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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15. 화요일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1. 그들의 국가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영남제분 사건을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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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2013년 9월16일


'여대생 공기총 살인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영남제분 회장의 전 부인 윤 모씨가 순전히 사적인 의심 만으로 사위의 이종사촌 동생을 끔찍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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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3년 7월 29일


이 사건의 실행범들을 잡기 위해 피해자의 아버지는 사재를 털어 1년간 동남아를 전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데 매우 당연한 이야기지만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저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 이 사건의 진범인 윤 씨가 처벌을 받았을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필리핀 납치단에 납치된 피해자들의 모습을 담은 죽지 않는 돌고래 기자의 기사들을 이 기회에 다시 읽어보며 그 가능성을 가늠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많아야 2% 정도?


그리고 피해자의 유족들은 기나긴 재판과정(자금적으로 아무 거리낄 것이 없는 윤 씨 등은 실행범의 위증 가능성을 집요하게 추궁하는 등의 여러가지 스킬을 동원해 재판을 어마어마하게 연장시켰다. 2008년에도 재심이 열렸다.) 동안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게 됐다. 얼마 전엔 형집행정지 스캔들이 터지면서 11년 만에 다시 피해자의 아버지가 1인 시위를 해야하는 지경에 빠졌다.


피해자에겐 친오빠가 있다. 독자 제위가 그의 입장이었으면 이 사건 이후 그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으리라는 점 정도는 충분히 상상이 가시리라 믿는다. 그가 느꼈을 고통과 절망감을, 이 사건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살면서 단 3초 만이라도 한 번쯤 상상이나마 해 봤으면 한다. 참고로 저 사건에서 ‘판사 사위’라는 표현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지금 변호사 개업을 해 여전히 법조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딸이 둘 있다고 한다.


한국 정부는 그들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어떤 지원을 해 줬을까?


영남제분 사건과 거의 동일한 ‘사형이 마땅하지만 참아주겠다’는 희한한 논리로 살인범이 무기징역을 받은 사건 중에 중곡동 주부 살인사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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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2013년 4월 11일


피해자의 배우자가 작성한 탄원서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건 네티즌들 사이에서 그랬다는 거고 저 사건의 가해자는 형집행정지든 가석방이든 가능성이 항상 열려있는 무기 징역을 받아 지금도 형무소에서 멀쩡히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가 살아있어서 인간의 존엄성이 유지되었다는 주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 문제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자.


피해자에겐 어린 자녀들이 있었다. 그들도 언젠가 이 사건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책이나 영화로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모두 건재하신 독자 제위들이 당연히 누릴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그들은 이제 단 하나도 누릴 수 없다. 어느 것 하나도.


한국 정부는 그들이 입은, 그리고 앞으로 살면서 한 순간 한 순간 입게 될 피해를 어떻게 보상해 줄 생각일까.


이쯤에서 아주 당연한 명제 하나만 확인하도록 하자.


범죄는 피해자 뿐만 아니라 피해자와 연관된 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한다. 살인범이 죽이는 것은 눈앞의 피해자 뿐만이 아니다. 그 피해자를 사랑하는 사람, 그 피해자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의 삶도 다 앗아간다. 영원히. 그리고 그 고통은 이제 남아있는 유족들의 몫이다. 살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성폭행 같은 끔찍한 범죄는 피해자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안겨주고 그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에서 주변의 사람들도 상상하기 힘들 만큼 큰 고통을 떠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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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당사자’는 가해자와 피해자인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범죄를 저지르면, 피해자와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은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그 피해자들은 자신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씻어내기 위해 어떤 대책을 요구할 수 있을까.


첫 번째로 민사재판이 있다. 돈으로 물어내라는 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상대방이 돈이 있었을때 가능한 이야기고(물론 이 재판 이전에 재산을 빼돌리는 수법도 다양하다.), 무일푼의 무차별 살해범이나 강간범의 경우 민사재판을 통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있으나 마나 한 권리다.


