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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16. 수요일

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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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현지는 분홍빛

 

드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전은 점심시간을 기다리며 버티고 오후는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버티는 것이 노동자의 마음이다. 와이캐피탈의 채권추심원들은 오전 1130부터 1230분까지 밥을 먹는 1조와 오후 1230분부터 130분까지 점심시간을 가지는 2조로 인원을 나누어서 밖으로 나갔다. 업무 특성 상 전화기 앞에 대기하고 있는 직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채무자의 전화가 가장 많이 걸려오는 시간은 점심시간 무렵이었기에 이때에는 독촉 전화를 걸기보다는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데 주력했다.

 

이번 달에는 추심 1과장과 2과장의 가위바위보 대결에서 2과장 박치훈이 승리했다. 덕분에 철수도 1130분에 먼저 밥을 먹으러 나갔다. 같은 과의 장재완과 오진성, 이민호 등도 함께였다. 법무과나 개인회생과 같이 고객응대 업무가 적은 부서에서 근무하는 사원들은 적당한 시간을 택했는데 여직원들은 보통 도시락을 싸와서 사내 탕비실에서 밥을 먹었다. 법무과에 새로 들어온 아르바이트 여직원 고현지도 보통은 도시락을 싸왔지만 오늘은 늦잠을 잤다며 추심2과를 따라나섰다.

 

고현지는 대구 출신으로 사투리를 감추려고 애써도 조금씩 묻어나는 말투가 애교스러운 아가씨였다. 갓 스무 살이 되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으로 입사한 회사가 바로 이곳이었다. 사회생활 경험이 없어서 일처리가 능숙하지는 않았으나 와이캐피탈의 막내 직원으로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채권추심과는 남자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고현지가 법무과의 심부름이라도 오게 되면 독촉 전화를 돌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다들 앞 다투어 말을 섞어 보려고 했다.

 

법무과는 과장도 여자였고 과원들도 대부분 여직원이었으나 기혼이었다. 그리고 와이캐피탈에서 일하는 여직원은 모두 독립법인이 되기 전 모회사인 캐시앤머니에서 근무하다 함께 넘어온 경력직이었다. 법무과에서 하는 일은 다른 회사와 다를 것 없는 서류 작업이었지만, 아무래도 대부업체라고 하면 거친 이미지가 연상되기 때문에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 중에 여자는 거의 없었다. 아르바이트 일자리로 급여가 적은 편이 아닌데도 구직자가 그리 많지 않은 까닭 역시 대부업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한번은 박치훈 과장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고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우리 현지 씨는 입사원서 쓸 때 무섭지 않았어?”

 

고현지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현지는요, 캐피탈이 뭐 하는 회사인지 들어오고 나서야 알았지요. 헤헤헤.”

 

와이캐피탈에서 남자 직원들끼리 있을 때의 기본 호칭은 이 새끼나 저 새끼였고 일상적으로 개새끼와 씹새끼도 호출되었지만 현지 앞에서는 누구나 말을 가렸다. 사장이나 과장이 부하 직원에게 온갖 육두문자를 소환하여 인격을 훼손하고 자존심을 마멸시키는 와중에도 현지가 나타나면 공격도가 낮아져 말투가 누그러들기 마련이었다. 상사의 공격에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부양가족의 얼굴이나 다음 달의 카드대금을 떠올리던 부하직원 입장에서 현지의 등장은 구원의 여신이 강림하는 것과 같았다.

 

언젠가 사장이 고현지에게 점잖게 타일렀던 적이 있었다. ‘이제는 회사원이 되었으니 회사에 올 때는 화장을 하는 것이 예의 바른 일이다.’ 그러자 주위의 추심원들은 일제히 고현지를 두둔하고 나섰다. ‘현지는 어리잖습니까.’ ‘화장하지 않아도 예쁩니다.’ ‘일찍부터 화장을 하면 피부가 상한답니다.’ 등등. 사장의 말에 항거하는 집단적인 움직임은 전에 없던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사장도 기세에 놀라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 후로 현지는 출근하기 전에 꼬박꼬박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기특한 일이었다. 하지만 현지가 종종 지각을 했을 때 사유는 언제나 똑같았다. ‘아침에 화장이 안 먹어서요.’ 어설프게 화장품을 치덕치덕 바른 얼굴로 울상이 되어 변명하는 앞에서 사장은 아무리 기가 막혀도 심하게 나무랄 수가 없었다. 만약 현지가 눈물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폭동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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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고 비혼인 여자 직원이 남자 직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것은 유성생식을 하는 양성생물의 집단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었다. 특히 추심2과의 경우 과장 이하 과원 모두가 혈기왕성한 독신 남성이었다. 이들은 종족 번식의 본능을 거스르지 않고 점심시간에 동행하게 된 현지를 반갑게 맞았다. 현지와 함께, 아니 여자사람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얼마만의 일인가.

