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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22. 월요일

Samuel Seong







이젠 한국이 재난지역이라며 위로 좀 해달라는 트위터 맨션이 심심찮게 들어오는 상황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첨엔 2006년에 나도 낙타 탔었다는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농담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여튼, 네팔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 230번째 지진 이후엔 세어보질 않아서 몇 번이나 왔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여진으로 산사태가 나서 40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걸로 모자랐는지 한밤엔 규모 5.3짜리 제법 큰 여진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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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 현장


항상 막히던 길들은 러시아워도 그닥 밀리지 않는다. 인구 300만이 북적거리던 분지에서 120만 명이 떠났으니 그럴 수밖에. 거국 연립내각 이야기가 나오더니 제헌헌법을 위한 16개 합의안이 나왔다. 재난 와중에도 제대로 된 리더십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 하늘을 찌르다 보니 길게 끌어왔던 정치적 혼란도 진정되려는 것 같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듣는데,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가장 필요한 것은 관광객이다. GDP의 15%를 차지하던 관광 산업이 시망이 되면 네팔 경제 구조 전체가 말려들어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이즈음부터 9월까지 관광 비수기다. 네팔 남부는 3월 중순부터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6월이 끝나가는 요즘 46도는 가뿐하게 찍고 있어서, 본격적인 우기로 들어가면 남부 지방 전역이 완전히 습식사우나가 된다.


그래서 불교 성지를 찾아오는 성지순례단도 주로 겨울에 온다. 불교국가인 태국의 타이항공이 불교 4대 성지인 룸비니, 보드가야, 사르나트, 쿠시나가르를 돌기 쉬운 인도 바라나시에 취항하는 것도 그즈음이다. 약 10월부터 3월 초까지.


거기다 요즘은 산에 올라가면 팥알만 한 거머리가 나온다. 요놈들이 꼭 외국인들만 쫓아다니는데, 피를 새끼손가락만큼이나 빨아먹고 나서야 떨어진다. 산에 오르는 것도 힘든데 거머리들이 헌혈해달라며 도처에서 조르니 힘들지. 트레킹 코스도 힘들다. 우기엔 산악을 하다 미끄러져서 다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꽤 오래전에 롯지에서 밤마을 구경하러 나갔던 한국인 여행자가 실족사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니 원래 네팔은 여름 방학 여행지로 좋은 곳이 아니다. 그나마 우기 직후 포카라에선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레의 멋진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지만, 그 확률이 희박하다. 카트만두에서 희말라야를 볼 수 있을 비율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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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만두에서 보이는 히말라야. 일 년에 보름 쯤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성지든 관광지든 소개하는 것이 적절한 타이밍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네팔에 가장 필요한 것이 관광객이다. 그러니 부족한 시간이나마 조금씩 틈을 내어 필자가 가장 잘 아는 지역을 시작으로 조금씩 안내해드리고자 한다.


현지에서 오랜 시간 지내며 얻은, 가이드북엔 없는 값진 이야기들이다. 당장 지금 오지 못하더라도, 겨울에 온 이후라도 괜찮으니 네팔에 오시게 되거든 출력해서 잘 활용하시라.


먼저 필자가 익숙한 지역인 ‘룸비니’지역부터 시작해 보겠다.



1. 부처님이 태어난 땅

 

일단 룸비니의 위치부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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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의 동그라미 안에 보이는 곳이 부처님 탄생 성지인 룸비니(Lumbini)다. 이곳은 인도와의 접경지대에 있는 네팔의 작은 마을이다. 인도 국경과 워낙 가까워서 네팔 통신사 대신 인도 통신사 신호가 잡히기도 할 정도다.


이곳에서 부처님이 태어났다. 인도와 가깝다 하더라도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부처님 탄생지는 네팔이 맞다. 그런데 부처님 탄생지가 인도냐 네팔이냐 하는 이야기가 있다. 왜 그런 걸까.


