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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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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부회장, 아니 실질적인 회장인 이재용에 대해 특검이 신청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통과되었고, 이재용은 구속되었다.


사실 “구속” 그 자체는 별 의미도 없는 일이다. 원래 사법 절차상으로도 구속은 죄의 유무와는 큰 관련이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저 사안이 중대하고 용의자가 도주할 우려가 있거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을 때 검찰이 잡아넣음으로써 보다 원활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뿐, 그게 유죄를 판결한다거나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검찰이 구속수사를 마치 무슨 큰 처벌이라도 되는 양 오용한다는 지적도 여러 차례 있어 왔다. 또한 누군가 어떤 혐의로 조사를 받으며 구속이라도 되면 유죄 확정 판결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보도를 하는 잘못된 언론 관행도 있었다.


즉 구속은 그 자체로는 현대적인 사법 절차의 일환으로 큰 의미도 없는 일이지만, 우리 사회의 관행으로는 구속은 죄를 지어 포도청에 끌려가는 죄인이 된 것으로 간주하는 일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기업이라는 삼성의 실질적인 총수가 구속되었다. 삼성의 역사 79년에 최초로 벌어진 일이다.


잠깐. 기업의 역사가 얼마가 되었든 총수가 죄를 지어 처벌을 받는 기업이라면 망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정례적으로 기업 총수들이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두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으니 삼성이 대단하다는 사례가 될 수는 있겠다.

 


폐허에서 고속성장으로


우리 사회는 전쟁을 겪은 지 이제 70년이 조금 덜 되었다. 그것도 해외에 파병해서 참전한 남들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 땅 위에서, 바로 이 한반도에서 우리끼리 내전을 벌이고, 그 내전에 전 세계가 반으로 갈려 함께 참전한 대차게 살벌한 전쟁을 치렀다는 얘기다.


심지어 전쟁 말기에는 핵무기를 동원한 제3차 대전 발발을 우려할 정도의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으나 2차 대전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판을 크게 벌리냐는 세계인의 우려 속에서 그나마 우리만 처절하게 부서지고 마는 걸로 마무리가 되기도 했다.


말 그대로 폐허가 되었다. 서울 시내에 멀쩡한 건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개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사실상 그 시점에서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 직후 1인당 GDP 67달러에서 출발하여 경제 규모는 원조에 힘입어 수직 상승을 시작한다. 이승만 시대의 원조경제는 이후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정희식 통제경제 방식으로 고속 성장을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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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장은 세계사적으로 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축된 과정이었고 그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성과가 대단했던 만큼 우리 사회에 남긴 후유증도 컸다.


개발도상국을 거쳐 선진국의 문턱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 과정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어떤 사람들은 그게 망국병이고 치유하기 힘든 부패라고 주장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게 세상 돌아가는 원칙이며 세상모르고 힘없는 어린 것들만 그런 이치를 모르고 까부는 걸로 보이는 “정경유착”을 남겼다.


사회 인프라가 형편없던 개발 초기 상황에서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명제는 더할 나위 없이 빛을 발했다. 해외 원조를 들여와 특정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민주적인 배분 과정은 무의미하게 여겨졌다. 국가의 돈으로 해외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경제관료들이 선도적으로 산업구조를 설계하고 거기에 합류할 젊은 사업가들은 관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면서 경제관료들의 의도를 파악해 그대로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이후 경제관료들의 엘리트 의식은 하등의 가치가 없어진 지금에 와서도 '모피아'라는 이름으로 관습적으로 남아 있으며, 그런 경제관료들에게 줄들 대려고 노력하는 기업인들의 자세 역시 거의 변화가 없이 유지되고 있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산업은 경쟁자 없이 초고속으로 발전하기 마련이며 거기서 나온 성과물 중 상당수는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가 정치인들의 배를 불려주게 된다. 이러한 정치권력과 경제분야의 유착, 정경유착은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는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며 그 성과를 뜯어먹는 소수의 부패한 관료들의 먹이 거리를 다 대주고도 국가 경제를 성장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이 흘러넘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선진국 진입을 노릴 수 있는 아주 드문 중진국이 되었다.


