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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3. 수요일

산하






19851021일 송광영 그리고 그 후



1985917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비는 한 학생의 마음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의 불길은 끄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이 학원안정법 같은 악법을 만지작거리고 조금 풀어줬던 고삐를 다시 죄려고 태세를 갖추던 즈음이었다. 광주 출신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경원대 법대에 진학했던 송광영은 전두환 물러가라를 부르짖으며 스스로의 몸에 불을 당긴다. 전두환은 광주에서만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그의 임기 동안 수많은 생명들이 그저 전두환의 존재 하나에 이를 갈고 발을 구르고 저놈을 내 죽여서라도 물어뜯으리라 다짐하며 불꽃으로 타올랐다가 사위어 갔으니까. 송광영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851021일 한 달여의 신음 끝에 그도 죽었다.

 

그의 어머니 이오순씨는 아들이 죽은 후 찾아온 경원대학교 신문사 기자 앞에서 이렇게 절규한다. “난 민주도 모른다요, 동지가 다 뭐다요, 우리 광영이가 죽으면 무슨 소용 있다요.” 민주가 아니라 독재의 개가 되더라도, 동지가 아니라 천하없는 배신자가 되더라도 펄펄 살아 숨쉬는 아들을 보는 것이 모든 어머니의 소망이었을 테지만 아들은 이미 돌아오지 않을 길을 간 뒤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적어도 어머니에게 그 길을 가라고 한 것은 아들이었으리라. 이오순은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가입했고 선봉에서 억세게 싸운다. ‘공포의 노란 가방은 백골단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보다 사나운 존재가 어디 그리 흔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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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민족21)


그러나 아들만 생각하면 한없이 여려지고 슬퍼지는 어머니였다. 이오순씨와 친했던 문익환 목사는 허구한 날 토해내는 그녀의 넋두리를 시로 엮는다. “이상히여 눈만 감으면 광영이 뛰여다니는 게/ 여기도 저기도 보이니/ 저게 다 내 아들 광영이 아닌개비여!/ 뜨거운 불길이 여기저기 치솟는 것이 보이는구먼!/ 저 아우성이 모두 광영이 아닌개비여!” 시의 제목은 <눈 감으면>이었다. 노래운동하던 사람들이 유가협을 위해 만든 노래에 이 제목이 쓰인다. <눈 감으면> 그리고 그 가사는 이렇다. “눈 감으면 보이는 내 아들딸의 얼굴/ 지금도 떠나지 않고 가슴 속에서 웁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메아리도 아지랑이도/ 눈 감으면 보이는 사랑스런 모습

 

1994년 갑자기 문익환 목사가 별세했을 때 이오순씨는 가족을 제외한다면 가장 슬퍼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 충격을 못이겨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문익환 목사를 따르듯 세상을 떠난다. “나 죽으면 광영이랑 문목사님 묻혀 계신 마석모란공원에 묻어주고, 꽃일랑 차라리 종이꽃으로 해줘가 유언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오순씨가 생존했더라면 2년 뒤에는 크나큰 아픔이 창날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을지도 모른다. 송광영의 희생 5주년을 맞은 1990, 경원대 선후배들이 기천만원의 모금을 거쳐 교정에 세웠던 송광영 추모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 발어졌으니까.

 

야심한 밤에 마스크를 쓴 괴한들이 기중기까지 몰고 쳐들어와서 비석을 파헤쳐 가 버린 사건이었다. 담당 형사도 현장에 와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할만큼 해괴한 일이었다. 그 돌이 거기에 서 있는 것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 분명했다. 당연히 학교 당국에 그 의혹의 눈길이 쏠렸지만 그들은 펄쩍 뛰었다. 심지어 학교측 재산이 없어졌으니 당신들이 신고해야 할 것 아니냐는 추궁에 성남중부경찰서장 앞으로 "96922일 경원대 교내에서 분실된 추모비를 조속히 찾아주시고 범인처벌을 해달라"는 내용의 고발장까지 써 냈다. 하지만 범인은 그들이었다. 학생과장과 장학복지과장이 작당을 해서 비석을 파낸 뒤 충북 음성까지 가서 버리고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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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민중의 소리


2000년대 초반 민주노동당이라는 당이 있을 무렵, 그 당 소식지에 송광영의 형에 관한 기사가 뜬 적이 있다. 서울 상계동에서 꽃집을 하던 그는 어머니 이오순의 민주화운동 공적 인정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는 월남 파병 용사였다. 그는 월남에서 펜팔을 통해 부인을 만났지만 평생의 골칫거리도 얻었다. 고엽제 피해자였던 것이다. 그는 그 보상을 위해서도 싸우고 있었다. 월남 파병 용사와 분신으로 항거한 대학생 동생, 그리고 아들의 죽음 이후 완전히 변했던 어머니......


19851021일 한 대학생이 죽었다. 하지만 그 가족들의 역사는 그 후로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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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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