일단 먼저 알아야 할 것 한 가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기 전에 어느 왕국의 왕자였다는 이야기는 다들 기억할 것이다. 부처님의 속명은 싯다르타, 카필라국의 왕자였다.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이나 고고학자들은 부처님이 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사이 즈음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때엔 '네팔'이라는 나라도, '인도'라는 나라도 없었다. 우리 역사로 치면 공자가 '구이'라는 나라로 가서 살고 싶다고 했던 그즈음의 이야기.


네팔은 20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2006년에 왕정이 무너진 후 공화정을 하겠다고 했으나, 제헌의회 선거만 2년 걸렸다. 그렇게 뽑은 제헌의회가 제헌헌법을 만드는 시간을 한참 어겼다고, 개헌 데드라인을 대법원원장이 설정하니까 대법원장이 암살되었다. 그래서 2013년에 2차 제헌의회 선거가 있었고 여전히 데드라인을 넘어갔다가 대지진이 이후에 정치권에 대한 압력이 엄청나게 높아지고 나서야 제헌헌법 제정 일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왕정이 무너지기 전까지 내전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 내전의 원인이었던 전근대적 토지소유구조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갈등이 산재해 있다는 말씀. 이런 판이니 자신들을 통합해줄 과거의 위대한 인물을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찾아 나서게 된 것이고, 그 결과 부처님이 선택되었다. 심지어 부처님의 출생지를 두고 다투고 있는 인도는 부처님이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셨음에도 자신들의 신(비시누의 화신 중 하나)으로 포섭해버렸다.


그러니 네팔은 부처님의 태생지가 네팔이라는 사실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네팔인들이 묻는 ‘부처님이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니?’라는 질문은 한국의 공식 질문인 ‘두유 노우 김치?’, ‘캔 유 대스 갱냄스타일?’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이렇게 물으면 모범답안으로 그냥 이렇게 답하자. ‘자야 네팔(네팔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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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장 많이 듣는 시즌은 부천님 옷니 날 연등 행진 할때



2. 룸비니 성역, 마야 데비 사원


전통적으로 석가족(카필라국)과 데바다하족은 결혼동맹으로 묶여 있었고, 데바다하족의 여성은 친정에서 아이를 낳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관습을 따라 카필라 성을 떠나 아이를 낳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마야부인는 이곳 룸비니 동산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산통을 느꼈다. 그때 사리수 나무의 늘어진 가지를 잡고 부처님을 낳으셨다.


부처님은 예정일을 한참 앞질러서 세상에 나오신 셈인데, 네팔의 영웅들은 예정일을 앞질러서 나오신 분들이 유독 많다. 이 설화에 의하면 브라흐마(힌두교 창조의 신)이 그의 손으로 부처님을 받았고, 신들과 천녀들은 시중을 들었으며 하늘에서는 더운 물과 차가운 물 두 줄기의 물이 뿌려져 아기 부처님을 씻겨드렸다고 한다.


이때 왕자의 탄생위치를 정확하게 표시하기 위해 인근 마을 룸비니 가메 주민들이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돌을 가져왔고, 이 돌이 바로 마크스톤(Mark Stone, 표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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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표지석

참고로 요즘은 마야데비 사원 전체가 촬영금지구역으로 별도의 촬영허가를 얻어야 촬영할 수 있다. 

난 다큐 촬영팀이었기에 촬영할 수 있었다


부처님의 열반 이후부터 이곳 룸비니는 불교도들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성지가 되었고 기원전 3세기경부터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후 기원전 3세기경, 인도 대륙을 통일한 아쇼카 대제가 불교로 개종하고 이곳 룸비니 지역의 주요 성지들에 석주를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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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탄생지인 마야 데비 사원의 경우엔 마크 스톤을 보호하기 위한 단도 세웠고. 이후에 서기 4세기경에 부처님 탄생장면을 묘사한 부조를 세우고 차츰차츰 사원의 형태를 갖춰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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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조


