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4. 목요일
햄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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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방 게이머다. 물론 돈 받고 게임을 하는 프로게이머는 아니고, 아프리카 방송으로 게임하며 돈 버는 BJ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냥 게임하는 잉여일 뿐이다. 요즘 게임이 중독성 물질이네 어쩌네 하는 판타지 소설이 어른들 사이에서 유행하며 대 인기라고 한다. 나이 먹고 별 시답잖은 소리 하는 걸 듣고 있자니, 문득 어린 시절 즐기던 비디오게임들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어디서든 비디오게임을 즐길 수 있는 시대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전자오락’이란 비행과 불효의 상징인 오락실 외의 공간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놀이 문화였다. 동네 형들의 담배 냄새와 왠지 모를 음습함, 그리고 사방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전자음으로 가득했던 오락실.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은 오락실이 아닌 곳에서 처음으로 비디오게임을 접한 사건은 아마도 유치원 시절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재믹스’를 만져본 때였을 것이다. 재믹스는 당시 대우전자에서 MSX의 시스템을 기반으로 내놓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였다.
재믹스
친구네 집에서 그 애와 나는 <쿵푸>를 했다. 그전까지 게임이라곤 액정 화면 속에서 정해진 패턴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건전지를 이용해 작동하는 휴대용 게임기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건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게임기가 TV에 연결되고, 흑백이 아닌 컬러 화면 속에서 사람이 움직인다. 똑같은 동작을 반복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조작하는 대로 위아래로, 점프도 하고 앉기도 했다. 그건 정말이지, 충격이라는 말을 넘어선 어떤 경험이었다.
친구와 한 시간 남짓 게임을 하고 나서, 나는 묘한 흥분 상태를 유지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당연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재믹스를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꽤 엄하신 편이었고, 그런 부모님에게 게임기를 사달라고 조를 만한 용기는 내게 없었다.
아마 몇 달만 지났다면 나는 곧 게임기에 대한 열망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TV와 잡지에서 엄청나게 재믹스를 광고 해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재믹스의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서 재믹스가 없는 집은 오직 우리 집’이라는 기분이 들 정도였으니 오죽했을까.
재믹스 광고 영상
그런 내 마음을 어찌 아셨는지,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부모님은 재믹스를 사주시기로 결정하셨다. 엄한 부모님이었지만 자식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를 만큼 무관심하진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당시 나는 ‘따개비 한자 100’이라는 교재로 한자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학업평가 차원에서 가벼운 시험을 치렀다. 그 시험에서 만점(또는 그에 달하는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 사주시겠다는 것이었다.
만화 <따개비 한문숙어>. 요즘에는 심지어 컬러판으로 판매되고 있으니 학부모 독자님들께서는 자녀분들의 교양을 위해 중요체크 하시라. 졸라, 한자가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결과가 어땠냐고? 물론 졸라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물론 부모님은 결과가 어떻든 게임기를 사주셨을 테지만 말이다. 그해 크리스마스는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크리스마스 중 하루였으리라. 재믹스가 우리 집에 있다니!
요즘에야 게임을 DVD 혹은 블루레이 디스크로, 또는 아예 인터넷에서 바로 다운로드해서 설치하지만 당시에는 롬팩이라 불리는, 사각 형태의 카트리지를 게임기에 꽂아서 작동시켰다. 재믹스를 구입했을 당시 부모님이 사주신 게임팩은 <걸케이브>라는 슈팅 게임과 <닌자 프린세스>, <마성전설>, <알파로이드>, <몽대륙>등의 게임이었다.
알파로이드
<알파로이드>는 전형적인 횡 스크롤 슈팅게임으로 진행되다가 게임 도중 바닥에 있는 통로로 들어가면, 마치 대전액션게임처럼 다른 로봇과 1:1로 전투를 벌이는 모드로 바뀌는 게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두 개의 장르가 섞인 꽤나 파격적인 형식이다. 비록 그 아이디어만큼 게임이 재미있었던 기억은 없지만 누구 아이디어였는지, 그 시도가 대단하다.
마성전설
<마성전설> 역시 무척 재미난 게임이었다. 단순히 세로방향으로 진행하는 슈팅게임이지만, 마치 액션 RPG를 플레이 하는 것 같은 시각적 요소들이 돋보였다. 무엇보다 극악에 가까운 난이도 덕분에 엔딩은커녕 3-4 스테이지 조차도 넘어가지 못했던 분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 당시엔 세이브라는 흔한 개념조차도 없었으니, 운 좋게 가보지 못했던 스테이지까지 갔다 하더라도 게임 오버가 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최근 들어 에뮬레이터로 다시 해봐도 졸라 어렵더라.
게임에 세이브가 없던 시절, 요즘의 10대 게이머들에겐 상상이 되려나 모르겠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만약 <메이플 스토리>를 하는데 접속할 때마다 레벨 1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세이브도 없고 플레이어의 목숨, 즉 재도전의 기회는 한정되어 있으니 ‘켠 김에 왕까지’가 불가능한 이상 매번 같은 구간을 반복하며 달인이 되는 방법 밖엔 없었다.
세이브가 없던 시기, 그 시절 게이머에게 가장 큰 낭패는 혼자 있을 때 찾아왔다. TV는 캡처 기능은커녕 리모콘도 없는 아날로그 텔레비전에, 핸드폰은 고사하고 디지털 카메라도 없던 시기. 어쩌다 운 좋게 막혀있던 구간을 뚫어내거나, 심지어 게임의 극의를 깨달아 천의무봉한 경지로 끝판을 깬다 하더라도 증거를 남길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다.
별 다른 도리가 있나. 증인들을 모셔다 놓고 그대로 다시 재현하는 수밖에 없다. 양치기 소년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든 다시 그 실력을 보여줄 수밖에.
지금의 나는 플레이스테이션 3를 37인치 HDTV에 연결해 놓고 화제가 되는 최신 게임들을 대부분 즐기고 있지만, 재믹스에 대한 추억은 요즘 게임의 화려한 그래픽보다 더 내게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처음으로 가졌던 비디오 게임기였기에 그 의미가 크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 아버지와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었던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 아버지의 연세가 지금 내 나이쯤 될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어린 나 못지않게 열중하며 게임을 즐기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 역시 지금 나이와 무관하게 만화와 게임을 취미 삼아 살고 있는데, 그때의 아버지라고 크게 다르셨을까. 어쩌면 내게 재믹스가 신기했던 만큼, 아버지에게도 비디오게임이란 마냥 즐겁고 신기했던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게임 중 특히 <몽대륙>을 무척 좋아하셨다. <몽대륙>이 어떤 게임이냐 하면, 펭귄 한 마리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남극을 지나 세계를 한 바퀴 돈다는 그런 내용인데...이거 <남극탐험> 아니냐고? 화면은 얼추 비슷한데, 이 게임은 훨씬 더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