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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19. 금요일

홍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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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스코프로 찍은 <JSA 공동경비구역>의 한 장면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라고 있다. 영화에서 쓰이는 화면비율의 일종으로 20세기 초부터 사용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보면 나오는 유독 가로가 긴 화면이 있잖은가. 그게 시네마스코프다.


<메트로폴리스>, <M>, <문플릿> 등을 만든 거장 감독 '프리츠 랑'은 가로가 긴 시네마스코프에 대해서,


"그 화면비로는 뱀이나 장례식을 찍을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겠구만!"


라고 악평을 남긴 적이 있다. 이 정도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을 본격적으로 영화시장에서 이용하기 시작했을 때, 많은 감독들이 난감해 했다. 저 광활한 가로 화면에 여백이 많을 텐데 주인공을 넣고 도대체 뭘 더 채워야 하나. 시종일관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영화 세트 지을 때 전보다 배는 신경 써야 하겠는걸. 게다가 배우의 얼굴을 담아내야 할 때 클로즈업을 하면 얼굴의 반이 잘려나갈 텐데.


그래서 한동안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은 주로 큰 스케일을 강조하는 데에만 쓰였다. 아니면 무작정 프레임의 비어있는 부분들을 엑스트라로 채워 넣거나, 롱 쇼트로, 넓은 풍경으로 퉁 치려는 만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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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이 활성화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에 대한 이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은 하워드 혹스 감독의 1955년 작인 <파라오의 땅>이다. (시네마스코프는 이미 1930년대에도 만들어져 있었지만, 상용화가 된 것은 1953년부터였다) 한국에서는 <파라오>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 왕의 묘지인 피라미드를 짓는다는 설정이 전체 이야기이고, 그 속에서 남녀 간의 애정관계 등을 섞어놓았다. 이 작품에서 피라미드를 짓는 것을 포함한 야외 시퀀스들은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을 무지막지하게 잘 쓴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화면의 좌측 끝에서부터 우측 끝까지를 엑스트라로 채운 것과 피라미드를 짓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여기저기 훑는 솜씨가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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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카메라가 실내로 들어와 소수의 인물들을 위주로 구도를 잡는 순간, <파라오의 땅>은 놀라울 정도로 평범해진다. 인물 배치가 어정쩡하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의 경우엔 인물을 위주로 카메라에 잡아야 할 순간에도 왼쪽을 지나치게 비워놓았다. 거기다 비어있는 왼쪽 배경에 눈길을 뺏을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어 시선이 분산된다. 당시의 하워드 혹스 감독이 시네마스코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명확한 판단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모든 건 시행착오를 거치는 법이다. 본격적으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이 극장가에 유행하면서, 감독들은 화면비율에 맞춰 클로즈업 하는 방법과 실내 장면을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자연스레 터득했다. 스케일이 크지 않은 여러 작품들도 이 화면비율에 맞춰 찍었다. 드디어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이 영화계에 정착한 것이다.


시네마스코프의 황금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러다 양 옆을 댕강 자르는 VHS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많은 영화들이 정보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1.85:1의 비스타비전 화면비율(HDTV나 PC의 와이드 모니터의 화면비율)을 선택한다. 이 일로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은 한동안 사양길을 걸었지만, 지금은 매체의 발전으로 ‘선택’을 할 수 있는 시대라 감독은 원하는 화면비율을 직접 선택할 수 있다. 덕분에 시네마스코프는 제자리를 찾았다.