룸비니에 있는 지금의 마야데비 사원은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진행된 발굴 작업을 완료한 이후에 마크스톤과 부조물, 그리고 참선을 하던 사원터를 중심으로 새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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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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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원 내부. 대략 3세기에서 6세기경에 만들어진 사원터가 마야데비 사원 안에 있다



3. 룸비니의 재발견


룸비니는 서기 14년 이후 완전히 역사상에서 사라진다. 무굴제국의 불교 유적지 파괴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이 근방에 큰 홍수가 나서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법현스님과 현장스님, 그리고 혜초스님의 성지순례 기록들로 ‘룸비니 마을이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지도상의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한 채 몇 세기가 흘러간다.


세월이 흘러 1893년, 인도군 소령 하나가 사냥을 위해 네팔을 찾는다. 지금 아쇼카 석주가 위치한 곳에서 꽤 많이 서쪽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비문이 있는 석주 하나를 발견한다. 이 소식은 신문으로 알려진다. 그는 “나는 네팔의 떠라이 지방의 밀림에서 비문이 있는 석주를 목격했다”라고 신문에 썼고, 이 소식은 사람들에게 크게 회자된다. “혹시 그게 룸비니 석주가 아닐까”라고.


인도에 있던 영국 정부는 휘러 박사를 파견한다. 네팔의 밀림에 가서 그 인도군 소령이 언급한 석주를 찾고 사진을 찍어 오라고. 휘러는 네팔로 파견되자마자 소령이 언급한 석주를 찾기 시작한다. 그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면서 석주에 대해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카필라 지역에 도착해서 카필라 지역의 사람들에게 묻자 그들은 “아, 석주를 하나 본 게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를 니그리하와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비문이 있는 석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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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러는 석주의 사진을 찍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그의 스승인 뷰러 박사에게 보냈다. 그리고 뷰러는 “이곳은 카나크무니 부처님(구나함모니불)의 탄생지이다”라는 뜻을 해독한다.


휘러박사는 현장스님이 “룸비니는 카나크무니 부처님의 탄생지에서 20km 동쪽에 있다”고 언급했던 기록으로부터 다음 단서를 찾게 된다. 그때부터 카나크무니 부처님의 탄생지에서 20km 동쪽으로 찾기 시작한 것.


사실 이 지역의 네팔사람들은 이 석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상단의 6피트는 보였다고 하니까. 휘러 박사가 계속 석주를 찾아 나서자, 네팔 정부는 그에게 해당 지역의 지주인 카르가 슘쉐어를 만나보라 제안한다.


그렇게 휘러는 1896년에 다시 룸비니 지역을 찾는다. 뤼러가 룸비니에 도착했을 때 카르가 슘쉐어는 이미 발굴을 시작한 상태였다. 그러나 카르가 슘쉐어는 브라미어는 물론 발굴 자체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최대한 깊숙이 파게 되었고 이 비문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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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사진을 찍어서 보냈던 비문은 다섯 줄 90자, 26개의 단어로 되어 있다. 팔리어를 브라미어로 기록한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들의 사랑을 받는 아쇼카 왕은 즉위 20년이 되던 해에 이곳을 찾아 참배하였다. 이곳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 하신 곳.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웠다. 위대한 분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며 이에 룸비니 마 을은 생산물의 1/8만 징수케 한다."


그러나 둘 다 전문 고고학자가 아니었던 까닭에 '발굴'을 진행하면서 초대형 참사들을 만들어낸다. 가장 큰 참사가 마야 부인께서 석가세존을 낳으신 이후 목욕하셨다고 하는, 수원이 두 개가 있는 연못, 사케 푸스카라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 그리고 석주 주변을 대충 파놨다가 마야부인을 기리는 사원으로 덮게 만들어놓은 것.


