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의 수상한 공기 때문에 골치가 지끈 거리던 그때 Y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새해니 술 한 잔 하자는 것인가? 아니다. 요즘 같은 시절에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뭐지? 불안하다.
“어이구. Y기자님 아니세요? 그 동안 격조했습니다.”
“그러게요. A로 옮겼다는 이야긴 들었는데, 시절이 시절이다 보니 우리 쪽도 모두 최순실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네요.”
“(웃음) JTBC 아니면 모두 낙종들인데, 적당히 하시죠? 날도 추운데 뻗치기 하다가 입 돌아갑니다.”
“(웃음) 말 속에 뼈가 있네. 여전하네 O과장은...”
“O차장입니다.”
“아차차, 들었는데 이러네.”
(초장부터 야지 놓고 시작하는 건 여전하네)
“어쩐 일이십니까?”
“A社의 사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가는데, 이제 A社도 어엿한 중견기업이잖습니까?”
(불안하다. 썰 푸는 게 뭔가 요구할 거 같다)
“이번에 신임 편집국장님이랑 광고국 이사님, 부장님 등등 해서 대표님한테 신년하례나 하러 갈까 해서요.”
(...씨바. 우리가 벌써 그런 급이 됐나? 아닌데? 뭐지? 우리 쪽은 소비재... 씨바 ‘협찬’이다)
‘편집국장’의 방문은 기업들에게는 일종의 ‘보증수표’다. 물론, 부도어음이 될 때도 가끔 있었지만(과거형), 요즘 같은 시절에는 100% 확실한 백지수표다. 언제 회사에 불리한 기사가 터질지 모른다. 그러나 편집국장과 안면이 있고, 그 편집국장이 기업을 한 번 방문한 전력이 있다면 그 언론사는 100% 믿어도 된다. 기사가 빠지거나 하다못해 마사지라도 해준다. 대신 이 백지수표를 사기 위해서는 그만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광고 사주면 되는 거 아냐?’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는데, 신년하례의 경우 이런 자질구레한 광고가 아니라 ‘협찬’이다. 10년 전부터 그런 경향이 뚜렷해 졌는데, 신문 팔아먹고 살 수 없게 된 언론사들이 너나할 거 없이 ‘OO 특별전’, ‘xx 컨퍼런스’, ‘xo 시상식’ 같은 행사를 연다. 신문사 주최의 각종 행사들의 대부분은 수익사업이다(조찬 강연, 세미나 등등도 다 수익사업이다). 선배들 말로는 예전엔 중앙 일간지들은 이런 행사가 밑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일종의 ‘사세과시’용으로 많이 활용됐는데, 요즘은 이게 돈벌이가 됐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갑자기 주말 섹션이나 경제섹션에 자전거 기사가 넘쳐나고, 특집기사와 함께 뚜르 드 프랑스에 관련된 기사가 넘쳐나면, 조만간 그 회사에서 ‘자전거 특별전’이나 ‘자전거 컨벤션’ 같은 걸 주최한다. 이때 자전거 업체들은 죽어나는 것이다.
우리쪽에 어떤 협찬을 요구할 생각인가? 퍼뜩 Y기자가 근무하는 P신문사의 직제도가 떠올랐다.
“R편집장님 잘 계시죠?”
“아, 이번에 이사로 발령 나셨네요.”
“(머뭇) ...광고쪽이신가요?”
“어휴, 빠꼬미시네.”
씨바. 요즘 신문들 인사 트렌드다. 편집국장 다음에 광고국으로 돌리는 것이다. 원래 이런 트렌드는 경영사정이 어려운 지방지들부터 시작됐다. 편집국 다음에 광고국으로 옮기는 것이다. 왜? 광고를 따기 위해서다.
어차피 신문사를 먹여 살리는 건 산업부와 경제부다. 그리고 그 위에 편집국장은 기사를 킬 할지 말지만 결정하면 된다. 이 셋이 움직이면 기업 하나 괴롭히는 건 일도 아니다.
