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3. 11. 07. 목요일

이창우






1.jpg

술은 기쁜 일로 유쾌하고 즐거울 때 마시는 것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허나 안타깝게도 나의 스물은 시작부터 신촌역 근처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를 찾아 술을 마시며 서로의 마음을 달래 주어야만 했다. 동동주로 시절의 수상함과 내 청춘의 불협화음을 풀어야만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기쁜 마음으로 즐거이 술을 권하기 보다는 내가 술을 찾아야만 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시간들이 오늘까지도 툭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에 쓸쓸해지기까지 하다.

 

트위터의 타임라인에는 지난 5년을 시민들과 함께 자신을 내던지고 함께 마음을 나누며 사회 정의를 위해 몸부림치던 이들의 시름시름 앓고 있는 모습들이 넘쳤다. 이제는 그들의 부정의를 향한 분노가 활자로 변화되어 타임라인으로 튀어 나오고 있다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그 다양한 시선이 지난 대선 48%로 모아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속에서 함께 느끼고 새로운 혁신을 바라는 이들의 공감의 결과였다. 그 결과는 당파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계파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48%의 그들이 바란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아우성이었지 싶다.

 

언론은 편파적 보도로 페허가 되어 있고 공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이 사회에서 봉하의 노랑바람개비를 품고 사람의 가치가 존중 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행동한 이들의 적지않은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라 본다. 팟캐스트를 통해 대안 언론으로써 왜곡된 정보들에 대한 국민의 알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개인이 혼신을 다 했던가. 조금이라도, 치우쳐 있는 이 사회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들이라면 알 수 있다.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외면한 채 여전히 과거의 프레임에 갇힌 정치인들의 행태는 평범한 개인의 시선에서도 볼 성 사납다. 아니 쓰레기장의 악취가 난다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한 개인이 지나온 시간들로 그의 주변이 아주 조금씩은 물들여진다는 사실을 경험해 본 이들은 알고 있을 거다. 우리 사회의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듯이 공정한 언론을 염원하는 이들의 마음이 함께 하여 대안 언론들이 탄생했듯이 말이다. 많은 이들이 그저 이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고 행동한 지성들이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사회를 향해 진실을 소리 내고 움직이는 것은 지나온 우리 역사의 아픔과 분노를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음들이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어도 외롭지는 않다. 너무 먼 길만 같아서, 보이지 않아서 때로 지치기도 하지만.


2.jpg


<인어베러월드>. 2011년 덴마크, 스웨덴의 작품으로 감독은 수잔 비에르이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어둠과 밝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한다. 영화 <In A Better World>로 위안을 삼아 본다면, 무력으로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없음을, 폭력에 맞서기 위한 폭력은 파괴를 낳을 뿐이라는 메세지를 건넨다. 부당한 폭력들에 맞서는 방법을 아버지 안톤은 다르게 풀어 간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 주게 된다.(물론, 영화에서 그 순간은 아이들의 그렁그렁한 토끼눈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의사인 안톤은 아내 마리안느와 별거 중이고, 덴마크와 아프리카를 오가며 의료봉사를 하며 혼자 살아간다. 의사로서 도덕적 책무와 한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지지만 폭력에 맞서는 개인적 고뇌와 그의 선택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열 살 난 그의 아들 엘리아스는 학교에서 상습적인 따돌림과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어느 날 전학 온 크리스티안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나면서 둘은 급속히 친해지게 된다. 그 둘에게 발생한 부당한 일들과, 이에 반응하는 아버지 안톤의 모습은 갈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일상적인 일들이 비상식으로 무장한 이의 폭력 앞에 무시되어 다시 폭력으로 되돌아 올 때, 결코 같은 방법으로 맞서지 않는다. 진실을 당당하게 표현을 하는 아버지에게 오히려 뺨을 때리며 꺼지라는 대상 앞에서(무식함의 전형이었다고 해야 할 그런 인물과 마주한 상황), 물러서는 안톤의 행동은 두 아들 앞에서 한 것이었기에 더욱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 않았나싶다.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영화니까 그렇지 뭐, 할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아이들 앞에서 만큼은 늘 강자이고 싶은 거니까.