그 연못은 인공연못으로 어떻게 대충 복원을 하게 되고 1962년 데바나 미트라라는 인도의 고고학자가 그들이 마구잡이로 팠던 흔적 위에 마야부인 사원터를 다시 그렸다.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카르가 슘쉐어가 마구잡이로 팠던 흔적들을 수습했고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수습한 것들을 가지고 다시 사원을 지어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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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복원된 모습. 하지만 저 마야부인 사원은 90년대에 다시 증, 개축 되었다



4. 룸비니 성역의 조성

 

1961년부터 1971년까지 UN사무총장이었던 우 탄트(U Thant, 1909.1.22~1974.11.25. 버마 교육자, 공무원)가 1967년 룸비니를 찾는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그는 룸비니를 성역으로 개발하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후 수많은 전문가가 룸비니를 방문했고 1972년부터 1978년 사이에 사방 5평방 마일을 성역으로 개발하는 계획을 일본의 건축가 단게 겐조(丹下健三, 1913. 9.4 ~ 2005.3.22)가 수립한다. 일명 룸비니 마스터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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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스터플랜은 룸비니 성역을 세 곳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부처님의 탄생지라는 아쇼카 대왕의 석주와 연못, 그리고 마야부인을 기리는 사원이 있는 곳을 거대한 호수에 둘러싸인 곳으로 만드는 성역 공원, 그리고 전 세계의 불교도들이 각국의 절을 세우는 사원구역, 마지막으로 룸비니 개발 공단과 각종 관련 기관들이 들어서는 뉴 룸비니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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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절인 대성석가사에서 바라본 룸비니 성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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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구역 중앙을 가로지르는 운하


그런데 이 역사를 보면 당시 국제정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우 탄트가 이곳을 성역으로 만들자고 했던 1967년은 제3차 중동전쟁이 터졌던 해다. 세계 3대 종교 중에서 기독교도들의 성지인 예루살렘과 무슬림들의 메카는 교전당사국들의 성지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딱히 분쟁이 벌어지지 않고 있었던 가난한 나라의 조용한 시골 마을은 그런 세파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지만 세파에서 벗어나 있는 만큼 상태가 엉망이었던 것.


종교성지 성역화 사업을 벌여서 세계평화를 위해 뭔가 해보자고 했던 것이다. 마침 그 성지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던 곳이었고.


단게 겐조가 이곳의 마스터 플랜을 만들게 되었던 것도 그의 전작들을 보면 이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의 전작 중 하나가 바로 히로시마 평화 센터기 때문이다. 1970년부터 룸비니를 개발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낸 곳도 일본이었다. 유엔에서 채화된 영원의 불에서 바로 보이는 곳은 일본 불교도들이 만든 평화의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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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기가 막히게 좋으면 저 탑 너머로 히말라야가 보인다. 진짜로


일본이라고 하면 일단 꼬나보는 게 우리지만, '원폭 피폭국이라 평화가 절실하다'는 이야기의 밑밥은 이런 식으로 전 세계에 깔려있다. 그들과의 격차는 사실 다른 나라에 와야만 볼 수 있다.



5. 룸비니 속의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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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비니의 한국 절, 대성석가사


룸비니의 한국 절인 대성석가사는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에게 꽤 인기 있는 곳이다. 일단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숙식을 해결할 수 있고(이와 관련된 분쟁들이 좀 있었는데, 결국 대성석가사에선 일박에 일 인당 1천 루피, 한화로 약 1만1천 원 정도를 받는 것으로 정리됐다. 사실 요즘 이 돈이면 성원 밖에서 저가 호텔에 묵을 수 있다), 참선과 예불에 일반 관광객들이 참여할 수 있는 까닭에.


대부분의 국가가 티벳 불교의 영향을 받아서 건물이 비슷비슷한데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절만 다른 국가 색이 좀 도드라지는 편이다. 양식도 그러한데, 제일 커서 더 도드라진다. 황룡사 규모로 만들어지고 있거든. 항상 자재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네팔에서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고 있다 보니 착공에 들어간 지 1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대웅전 골조가 완공되었다.