 

박치훈 과장이 신이 나서 현지를 향해 물었다.

 

우리 현지 씨 배고프지? 점심 뭐 먹고 싶어? 과장님이 사줄까?”

 

헤헤헤. 현지는요짜장면이 먹고 싶어요.”

 

과장이라 해봐야 주머니 형편이 뻔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현지가 고른 메뉴는 점심식사 중에서도 저렴한 축에 속했다. 박치훈이 호기롭게 모두를 돌아보며 선언했다.

 

오늘 점심은 중국집이다. 내가 쏜다.”

 

일행은 우르르 회사 근처 중국집으로 몰려갔다. 다른 회사의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전이라 식당 안은 그리 붐비지 않았다. 홀에 있는 큰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짜장면으로 대동단결을 선포한 뒤 탕수육을 하나 추가했다. 단무지에 식초를 따라 놓고 물잔을 돌리며 유쾌하게 식사를 기다렸다.

 

식당 벽에 걸린 텔레비전의 대형화면에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미납추징금 공소시효 만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장재완이 무심히 텔레비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과장님. 저 돈은 왜 못 받습니까?”

 

각하께서 가진 돈이 29만원 밖에 없다고 하신다.”

 

박치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장재완은 정치에는 원체 관심이 없었기에 과장의 설명을 납득하지 못했다.

 

돈이 없어도 재산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왜 못 받아 냅니까?”

 

과연 추심왕 장재완의 기개는 대단했다. 와이캐피탈의 에이스 장재완이 받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는 돈은 확실히 받아낼 수 있는 채무였다. 정부에서 진작 그를 고용했다면 두 전직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됐을 것이다. 장재완의 당연한 반문에 과장이 말했다.

 

우리 재완이 청와대로 보내야겠다.”

 

빈정거림이 섞인 농담이었으나 장재완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근데요, 전두환이랑 노태우랑 댑따 댑따 옛날 일 아니에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현지가 과장에게 물었다. 스무 살인 현지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두 대통령은 이미 퇴임했는데 아직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서른아홉 살 박치훈 과장이 친절하게 햇수를 따져보고 대답해 주었다.

 

어디보자추징금 판결 난 지가 이제 16년 됐지.”

 

현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 번 물었다.

 

우왕. 16년이나 지났으면 이자도 장난 아니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그거 이자는 어떻게 받나 모르겠다. 지금 법정최고이자가 39%까지 되거든. 옛날에는 49%였는데재완아, 그냥 39%로 잡고 계산기 좀 두드려 봐라. 단리로 계산해도 그게 얼마냐?”

 

장재완이 핸드폰을 꺼내들고 계산기를 눌러 보았다.

 

“1672억에 39% 거기에 16년 곱하면이자만 총 14332800만원 나옵니다.”

 

어마어마하네.”

 

우리 회사 돈이었으면 가만 안 두는데 말입니다.”

 

부하직원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듣고 박치훈 과장은 클클 소리 내어 웃었다.

 


이하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 -전두환.jpg

이하, 귀여운 독재자 시리즈 -전두환, mixed media, 160x120cm, 2012

이작가는 이하 작가의 작품 창작과 표현의 권리를 지지합니다. (출처 : 이하의 블로그)

 


박치훈이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고 말했다.

 

오늘 실적 안 나와서 미치겠다. 장재완이 말고는 죽 쑤고 앉았잖아. 아침엔 비도 오고

 

대부회사에서 대출을 받고 제 때 갚지 못한 장기연체자 중에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 날이 궂으면 일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쉬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날씨와 계절은 채권추심업에도 영향을 미쳐서 한여름과 한겨울에는 눈에 띄게 추심액이 줄었다. 아직 여름 장마가 시작되려면 멀었지만 지난 주 부터 봄비가 조금씩 내려서인지 실적이 좋지 않았다.

 

늬들 핸드폰 바꿀 때 안 됐냐? 누구 핸드폰 바꾼다고 하면 사장이 핸드폰 얘기만 할 텐데.”

 

사장은 얼리어답터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휴대전화나 타블렛, 컴퓨터 같은 최신 전자기기를 화제로 꺼내면 실적에 대한 압박이 조금은 줄어들 터였다. 박치훈이 기대감에 찬 눈으로 철수를 바라보았다. 철수가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답했다.

 

저는 약정도 안 끝났습니다.”

 

철수는 스마트폰으로 전화기를 바꾼 지 몇 달 되지도 않은데다 신제품에 별 관심이 없었다. 과장이 실망한 표정으로 오진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오진성이 눈을 마주치며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베가레이저 투가 곧 나온다던데 제가 오후에 이야기를 먼저 해보면

 

얌마. 사장이 베가 원 쓰다가 얼마 안돼서 바꿨잖아. 베레기 베레기 입에 달고 다니던 거 기억 안 나?”

