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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 기간인 4년 6개월 동안 일본군은 전쟁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고, 240만 정규군과 300만의 예비군, 7,500대의 항공기와 230척의 주력 함선을 자랑했다. 미국은 어땠을까? 훈련미필자 100만 명을 포함해서 병력 150만, 항공기 1,157대, 전투함 347척, 수송선 총 1천만 톤의 전력이었다. 보기엔 일본이 유리한 것 같다.


그러나 잠재력을 살펴보면 일본의 전략적 기조가 너무 낙관적임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은 독일이 선전해 주어서 미국이 유럽 전선에 발목을 잡힌다는 가정 하에서 전략을 짰다. 역으로 말하자면, 일본은 독일이 ‘유럽전선에서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1941년 2월 루즈벨트의 발언이다.


“만약 미일 간에 전쟁이 벌어져도 유럽에 대한 지원은 변함이 없을 것”


이 발언에 일본은 한껏 고무되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통계지만, 철강은 20배, 석탄은 10배, 전력은 6배, 알루미늄은 6배 정도의 생산력 격차를 보였고, 비행기 생산력은 5배, 자동차 생산력은 450배, 공업 노동력은 5배의 차이를 보였다. 더욱 더 암담한 건 석유 비축량인데, 개전 당시 미국의 석유 비축량은 약 14억 배럴로 일본의 700배였다.


1938년 기준으로 양국의 산업 잠재력 격차는 무려 7배였고, 몇 년 안에 이 격차는 10배에 이를 것이라는 통계가 있었는데도, 일본은 미국, 영국, 네덜란드와 한판 붙어 보겠단 생각을 했다.


일본은 독일이 유럽전선에서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진주만을 박살내고, 바로 남방작전을 펼쳐 네덜란드령에서 8백 만 톤, 미얀마 지역에서 2백 만 톤의 석유를 확보한 뒤 미국과 일전을 벌이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이 남방작전의 성과로 얻은 자원을 가지고 태평양을 요새화하면 미국에게 막대한 손실을 줄 수도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까지 하며 이야기를 점점 구체화시킨다.


그렇다면 ‘낙관적인 생각’이 가능했던 이유가 뭘까? 일본의 ‘낙관적인 정보보고’에 있었다. 일본 수뇌부는 미국과 일전을 벌였을 때, 미국 측이 태평양 전선에 투입할 병력을 전체 미군 병력의 1/3 수준이라 예측하였고, 이를 막아내려면 연간 3천 만 톤의 강철과 총톤수 4천 만 톤의 선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문제는 이런 낙관적인 상황분석을 토대로 하여도, 당시 일본의 수준으론 택도 없었다는 것이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미국의 보급의 양은 대서양 전선, 즉 유럽 쪽의 1/5, 기록에 따라선 1/10 수준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일본을 압도했다). 일본의 공업생산력은 연간 7백 60만 톤의 강철생산을 겨우 하는 수준이었다. 더 처참한 건 함선인데, 보유 함선의 톤수는 겨우 66만 톤에 불과했다. 상당한 차이지 않은가? 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본영이 제시한 것은 ‘정신력으로의 극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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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도 강요하고 있던 '정신'이었다


그래도 1941년 세계 최대의 해군 세력을 가진 것은 누가 뭐래도 일본이었다. 세계 최강의 기동함대를 가진 것이 어떤 나라냐면, 일본이라고 밖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나라는 인정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당시 미국은 ‘워싱턴 해군 조약’에 따라 총톤수 135,000톤까지 항공모함을 만들 수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는 81,000톤까지만 제작이 허용됐다. 각국은 33,000톤급 항공모함 두 척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때 나온 것이 진주만의 히어로인 일본의 아카키, 카가였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도 사라토가와 렉싱턴을 만들지만, 두 나라는 항공모함에 대한 이해부터가 달랐기에 운용에서 벌써 차이가 드러난다. 미국은 이 항공모함을 정찰기 모함으로 사용했다. 아직 거함거포주의의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일본은 중일전쟁에서 이 아카키와 카가를 가지고 중국의 향주를 폭격하며 톡톡히 재미를 봤었다.


