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11층에서 연락이 왔다.
“O팀장 요즘 많이 바쁘지?”
K이사의 은근한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넘어왔다. 영업이사였다.
“아, 예...”
“다른 게 아니라 OO타임즈 있잖아?”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걔들 요즘 사는 꼴이... 우리랑 나쁜 사이도 아니고, O팀장 바쁜 건 아는데, 신경 좀 써 줘.”
“...예, 제가 연락 넣어보겠습니다.”
아침부터 청탁이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OO타임즈는 이쪽 업계에서 소위 ‘업계지’로 분류되는 언론이다. 업계지라고 하면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우리도 생소하다. 가급적 회피하고 싶은 존재라서), 이쪽에서는
'그냥저냥 업계 빌붙어서 먹고 사는 존재'
정도로 규정할 수 있는 존재다. 간단히 말해서 주류 업계가 있으면, 이 주류업계를 취재처로 먹고 사는 '소주 타임즈‘(가상이다) 같은 게 태어나는 것이다. 자전거 업계라면, ’두바퀴 포스트‘ 뭐 그런게 나올지도 모른다(다시 말하지만, 가상의 언론이다. 단, 이런 류의 잡지나 언론이 현존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지금 그런 ‘업계지’ 하나의 청탁이 들어온 것이다. 사정이 그려진다. 업계지 중 하나가 영업이사에게 읍소를 한 듯 하다. 보통 같으면 거절했겠지만, 영업이사의 청탁이다.
요즘 회사 내, 외부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특히나 안쪽이 문제다. 얼마 되지 않은 회사, 업무 시스템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업무의 경계도 불분명하고(인사과 일을 마케팅 쪽에 떠넘기려 하는 시도가 몇 번이나 있었고, 몇 번은... 아니, 거의 대부분은 떠맡았다), 본부장과 전무가 날 불러 따로 경고를 날리기도 했다.
혼자 너무 튄 거였다.
아니,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사번이 빠른 쪽 직원들이 가재미눈을 뜨고 날 경계하고, 실제로 인사과 과장은 은근슬쩍 내게 맞먹으려 덤벼들었다. 본부장의 구두 경고가 한 번 있고 난 뒤 고민을 했다.
'2년 뒤를 볼 것인가? 아니면, 그 후를 도모할 것인가?'
직장생활을 해 본 사람들의 철칙이 하나 있다(성공은 모르겠지만, ‘출세’한 사람들의).
“아래 애들에게 백날 잘 해봤자 소용없다. 출세하려면 윗 분들에게 붙어라.”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 생각은 내 스킬을 최대한 발휘해 보자였다. 애들 키워나가는 재미도 느껴보고, 정치싸움 같은 것은 되도록 피하고 ‘일만 하자’였다. 물론, 각오는 있었다. 작은 회사 일수록 정치 싸움은 더 심하고, 회사 올라간 지 얼마 안 됐기에 내부적으로 치열한 수 싸움이 있을 것이란 ‘어느정도’의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더 심각했다.
능력 없는 사원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고, 어디 ‘줄’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원래 이 회사에는 K이사 파와 본부장 파가 있었다. 그런데 K이사 파는 내가 입사하기 얼마 전 한꺼번에 쓸려 나갔고(K 이사는 자회사 쪽으로 내려간 상태) 우리 본부장이 사장의 오른팔이 됐다. 사장은 본부장의 말에 전적인 신뢰와 함께 예산과 인력의 무제한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덕분에 본부장이 운영하는 팀은 4개에서 6개로 늘어났고, 자기 입맛에 맞는(결국 자기사람이겠지) 애들을 데려와 포진 시켰다. 문제는 나였다. 본부장이 관리하는 6개의 팀 중 하나가 마케팅 팀이었다.
본부장은 마케팅에 있어서는 문외한이었다.
전임 마케팅 팀장은 원래 홍보 쪽 전공이었던 인물이었다(덕분에 그 뒷수습을 하느라 내가 죽어나갈 판이다). 전임은 K 이사파였다. 어쩌면 난 ‘타협안’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가 사장에게 직보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본부장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사장은 내 능력은 인정했다. 그러나 사장을 제외한 그 나머지 인물들은 내가 입사한 지 석 달도 안 돼 내게 도끼눈을 뜨고 있다. 난 족보도 없고, 사번도 늦다. 그런데 돈은 많이 쓴다.
나보다 직급이 낮은 과장이 반말과 존대 비스므리하게 섞어가며 은근슬쩍 자기 업무를 우리에게 떠넘기려 했다. 처음엔 맞받아 쳤다. 그리고 일주일 후 사내에 내 소문이 이상하게 나기 시작했다. 업무평가는 사장 전결임에도 불구하고, 그 과장은 자기 마음대로 사장의 평가를 ‘해석’해서 내게 내밀었다(난 내 팀원들의 고과 하나만은 칼같이 챙긴다). 인사과의 파워였다.
