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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은 제 6공화국 시대다. 문민정부니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정권들은 5년마다 또박또박 들어섰고 물러갔지만 제 9차 헌법 개정을 통해 이뤄진 제 6공화국이 그 모두를 아우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제 6공화국을 낳은 것은 다름아닌 1987년의 6월 항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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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국민이 일어나 독재 정권에 맞서고 마침내 항복을 받아 낸 한국 현대사의 대사건의 자식이 바로 제 6공화국이라는 뜻이다. 그럼 이 6월 항쟁의 시작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한 의로운 학생의 죽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거대하고 난폭한 악(惡)에 맞서서 떨쳐 일어나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정의를 위해 발버둥치고 손을 모으고 결단한 여러 명의 의인(義人)들에 의해 넓혀지고 깊어져 마침내 말라붙은 한국 현대사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물로 흐르게 된다.


1987년 1월 16일 중앙일보 사회면에는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死)’라는 2단짜리 기사가 실렸다. 죽은 학생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었다. ‘쇼크사’라는 단어에는 따옴표가 쳐져 있었다. 정부가 내리는 보도 지침, 즉 이건 이렇게 보도하고 저건 저렇게 보도하지 말라는 ‘지침’의 시퍼런 날 사이로 ‘쇼크사’의 따옴표는 “진짜 쇼크사라고?”하는 질문을 사람들 가슴 깊숙이 찔러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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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치안본부에서도 오보라고 펄펄 뛰었지만 사실은 드러나고 말았다.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와서 1980년 광주의 참상과 독재 정권의 만행에 분노하여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청년 박종철이 용산구 남영동에 위치한 경찰 대공 분실에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는 피의자 신분도 아닌 ‘참고인’ 신분이었다. 즉 범죄를 저질렀다고 추궁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로 경찰이 ‘협조’를 구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


박종철의 친구들에 따르면 그는 더할 수가 없을 만큼 착한 사람이었다. “따뜻한 점퍼를 입으면... 원래 소유자는 종철인데 학교 친구들이 보면 제가 입고 다니는 일이 더 많은... 친구들은 점퍼를 제 걸로 알지 종철이 것으로 알고 있지 않고 결국 제 것이 되는 그런 점퍼가 있었어요. 보통 사람이면 불만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종철이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밝고 구김살 없는 친구를 본 적이 없어요. 참 뭘 주기 좋아하고.”


그런 그에게 수배 중인 선배가 찾아왔고 박종철은 돈 만원과 함께 누나가 짜준 목도리까지 건넸다. “이거 누나가 떠 준 거라며?” 거절하는 선배에게 박종철은 연락하면 또 떠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목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박종철은 이 선배를 추적하던 경찰들의 방문을 받고 남영동 대공 분실로 끌려간다. 박종철은 선배가 갈 만한 곳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말하지 않았고 경찰들은 이 어진 젊은이의 팔다리를 잡아채고 물 가득한 욕조로 향한다. 물고문의 시작이었다.


1987년 1월 14일 청년 박종철은 생똥을 바지에 지릴 정도로 고통을 당한 끝에 세상을 떴다. 기차게 착하고 순진했던 청년, 하지만 "우리 앞에는 외면할 수 없는 역사와 현실이 있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부르짖던 "의로운 청년 박종철은 죽었다." 이 사실이 ‘쇼크사’로 표현돼 세상에 나온 것이다.


대개 불의한 자들은 진실이라는 태양 앞의 바퀴벌레들과 같다. 갑자기 진실이 불쑥 세상에 나와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비출 때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며 숨을 곳을 찾거나 되지도 않을 몸부림을 치게 마련인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경찰의 총수의 발언은 두고두고 세계사적인 웃음거리로 남는다. “조사 중 책상을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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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의 시신은 당황한 경찰들의 채근으로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화장돼 얼어붙은 강물 위에 뿌려진다. 늙은 아버지는 삽시간에 재로 변해 버린 아들의 유해를 뿌리며 울먹였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그러나 그 죽음 앞에서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은 온 나라에 넘쳐났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리고 더하여 “할 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박종철의 시신이 한 줌 재로 변하기 전에도 몇몇 사람들은 두려움을 뚫고 진실을 입 밖에 냈다. 앞서 말한 중앙일보 특종을 낸 신성호 기자 같은 언론인들, 그리고 그들에 앞서 진실과 마주해야 했던 의사들이었다.


물고문을 당하던 박종철이 의식을 잃자 다급해진 경찰들은 인근의 중앙대학 병원 응급실 의사를 불렀다. 달려온 이는 나이 서른 한 살의 의사 오연상. 그는 가운이 젖을 만큼 물이 홍건한 취조실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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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심경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면 그는 생사람의 머리를 물 속에 처박으며 고문을 하다가 죽여 버린 야차같은 경찰들 틈에 갑자기 끼어든 셈이었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자신이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을 것이고, 실제 경찰은 다음날 그의 진료실 문 앞을 교대로 지키며 외부인과의 접근을 차단했다. 그러던 중 화장실에서 그는 기자를 만났고 사건의 진실을 비춘다.