(이 대목은 잠깐 설명해야겠는데, 일본은 워싱턴 해군 조약의 허점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다 기동함대를 만들었지만, 진주만 기습 성공 이후 다시 거함거포주의로 함몰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미국은 진주만 기습 이후 본격적인 기동함대를 운용한다. 이는 진주만 기습의 교훈이기도 했지만, 당장 전함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1936년부터 일본은 워싱턴 조약을 무시하더니 36년부터 41년까지 해군력을 2배 이상 확충했다. 무려 6척이나 되는 항공모함을 새로 찍어냈다. 여기에 스스로 ‘동양의 신비’라 자랑하는 “0식 함상 전투기”, 제로센이 등장하면서 일본은 한 번 붙어볼 만하다는 ‘희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서구 열강에 비해 전차, 총기, 화포 모든 면에서 한 세대 이상 뒤떨어진 일본군에서 서구 열강에 자랑할 만한 무기체계가 두 개 등장하는데, 하나는 2차 대전의 영웅 몽고메리가 극찬했던 일본의 ‘산소어뢰’였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제로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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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센에 대한 정보를 취합한 미 해군 정보국이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을 때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지만, 이후에 미군들은 이 정보를 믿어야 했다. 진주만 공격이 있기 전까지 미국은 일본의 전투기 생산기술과 일본 전투기 파일럿들의 기량을 무시했다. 일본 파일럿이 키가 작고, 눈이 옆으로 째져서 공중전을 못한다는 별 희한한 논리로 일본 조종사들을 무시했지만, 세계 최고의 베테랑 파일럿들은 다 나구모 제독의 제1기동함대에 몰려 있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100시간의 비행훈련시간을 가졌는데, 미국의 240시간에 비해서는 짧은 것 같지만, 중일전쟁을 통해 단련되어 있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시 일본 해군의 경우는 평균 650시간, 육군의 경우는 500시간의 비행시간을 경험한 우수한 파일럿 3,500명을 보유했다.


이들을 전부 몰아태운 아까기, 카가의 제1항공전대와 히류, 소류의 제2항공전대, 그리고 수준은 떨어지지만 미군보다는 압도적인 쇼카쿠와 즈이카쿠에 있는 제5항공전대, 이들 6척에 실린 351기의 함재기들과 파일럿들은 이미 미국을 넘어서 세계 최강을 말할 수준의 최강의 기동함대였다.



일본은 왜 하필 진주만을 치려했을까?


미국 국민들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거란 걸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어디일까를 물으면 대부분은 필리핀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좀 머리가 트인 사람들은 미드웨이일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진주만을 노릴 거라곤 거의 생각을 못했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일단 일본에서 진주만까지의 거리가 3천 해리가 넘어간다는 문제가 있다. 3천 해리를 미군의 감시를 뚫고 넘어온다는 자체도 문제였고, 뚫고 와도 진주만의 병력과 상대를 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진주만에 주둔해 있던 미 지상군 병력만 5만9천을 헤아렸고, 하와이에 배속된 전투함만 전함 9척에,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8척, 구축함 54척, 잠수함도 22척이나 되었다. 여기에 해군의 항공기 수만 450대를 자랑했다.


“어떤 미친놈이 진주만을 넘볼까?”


란 생각을 가져볼만한 전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이곳을 치려했다. 여기만 박살내면 일본은 배후를 안심하고 남방작전을 실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야마모토는 이미 진주만을 치지 않으면 일본은 승산이 없다는 판단 하에 진주만 공격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나간다. 1940년 11월에 있었던 영국의 이탈리아 티란토항에 대한 공습에서 항공모함의 우수성과 공중공격이 전함을 깨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덤으로 어뢰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얻었다. 티란토항은 수심이 얕아서 어뢰의 공중공격에는 부적합한 걸로 알려졌으나, 영국은 어뢰를 개량해서 실전에 사용하였고, 결국 전함을 격침시켰다. 야마모토는 한껏 이 티란토항의 전투에 고무되어 한번 해보잔 결의에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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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다 미노루(源田實)


1941년 5월 이 작전의 최초 입안자인 겐다 미노루(源田實)를 주축으로 30명의 고급장교들이 모여 특별연구단을 구성한다. 그렇게 진주만 공략계획이 수립된다. 겐다가 맨 처음 한 일은 자신의 해군 동기이자, 제3항공함대의 참모인 후치다를 데려와 아카키의 비행대장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곤 계속 작전기획을 했다. 이미 함재기의 파일럿들은 일본의 가고시마로 보낸 상태(일본 지형 중에서 하와이와 가장 지형이 비슷한 곳이 바로 가고시마 였다)였다.


