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4. 월요일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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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티아그라하
간디의 철학이자 흔히 비폭력 저항으로 해석되는 사티아그라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사티아’는
진리를 뜻하며 ‘아그라하’는 노력, 열정을 뜻한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를 뜻 그대로 해석하면 '진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된다. 물론 간디에게 이러한 노력은 비폭력이라는
대전제를 의미한다. 사티아그라하의 대원칙으로 간디가 자주 사용했던 ‘아힘사’라는 단어가 ‘타인에 대한 상해 불가’를 뜻하기도 한다. 앞으로 간디의 비폭력 저항 원칙은 본래의 표현을
살려 사티아그라하로 통칭하기로 한다.
간디가 사티아그라하를 사회적 운동의 차원으로 처음 등장시킨 것은 그가 남아공에 머물던 시기부터였다. 당시 남아공의 인도인들은 갖은 모욕과 차별을 당하며 일하고 있었는데, 정부적
차원에서 이러한 차별을 법제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를 테면 남아공에 입국하고자 하는 인도인들을
까다로운 조건으로 심사한다던가, 남아공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에게 차별적인 인두세를 부과하는 방법들이었다. 심지어 남아공 내 인도인들에게 주거 허가증 비슷한 것을 발급하기로 하고 이를 발급받지 않거나 소지하고 다니지
않는 인도인들을 처벌하는 조항까지 신설하려 한 것이다. 시민권의 하나인 선거권을 인도인들에게서 박탈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미 간디는 열차의 1등칸 탑승을 단지 그가 인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승차 거부 당하는 등의 생활 속 차별을 겪으면서 이를 시정하고자 노력해오고 있었다. 그런 간디에게 이러한
차별적 제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간디는 신설되는 차별 조항에 대한 불합리성을 인도인들에게 알리는 한 편 이를 조직적으로 거부할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원된 운동의 방식이 사티아그라하였다. 이
시기 간디의 사티아그라하가 아직 완벽한 틀을 갖추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저항의 방식은 이미 비폭력 저항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 차별 조항을 철폐하기 위해 간디가 택한 방식은 조항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미 발급받은 인도인들의 신분증은 모두 모아 놓고 불태우는 한편, 아직 신분증을 발급받지
않은 인도인들은 신분증 발급을 거부했다. 차별 조항을 조직적으로 위반하자 간디를 포함한 수많은 인도인들이
체포되었다. 오래지 않아 남아공의 감옥은 넘쳐나는 인도인들의 숫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현지 경찰들의 체포와 구금, 구타와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간디를 위시한 인도인들은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회는 곧 혼란에 빠졌다.
남아공의 영국 정부는 기만 전술로 이에 맞섰다. 인도인들의 조직적 저항 앞에 화해의 손을 내밀면서 협상의 태도를 보이다가도 인도인들의 저항이 조금이라도 수그러든다 싶어지면 어김없이 약속을 어기고 더 큰 탄압을 자행했다. 그럴 때마다 간디와 인도인들이 보인 태도는 같은 방식의 조직적 저항이었다. 결국 사태가 진정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영국 정부는 원래의 자세에서 한 발짝 물러난 조건으로 인도인과의 협상을 타결시켰다. 간디 또한 원래의 강경한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고 타협의 자세를 견지했다.(간디는 이후 어떤 종류의 사티아그라하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상대가 인도인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태도를 보이면 같은 편도 놀랄 정도로 타협의 여지를 두고 조건을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간디의 태도에 실망하는 인도인 또한 적지 않았으나 간디는 언제나 대타협의 여지를 두고 협상에 임했다) 어찌됐든 이는 명백한 사티아그라하의 승리였다.
소금행진,
사티아그라하의 위대한 승리
소금행진을 형상화한 기념물
식민지 인도를 지배하는 영국 제국의 전형적인 착취 행위 중 하나는 바로 소금이었다. 해안가에 나가기만 해도 누구나 자연 생산된 소금을 건져 올릴 수 있었음에도 인도인들은 제 마음대로 소금을 얻을
수 없었다. 오로지 영국 제국의 허가 아래 생산된 소금만을, 막대한
세율이 부과되어 있는 상태의 소금만을 살 수 있었다. 영국 제국의 소금 지배는 인도 경제의 파탄과 살인적인
착취의 상징이었다.