어찌보면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이야말로 가장 영화적인 화면비가 아닐까? 비어있는 그 긴 구도를 채우기 위해서 감독들로 하여금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시네마스코프. 비록 과거만큼의 영광은 아닐지라도, 시네마스코프는 지금도 꾸준히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화면비율을 참 좋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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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4일, 박근혜 대통령이 서울대병원을 방문해 메르스 격리병동을 찾아 의료진과 얘기를 나눴다. <KBS 뉴스>는 대통령이 가는 곳마다 있는 ‘살려야 한다’는 문구를 카메라에 담았는데, 위의 사진에서는 시네마스코프 화면 비율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아, ‘영화’가 아니니까 그냥 ‘스코프’라고 해야 하나. 이 정권이 하는 것마다 철저하게 연출된 극영화를 보는 느낌이라 영화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어쨌든 <KBS 뉴스>는 이 모습을 비스타비전 화면비율로 찍었다. 그래서 위의 사진과 아래의 사진의 앵글이 좀 다르다. 사실 비스타비전의 비율로도 메르스 격리병동 CCTV를 확인하며 전화를 거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을 담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뭔가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최종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사진은 가로의 길이를 살린 스코프 비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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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비스타비전 사진으로 찍혔을 경우, 대통령의 모습 일부나 PC모니터가 잘렸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중 하나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다가 가운데에 있는 ‘살려야 한다’라는 문구가 돋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사진은 비스타 비율로 찍어놓고, 위와 아래만 잘라내어 스코프로 찍은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옆에 ‘법정전염병’이라 적혀진 파일이 꽂혀있기는 하지만 저걸로는 역부족이다. 메르스는 현재 한국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접근해야 할 정도의 병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전염병이라는 글자로 국한할 것이 아니다. 이 사진은 ‘박근혜 대통령’, ‘PC’, ‘법정전염병 파일’, 이렇게 세 가지를 살리기 위해, 무엇보다도 ‘살려야 한다’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스코프 비율을 선택한 것 같다.


사진을 보면서, 요 몇 년간 탄생한 수많은 졸작들과 자웅을 겨룰만한 싸구려 미장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려야 한다’라는 문구가 그나마 이 사진과 메르스가 관련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예측했었는지 ‘나 진지하다’고 말하는 듯한 궁서체가 무척 애처롭다. 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은 저 종이를 고심 끝에 붙인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오신다니까 급하게 만들어 붙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충분히 그리 생각할 만 하다. 사진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이, 오른쪽에서 전화받고 있는 한 여인의 뒤통수를 보완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기능적으로만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진의 기능적인 측면으로도 어떤 미적인 순간을 구현해내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사진의 경우에는 공간 구성조차 깊이 없이 평평하기만 하다. 종이는 분명 모니터보다 뒤에 붙어있는데 사진만 보고 있으면 옆에 붙어있는 것 같다. 그래도 저 종이가 없었으면 대통령이 CCTV를 구경하면서 잡담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타깝다. 뭔가를 스코프 비율로 찍어 보겠다면 이 정도로는 해줘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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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초라한 스코프 미장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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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등장한 바로 위의 사진은 세상에서 '자기만 아는 한 권력자가 실은 타인에 대한 책임감도 갖고 있더라'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엄청나게 애를 쓴 사진일 뿐이다. 미학도 어떤 것도 없다. 거기다 책임감이라는 건 사회의 구성원이면 당연히 갖고 있는 감정이고, 그렇기 때문에 요란스럽게 연출할 필요가 없다. 원래는 그렇다, 원래는. 하지만 이런 연출을 했다는 건 그런 책임감마저 없었다는 얘기겠지. 결국 극영화 같은 연출력마저도 상실한, 어설픈 자기 PR로 머물러 버린 사진이 됐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연출로 보여주려고 하니 이 사진은 결국 코미디가 되었다. 그것도 굉장히 웃기지 않는 코미디 말이다.


이 사진을 통해 자신의 그릇을 드러내고,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동력으로 삼는다면 그 용감함에 박수는 쳐줄 수 있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통령이 그럴 거 같지는 않아 보인다. 실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뻔뻔한 졸작 사진인지라, 보고 나서 ‘와. 이거 당장 뭐라도 쓸 수 있겠는데’ 싶었다. 시네마스코프 화면비율의 팬으로서, 이런 사진을 보면 좌절한다. 그녀가 제발 스코프를 모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살아있는 국민도 모독하는 사람인지라 그리 해줄 리가 없을 것 같다만.


고로 나는 경악한다. 우와, 세상에. 살다 살다 이렇게 구린 사진 처음 본다고.




P.S:


1) 오히려 걸작은 이런 사진들이 아닐까. 실로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사진들이다. 첫 번째 사진은 스코프, 두 번째 사진은 비스타 비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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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명근 트위터 @lolen86)


2) 다 써놓고 보니까 이미 비슷한 이야기를 <오마이뉴스>에서 다뤘더군요. 저보다 먼저 쓰셨습니다. 그렇다고 제 글을 지우자니 아까워서 그냥 올려봅니다. 저는 써놓은 걸 지우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 상부상조하는 의미에서 <오마이뉴스> 기사의 링크도 걸어 놓습니다.










홍준호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