1941년 9월 고노에 총리가 마지막으로 루즈벨트와의 정상회담을 추진하던 때, 일본 해군은 해군대학교 별실에서 도상훈련에 들어간다.


여기서 나온 결론이,


“작전 성공률 50%”


였다. 작전을 성공해 미 해군의 전력 중 2/3는 박살낸다 해도 일본 역시 항공모함 2척은 격침, 2척은 파손되며 127기의 항공기가 격추된다는 비관적인 상황이었다.


진주만 공격계획이 진행될수록 문제점은 계속 튀어나왔다. 당장 걸리는 것이 어뢰였다. 상공 100미터에서 떨어뜨린 어뢰는 수중 60미터까지 들어갔다 튀어나와 목표로 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진주만의 수심은 12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이 어뢰문제는 진주만 공격대의 발목을 끝까지 잡아채는데, 최종 기동연습을 하던 11월 4일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진주만 공격대는 요코스카에서 제작 중인 신형어뢰를 들고 와 쓰자는 의견과 차라리 초 저공으로 날아가 떨어뜨리자는 의견으로 나뉘는데, 후자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고도 6미터에서 어뢰를 시험 투하해보았다. 결과는 성공이었고 진주만 공격대의 발목을 잡아채던 어뢰문제가 해결되었다.


진주만 공격 기획에 대한 난관을 하나둘 해결해 나갔지만, 아직까지 진주만 공격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야마모토는 이 진주만 작전에 의문을 품는 인사들을 찾아가 일대일로 설득하는 온건책과 함께, 그의 특기인, 


“이 작전을 승인하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관 자리를 그만두겠다.”


강경책을 병행하며 11월 3일 대본영의 재가를 얻어내기에 이른다.


진주만 공격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 정부는 “12월 1일까지 만족스런 외교적 결과가 없을 시에는 전쟁을 결의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는 히로히토 덴노의 재가를 얻어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히로히토가 이 ‘전쟁’에 어느 정도 개입했느냐는 대목이다. 히로히토는 진주만 작전과 이후의 남방작전에 관해서 자세히 보고를 받았고, 스스로 ‘보급’에 관한 문제점을 질문할 정도의 이해도를 자랑했다. 이전에 그는 전쟁에 대한 어떤 ‘기대’를 신하들에게 내비쳤다.


“미국과 영국하고 전쟁을 하면 물론 우리가 이기겠지만, 1905년 러일전쟁 때처럼 완벽한 승리는 안 되겠지요? 그렇지요?”


참모총장들과의 대담을 나누던 중 히로히토가 내뱉은 말이다. 이에 나가노 오사미(永野修身) 군령부총장이 완벽한 승리는 고사하고, 이길 수 있느냐가 문제라며 일본의 열세를 은연 중에 인정했다. 이날 히로히토는 궁내청의 측근에게,


“원칙적으로 미국이나 영국과의 전쟁에 반대는 하지 않지만 확실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없다면 절망감에 빠져들 것이 뻔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


라며 전쟁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개인적인 추론이지만, 히로히토는 ‘간’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원칙적으로 미국이나 영국과의 전쟁에 반대하지 않지만…’ ‘미국과 영국하고 전쟁을 하면 물론 우리가 이기겠지만…’이라는 발언의 의미는 뭘까? 히로히토는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고, 승산만 있다면 전쟁을 해도 상관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가 침울했던 건 나가노를 비롯한 자기 주변의 총장들이 확실하게 승리를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전쟁으로 내달리는 발걸음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1941년 7월 26일 황궁 운동장에서 공습 대비 훈련을 시작했고, 대피소 건설에 대한 의견들이 나왔다. 1941년 9월엔 앞으로 점령할 대동아 공영권에서 사용할 ‘군사점령지역 엔화’를 찍어내고 있었다.


일본은 전쟁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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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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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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