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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23. 월요일

산하 






1964910일. 검찰, 이럴 때도 있었다. 


하루를 건너뛰었는데 마침 그 날이 장날이었네. 1964년이라면 박정희 대통령이 군정을 끝낸 후 민선 대통령으로 임기를 시작한 다음 해다. 이미 권좌에 앉은 것은 3년 전이었지만 그건 최고회의 의장이었고 선거를 치른 뒤 제 5대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를 한 것이 19631217일이었으니 1964년이란 대통령으로서의 첫 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이때 중앙정보부장은 바로 남산 돈가스 김형욱이었다. 이 멧돼지 같이 욕심 많고 사납던 사내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도전하거나 거슬리는 모든 세력을 가차 없이 빨갱이로 몰았고 여러 사건을 일으켰다. 50년 뒤의 국정원과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댓글 달 일은 없었을 것이지만. 

 

그 중의 하나가 1차 인혁당 사건이다. 그즈음 박정희 정권은 한일 국교 회복에 진력하고 있었고 학생과 지식인들은 매국적 한일회담 반대를 기치로 거세게 항거하고 있었다. 김지하가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죽었다.”를 부르짖는 가운데 김종필이 즐겨 운위하던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치른 것을 필두로 6.3 시위가 서울 시내를 뒤덮어 위수령까지 내려졌던 판이었다. 후일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 학생이 시위에 가담했다가 흰 한복을 입고 수갑을 찼던 것도 그 해였다. 거국적인 반정부 시위의 고비를 겨우 겨우 넘기던 중앙정보부가 그에 맞서 기획해 낸 것이 1차 인혁당 사건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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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8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직접 기자회견장에 나서서 중앙정보부의 수사(라고 쓰고 창작이라고 읽는다) 결과를 발표한다.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 경제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북괴로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새 강령과 규약을 채택함으로써 발족하였다. 인혁당은 창당 후 조직을 확대해오다가 19644월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동당 중앙상임위원인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함과 동시에 학생데모를 4·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구속자, 불구속자, 미체포자 등 총 41명의 혐의자 명단을 검찰에 넘겼고 16명을 전국에 수배한다고 발표한다. 아무리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리는 중앙정보부라고 해도 대한민국에서 기소독점권을 검찰이 지니고 있으니 직접 기소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어쨌건 중앙정보부가 제출한 증거를 통해 위법성을 확인하고 기소할 수 있는 건 검사였다. 그런데 이 검사들이 뜻 밖의 말썽(?)을 일으킨다. 

 

중앙정보부장이 몸소 발표한 이 방대한 수사 자료를 넘겨 받긴 했는데 검사들 눈에는 도통 증거다운 증거가 보이질 않았던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스무날 넘게 눈에 불을 켜고 서류를 뒤졌지만 그들 눈에 펼쳐진 것은 증거가 아니라 중앙정보부의 조서였다. 조서에 따르면야 대한민국을 수십 번도 더 뒤집어엎을 역적들인데 그 혐의를 기소하는 데 필요한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피고인들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고문 백화점을 거친 빛이 역력했다. 부장검사 이용훈은 이를 악물었다. 서울지검장에게 기소 못하겠다고 배를 짼것이다.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나서서 발표한 걸 기소 못하겠다면 정부 위신이 똥 친 작대기 이상이 될 수 있겠느냐...... 지검장 이하 검찰 상층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어떻게든 해 보라고 호령하는 상부를 향해 이용훈은 검찰 역사에 남을 한 마디를 던진다. 어떻게든 해 보라는 말씀은 증거가 없어도 기소하라는 말씀이오?” 정권 입장에서 보면 곤장을 치려고 죄인(?) 볼기 까 놓고 형틀에 매 놓았는데 곤장 손잡이에 가시가 돋은 격. 어떻게든 이 깐깐한 부장검사 이하 검사들을 구워 삶으려고 장,차관을 비롯한 상층부가 총출격한다. 원래 이럴 때 행동대장은 차관, 

 

권오병 법무부 차관은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댄다.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겠소? 정보부에서 받아낸 피의자들의 자백을 검사들은 왜 못 받아내는 거요? 정보부에서 자백한 것이 있으니 그대로 공소제기를 해도 되지 않겠소?” 아아 이때 이용훈의 대답 역시 검찰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비록 그 후배들이 그 말을 잊어 버리거나 심지어 고의로 잃어버렸다 해도, 그래서 그 의미가 수십 년간 까마득한 지층 아래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해도. 

 

차관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차관님께서는 대학에서 형사소송법을 강의하시면서 학생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가르치십니까?” 

 

무슨 동일체의 원칙이다 상명하복의 전통이다 하는 건 기본적으로 그 취지가 정의로울 때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다. 안되는 일을 되게 하라고 우기는 조직에서 동일체 원칙이란 함께 괴물이 되자는 결의 이상은 아니고 벽을 두고 문이라고 들이밀라고 우기는 상사 앞에서 상명하복이란 겨울철 허수아비의 거적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한때 대한민국 검찰에도 부장검사가 차관에게 너는 니가 가르치는 애들한테 그렇게 가르치냐?”라는 식으로 시원하게 라이트 훅을 날리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기소해 보라고 윽박지르는 상사들의 이마빡에 검사들은 사표를 날려 버렸다.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는 것이 그들의 변. 1964910일 각 신문은 사상 초유의 검사들의 사표 행진을 대문짝만하게 싣는다. 그로부터 49년하고 나흘 뒤 애들한테 나중에 창피하기 싫어서사표를 던진 검사의 고별사가 신문과 인터넷을 뒤덮었듯이. 

 

검사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지만 제일 썩은 곳이 검찰이라는 얘기가 항간을 떠돈 것은 이미 오래다. 제일 썩었다는 것은 곧 가장 큰 권력 집단 중의 하나라는 뜻이 될 것이다. 원래 사람이 죽으면 내장부터 썩고 권력은 힘센 곳부터 부패하니까. 검사들의 무기였던 그 강력한 이빨. 기소독점권과 수사지휘권과 기타 등등의 힘의 주인은 권력이 아닌 국민이어야 했고 검사들은 철 되면 바뀌는 권력이 아니라 국민에게 충성하는 진돗개여야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밥 주는 사람에게만 충성하고 이따금은 밥 떨어진 주인을 물어뜯는 셰퍼드와 도베르만의 튀기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오늘날 한 신문이 난데없이 제기한 의혹에 생물 교과서의 기초에도 모자라는 혈액형 추궁이 이어진 끝에 검찰총장이 날아가는, 그야말로 똥 핥는 개 꼴로 전락했다. 

 

이쯤 되어서야 '전설의 영웅의 호위 무사'를 자처하고 '학도병의 피와 민주 시민의 희생'을 운위하는 것은 좀 겸연쩍은 일이나 그래도 그 울부짖음에 공명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자신의 애완견이자 사냥개마저 이토록 저질로 만들어 버리는 권력을 경멸함이 하나고, 그래도 50년 전 선배들이 보여 주었던 기개들을 본받아 최소한 똥 핥는 개의 범주에서는 벗어나 주는 것이 바닥 이하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나라의 자존심을 살리는 일이 되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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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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