그리고 민사재판을 통한 배상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돈으로 물어냈으니 합의해 달라’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쉽고, 이런 경향이 강해지면 가장 경계해야 할 ‘돈이 많은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는’ 사회로 다가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범죄 피해자를 위한 공적인 지원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의 지원을 들 수 있으며, 이 외에도 여러가지 방면에서 사회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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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


하지만 이 기능이 금전적인 면에서 너무 강해지는 것도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범죄자들이 “나는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어차피 유족들에게 국가에서 얼마의 보상금을 지불하지 않느냐. 그냥 로또 맞았다고 생각해라”라고 인터뷰에 나와서 말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자. 범죄 피해자를 위한 지원은 이런 문제도 내포하고 있다. 이 기능이 너무 강해지면 범죄자들이 “어차피 너희들도 나 덕분에 국가의 돈으로 생활에 문제없이 살고 있지 않느냐”는 식의 발상을 가져 죄의식이 옅어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세 번째 대책만이 남았다. 가장 유효하고 가장 중요한 대책. 형사재판을 통해 범죄를 저지른 자들의 죄를 따져 물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범죄 피해자들은, 그리고 그 유족들은 이 형사재판의 '당사자'가 아니다.



2. 그들의 사회


이 연재의 처음부터 강조해 온 인류 이성의 발전과 인권이 보장된 합리적인 형사재판의 백미는 범죄의 피해자들을 재판 당사자의 지위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이제 형사재판에서 피해자의 복수심이 재판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다. 현대적인 형사재판의 당사자는 사회의 공익을 대변하는 검사(진짜다)와 피고인 즉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공정한 입장에서 듣고 판단을 내릴 판사 이 셋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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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혹은 피해자 유족들도 물론 법정에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그냥 증인 자격이며 증인이 아닐 경우는 그냥 방청석에서 다른 모든 시민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재판을 ‘보고 들을’ 수 있을 뿐이다. 흥분한 유족들이 피고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비를 위한 인력이 배치된다. 그나마 유영철 사건처럼 경찰이 유족을 발로 차지는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형사재판 제도 자체는 타당하다. 피해자 혹은 피해자 유족들의 복수심이 형사재판 그 자체를 뒤흔들어서는 안 된다. 재판은 공정하게, 피고인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하고 판사는 개인적인 복수심 따위 없이 그저 범죄에 합당한 처벌 만을 내려야 한다. 독자 제위가 아직 고등학생이라면 이렇게 작문해서 학교에 냈을 때 아마 거의 만점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오늘 딱 한 번만 생각해 보자.


이것이 과연 언제나 올바른 길이고 영원한 진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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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피해자와 유족들을 재판에서 철저히 배제한 상태에서, ‘인권 보호를 위해’ 그저 가해자에게 ‘가능한 한 가벼운 처벌’ 만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이성적인 태도인가.


피해자의 복수심은 비이성적인가. 그저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인데 칼에 찔려 죽거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강간을 당해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그 범죄자를 증오하는 것은 ‘인간답지 않은’ 일인가. 그들의 목소리를 재판에 반영하는 것이 그들을 찌르고 폭행하고 강간한 자들의 ‘인권’을 지키는데 방해가 된다는 사고방식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놀랍게도 범죄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게 ‘용서’를 권하거나 혹은 거의 강요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 지도자부터 인권 운동가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피해자가 아닌 사람들이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책장 한 장을 넘기는 것 보다 쉬운 일이다. 그들은 당사자가 아니니까. 자신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일의 가해자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것 만큼 쉬운 일이 있을까. 그냥 키보드 자판으로 ‘용서한다’라고 치면 된다.