기획과 인사 쪽에서 날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찮았다. 어느새 본부장 쪽 인사로 분류된 데다가 ‘바른말’을 하는 내가 눈엣가시가 됐다. 그렇다면, 본부장이 내 우산이 돼 줄까? 본부장 역시 날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대외적으로 본부장 계로 분류 됐기에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본부장에게 부담이 된 상황. 그럼에도 이 굴러온 ‘차장’이 사장에게 직보를 한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본부장을 바라보는 사장의 눈빛에 온기가 빠져 있었다.
사장이 결제금액을 챙겨보기 시작했다.
“사장이... 현미경을 들이밀기 시작했어.”
선문답 같은 이야기로 말문을 연 본부장은 한참을 머뭇거렸다. 입안에 맴도는 단어들 중 하나를 골라내려는 것인지, 아니면 말을 숙성시키는 것인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이윽고 본부장의 입이 다시 열렸다.
“사장은 싫증을 잘 내. 사내에서 자네에 대한 말들이 오가고 있어. 물론, 그 전부터 우리 파트에 대해서 바라보는 눈빛이 남달랐지만... 이럴 때일수록 말조심해야 해. 자네가 내뱉은 말들 때문에 많이 곤란해지고 있어.”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잘못했는가? 전임 팀장의 실수? 절반으로 줄어든 마케팅 비용 때문에 기획 자체가 어려워졌다는 푸념?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회사 내 업무 분담과 돌발 상황에 취약한 회사 구조에 대한 분석? 일만 하러 왔는데, 어쩔 수 없이 정치판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일만 합시다. O팀장. 매사에 입조심 하고, 일희일비 하지 말고, 경거망동을 삼가요.”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꾹 눌러 담았다. 여기서 대거리를 했다가는 난 완벽하게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2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이 회사를 떠날지도 모른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본부장실을 나왔다.
목을 죄어오는 넥타이를 잡아 당겼지만, 와이셔츠 단추를 풀 수는 없었다. 긴 한숨.
이때 K 이사의 청탁이 들어온 것이다. 업계지에 광고 하나를 쏴 달라는 은근한 부탁. 본부장실을 나오기 전의 나라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이쪽에서의 업계지 광고 단가는 100만원선이다). 그러나 본부장실을 나오고 난 후의 나로서는 생각이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저...팀장님?”
“응?”
눈치 빠른 김과장이 커피 한잔을 내밀며 말을 섞는다.
“11층에서 무슨 일이라도...”
사내 분위기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모르는 게 이상하다. 이 코딱지만 한 회사 내에서 3년 동안 2번의 숙청이 있었고, 바로 직전의 숙청이 몇 달 전 일이었다. 그 뒷수습용으로 무당파인 외부인사가 마케팅 팀장으로 들어왔다. 나름 능력은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안에 박혀 있는 혓바늘처럼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눈치 없는 팀장. 내치자니 아쉽고, 끌어들이자니 속을 알 수 없는 형국. 사내에선 몇 바퀴나 소문이 돌았고, 마케팅팀 업무도 아닌 잡무들이 하나둘 씩 쌓여나가는 걸 보면서 팀원들도 몸으로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10여년 넘게 배운 처세술과 직장인의 본능으로 이런 경우의 대책은 한가지였다.
'바짝 엎드린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한다면, 끈은 이어놔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우리 위기관리비용 얼마나 썼지?”
“예? 위기관리 비용이요? 아마 거의 안 썼을 겁니다. 거의 대부분 팀장님 전결로 처리하셔서...”
홍보마케팅 쪽에 처음 일하다 보면, 연초에 자기네들에게 배정된(혹은 요구해서 얻어낸) ‘위기관리비용’이란 돈을 보고 의아해 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홍보에 무슨 위기관리가 필요해?'
눈치 챘겠지만, 위기관리 비용은 ‘對 언론사’용이다. 회사에 타격을 입힐 만한 언론들의 ‘협박’에 대응하기 위해 책정해 놓은 예산이다. 즉,
“너희들 기사로 조지겠어!”
이러는 언론을 상대로 써먹는 돈이다. 어지간한 회사라면, 홍보 마케팅 라인에 위기관리용으로 얼마간의 돈을 책정해 놓는다. 우리 쪽에서도 위기관리 비용으로 1억을 책정해 놓은 걸 인수인계 할 때 확인했었다.
어지간한 사건사고들은 내 전결로 해결할 수 있지만, 그 수비범위를 벗어나는 큰 건들을 처리하기 위해, 혹은 그 사건들을 처리하기 위한 ‘밑작업’을 생각해 준비 해 놓은 돈이다.
(언론에게 얼마나 당했으면, 이런 돈을 따로 준비해 뒀겠는가? 상식적으로 바라본다면, 기가 차겠지만 지난 10여 년 간 내가 경험해 본 바로는 이 ‘돈’은 정말 필요하다. 은행의 지급 준비금과 같은 용도다)
“OO타임즈에 광고 하나 쏴 줘. 유가 기사... 아니, 그쪽 담당자랑 연락해서 인터뷰든 뭐든 해서 박스 기사도 좋으니까 하나 넣고 100만원짜리 하나 쏴.”
