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에로틱한 장면에 로망은 있었지만, 장편영화의 데뷔를 에로로 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은 늘 괴리감이 크다. 에로 영화로 데뷔하자 지인들은 이제야말로 적성을 찾았다고 짓궂은 농담을 건넸다.

“이번 기회에 그냥 그 길로 계속 가는 게 어때?”

같이 웃었지만 속은 아팠다.


대부분 감독이 좋아하는 영화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차이가 있다.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 같은 영화를 좋아하지만 내가 쓴 장편 시나리오는 스릴러와 액션이다. 킬러와 형사, 비련의 여주인공과 팜므파탈이 등장한다. 돈과 배신 그리고 욕망의 이야기다. 이 시나리오로 상을 탔다.


단편 영화를 찍고 장편 시나리오를 끄적거리며 음지를 떠돌 땐 수상만 하면 내 영화 인생이 손바닥을 뒤집듯 확 뒤집힐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상금으로 몇 개월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 말고는 달라진 건 없었다. 시나리오는 영화화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유명 감독님들과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친 것이 약간의 위안일까?


막 상을 탄 시나리오 작가 곁에는 사기꾼들이 어슬렁거린다. 신인의 어수룩함 사이로 아이템 도둑질과 재능기부가 난무한다. 쓰레기들을 몇 번이나 만났다. 그중에는 진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디 장편으로 데뷔 직전까지 갔지만 엎어졌다. 몇 년이 지나고 내가 쓴 조폭 누아르에 관심을 가진 제작자도 만났다. 일 년을 매달렸지만, 헛발질이 되었다. 영화판은 그렇다. 엎어지면 모든 것은 제로로 돌아간다. 남는 건 하나도 없다. 그러던 중 한참 잘나가는 IP 영화 제작자와 만났다.


“같이 영화 한 편 하시죠?”


그렇게 시작되었다.



movie_image.jpg

영화 <운명의 손>



대한민국 최초의 키스신이 등장한 영화는 한형모 감독의 1954년 작 <운명의 손>이다. <운명의 손>에서 최초의 키스신을 연기했던 배우 윤인자는 1956년 영화 <전후파>에서 알몸 목욕신으로 국내 최초 누드연기를 선보인 여배우란 타이틀을 얻었다. 그녀는 1957년 <그 여자의 일생>에서 또 한 번 알몸 목욕신을 연기했다.



movie_image (1).jpg


본격적인 베드신을 선보인 1965년 작 <춘몽>



에로 영화를 감독할 기회가 오면 틴토 브라스 감독의 명작 <카프리의 깊은 밤>, <All lady, s do it> 같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 혹은 이시이 타카시 감독의 <꽃과 뱀> 부류의 영화도 좋았다. 기왕 찍을 거라면 독특하고 센 걸 찍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따라주지 않았다. 이상은 높고 현실은 바닥이다.


대한민국 영화판의 가장 고질적 문제점은 장르의 편식이다. 로맨틱 코미디와 스릴러물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투자가 거의 없다. 고퀄의 공포물이나 에로물이 나오기 힘들다. 소수 마니아를 위한 장르가 점점 사장되고 있다.



작품의 예산이 줄어들면 시나리오는 현실과 타협을 시작한다. 이런 타협은 영화의 질을 떨어트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신을 오토바이 혹은 자전거로 대신하거나 커피숍 대신 길거리 자판기 앞에서 찍기도 한다. 저예산은 그렇게 타협해야만 한다.



photo_2016-12-14_21-54-25.jpg

저퀄리티의 안 좋은 예.jpg



IP 영화의 감독직을 맡고 처음 했던 작업은 예산에 맞춰 시나리오를 쳐내는 일이다. 이건 모든 영화 제작 시 필요한 작업이다. 낯설지 않다. 하지만 IP 영화는 특유의 문법이 있다. 꼭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 있다는 것. 그 판의 표현을 빌리자면 큰 베드신이 네 개, 그리고 기타 야한 상황이 두어 개 정도 필요하다. 큰 베드신 네 개는 여배우 둘의 전라 노출이 각각 두 신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40분 분량의 베드신이 나오면 전체 드라마를 50분 정도 다시 가지쳐야 한다. 시나리오 수정 단계에서 제작자와 이견이 있었다. 베드신만 강하면 적당하게 이야기를 나열해도 되지만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 길로 하차했다. 첫 번째 에로 영화 감독 데뷔는 그렇게 무산 되었다.


