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덕분일까? 기자들의 ‘협조요청’은 그 전에 비해 덜했다(정도가 덜해진 거지 없어진 건 아니다). 기자들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덜해진 만큼 다른 쪽의 스트레스가 더해졌다. 군대인가? 훈련이 빡세면 내무 생활이 널럴한 것처럼?
사내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시작은 조직개편이었다. 작은 회사가 조직개편을 여러번 한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경우이다(큰 회사도 마찬가지지만). 뭔가 회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다거나, 사내 권력구도에 변화가 있다는 징조이다. 우리 회사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봐야 하는 게,
'톱니바퀴를 맞춰가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대외적으론 말이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보자면, 사장의 ‘촉’이 움직인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해 회사를 일군 사장. 그 사장의 ‘촉’은 살아 있었다.
“야, 너희 회사도 조직 개편했다면서?”
“말도 마. 칼바람이야 칼바람.”
“왜?"
"엊그제까지 그룹장 하던 이사를 팀원으로 발령 냈어."
"...나가란 소리잖아?"
"나가란 소리지."
“나갔냐?”
“아직까진 모르겠어. 병가 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세상 참 무섭다.”
“세상이 무섭냐? 회사가 무서운 거지.”
“...그래, 회사가 무섭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의 계열사에 다니는 동기 놈이 아침부터 전화질을 해 사람 심장에 차가운 냉기를 흩뿌렸다. 동기 놈이 말한 그룹장은 나도 안면이 있는 인물이다. 실무 능력은 확실히 떨어진다. 학벌이나 다른쪽 스펙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경쟁력이 하나 있었다. 동기 놈이 다니는 회사 사장이 예전 이사 시절 비서를 했던 ‘전력’이 있었던 것이다. 대기업이라도 이런 ‘라인’은 확실히 살아있다. 아니, 대기업이 더 확실한 것이다.
“너네 회사는 어때? (심드렁) 하긴, 너네는 1년 365일 상시 조직개편 모드니까.”
“말도 마 헤드헌터 찾아가 모가지를 비틀고 싶어.”
“에이, 그래도 여기만 할라고? 작은 회사가 한번 줄 타면 쭉쭉 올라가잖아? 실적도 괜찮고, 아... 맞다 너 PPL 어떻게 됐냐? 개박살 났지? 똥줄 좀 타겠는데?”
“...죽을래?”
A에 입사하기 전에 내가 맡았던 종목은 ‘술’이었다. 덕분에 PPL이라고 들어오는 것들이 전부다 깡패영화, 조폭영화에 느와르물이었다. 덕분에 느와르 영화만을 고집하는 몇몇 영화사 직원과는 호형호제하며 지낼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소비재의 경우에는 밝고 화사하게 드라마 쪽으로 치고 들어갔는데... 최순실 덕분인지 사람들은 드라마 대신 JTBC 뉴스룸만을 보고 있었다. 시청률은 안 나오고, 난 쓰린 속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동기는 그걸 놀리는 것이다.
이때 영업이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O팀장 바쁘지?”
“예? 연말이다 보니 좀...”
“바쁘더라도 점심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어때? 연말이니 거래처도 한 번 둘러봐야 할 테고, 겸사겸사 한 번 들르지?”
대행사 핑계로 영업이사가 있는 K시 쪽으로 얼굴 한 번 비치란 소리다. 뉘앙스론 오늘 점심 아니면, 확실히 날짜는 박자는 소리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 짧은 순간 머리를 풀 가동시켰다. 지난 번 업계지 광고를 한 번 쳐준 것에 대한 감사? 그리고 또다른 요구가 하나 더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지금 영업이사를 만나러 간다면? 줄타기? 아니, 확실한 건 영업이사는 내가 본부장 라인이 아니라고, 아니 최소한 중립적이란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럼 포섭?
“저번 광고 건도 있고, 이번에 또... 염치 불구하고 뭐하나 또 부탁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아, 어려운 이야긴 아니고...”
공짜 점심은 없는 것이다. 지난 번 업계지 광고는 떡밥이었다. 내가 입질을 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한 것이다. 100만 원짜리 업계지 광고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그런데 내가 움직였다. 이사는 본격적으로 낚싯대를 드리우려 하는 것이다. 입질을 한다면 낚아채겠다는 걸까? 아니, 버림패로 쓸 수도 있다.
“...연말에 시간 빼기 어려운가?”
은근히 파고드는 속삭임. 고작해야 밥 한 끼, 그럼에도 밥 한 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먹고 살기 위한 ‘식사자리’는 내 밥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고작해야 밥 한끼가 될 수 없다. 더구나 K시까지 내가 움직여야 한다.
“점심은 선약이 잡혀 있어서...”