 

장애물의 등장


그러나 생각보다 선진국 진입은 쉽지 않았다.


환율 조작으로 1인당 국민소득을 좀 올리고, 사정사정해서 OECD에 가입한다고 갑자기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IMF의 가시밭길을 걸으며 눈물겹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뭔가 많이 달랐다. 뭔지 모르지만 달랐다.


뭘 만들어도 다 가져다 팔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던 세계 시장은 갑자기 좁아졌다. 아니 세계 시장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우리 덩치가 그만큼 커진 것이다. 우리 앞에는 백 년 넘게 경험을 쌓아온 탄탄한 선진국들이 버티고 자리를 안 비켜주는데 뒤에선 세계 최대의 시장을 가진 중국이 막 쫓아온다.


경제는 확장력이 없어지고 내수는 죽어가고 일자리는 줄어드는데 신성장동력이라고 할 것은 나타나지 않는 막막한 상황이 이십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그동안 잘 작동하던 기본 원리가 왜 작동이 안 되는 걸까? 그저 열심히 일만 하면 쑥쑥 자라나던 경제 규모는 왜 더 자라질 않고, 만들기만 하면 팔리던 물건들은 왜 팔리질 않을까?


방식이 다른 것이다. 선진국들이 하는 방식과 우리가 해온 방식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우리는 개발도상국의 방식이었고 저들은 선진국의 방식을 쓴 것이다.


우리는 권력의 힘을 등에 업고 시장을 지배하면 그걸로 끝인데, 저들은 권력자의 의중과는 관계없이 시장에서의 경쟁으로 승부를 본다. 우리는 누가 더 많은 뇌물을 주는가로 경쟁하는데 저들은 누가 더 쿨한 제품을 만들어서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가로 경쟁을 한다.


한국 소비자들은 백날 천날 멍청한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눈을 뜨고 해외 직구를 하네 마네 하면서 선진국 소비자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고, 한국의 젊은이들은 우리 때와는 달라서 밥만 먹여주면 밤새워 일하질 않으려고 든다.


이 정도 되면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켜온 경영방식, 시장을 지배하는 방식,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뜯어고쳐야 된다는 것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평생에 걸쳐 배워온 세상 원리를 한순간에 뜯어고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된다.


문제가 우리의 내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국제 경제가 불안정해서, 서브 프라임 모기지 때문에, 지나친 기술 경쟁으로 인해, 이상 기후로 인해.. 라면서 온갖 외부의 핑계를 찾는다.


점점 힘들어지는 상황 속에서 그나마 살아남기 위해 기존보다 더 가열차게 권력의 힘을 등에 업으려고 노력을 한다. 말을 사주고, 재단을 설립해주고, 해외 땅장사를 시켜주고.. 그래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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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흔해진 이야기다.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개발도상국 시절에는 정경유착이야말로 선택과 집중을 가능케 해주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고, 모두가 그 방법을 써서 성장하고 대기업을 만들어 온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형 경제 체제로 체질을 바꾸기 위해선 정경유착을 차단하고 건전한 시장 경쟁을 활성화해야 되는데, 기업 체질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안 바뀐다. 사람의 사고방식이 안 바뀌듯이 말이다.


거기다가 개발도상국형 경제 시스템에서 성장의 과실을 공유했던 계층이 사회의 가용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데, 선진국형 경제체제로 바꾸려면 그 자원을 재분배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러나 이미 자원을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 계층이 그 자원의 재분배에 동의할 리가 있냐는 것이다.


정경유착의 구조적 근절, 새로운 시스템에 걸맞은 자원의 재분배, 이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중진국은 선진국이 되지 못한다. 이건 상식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걸 하지 못한다.


마누라만 빼고 모든 것을 바꾸라는 이건희의 일갈도 허무하다. 정작 바꿔야 할 것은 이건희 자신이었는데 그걸 깨닫지 못했으니 말이다.