소금행진은 이러한 착취에 저항하는 발걸음이었다. 1930년 3월 12일. 간디는 7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아메다바드를 출발하여 단디 해변을 향해 행진한다.
360Km의 대장정을 걷는 동안 걸린 시간은 24일,
78명의 행진 인원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행렬이 길어져 마지막에는 무려 수천 명이 행진에 동참하게 된다. 행진의 과정에서 영국 경찰의 폭력과 저지가 있었지만 꿋꿋하게 발걸음을 내딛은 간디와 일행. 끝내 4월 6일 새벽 5시 30분, 간디는 단디
해변에서 한 줌의 소금을 건져 올리게 된다.
인도 전역에서 자발적으로 소금을 생산하기 위한 행동이 이어졌다. 간디를
포함한 무려 6만 명의 인도인이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 수감되었다. 제염소로 행진하는 인도인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어떠한 무기나
폭력적 행동 없이 그저 앞으로 묵묵히 걸어나가기만 했던 이들에게 무장한 영국 경찰들은 제염소를 지키며 곤봉과 몽둥이로 그들에게 무차별적인 구타를
가했다. 첫 열이 휘두르는 곤봉에 아무런 저항 없이 쓰러지면 그 뒤를 두 번째 열이 이어 걸어 나왔다. 그렇게 두 번째 열, 세 번째 열... 그리고 그 다음 열, 그 다음 열...
결국 제국은 이들의 저항 앞에 1931년, 협정을 체결하며 소금법을 폐지시킨다. 비폭력이 폭력을 이긴 것이다.
사티아그라하, 절대 불변의 철학인가, 전술인가
남아공과 인도에서 사티아그라하가 거둔 승리는 분명 인도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티아그라하가 간디의 절대 법칙이라 하기에는 간디가 보인 모순된 행동을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
단적인 예가 1차세계대전 당시 보인 간디의 태도다. 사티아그라하의 간디가 인도 청년들에게 1차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영국군의
일원으로 싸워줄 것을 호소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다. 사티아그라하와 세계대전 참전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괴리는 몇 가지 사실에 입각하여 어느 정도 그 원인을 추정 해볼 수 있다. 먼저
간디가 세계대전 참전을 독려했던 시기는 1915년이었고 소금행진은
1930년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15년의 시간 차는 짧은 것이 아니다. 물론 간디가 1915년 이전에도 비폭력에 입각한 저항 운동을 벌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는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다. 1차세계대전 이전의 사티아그라하가 비교적 소극적 형태였다고 가정해보자. 간디는
이전에도 인도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한 운동에는 비폭력적 수단을 강조했지만 이때까지는 그것을 인도인들의 운동에만 한정 지어 생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국민의 권리를 영국 제국에 더 힘주어 주장하기 위한 방편으로 1차세계대전
참전을 독려했다고 유추해 볼 수는 있다.
1차세계대전
물론 이러한 가정이 과연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한 그 가정이
옳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간디의 행동에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만약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이
시기까지의 사티아그라하는 매우 편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는 철학적 신념이
아니라 그저 전술의 일환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맥락적으로는 사티아그라하와 세계대전 참전 독려 사이의 모순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겠다. 1차세계대전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참전을 독려했던 간디가 2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참전 거부는 물론 인도인의 자체적인 무장에도 반대했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 전략적 차원에서 인도가 더 이상 영국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도 충분히 독립에 대한 뜻을 관철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다른 시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간디가
주장하는 사티아그라하의 범위가 1차세계대전 때 보다는 더 넓어진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2차세계대전 참전을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 주장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판단은 결국
간디를 바라보는 독자들의 몫이다.
사티아그라하의 한계 – 간디의 무책임한 순진함?
간디의 모순된 행동과는 관계 없이 사티아그라하 자체에도 뚜렷한 한계는 존재한다.
사티아그라하는 상대와 싸워 이기기 위한 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사티아그라하는 비폭력으로
폭력을 정화하여 상대방을 개심(改心)시켜 행동의 변화를 이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폭력으로 일관하는 상대에게 개심의 여지가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사티아그라하는
성립될 수 없다. 필자는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모든
종류의 폭력 주체에게 개심의 여지는 있는가?