들릴 듯 말 듯 한숨 소리가 넘어오는 느낌? 아니, 느낌적인 느낌? 이사는 날 카드로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대신에 저녁 겸 해서 반주 한 잔 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짧은 정적. 뒤이어 허파가 튀어나올 듯 한 우렁찬 웃음소리,
“그렇지? 점심 때 심심하게 밥 먹는 것보다는 허리띠 풀고 찐하게 한잔 하는 게 맞지. 역시 마케팅 쪽에서 일했다는 말이 빈말이 아냐.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래, 뭐 좋아하나? 아니, 말하지마! 내가 이래봬두 영업경력 20년이야. 우리 O차장 취향대로 세팅해 놓을테니, 와서 품평 한 번 해 줘. 그래, 그럼 이따 7시쯤 해서... 아, 그쪽에서 넘어오려면...”
“일찍 나가겠습니다.”
“그래? 역시 사람이 화통해. 좋아 7시에 봄세.”
회사에는 라인이란 게 있다.
사람들은 출세... 아니, 최소한 ‘오래’ 회사를 다니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회사에서 ‘인정’ 받고 싶어한다.
누군가 말했지 않은가, 인간은 인정욕구의 화신이라고...
그러기 위해 출세를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출세의 정점이 ‘이사’ 그리고 ‘꽃보직’이다.
까놓고 말해서 국내 30대 대기업에서 임원 인사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운”
이다(적어도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 100명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40대 후반, 50대 초반에 ‘별’을 달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일까? 잘해봐야 5~6명이다. 그것도 10대 대기업 안에 들어가는 큰 회사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밖에서 보면, 이들이 출중한 능력이나 성과가 있어서 별을 단 줄 알지만, 그렇게 알면 오산이다.
임원 후보급에 올라간(부장들) 사람들 중에서 능력 없고 성과 없는 사람은 없다. 능력과 성과는 기본이란 것이다. 그 나머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게 ‘운’이다. 아니,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승진 연차 때 자신이 속한 사업부의 실적이 떨어지거나 사고 같은 게 터진다면, 승진은 물 건너간다. 반대로 자기 실적은 떨어지지만 사업부가 잭팟을 터트리면?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가상의 S그룹이라는 회사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이 그룹의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구조본이나 미전실, 비서실 같은 어떤 ‘집단’이 있다 치자. 이들이 임원승진 인사를 할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게 ‘쿼터’다. 각 사업부 성과나 실적, 사내외적인 환경 등등을 고려해 어떤 곳은 몇 명, 다른 곳은 몇 명 등등 쿼터를 할당해 올리고 내린다(인사발령도 해야하니까 보직도 이리저리 바뀐다). 여기에 파워게임이 들어간다 해도, 핵심은
“어느 자리가 실적을 내기 가장 좋은가”
로 압축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게 우리 같은 사축(社畜)들의 머릿속에 ‘이데아’처럼 박혀 있는 ‘라인’이라는 환상이다.
내가 보아왔고, 경험했고, 들어왔으며, 최종 정리한 라인의 실체는 ‘환상’이다.

누군가 위에 있는 사람이 마치 내 사람인냥, 내 라인인냥 살뜰히 챙겨주는 것 같은데, 그렇게 라인으로 포섭된 사람들 중 8명은 ‘버림패’이다. 1~2명 정도 건지면 다행이고, 그나마도 어떤 커다란 혜택을 받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꽃보직으로 갈 확률이 높지만, 그건 순전히 그들이 ‘실력’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결론은 ‘잘난놈’이니 그 자리까지 남는다 정도가 되겠다. 거기까지 올라갈 정도이고, 누군가가 눈여겨 볼만한 사람들이라면 기본적으로 실력 하나만은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라인’의 효용은,
“내가 안 먹어도 될 욕을 먹지 않게 해주는 방어막”
이다. 직장생활을 해보면 알 것이다. 이해의 범주 밖을 한참 벗어난 각종 뒷말(음해에 한 없이 가까운 뒷다마)들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난 정말 운이 좋게 사회생활 시작과 거의 동시에 인간의 속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걸 눈앞에서 확인하게 됐다.
“평범한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것? 남이 안 되는 걸 보는 것.”
형제끼리도 질투를 하는데, 똑같이 입사해 나름 ‘공정’하다는 잣대로 평가되는 사회생활에서 동기의 성공, 후배의 영전을 제정신 가지고 칭찬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약 그들이 안 된다면, 안되게 만들어서라도 끌어내리고 싶은 게 인간의 욕망이다(물론, 그 시도가 단순한 푸념이나 뒷말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재미난 건 지금까지 말한 ‘라인’이란 건 정말 재능 있고, 능력 있는 세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직장의 ‘평범한’ 직장인들은 마치 무슨 라인이 있고, 라인을 잡았다는 듯이 떠벌리거나 으스댄다. 그리고 또한 자위한다.