정경유착의 최고봉, 신의 경지에 이른 정경유착의 달인, 세계 최강의 정경유착 원천 기술 보유 기업이 바로 삼성이다. 박근혜 정권의 최고 실세가 최순실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던 시절부터 이미 혼자 파악하고 승마협회 회장직부터 장악하고 나서던 기업이 바로 삼성이다.


결국 문제는 단순해진다.


삼성을 바꾸지 못하면 우리는 선진국이 될 수가 없다.

 


삼성이 바뀌고 있는가


다른 재벌들은 총수 구속 및 처벌도 경험하고 재벌 해체도 경험했다.


삼성은 예외다. 삼성은 그만큼 정경유착을 잘해온 셈이다. 내부관리도 잘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삼성은 형사범죄를 안 저지른 것일까? 정경유착은 근본적으로 뇌물에 기반한 시스템이다. 뇌물은 굉장히 강력한 처벌을 동반하는 형사범죄다. 뇌물 없는 정경유착은 없다.


삼성의 정경유착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현직 검사들에게 뇌물을 뿌린 정황이 녹음되어 공개되어도 처벌받기는커녕 조사도 안 받고,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기자와 국회의원이 처벌됐다. 삼성 공장의 직원들이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백혈병에 걸리고 암에 걸려 죽어가도 삼성은 조사조차 받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들조차 삼성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말조심을 하는 태도가 확연히 엿보인다.


임기 끝나면 내어놓아야 하는 대통령의 권력이 무한하게 이어지는 삼성의 권력보다 강한 것인지 의심이 간다. 정경유착이라는 것이 주로 정치권력에 경제인들이 빌붙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때 삼성이 하는 것이 과연 정경유착인지도 의심이 간다. 정치인들의 권력에 삼성이 빌붙는 것이 아니라, 삼성의 권력에 정치인들이 빌붙어 당선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사실은 시장이 아니라 삼성을 의미하는 것 아니었는가 하는 의심도 간다.


그런 삼성의 실질적인 총수 이재용을 상대로 특검이 구속영장을 신청했을 때, 그게 법원에서 발부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기각되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면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특검은 다시 한번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그게 발부되었고, 이재용은 구속 수감되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구속은 판결도 아니고 처벌도 아니다. 삼성은 그룹 차원에서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법원에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공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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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삼성이라는 기업의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단 한 순간도 시대의 권력과 유착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삼성의 총수가, 최초로 구속되었다.


왜일까? 뭔가 변한 것인가?


삼성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심정으로 싸워온 수없이 많은 약자들의 희생이 드디어 성과를 거둔 것인가? 아니면 박근혜 탄핵이라는 대의 앞에 모여든 촛불의 힘이 사법부를 압박한 것인가?


아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변화의 시작


삼성은 바뀌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이 먼저 바뀌고 있다. 세상이 바뀌면 삼성도 바뀐다. 세상이 바뀌는데 그 흐름에 역행하면 제 아무리 삼성이라 해도 망하게 된다.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 바로 삼성맨 들이다.


지금 당장은 변화를 거부하는 몸짓을 하겠지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바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바뀌고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장애물을 헤치고 발전해 나가게 될 것이다.


삼성 이재용의 구속. 어찌 보면 아무 의미도 없는 기업 경영인의 범죄와 그에 따른 조사를 위한 구속조치일 수도 있으나, 나에게는 이것이 중대한 시대적 변화의 징조로 읽힌다. 그만큼 삼성은 무엇보다도 강력하고 견고한 보수의 상징이었으며 진보를 외치는 사람들의 앞길을 막아온 거대한 장벽이었기 땜이다.


그 거대한 장벽에 이제 막 아주 가느다란 실금이 하나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만간 그 장벽은 허물어져 내릴 것이다.


거대한 소란과 다수의 고통을 동반하겠지만 모든 변화는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 변화란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물뚝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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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