상대의 개심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사티아그라하에는 나름의 전략적 가치가 있기는 하다. 만약 폭력의 주체에 맞서 저항하는 이들이 똑같이 폭력적 수단을 사용했다고 가정해보자. 이러한 저항은 상대의 폭력을 저지하고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겠으나 대체적으로는 더
큰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오히려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사티아그라하는
더 큰 희생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이라는 측면에서도 그 가치가 있다. 어디까지나 간디는 희생의 최소화를
간절하게 원했으니 말이다.(때문에 간디는 인도인 모두가 사티아그라하에 동참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간디는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소수만으로도 사티아그라하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 조차 결국은 1차적인 것이다. 만약 상대의 폭력이 개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라면 그래도 사티아그라하는 유효한 것인가?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학살 소식을 접한 간디의 말을 떠올려 보자.
간디는 유태인들은 도살자의 칼에 자신들을 바쳤어야 했다고 말한다. 절벽에서 바다로 뛰어내렸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랬다면, 전세계 사람들과 독일 민중들을
깨어나게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간디가 설령 진정한 성자라고 한들 무슨 권리로 학살 당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요구한단 말인가? 보다 근본적으로, 과연 유태인들이
간디의 말대로 자신들을 도살자의 칼에 바쳤다 한들 당시의 나치가 태도를 바꾸었을까? 당시 유태인들은
나치 앞에 어떠한 폭력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폭력 저항이 선택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실제로’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수백 만의 유태인이 죽었다. 만약 독일이 패전하지 않았다면
지구상의 유태인은 정말로 씨가 말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벌거벗겨진 채로 줄지어 끌려가는 유태인들.
간디의 말처럼 이들은 실제로 도살자의 칼에 자신들을 바치지 않았는가.
때문에 간디의 이러한 입장은 어찌 보면 너무나 순진하다. 폭력이라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에게 아무런 폭력적 저항 없이 그저 자신의 목숨을 내던짐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태도를 변화시키길 바라는 행동은 무모한 순진함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한 무모한 순진함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담보로 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그렇다면 그 순진함은 심지어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대통합 –
모든 욕망의 대변자
간디의 업적 중 가장 대표적인 것 한 가지는 온갖 종교와 각 종교의 분파, 계층과
계급, 문화가 뒤섞인 인도라는 카오스의 세계를 통합한 전무후무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간디가 힌두교인이었음에도 말이다. 필자는 간디의 이러한 업적을 그가
모든 이들의 욕망을 대변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싶다.
종교적 측면을 먼저 생각해보자. 간디는 힌두교인이었지만 타 종교에 배타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인도 내에서 힌두교가 주류 종교였음을 감안하면 간디가 힌두교를 신봉한다는 사실 자체로 인도 내의 힌두교인들은 간디를 배척할 이유가 없어진다.
한 편 이슬람을 신봉하는 무슬림의
입장에서 보면 간디는 비교적 소수인 자신들을 헤치고자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말이 통하는’ 힌두교인이야말로 간디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힌두교의 나라에서 무슬림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간디를 따르는 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인도의 지도자가 비주류인 무슬림 가운데서 나오지 못한다면야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간디이기 때문이다.
카스트 제도의 계급 안에서 보아도 그렇다. 생활 속에서 종교적인 것과
비종교적인 것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은 인도의 특성상 간디는 정치 지도자이면서 한 편으로는 종교 지도자였다. 그것도
힌두교 종교 지도자였던 것이다. 카스트 제도 내의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그리고 중간 계급인 바이샤에게 간디는 분명 존경할 만한 인물이었다. 일부
브라만들은 바이샤인 간디가 최하 계급인 수드라는 물론 계급에 속하지도 못한 불가촉천민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고 그들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일부에 불과한 것이었다. 수드라와 불가촉천민들에게는 또
어떠한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그들에게 손길을 내민 간디는 그야말로 성자 그 자체였을 것이다. 실제로 간디를 가장 신격화하며 따랐던 무리 또한 이들이었다.
이번에는 경제적 계급차원에서 바라보자. 지주와 고용주들이 생각하기에 영국
제국의 억압과 착취만 없어지면 인도는 그들의 세상이 될 것이었다. (上)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간디가 영국 제국에 요구한 조항들은 이들 지주와 고용주들에게 해가 될 것이 없었다. 반대로 반사이익이 더 컸음을 부정할 수 없다.
노동자와 하층민들에게 간디는 카스트 제도의 피해자들 눈에 비친 간디의 모습과 같았다. 실제로 대부분의 노동자와 소작농, 하층민들이 카스트 제도의 피지배계급이었던 데다 영국 제국의 착취가 가장 직접적인 생존의 위협이 되었던 것이 이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러한 사람들에게 간디는
구원자나 마찬가지였다.