우리 솔직해 지자.
라인끼리의 사내 정치싸움이란 건 정말 오르고 올라서 천상계가 보일 때쯤, 그러니까 지평선 너머가 보일락 말락 할 때쯤 시작되는 것이고, 평범한... 그러니까 공채로 들어왔거나 헤드헌터가 데려왔거나, 사돈의 팔촌의 당고모의 조카 정도의 빽으로 특채된 사람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없는 것들이 더 꼴값을 떤다.”
서푼어치 권력, 그리고 직장 내 왕따 등등으로 마치 무슨 권력을 잡았거나 힘을 쟁취했다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다 허무한 거다. 그건 라인이 아니라 왕따 놀이의 다름이다.
(이런 구질구질한 사내정치싸움... 아니, 편싸움이나 왕따 놀이를 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영업이사를 만나겠다는 건 라인을 잡겠다는 것도, 내가 어떤 승진욕구가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먹을 욕을 좀 줄여보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난 현지퇴근이라 말하고 K시로 달려갔다.

이사는 그 동네에서 꽤 괜찮다고 소문이 난 횟집에서 참치 눈물주를 강권했고, 뒤이어 룸빵으로 달려가 3번의 빠꾸와 실장과의 지저분한 실랑이로 내 옆에 그쪽 에이스를 앉혀줬다.
“야 이년아, 그 오빠 잘 모셔라. 너만 에이스야? 그 오빠가 우리 회사 에이스야 에이스! 그 오빠 한 마디면, 너 드라마도 찍고, CF도 찍을 수 있어.”
“어머 진짜? 오빠 대단한 사람이었어? 하긴 들어올 때부터 포스가 남달랐어.”
(...포스는 로그원에서 찾아 이것아)
“너 오늘 아랫도리 김날 거니까 각오해! 내가 O팀장한테 내 눈물주까지 양보했다니까. O팀장! 아직 미혼이랬지? 잘 됐네. 오늘 밤새도록 풀고 가!”
(그거 화장실가서 다 쏟았는데요? 그리고 미혼이라도 만나는 여자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업이사는 입이 찢어졌고, 마지막에 가서는 말을 놨다. 그리고 은근슬쩍 홈쇼핑 하나를 치자고 말했다. 홈쇼핑 하나 치는 게... 좀 짜증나긴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개인적으로 어떤 ‘목적’이 없다면, 홈쇼핑 들어가는 걸 싫어한다). 대충 어딘가에서 연락을 받았거나 밑에서 부추겼을 것이다. 이번에 자기가 맡게 된 Q를 띄워보고 싶어 하는 눈치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이쪽에 문외한이라도 홈쇼핑을 통해 뭔가를 팔아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일종의 통과의례다.
얼핏 영업 쪽에서 넘어 온 기획서가 스쳐지나갔다. 이사는 Q를 중국 쪽에 밀어붙이고 싶어하는 것이다.
상품개발팀, 공장, 재무팀 등등의 얼굴이 지나갔다. 홈쇼핑용 상품을 만들 순 없고, 단가 맞출 생각하니 아찔하다. 물론, 힘든 건 아니다. 귀찮고 짜증날 뿐이다. 대신 난 최소한 영업이사 라인에서는 ‘덜’ 까일 것이다. 이건 통과의례다. 최소한 중립적인 놈이고, 말은 통하는 놈이란 사인을 보내야 한다. 본부장 귀에도 오늘의 만남은 들어갈 것이다(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놀랍게도 내가 믿는 건 ‘사장’이다.
사장이 있기에 난 이 무모한 만남을 결심한 것이다. 사장은 실력본위를 말한다. 내 평가가 나쁘진 않다. 그리고 이 회사에서 마케팅 쪽으로는 내가 가장 경험이 많고, 실적이 있다. 거기에 베팅을 해 보는 것이다. 안 되면? 2년 꾹 참고 버티다 헤드헌터를 찾아가야 한다.
.................................................................
일만 하자는 내 결심을 지키기 위해 난 정치에 한 발을 담그게 됐다.

추신
이 시리즈를 투고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내부자의 안전과 비밀보장을 최우선시 한다는 딴지일보를 믿으나
이 연재가 중단되면 나에게 클레임이 들어왔거나 딴지 편집부가 쫄았거나 둘 중 하나로 생각하시라.(실제 지난 8편에서 관계자가 이 글을 읽고 클레임이 들어오긴 했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날리 없는 소설이라고 믿어주면 좋겠다.
지난 기사 |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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