판사의 입장도 거의 마찬가지다. 판결문에 “유족들의 고통은 어떠한 말로도 위로할 수 없다”라고 한 줄 적으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유족들은 위로하지 않고 피고인의 형은 감형해 주는 판결문이 수두룩하다. 그 판사는 고뇌하는 표정으로 법정을 나와 가정으로 돌아가면 된다. 살인 사건으로 살해당하지 않아 멀쩡히 삶을 영위하는 그의 가족이 그들을 맞이할 것이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환담을 나누며 다음 사건을 생각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TV로 영화를 한 편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범죄가 발생한 순간부터 형사재판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사건의 당사자였던 피해자와 유족들은, 형사재판의 모든 과정에서 그저 방관자 혹은 잘해야 ‘증인’이 된다. 그리고 재판이 끝나는 순간, 모든 관계자들은 다 그들의 삶에서 퇴장하고 이제 다시 피해자와 유족들만 덩그러니 남는다. 가해자는 인권이 보장된 형무소에서 ‘최소한의’ 형기를 채우고 나오면 일단 법적으로는 모든 책임에서 해방된다. 일사부재리. 더 이상 어떤 방식으로도 그들의 범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피해자가 완벽히 배제된 형사재판에서 ‘가해자의 인권과 재도전을 위해’ 가능한 한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이 언제나 합당하다는 식의 사회적인 공감대가 거의 형성되어 가고 있는 상태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3. 정의의 검


정의의 여신 디케의 동상을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눈을 가리고 천칭을 들고 검을 든 여신. 눈을 가려 공정함을 추구하고, 천칭으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며, 검으로 그 판단을 집행하는 정의의 상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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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형사재판은 공정함과 정확한 판단 면에서는 이미 완숙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본다. 언론에서 논란이 될 만한 사건들만 보도되는 바람에(그것이 언론의 사명이기도 하고) 사법 관계자 전체가 비상식적인 사람들의 집단처럼 비춰지는 경우도 있지만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수사를 담당하는 일선 경찰부터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판사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인 대다수의 관계자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고 치밀한 수사와 공정한 재판을 위한 제도적 장치, 관계자들의 숙련도 등 모든 면에서 훌륭한 수준이다. 당장 한국 사회가 치안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시민들의 삶도 별다른 불편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비교적 올바른 형사재판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을 반증한다. 정의의 여신의 눈가리개와 천칭은 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정의의 여신이 든 검은 검의 날이 너무 무뎌져가고 있다.


치밀한 수사와 공정한 재판을 통해 죄를 모두 다 밝혀내고 그 죄의 엄중함도 입으로는 다 꾸짖은 뒤 최후의 순간에 검이 아닌 나무 막대로 어깨를 한번 툭 치는 꼴이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죄가 있다면 다시 재판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죄의 엄중함을 몰라서 내린 판결이라면 판사를 원망할 수도 있을 텐데, 죄는 다 밝혀졌고 그 죄의 엄중함도 아는 재판부가

 

“그러나 너의 죄를 사하리”


라고 위대한(?) 용서를 해 버리면, 형사재판이 최후의 보루인 피해자와 유족들은 이제 무엇으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감형과 집행유예의 과다한 운용, 가석방과 형집행정지, 가해자의 인권과 앞으로의 삶을 고려한 최소한의 양형. 그렇게 정의의 검에 녹이 슬고 이가 빠지는 동안 피해자와 유족들이 흘린 눈물도 이제는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부언하고 싶다. 그러니 제발 죄는 미워하자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 죄를 미워하지 않을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는 것은 그저 극심한 형벌로 피해자를 괴롭히자는 주장이 아니라는 공감대도 형성되어야 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범죄에 합당한 처벌’이며, 재판부가 지나치게 가벼운 형벌로 치우칠 때 시민들이 “그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소리높여 말할 권리도 충분히 보장받아야 한다.


이제 정의의 검의 날을 다시 한 번 세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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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주시자로 부터.





첨언


다음 편에서 사형 제도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연재의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경우에 따라 외전 성격의 글을 두어 개 쓸 수도 있지만 아직 미정입니다. 수뇌부가 이 별 인기없는 연재의 외전까지 지면을 줄 지도 미지수입니다만.


반론하고 싶으신 분들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편에서 사형제를 다루고 본편 연재는 끝낼 생각이니 반론글을 쓰시려는 분들은 슬슬 워드창을 여셔도 될 타이밍이라 봅니다. 다만 제 부족한 필력으로 재반론까지 쓸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어 ‘논쟁 예약’은 못해 드림을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글에 다 답변해 드린다는 확약은 못하지만 트위터도 열려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수뇌부는 제 뻘글보다 깔끔한 반론글을 더 기대하고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 경청하고 저도 더 배우길 바랍니다. 댓글에 답변 못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트위터: @unknownbeholder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