 

베가레이저 괜찮은데 말입니다.”

 

너한테 괜찮은 거 말고 사장한테 괜찮은 거 찾아보란 말이다. 삼숭이나 엘쥐에선 뭐 안 나온대?”

 

잘 모르겠습니다. 갤록시 쓰리가 나올 때가 되긴 했는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고

 

에휴. 됐다.”

 

오진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과장은 오진성의 입을 틀어막은 뒤에도 한참 동안 스마트폰 이야기를 했다. 옆 자리에 앉은 고현지에게 무슨 어플리케이션을 쓰고 있는지 물어보고 카카오톡 프로필에 걸어 놓은 사진 이야기도 했다. 고현지는 눈치 빠르게 과장의 말을 받아 내면서 다른 직원들에게도 틈틈이 조금씩 말을 걸어 주었다. 오랜만에 화기애애한 대화가 이어진 점심시간이었다.

 

열두시가 지나자 식당 안에는 손님들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철수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거리에는 밥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일행은 조금씩 흩어져서 사무실을 향해 걸었다. 현지가 잰 걸음으로 앞서 걷던 철수에게 다가왔다. 철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나서 고개를 쑥 내밀어 눈을 마주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김 주임님.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종종 현지는 철수에게 남다르게 관심을 보였다. 둘만 있을 때 철수에게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수아가 집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철수가 이사하기 전이라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고 답하자 현지는 실망한 듯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철수는 수아의 일을 회사 동료에게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과장이 결혼 계획을 묻기라도 하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식으로 둘러대고 넘어갔었다.

 

철수는 현지의 관심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현지가 하는 일을 자주 도와주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친밀하게 대하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키도 작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철수로서는 어리고 귀여운 여자애가 자기에게 이성으로서 호의를 품을 거라고 기대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현지가 가까이 다가올 때면 부끄럽고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철수가 뒤를 돌아보며 다른 일행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과장님, 선배님, 다들 아이스크림 드시겠습니까?”

 

모두 좋다고 하는데 철수와 현지 사이에 오진성이 끼어들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흔들며 현지에게 시비 걸듯 말했다.

 

, 고현지. 오 오빠도 지갑 있다.”

 

현지가 가슴 앞에서 두 손이 맞부딪히게 모으고는 생글 웃으며 답했다.

 

그럼 오 오빠가 김 주임님 아이스크림 사주시면 되겠네요.”

 

오진성은 고현지가 입사하기 전에 대리로 승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임으로 강등되고 말았다. 고현지는 오진성을 대리로 부르다가 직급을 낮춰 주임이라 불러야 하는 상황이 난처했다. 오진성의 상급자는 이름을 불렀고 철수는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되었다. 현지는 오진성을 어떻게 부를까 망설이다 결국 오 오빠라는 말장난 같은 호칭을 찾아냈다. 회사 안에서 오빠 언니 같이 사적인 호칭을 쓰지 않았지만 현지는 예외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오진성은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자신은 오빠가 되었지만 철수에게는 꼭 직함을 붙여 김 주임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자신과 현지가 더 가깝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었다.

 

고현지와 다섯 명의 남자들은 편의점에서 2+1으로 할인 판매하는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금액이 얼마 되지 않았으나 현지의 말대로 철수와 오진성이 반씩 계산했다. 일행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여유롭게 사무실로 돌아갔다. 회사가 입주한 상가 앞에 도착하자 박치훈 과장과 장재완, 이민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가끔 담배를 피우지만 애연가는 아닌 철수와 담배를 피우지 않는 오진성, 고현지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현지가 새로 산 분홍색 립스틱이 화제에 올랐다. 형광기가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꽃분홍색이었다. 오진성이 촌스럽다고 놀려대자 현지는 여배우 윤은혜의 강남핑크라고 응수했다.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핥느라 립스틱이 안쪽부터 조금씩 지워져 나가 본래의 입술색이 드러나 있었다. 철수는 스무 살 무렵의 수아를 떠올렸다. 그때도 진한 분홍색 립스틱이 유행이라고 했었다. 수아는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어서 립스틱이 자주 지워져 몇 번이고 거울을 꺼내 들고 입술에 색칠을 했었다. 아련한 기억이 떠오르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철수는 물끄러미 현지의 입술을 바라보다 시선이 마주치자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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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대로로 이어진 좁은 골목에 사무실과 학원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일대의 유동 인구는 하루에 100만에 가까웠으니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로 거리가 혼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파가 반으로 갈라졌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르듯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채를 쥐고 수많은 행인을 가르며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눈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이작가


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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