간디가 인도를 하나로 묶었던 이유에는 간디의 성품과 그가 인도를 위해 헌신한 모습 또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필자 또한 인정한다. 때문에 일부 독자들은 욕망의 대변자라는 다소 거친 표현에 불편함을
느꼈을 수 있겠다. 그러나 필자가 글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자’ 간디가 아니다.
모두의 편에 선다는 것 = 모두에게 배신감을 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나 한 편 생각해보자. 사실 모든 계층과 종파를 완전히 하나로
묶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통의 목표가 있거나 모두의 바람을 충족 시켜 줄 것 같은 지도자가 있을
경우에 일시적으로 뭉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인도에는 영국 제국이라는 공통의 적이 있었고, 간디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편에 선다는 것은 모두에게서 버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디가 불가촉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노력했을 때, 간디는 브라만과
크샤트리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반대로 간디에게 카스트 제도 폐지에 대한 의지가 없음을 확인했을 때, 일부 불가촉천민들은 크게 실망하고 간디에게서 등을 돌렸다.
간디가 힌두교도임에도 무슬림의 주장을 경청하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려 하자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은 간디를 규탄했다. 무슬림은 그들 나름대로, 힌두교의 암소보호 운동에 앞장서고 정치적 구호와 연설에도 힌두교리를 적용하는 간디가
언젠가는 그들의 적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인도의
분리는 내 몸을 두 동강 내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인도의 통합에 있어 간디의 역할과 행동을 단순화 할 수 만은 없는 이유는 간디가 그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할 행동, 통합을 위한 목숨을 건 노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인도 독립의 서광이 비추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오히려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갈등을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마침내 영국 제국의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간디는 비탄에 잠겼다.
힌두와 이슬람의 갈등이 급기야 상대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번졌기 때문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공격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살육하면 공격을 당한 쪽은 더욱 더 잔혹하게 상대 진영에 복수의 칼을 휘둘렀다. 영국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때 보다 더한 살육전이 인도 전역에서 일어났다.
인도 내 무슬림은 인도에 파키스탄이라는 무슬림의 나라를 세우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인도가 독립하자 간디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다. 간디는 인도의 분열을
막아야만 했다. 간디는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갈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도의 분리는 내 몸을 두 동강 내는 것과 같다’는 간디의 외침은
인도의 분리를 끝내 막지 못했다.
이 분과 묘하게 닮아 보이는 간디 말년의 행적
간디는 인도 내의 힌두교인 만을 편들지 않았다. 당시 인도 정부는, 분리 이전의 인도의 자산 중 파키스탄의 몫인 5억 5천만 루피를 파키스탄에 지급하지 않고 있었다. 이때 파키스탄의 자산을 돌려줄 것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 간디였다. 힌두교를 신봉하는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이러한
간디의 행동에 아연실색했다. 그러나 간디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5억 5천만 루피를 파키스탄에 돌려 주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미
분리된 파키스탄이었지만 간디는 통합의 꿈을 놓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파키스탄에 방문하여 지도자들과
만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대략 그 시점부터 RSS를
비롯한 과격 힌두주의자들은 간디의 목숨을 노리기 시작했다.
간디의 죽음
인도가 독립한지 채 반 년이 되지 않은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끝내
‘고드세’라는 힌두교 근본주의자의 총에 생을 마감한다. 간디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무슬림이 아닌 그와 같은 힌두교인이었던 것이다.