별별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난 해 있었던 조사 4국의 후폭풍인가? 업계에 우리 회사가 돈을 제법 벌었다는 이미지가 각인 됐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앞으로 카톡이 불나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우리가 돈이 있다는 걸 안 이상,
“내일 나갈 기사인데, 반론권 보장 차원에서 보냅니다. 살펴보십시오.”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카톡들. ‘펼쳐보기’를 하면 거의 대부분 회사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들이다. 그 기사를 보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광고를 달라는 소리다. 만약, 그래도 이런 경우엔 양반이다. 기사에 대한 근거는 없지만, 그래도 화를 낼 ‘껀덕지’라도 있다. 문제는 오너다.
언론사의 가장 손쉬운 타켓은 ‘사장’이다.
사장에 대한 악의적인 기사, 기사 꺼리가 없더라도 한참 지난 일을 끄집어 내 기사제목만 바꿔 사람 속을 긁는다. 전문 경영인이라면, 그나마 편하겠지만 오너인 경우에는 이야기가 복잡해 진다.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개 풀 뜯어먹는 소리다. 인간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동물이다. 아무리 자기절제를 잘한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허점이 있다. 아니, 잘못이나 실수가 없더라도 그렇게 몰아가면 그런 인간이 된다. 언론사는 인간의 약한 고리를 파고들어 ‘조지는’ 것이다. 그럼 오너는 불호령을 내린다.
끌려갈 수밖에 없다.
(오너리스크의 절반은 오너 책임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이런 식이다. 오너도 사람이기에 인간적인 상처나 실수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한참 전에 덮어놓은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경우에 허물어 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에게 이걸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십중팔구 돈으로 해결하려 한다. 물론, 좀 심각한 경우에는 법무팀이 출동하지만, 언론사와 싸워 이득 볼 일은 없다. 전가의 보도인 ‘언론자유침해’가 그들에겐 있다.)
회사가 커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도 분명 존재한다.
‘씨바, 미친 척 하고 법무팀 대기시킬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지금은 우선 탐색이다.
“어휴, 저희 같은 구멍가게까지 귀한 걸음 하시려고...”
“구멍가게라뇨? A사 기업공시 보니까 이미 중견기업 넘어서 100대 재벌로 치고 올라갈 기세인데...”
“100대 재벌이라뇨, 그냥저냥 운이 좋아서 밥 벌어먹고 사는 거죠.”
“어떻게 날짜 한 번 잡아볼 수 있을까요? A사 사장님 인터뷰 기사 보니까 젊은 분답게 패기 넘치시고, 열정적이시던데... 새해에 그 기 좀 받으려구요.”
씨바. 지금은 받아야한다.
“어휴, 저희가 찾아 봬야 하는데 이렇게 오신다는데 버선발로 뛰어가야죠.”
“그럼 일자 정리해서 연락 주십시오.”
“아, 예... 그리고 그게...”
“예?”
“좀 더 유익한 시간이 되려면, 만남의 주제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수화기 건너편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Y기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쪽 업계에 들어 온 뒤 내 뇌에는 영상통화 기능이 추가 된 것 같다.
“뭐, 인사차원이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좀 하고...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에이, 저도 이쪽 짬밥이 몇 갠데요...”
“그냥 뭐... 우리 신문 정기구독하고 있죠?”
“예? 예. 물론 보죠.”
(이색희 신문정기구독 권유하러 온다는 거야 뭐야? 안 보면 상품권이라도 몇 장 주고 구독 권유하게?)
“보시면 알겠네요. 그럼 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주 중으로 일정 좀 알려주세요.”
전화를 끊는 Y.
“P신문 좀 가져와봐!”
홍XX가 재빨리 신문을 가져왔다. 신문을 몇 장 넘기지 않았는데, 정답이 나왔다. 우리가 판매하는 상품 카테고리가 묶여져 나왔다.
“씨바... 특별전 하나 거하게 하려나 보네.”