이 지역은 UNESCO 관할 지역이라 종종 각국 대사관의 문화 담당자를 불러서 회의를 갖는다. 그런데 한국은 이 모임에 그동안 계속 불참해왔다. 이거, 한국 대사관 직원들의 종교적 편향 때문이라는 썰이 도는데 그건 아니다. 국제사원구역의 다른 나라 절들은 그 나라의 최대 불교단체에서 자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서 지었다. 반면 한국 절을 부처님 탄생 성지에 짓자는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2년에 불교 4대 성지를 돌아본 일군의 스님들과 불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분들이 룸비니 개발위원회와 부지 임차에 대해 합의한 것이 1994년이었고.


1994년 3월 말부터 4월 사이엔 당시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의 3선 연임을 막는 과정에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벌어졌었다. 이때 조만간 총리가 되실 분이 검사로 활약하신 바 있다. 그 난리 통에 종단의 도움을 받아서 탄생성지에 뭘 만들 수 있었겠나? 일군의 뜻있는 분들이 1992년에 성지순례를 한 후 1년 뒤에 이곳에 한국 절을 지어야겠다고 결의를 다지던 그즈음에.


거기다 해외여행이 자유롭게 된 것은 89년이었다. 94년만 하더라도 부처님 탄생 성지인 룸비니는 말 그대로 전설 속의 공간일 뿐이었지 거기에 뭘 만든다, 뭐 한다 이런 생각들 가진 사람들 거의 없었다. 순례객들, 그리고 불교 성지에 한국 절을 만든다는 것에 감동하신 분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항상 자재난에 시달리는 상태에서, 거기다 교육수준이 낮아 네팔어도 제대로 못 읽는 인부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이 절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대성석가사 주지 스님인 법신스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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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석가사 주지스님 법신스님과 스위스 절 주지스님


사실 여기도 많이 어지럽다. 중국 순례자들이나 배낭여행자들도 한국 절에서 묵는다는 것이 불편했던 중국 양반들은(티벳 스님들이 독립운동하고 있는데 중국 공산당이 불교를 내비 둘 것 같은가? 국가가 직접 개입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 한국 절 부지를 낼름 먹어보겠다고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다.


룸비니 개발위원회는 문화부 장관이 당연직 위원장을 맡는 구조인데, 실제로는 부위원장이나 개발위원회 위원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꽤 큰 곳이다. 겨울철 빼고는 46도 언저리라 사람 살 곳이 아니지만 외국의 돈이 계속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판이라 규모 있는 지원이 필요한데, 원래 시작을 개인 불사로 시작해놓았던 까닭에 종단이나 국가의 전적인 지원을 받기 애매하다. 몇 년 전부터 조계종 종단에서 지원하기 시작했지만, 공사를 빨리 끝내도록 하는 쪽에 한정되어 있지 국제정치와 로비는 좀 많이 어렵다.


한국이 이 성역에 기여한 곳은 또 하나 있다. 현지에선 주로 남쪽 연못(South Pond)라고 불리는 '네팔-한국 불교도 우정의 평화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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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역시 개인 불사다. 2008년 당시에 도선사 주지스님이면서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셨던 선묵혜자 스님이 고 기리샤 코일랄라 수상과의 인연으로 만든 곳이다. 내전이 끝나면서 집 짓는 붐이 전국적으로 일어서 원자재 수요가 폭발하던 즈음에 만들어졌던 곳이다. 레이저 가공된 대리석을 개인 주택 인테리어라고 관세 때리던 네팔 관세청의 겐세이는 보너스 되겠다. 거기다 원래 룸비니 개발 위원회에서 만들었어야 할 호수 부분까지 만들도록 떠밀렸던 까닭에 공사현장에서 벌어졌던 아수라장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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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데비 사원에서 예불을 올리는 스리랑카 순례자들


언뜻 보기엔 평화로워 보이는 이 성역, 사실 처음 조성될 때부터 정치적 목적이 있었던 곳이고 지금도 국제정치의 한 갈래가 작동하는 곳이다. 거기다 일반 배낭여행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 다닐 수 있는 곳이 여기까지가 한계라 가이드북도 룸비니 성역만 소개하고 만다.