“청진기를 대 보니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고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습니다.”


사실 수포음이란 폐에 피나 기타 체액이 스며들어 나는 소리로 물고문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지만 어떻게든 물고문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싶었던 의사는 그렇게 용기를 냈던 것이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리라.” 자신을 가다듬으면서.


하지만 박종철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확실히 알려면 부검을 해야 했고 그 임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맡고 있었다. 치안본부장 이하 경찰의 고위 관리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하 국과수)로 총출동했다. 심장쇼크사로 하자는 둥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하자는 둥 갖가지 사악한 시나리오들이 제시됐고 심지어 치안본부장이 목욕이나 하라며 백만원 현금 다발을 건네는 희한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가 국과수를 감쌌다.


국과수도 엄연히 경찰 산하 조직이었다. 경찰의 총수가 들이닥쳐 ‘목욕비’를 건네면서 잘 부탁한다고 등을 두드리고 당신만 믿는다며 자신들이 짜온 시나리오를 들이미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 박종철의 사인을 밝히는 임무를 맡은 건 황적준이라는 법의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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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시 고민을 거듭한다. 정치와 관계없이 의사로서 한 세상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상관들은 '아무 걱정 없이' 조작된 사인(死因)에 서명만 하면 된다고 부추겼다. 그 순간 황적준 박사가 "원래 폐에 병이 있었으며 사인은 그것이었다"고 밝히면 그것으로 상황은 끝날 수 있었다. 부검만 끝나면 바로 시신을 싣고 화장터로 직행할 태세를 완비하고 있었으니 박종철의 시신을 다시 들여다볼 의사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 한 번 질끈 감고 서명만 하면 되는 일이었고 설사 후일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조직의 일원으로서 상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고 고개를 숙이면 자신이 직접 책임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황적준 박사의 머리 속은 터져 나갈 듯 했다. 국과수 동료들과 술잔을 나누고 들어와서 그는 가족의 얼굴과 마주한다.


"내 사랑하는 정희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깊은 사랑을 내게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애들은 영문도 모르고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황적준 박사의 일기)


그날 밤 가족들의 얼굴에서 그는 행복하고도 평온한 일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싸늘한 시신으로 자신 앞으로 온 한 착하게 생긴 젊은이의 얼굴을 겹쳐 보았을 것이다. 이 청년도 행복한 가족의 일원이었을 텐데... 그 아버지는 잠든 청년의 얼굴을 보며 이토록 뿌듯해하고 그 누나는 남동생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목도리를 짰을 텐데... 대체 누가 이 행복한 일상을 파괴했는가. 그리고 왜 한 가족은 자신들의 소중한 아들이자 동생이 어떻게 죽었는지 조차 몰라야 한단 말인가.


평범한 의사. 시대적 고민과는 동떨어진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한 의사는 그 밤을 지나면서 당연한 그러나 위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정의의 편에 서서 감정서를 작성할 거야.” 다음날 아침 그가 가족들에게 전한 말이었다. 그 순간 박종철의 원혼도 그 풍경을 지켜보며 살짝 미소를 띠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 결연한 의사의 말로 인해 서서히 일렁여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이란 허약한 존재다. 작심삼일은 고사하고 아침의 결심이 저녁까지 이어지지 않는 일도 흔하다. 더구나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을 각오한 결심에서랴. 황적준 박사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형을 찾는다. 한 번 찾아갔다가 일정상 만나지 못했던 형은 두 번째 방문에서 황적준 박사의 결심에 힘을 얹는 대답을 해 준다. “사실대로 알리는 게 내 생각이다.” 한 젊은이의 한맺힌 죽음은 그제야 합당한 이유를 얻게 된다. “경찰이 물고문으로 사람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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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서슬 앞에 고개를 숙이던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기 시작했다. 비겁한 복종의 표정에 분노가 깃들고 있었다. 힘센 정권 앞에서 손바닥만 비비던 사람들이 주먹을 부르쥐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1987년 1월 17일 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중배의 기명 칼럼은 뭇 사람들의 임계점을 대변한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줄기로 살아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흑, 흑흑..." 걸려오는 전화를 들면, 사람다운 사람들의 깊은 호곡이 울려온다. 비단 여성들만은 아니다. 어떤 중년의 남성은 말을 잇지 못한 채, 하늘과 땅을 부른다. 이 땅의 사람다운 사람들을 찾는다...


그리고 1987년 1월 26일 보통 사람들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속을 뒤집는 발언이 대한민국을 뒤흔든다. 아니 물론 그날은 사람들은 몰랐다. 보도지침 치열한 언론에서 그 발언을 제대로 보도하기는 어려웠으므로. 1월 26일은 월요일이었다.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가 열린다. 이 날 김수환 추기경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는 한 영원히 남을 강론을 남긴다. 두 손을 모으고, 때로는 흐느끼던 그의 교우들 앞에서, 그리고 성당 밖 선술집에서 욕지거리 내뱉으며 술잔만 비우던 무력한 사내들을 향하여, 고문 받고 죽어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님을 안도하면서도 슬퍼하던 어른들의 머리 위로.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1월 14일 하늘마저 노할 경찰의 포악한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학 고 박종철군의 참혹한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솟구쳐 오르는 의분 속에 온나라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할 말을 잊고 하늘만 바라 보고 있는 어제, 오늘입니다."