“예?”
의아해 하는 홍XX를 무시하고 머리를 싸맸다.
‘너무 빠르다, 너무 빠르다, 너무 빠르다.’
입에서 빠르다란 말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팀원들이 날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매출로만 보자면 주목 받는다는 건 이해하지만, 업계 진출한 지 얼마 안 된 회사이다. 우리 앞에 도열해 있는 업계 주자들이 몇이나 되는데... 여기까지는 푸념이다. 지금 푸념할 시간은 없다. 이쪽 일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몸에 밴 습관 하나.
'위험에 대한 식스 시그마 수준의 대처'
내 머릿속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P신문이 연락이 왔고, 만약 협찬이 이어진다면... 그 뒤는 다른 언론사들도 덤벼들 것이다. 지금 우리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직전이다.
“김과장 어딨어?”
“아, H대행에 외근 나갔는데요... 부를까요?”
“급한 거 정리하는대로 바로 오라고 그래! 박과장!”
“예!”
“우리가 관리하는 대행사에 다 연락 넣어! 이따 점심... 아, 너무 이른가? 그래 2시에 미팅 있다고 다 불러.”
“무슨 일이신지...”
“그냥 불러!”
내 멋대로 머리가 굴러갔다. 이럴 때 보면 뇌가 날 지배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다. 퍼뜩 떠오른 게 3가지다.
첫째, 오너 리스크 관리.
둘째, 스포츠 신문 관리.
셋째, 협찬과 광고의 전략적 관리.
거창하게 말했지만, 별 거 아니다. 몇 달 전까지 우리 회사는 2부 리그에서 뛰었는데, 조사 4국이 한번 휩쓸고 지나간 뒤 1부 리그로 승격(?) 당한 것이다.
강제로 승격당한 자의 비애라고 해야 할까?
당장 중요한 건 맷집을 키우는 것이겠지만, 맷집이란 게 하루아침에 생기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피하는 수밖에 없다.
“박과장!”
“예!”
“우리 사장님 관련해서 인터넷에 나오는 모든 자료 다 끌어 모아.”
“예? 무, 무슨일로...”
“나중에 설명할게 일단 다 모아.”
“예.”
“남OO씨!”
“예!”
“남OO씨는 우리 회사 관련해서 자료 다 끌어 모아.”
“예? 예...”
“정XX씨! 외근 나간 직원들 모두 연락해서 일 끝나는대로 바로 들어오라고 해요. 아니, 1시 전까지 들어오라 해요.”
“예”
“홍XX씨는 2시에 회의 준비해. 미팅 룸 잡고”
“몇 명이나...”
“대행사 전부랑 우리 모두 참가할 거야. 급한 업무 있는 사람들은 지금 말해. 어지간한 건 다 치워. 이게 더 중요해.”
사전에 입을 틀어막았다. 다들 꿀 먹은 벙어리 표정이다.
“없지? 그럼 2시에 보자.”
일어서는 날 보며 박과장이 엉거주춤 일어나며 ‘어, 어디’라며 말을 샌다. 숫기없는 놈. 김과장이랑은 다르다. 저래서는 출세하기 힘든데...
“11층.”
“11층 어디...”
답답한 녀석.
“법무팀.”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내린 오더와 법무팀이란 단어가 결합했으니 한 없이 나쁜 쪽으로 상상력이 치닫고 있는 중일게다.
“엉뚱한 상상하지 마! 그냥 확인하러 가는 거야. 뭐해? 2시 미팅이야!”
기자들과의 전쟁이 다시 시작됐다.
추신
이 시리즈를 투고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내부자의 안전과 비밀보장을 최우선시 한다는 딴지일보를 믿으나
이 연재가 중단되면 나에게 클레임이 들어왔거나 딴지 편집부가 쫄았거나 둘 중 하나로 생각하시라.(실제 지난 8편에서 관계자가 이 글을 읽고 클레임이 들어오긴 했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날리 없는 소설이라고 믿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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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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