나투람 고드세
- (上)편의 댓글에서 어떤 분은 간디에게서 이승만의 느낌이 난다고 했다. 필자 또한 비슷한 생각이나 한 편으로 간디의 말년을 보면 오히려 김구 선생과 같은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앞서 필자는 모두의 편에 선다는 것은 모두에게서 버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모두가 간디를 버린 것은 아니다. 간디가 뜻하는 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을 뿐이다. 간디는 여전히 모든 인도인의 존경의 대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간디를
살해한 고드베의 행동이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간디 사후, 인도 내의 모든 정치 세력들이 간디를 이용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고 서로와 반목하면서도 각자가 모두 그들 스스로 간디주의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간디는 모두의 필요를 받아들여 행동했고, 그들은
모두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간디를 이용했다. 정작 간디는 그 스스로 ‘간디주의’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들이다. 인도는 간디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간디의 죽음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벌어졌던 수차례의 전쟁과 인도 내의
갈등은 간디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
간디, 그
순진한 신념의 명백한 한계와 희망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독립을 앞둔 인도에서는 종교 분열이 극한에 달했다. 또한 독립 정부 수립이 논의 되면서, 그간 독립을 위해 간디와 함께 행동했던 인도 국민회의의 사람들에게서는 부패와 타락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간디를 실망시켰다. 그 실망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실망이었다. 소금행진 등에서 인도가 보여주었던 사티아그라하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중 어떤 쪽이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인가? 삶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노년의 간디는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뒤늦게 사로잡혔을 것이다. 실제로 간디는 이와 비슷한 의도의 글과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을 전후한 시점에서 인도 내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인간의 본성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간디가 간과한 것은 인간 본성의 선악이 아닌 구조적 차원의 문제였을지 모른다.
인간의 개별적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인간 본성일 수 있겠으나 개별적 인간을 한 때나마 완전히 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이 종교적 분열이든, 집단의 부패와 타락이든 마찬가지로 사회
구조적 차원의 접근은 언제나 필요하다. 눈앞에서 집단의 일원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들이
상대에게 똑 같은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을 두고, 어떻게 인간 본성만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편협한 필자의 견해로 간디는 끝까지 너무나 순진했다.
그러나 간디의 순진함과 그것이 가진 명백한 한계에 그저 비판으로 일관하기에는,
그가 목숨을 걸었던 그 순진한 신념이 보여준 기적 같은 일들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하다. 인도가
독립한 직후, 인도 전역이 종교 분열로 인한 혼란에 빠져있을 때,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이 맞닿아 있던 펀잡 지역의 폭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5만 5천 명의 군인이 진압을 하는 대도 애를 먹고 있던 그 시점.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력 아래 있던 벵골 지역에는 단 한 명의
군인만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벵골 지역에서는 어떠한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먼저 그들은 당신을 무시할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당신을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당신과 싸울 것이다.
그리고나서 당신은 승리할 것이다.
힌두와 이슬람의 충돌을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간디가 목숨을 건 단식에 임하자,
양 쪽 진영 모두는 잠시나마 싸움을 멈추고 간디가 단식을 중단할 것을 한 뜻이 되어 요청했다. 간디가
암살 당하자, 반대 진영에 있던 파키스탄과 모든 무슬림까지도 간디에게 애도를 표했다. 실로
한 사람의 개인이 발휘한 것이라 믿기 어려운 일들을 간디는 몸소 보여 준 것이다. 식민지 인도의 권리를 위한
저항에서부터 인도의 통합을 위한 여정에 이르기까지, 순간 순간마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 온 간디의 순진한
신념이 일으킨 기적이었다.
20세기 이후 세계 역사에 있어 간디 만큼이나 정치적 색채와 종교적 색채가 혼재되어 있는 인물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어떤 관점을 갖고 간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한다.
우리는 간디를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로 기억해야 할까, 아니면 '마하트마 간디'로 기억해야 할까. 역시나 판단은 독자 여러분의 몫일 게다. <찌질한 위인전>, 간디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뱀발
1. <찌질한 위인전> 간디편은
간디 생애의 주요한 사건을 바탕으로 제가 나름의 생각을 덧붙여 서술한 것입니다. 그러나 간디의 생애와
그 당시 인도의 모습, 역사적 의미까지 모두 싣기에 짧은 글 두 편이라는 분량은 너무 턱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제프리 애쉬의 <간디
평전>과 E.M.S 남부디리파드의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간디의 자서전인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를 읽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2. 간디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금욕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노년에도 젊은 여성과 나체로 동침했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일화를 소개하면서 나름의 생각을 밝히려 했습니다만 분량 관계로 미쳐 이야기하지 못했음을 알립니다. 그러나 (上)편의 댓글에서 한 분이, 당시 간디가 손녀인 마누와 실제 성관계를 했다고 주장하신 것은 제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신빙성 있는 자료를 제게도 알려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3. 간디 (下)편을 쓰면서 본 글과는 별 상관 없는 생뚱 맞은 질문이 문득 생각나 이곳에 적어 놓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정치, 사회적인 현실에서 싸워야 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싸움의 대상은 부정한 개개인일까요, 아니면 구조 그 자체일까요? 어리석은 필자의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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