 

하지만 왜, 우리도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에서 최고의 능력자라 여기던 시절이 있지 않나. (나만 그런가? 아니면 말고) 암튼, 보통의 아버지로서는 아이들 앞에서 비굴하게 보이는 그런 모습을 참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허나 안톤은 아이들에게 진정한 강자는 옳은 일을 선택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용서만이 폭력적이고 잔인한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영화가 끝나갈 즈음이면 마음 속으로 느낄 수 있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많은 분노들에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가? 참으로 힘든 결정을 해야 하는 과정이 우리에겐 늘 필요하다. 그 때마다 타협인지, 처세술인지, 아니면 나와 상관없는 일이기에 외면해야 하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되는 상황들. 그러나 부당한 현실 앞에서 진정으로 무기력해지는 것은 그 상황을 회피했을 때인 것 같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은 그 부당함 앞에 당당하게 맞서 먼저 용서와 화해를 하는 것이라는 메세지를 이 영화를 통해 아주 진하게 만날 수 있었다. 부당한 폭력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3.jpg

 

이것이 요즈음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겪는 휘청거리는 마음이다. 하룻밤 자고 나면 부정선거와 관권선거의 난투극에 관한 사실들이 자꾸 삐져 나오고, 그에 맞선 이들은 한탄과 한숨으로 잠못 이루는 밤을 맞는다. 그런데도 우아한 귀태의 1인은 자꾸만 '니들, 왜 그러니, 불복하려면 해 봐, 도움받은 거 없거든 ~~'하는 무성의 속삭임이 귓가를 울린다. , 이게 욕 나올 지점이지만 나도 우아함으로 무장을 한다.(...)


하지만 용서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잘못의 당사자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 될 수 있는 거다.

 

이 땅에 강한 자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연출하는 폭력들로 세상을 더 위험한 사회로 만들어 왔다. 더 치사한 것은 저항이라는 몸짓에는 과한 벌금딱지가 쌓일 것이라는 의미로 마구 감시의 촉을 날리고 있으니, 저항하려면 주머니도 두둑히 채워둬야 할 판이 되었다. (지리적으로 시청 광장과 멀리 있는 나의 신세가 위로라면 위로라니까. 그렇다면 아으, 얼마나 서글픈 일이냐구)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개인의 용서와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될 수 있으리라는 그 믿음, 영화 <인어베러월드(in a Better, World)>를 보며 아이들 앞에서 언제나 영웅일 수 만은 없는 아버지 안톤을 통해 공감했던 점도 부당한 폭력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희망이었던 것같다.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놈의 현실에서 이 영화가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보면 좋을 듯하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이 말 앞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이들이 있을까. 개인의 감각에 의해 진실이 가볍게 무시되는 경우가 일상 생활에서는 숱하다. 진실은 그 자체로서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상의 언어 사용에서 극단적인 엄격성을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심각한 경우에는 바로 진실을 왜곡하려는 고의적 의지와 개인만을 위한 지나친 탐욕을 전제하는 거짓말이라 하겠다.

 

6.jpg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 이유에서이지 논리적 이유는 아니다. 도덕이나 윤리는 우리의 삶을 억누르고 강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개인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은 비도덕적인 상황에서는 누릴 수 없는 것이기에 스스로 도덕적 책임감을 기꺼이 갖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 권력이 국민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도덕적 해이라는 함정에 빠져 이런 근거를 몽땅 싸잡아 던져버린 채 벌거벗은 정부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채 오늘도 나에게 독주를 권하고 있지만, 절대 취할 수가 없다. 정부가 정신적으로 가하는 폭력의 무게를 더욱 자각하게 해 준다.

 

강한 자가 약자를 어루만져 주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지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질문 앞에 당당하고 싶다. 과거 잘못된 권력을 남용하며 이 땅의 공동체를 위협하고, 기득권을 이용하여 만든 법치를 내세운 부당한 사회 구조는 폭력을 정당화시키며 세상을 더욱 위험한 사회로 만들어 왔다. 보통 사람들은 날마다 생존과 자식들의 뒷바라지와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저 내 눈에 보이는 좁은 시야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내가 애써 의식하지 않으면 좀 더 나은 세상, 상식과 정의가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사회는 열리지 않는다. 개인의 용기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나의 한 걸음들로 이어져 왔음을 상기하고 싶다고 주절거리면 나, 취한 거니?







이창우


편집 :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