그리고 일 년 후, IP 영화 제작자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IP 영화판에서 가장 힘든 건 주연 여배우 캐스팅이다. 영화의 특성상 여자 주인공은 전라 노출을 해야 하고 강한 베드신을 찍어야 한다. 거기에 연기력까지 갖춰야 한다. 연기는 수준 미달이지만 노출은 제약 없는 베드신 전문 배우들은 많다. 몇몇 에이전시에 전화하면 바로 미팅을 잡을 수 있지만 이건 최후의 카드다. 어쩔 수 없을 때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카드. 최소 한 달은 주연 여배우 캐스팅에 올인한다. 매일매일 여배우들과 미팅한다. 얼굴, 몸매, 연기력 그중에서도 여배우의 가슴 사이즈가 매우 중요하다. 예쁘고 연기가 뛰어난 여배우가 전라 노출과 베드신을 향한 열의를 보이며 매달려도 가슴이 작으면 제작자는 고개를 흔든다. 이 때문에 실제로 미팅 중 B컵이라고 우기는 여배우를 두고 감독과 피디는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여배우에게 "거 한번 봅시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음날 의상 팀장이 진실을 확인했다. 안타깝게도 여배우는 캐스팅이 좌절되었다. 이 코미디는 현실이다.  


이제 캐스팅이 끝나고 베드신 협의가 남았다. 전라 노출, 남자 배우와의 신체 접촉 등 여배우가 베드신을 꺼리는 이유는 다양하다. 감독은 원하는 신을 끌어내기 위해 고심하고 배려할 필요가 있다. 감독은 다른 영화의 베드신을 보며 여배우가 연기해야 할 베드신을 설명해야 한다. 체위와 수위 그리고 찍어야 할 앵글과 컷들까지. 다소 음란한 단어들을 입에 올려야 한다. 정상위, 후배위, 오랄, 삽입, 사정...상당히 민망하다.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적나라하게 이야기할 때와 감독의 입장으로 이야기할 때는 많이 다르다. 이 지점이 쉽지 않다. 협의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다음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다.


새벽 2시, 동트기 전까지 베드신을 끝내야 하는데 콘티를 보던 여배우가 촬영 거부를 한다. 자신은 동의한 적 없는 장면이 들어있다며 눈물까지 흘린다. 암담하다. 그럴 땐 어쩔 수 없다. 감독이 모든 총대를 메야 한다. 겨우겨우 여배우를 달래 몇 가지 컷들을 생략하고 촬영을 진행한다. 결국 중요한 베드신의 음란한 맛이 사라졌다. 제작자는 투덜거리고 난리다. 새벽에 먹는 야식도 안 먹었다. 입이 쓰다.


베드신에서 중요한 또 한 가지, 바로 공사다. 공사는 배우가 맨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작업을 말한다. 재료 준비는 분장 팀에서 하지만 자신의 공사는 배우가 직접 한다. 여배우는 살색 테이프에 팬티 라이너를 붙여서 마무리한다. 남자 배우는 양말로 주머니처럼 전체를 싼 다음 살색 테이프로 밀봉하듯 전체를 붙인다.


남자 배우의 공사는 문제가 거의 없지만, 여배우의 공사에는 작은 다툼들이 있다. 베드신의 앵글이 여배우의 은밀한 부분으로 깊게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살색 테이프의 면적이 크면 카메라에 테이프가 보인다. 이걸 현장에서 '바래' 라고 한다. 바래가 난 컷은 쓰지 못한다. 버려야 한다. 어떤 여배우는 공사 시 테이프를 팬티 수준으로 덕지덕지 붙인다. 찍는 컷마다 바래날 수밖에 없다. 감독으로서 곤란한 경우다. 베드신을 전문으로 하는 배우들은 미니멈 공사를 한다. 아래 헤어를 완벽하게 제모하고 딱 입구만 가리는 거다. 간혹 관객들은 배우가 공사를 하지 않았다고 오해한다.



제목 없음.jpg


그렇다고 한다




현장을 잘 모르는 분들은 전라 노출한 여배우와 작업하는 감독을 부러운 시선으로 보지만 사실 그렇긴 하다.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경험이다. 감독만이 누릴 수 있는 체험이다. 누군가는 특권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 특권 뒤에는 무한한 책임이 따른다. 전라 노출로 강한 베드신을 연기하는 여배우를 달래고 칭찬하며 베드신을 끌어내야 한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 기분이 상해버린 여배우와 촬영을 진행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다.


에로 영화는 애로 사항이 많다.




director'scut

편집 : 나타샤
Profile
차가운온정, 개인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