6. 출가, 그럼에도 이어지는 가족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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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필라성 동문


카필버스투는 카필라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왕궁에서 29년을 보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문을 나서 왕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수행자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래서 저 곳은 “Maa Bani Scarm Dwara”, 위대한 포기를 한 곳이라고 불린다. 싯다르타 왕자는 이 문을 통해 마부인 찬나와 칸타카라는 말과 함께 나섰고, 밤새도록 나아가 아노마 강둑에 도착한 후 왕자의 옷과 장신구들을 벗어 작은 보따리를 만들어 찬나에게 카필라 성으로 가지고 가라고 한다.


그렇게 칸타카와 찬나는 카필라 성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칸타카는 도시를 보고 나서야 자신의 주인이 떠났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고 한다. 나중에 석가족들이 무덤과 스투파를 세워주는데, 바로 저곳, 동문에서 보면 작은 나무 하나 밑에 있는 작은 스투파 흔적을 볼 수 있다.


룸비니 개발공단이 예산이 없어서(?) 이곳 카필버스투 성은 발굴이 거의 안 된 상태다. 룸비니 개발공단의 수석 고고학자인 비산타 박사님 말로는 약 20% 정도만 진행했다고 한다. 그래도 성지순례자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좀 찾는 이곳은 주변에 팬스라도 처져 있어서 도굴은 막을 수 있는 상태다. 하지만 다른 곳들로 가면 거의 개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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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쿠단이다


한국 불교 역사서에선 니고다라마라고 부르는 곳으로 만들어진 이유가 꽤 애틋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부인 정반왕(숫도나다왕)께서 아드님이 깨달음을 얻으시자 자신의 왕국, 카필라국으로 계속 초대하셨다고 한다. 계속된 초대를 거절할 수 없으셔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7년 만에 300명의 도반과 함께 카필라 성을 찾게 되었을 때 부왕인 숫도나다왕은 자기 아들과 그의 도반을 위해 큰 사원을 짓게 되는데 바로 그 사원이 쿠단이다.


이곳에는 두 개의 스투파가 있다. 하나는 친아들인 라훌라 존자가 출가한 곳에 세워진 스투파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카필라성으로 오셔서 점심을 드시고 아내였던 야소다라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야소다라가 라훌라를 부처님께 소개해 올리는데 그때 라훌라에게 “이분이 너의 아버지이다. 재산을 물려달라고 하거라”라고 말한다.


저녁이 되어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니고다라마로 돌아오셨을 때 라훌라는 아버지를 쫓아와 자신에게 재산을 물려달라고 청하고 부처님께선 이 생에서 얻으신 것을 넘겨주시기 위해 출가를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이모였던 파자파니가 부처님께 노란 가사를 공양한 곳에 세워진 파자파티 스투파도 있다. 거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룸비니 인근의 성역을 실제로 돌아보면 속세의 인연을 끊고 구도의 길에 나선다는 것이 말 그대로 칼처럼 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숫도나다 왕은 깨달음을 얻은 아들을 위해 사원을 지어줬고, 부처님은 부왕께서 세상을 떠날 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통을 덜어드렸을 뿐만 아니라 임종도 지키고 화장도 직접 진행하셨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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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티 강, 바로 이곳에서 부처님은 아버지 숫도나다 왕의 장례를 직접 치르셨다고 한다


사실 속세의 인연을 칼과 같이 끊고 구도의 길에 나선다는 것은 사실 티벳이나 스리랑카 불교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이른바 소승불교의 세계에서도.


다음 편에는 출생의 비밀이 불러온 왕국의 멸망과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는 곳, 라마그라마를 다루고 이곳을 어떻게 여행할 것인지 정리해보겠다.







 

국제부 Samuel Seong

트위터 @ravenclaw69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