민주 국가, 법치 국가, 정의 사회라는 대한민국 안에서 백주에 한 젊은이가 경찰에 연행된 지 수시간 후 시체로 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한없이 아파하면서,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뼈 아픈 반성과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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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이 천둥같은 강론이 졸지에 카인의 후예가 되어 버린 대한민국 4천만 국민들의 가슴을 뒤흔들 즈음, 그래도 정신을 못차린 정부는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박종철의 죽음에 관계된 경찰관들이 더 있었음에도 이를 축소 조작하고 경찰관 두 명에게만 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을 낱낱이 지켜보던 한 교도관이 있었다. 다름아닌 영등포구치소 보안계장 안유였다. “당시 경찰 수뇌부들이 구속된 경찰들을 찾아와 입 닥치고 있으면 1억 원을 주겠다고 회유하고 가족을 내세워 협박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대공수사부서가 국가에 왜곡된 충성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도관이었다. 80년대 넘쳐났던 대학생들, 시국 사범들과 승강이를 벌이고 때로는 멱살잡이도 하고 호통도 치고 괴롭히기도 했던, 그게 임무였던 교도관이었다. 그 눈 앞에서 경찰들이 무슨 영화 속 조직폭력배들처럼 “1억 줄게 입 다물어.”의 대사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경찰들이 교도관들을 ‘우리 식구’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도관은 너무도 억울하게 죽어간 대학생의 죽음 앞에서 그야말로 영웅적으로 경찰의 믿음을 배신(?)한다. “결국 엉뚱한 학생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 사건을 조작, 은폐 축소하려는 것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어 그 사실을 같은 구치소에 투옥돼 있던 이부영씨에게 털어놨다"


자신이 감시하는 수용자에게 자신이 속한 국가 기관으로부터 얻은 비밀을 털어놓는 교도관을 상상해 보자. 그 마음은 어땠을까 만약 발각이라도 된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들이닥칠지 당연히 고민했을 것이다. 어쩌면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교도소 침투 간첩단”의 일원이 되어 욕조에 머리 담근 채 버르적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100퍼센트 상상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을 것이고 그 가족들에게도 해가 미치면 어쩌나 이맛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러나 안유 교도관은 용기를 낸다. 그 마음 속 한 켠에는 아마도 김중배의 절규가 김수환 추기경의 호소가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이럴 수 있는가. 종철이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종철이를 죽인 범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화답했고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비밀을 누설함으로서 역사의 물꼬를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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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교도소에 수감중인 이부영(가운데) 당시 민통련 사무처장에게

‘박종철군 고문 경관이 3명 더 있다’는 사실을 제보한 당시 보안계장 안유(왼쪽)씨와

그 사실을 적은 편지를 밖으로 전달한 교도관 한재동(오른쪽)씨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발표한 정부의 고문 경찰 축소 조작 폭로는 바로 안유 교도관이 전한 내용 그대로였다. 독재 정권은 자신이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지 않은 감옥 안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생으로 한 젊은이를 죽여 놓고 그 사인을 조작하려 들고 나중에는 범인들마저 축소 조작하려 했던 정부의 징그러운 알몸은 5월의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로부터 20일 후 6월 항쟁의 태양은 휴전선 이남 9만 8천 평방 킬로미터의 남한 땅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게 된다. “고문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다.”, “박종철을 살려내라”, “독재타도 민주 쟁취”


한 의로운 젊은이의 안타까운 죽음과 그 죽음을 슬퍼한 보통 사람들의 의로운 삶의 선택을 통해 물길이 열린 6월항쟁은 계곡을 박차고 강을 이루어 바다로 나아가는 역사의 파노라마를 그려 가게 된다 그냥 눈 질끈 감고 선배의 행방을 이야기했어도 박종철은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을 것이다. 물고문을 해 대는데 그 누가 버틸 수 있었겠는가. 선배에게 미안하다 머리 한 번 긁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박종철은 입을 열지 않고 죽었다.


의사 오연상과 황적준 역시 구태여 용기를 내지 않아도 삶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의사로서 먹고 살 걱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고 상부의 지시나 경찰의 협박에 못이겨 그랬노라고 변명한다 해도 누가 뭐라고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안유 교도관이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애초에 그의 임무는 교도소 내부와 외부의 연락을 차단하고 내부의 비밀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는 보안계장이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정의를 택했다. 그들이 쉽고도 안락한 자기합리화를 택하지 않고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정의를 행했을 때 대한민국은 그 육중한 몸을 ‘정의’ 방향으로 선회했고 수천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이 정의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편집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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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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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지킨 사람들"은 

역사 교과서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짧게 언급만 하고 지나친 ‘한국사의 숨은 양심들’을 소개합니다.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모난 돌이 정 맞는 세상’에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정의를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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