“예? 예... 근데 왜 위기관리 비용에서...”
김 과장의 말꼬리 뒤에 붙은 이야기는 아마도 내 전결이나 광고비에서 빼지 왜 위기관리비용이냐는 의문이다. 설명할 수는 없다. 내 전결로 가면, 본부장의 의심이 깊어질 것이고, 광고비로 책정하기엔 간지럽다. 그렇다고 K이사의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니, 끈은 엮어줘야 한다. 아마 이야기는 돌 것이고, K이사가 똑똑한 사람이라면, 내가 광고비가 아니라 위기관리비용에서 돈을 빼 광고를 쏴줬다는 걸 안다면 한 번 생각을 할 것이다. 만약 모른다면? 그건 그거대로 내 결정의 판단자료가 될 것이다.
“재무팀 애들 손 한 번 더 가게 하려고”
김과장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간다. 김과장의 뒷모습, 그리고 10여명의 핏덩어리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는 마케팅팀 사무실을 보면서 괜히 미안해졌다.
‘족보 없는 팀장 잘못 만나 고생들이다.’
어느새 쌓이기 시작한 잡무들, 백오피스 팀들의 신경질적인 반응, 본부장에게 향하던 화살이 어느새 내게로 쏠리면서 들려오는 마케팅팀에 대한 험담들...아니, 어쩌면 본부장의 술책일 수 있다. 욕먹을 누군가는 필요한데, 그게 창립멤버여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 같은 것. 날 욕받이로 내세워 본부장은 사내에서 운신의 폭을 넓힐 수도 있다.
‘2년만 버틸까?’
헤드헌터가 강력히 추천해 이 회사에 들어왔다. 이직한 지 채 1년도 안 됐는데, 지금 자리를 옮길 수는 없다.
‘저것들을 끌고 버텨볼까?’
마음 한구석에서 스물스물 ‘나답지 않은’ 생각들이 기어 올라왔다. 손에 피 묻히고, 누구 따까리 하는 건 내 성격상 맞지 않는다.
한 때 전설이었던 선배가 있었다. ‘일만 잘하면 되지’라며 사내정치나 부하관리는 내팽개치고(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술 마시는 걸 못 견뎌했다) 일만 죽어라 팠던 선배가 있었다. 실력 하나만은 일류였다. 서너명이 붙어서 처리해도 될똥말똥 한 기획을 혼자서 다 처리했다. 사장이 그 기획을 보고,
“이거 몇 명이서 했어?”
라고 물어봤는데, 그 선배 혼자만 손들었다. 그러나 그 선배는 과장에서 멈춰 섰다. 우리가 붙여준 별명은,
“출세지양(止揚)주의자”
였다. 기획회의에서 자신의 기획을 눈치 빠른 후배 놈들이 마치 자기 것인냥(주어를 생략하고 두루뭉술 넘기면서) 채 가기도 했고, 팀장은 그 선배만 대놓고 씹어 됐다. 만만하니까...
인사고과는 언제나 C나 D였다. 사내정치의 스트레스 때문에 대상포진에 걸린 선배는 두 달간 휴가를 냈고, 그 해 인사고과는 D가 나왔다. 차장 승진연차인데도 두 번 미끄러졌다. 그 사이 후배들은 치고 올라왔고, 그 중 한 놈이 미친 듯이(회사 허락도 받지 않고) 석사 과정에 들어갔다.
무식하고, 능력 없고,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였지만(남의 기획을 자기것인냥 포장하는 능력만은 최고였다), 회사의 인사고과에 ‘석사’란 타이틀은 가산점을 부여한다. 정량평가에서 최대한 점수를 얻고, 팀장 앞에서 최대한 비위를 맞춰 정성평가 점수도 챙겨가겠다는 심보.
능력만을 믿었던 그 선배는 그제서야 후회했다.
이 사회는 어느 순간 ‘뻔뻔한’ 사람들이 살아남고, 그걸 능력이라 포장하고 권하는 사회가 됐다. 그리고 그 ‘뻔뻔함’을 가장 많이 접하는 동네가 바로 이 곳이다.
“팀장님! 여기 잠깐 와보셔야 하겠는데요?"
“왜?”
“N 광고국인데요...”
‘부도덕’이란 단어가 스쳐지나갔다. 불길한? 아니, ‘불쾌한’ 감정이 확 끌어 올랐다.
추신
이 시리즈를 투고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내부자의 안전과 비밀보장을 최우선시 한다는 딴지일보를 믿으나
이 연재가 중단되면 나에게 클레임이 들어왔거나 딴지 편집부가 쫄았거나 둘 중 하나로 생각하시라.
아참, 이거 대한민국에서 일어날리 없는 소설이구나.
지난 기사 |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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