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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부리 추천7 비추천0

2013. 11. 19. 화요일

편집장 너부리








편집부 주


본 기사는 [더딴지] 12호에 실린 기사의 전문입니다.


 





1. 취지

 

본 기사는 각종 매체에서 이루어졌던 광고 아닌 척 책 소개하기 식의 서적 광고도 아니고 필자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인 니맘대로 서적 리뷰도 아니다.

 

제목에서 이미 눈치 챌 수 있듯 본 기사는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서적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그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 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한 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얘기만 나오면 자아 한 곳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 들어가며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와 더불어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나도 모르게 자동 반사적으로 읽은 척을 하는 대표적 작품이 바로 이번에 소개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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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당 작품은 워낙 많은 사람들에게 언급될 뿐만 아니라 다른 고전에 비한다면 너무나 인간적이라 할 수 있는 200페이지 안팎의 분량에 그치기 때문에 당 서적을 읽어본 바 없다고 실토하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무지에 대한 커밍아웃이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루면 읽을 수 있는 걸 아직도 읽어보지 못했느냐 식의 나태한 삶에 대한 총체적 손가락질까지 덤으로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는 알을 깨고 나오는데 그 알은 세계라느니, 선과 악이 붙어 있는 신(神) 압락사스니 하는 거의 유행가사처럼 들먹여지는 당 작품 내 일부 내용은 대부분 한 번쯤 들어본 바 있어, 한 줌의 귀동냥으로 호기롭게 읽은 척을 하고 싶은 유혹이 커질 수 있는 만큼, 바로 그만큼 평생 지울 수 없는 개망신을 당할 가능성도 동시에 커지는 위험한 작품이라 할 것이므로 그 어떤 고전보다 읽은 척 매뉴얼 편찬 작업이 시급했다는 데 당 서적의 선정 이유가 있다 하겠다.



3. 읽은 척 매뉴얼


 1) 등장인물

 

나(에밀 싱클레어) : 당 작품의 화자. 책 제목이 <데미안>이다 보니 주인공 역시 데미안일 것만 같은 신기루가 아른거릴 수 있겠다. 하지만 당 작품의 주인공은 1인칭 시점의 화자인 에밀 싱클레어이고, 데미안의 비중은 사실 동네 아는 형정도에 불과하다. 즉 <위대한 개츠비>, <그리스인 조르바> 등과 마찬가지로 작중 화자인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상대의 이름이 작품 제목으로 쓰인 경우라 하겠다. 당 작품의 부제가 ‘에밀 싱클레어의 청년시절의 이야기’라는 걸 기억해두면 유용할 것이다.

 

데미안 : 데미안(Demian)은 사람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악마 숭배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 단어 Demon을 떠올리면 되겠다. 바로 여기에 데미안이 어떤 유형의 인물일지를 읽은 척 유추할 수 있는 소중한 단초가 있다. 왠지 이름의 어감상 금발의 곱슬머리 미소년이 연상되면서, 미소년이니까 착하겠지 뭐… 라는 식의 관습적 논리가 발동할 수 있겠으나 이는 자칫 큰 화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읽은 척 세부 스킬에서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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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오멘>의 주인공 이름도 ‘데미안’이다.

 


에바부인 : 데미안의 모친. 데미안이 데미안일 수 있게끔 만들어준 근본이라 할 수 있다. 낳아준 어머니기 때문에 당연히 성립되는 육체적 근본일 뿐만 아니라 데미안의 남다른 영적 능력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할 수 있다.

 

크로머 : 유년기의 싱클레어를 협박, 갈취했던 범죄 영재.

 

피스토리우스 : 오르간 연주자. 주인공(싱클레어)에게 압락사스에 대한 무료 과외교습을 해주는 남성이다.

 

크나우어 : 싱클레어가 김나지움(우리나라의 고등학교쯤)에서 만난 동급생. 성욕에 대한 과도한 죄의식으로 자살까지 시도하려다가 주인공에 의해 구원받는 것처럼 묘사된다.

 

베아트리체 : 싱클레어가 유년기를 지나 사춘기 방황을 하던 중 찍은 마음 속 아이돌. 그러니까 주인공이 말도 한 번 못 붙여보면서 운명적 여인이네 완벽한 여신이네 우짜구 하며 각종 오바질을 내뿜던 대상이다. 베아트리체도 진짜 이름이 아니라 단테가 9살부터 평생을 사랑했다고 알려진 전설 속 여인의 이름을 따다 붙인 것.풉… 9살에 빠진 운명적 사랑이라니.

 

 2) 내용 요약

 

나름 유복한 집안에서 잘 자라던 나는 후진 공립학교에 다니던 크로머와 어울리면서 뱉은 거짓말로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다. 그야말로 빵셔틀, 돈셔틀이 된 것. 막판에는 친 누나까지 데리고 나오라는 크로머의 요구에 고뇌하던 중, 새로 전학 온 데미안을 통해 그 고뇌를 해결한다. 정확히 말하면 데미안이 모든 걸 혼자 해결해준다. 데미안의 설득이나 격려로 주인공이 반 푼어치의 용기라도 내서 문제를 해결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이 점 중요하다.

 

이후 유년기가 지나 사춘기가 된 나는 김나지움에서 다시 한 번 고뇌에 빠진다. 해결할 수 없는 성적 욕망과 그로 인해 더욱 커지는 외로움을 술과 허세로 달래기 시작하다 나중에는 그 술과 허세에 중독이 되어 퇴학 직전의 문제아가 되어버린 것. 그러다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갑자기 경건해지기 시작한 나는 베아트리체의 얼굴을 그리겠다고 한 게 데미안의 얼굴이 되더니, 다시 나의 얼굴이 됐다가, 결국에는 데미안도 아니고 나도 아닌 미지의 어떤 여인의 얼굴이 되는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이후에도 신기한 영적 체험 같은 것들이 계속 일어난다. 이를테면 이상한 꿈들이 반복되어 꿈속에서 본 새를 그려 발신인 표시도 없이 한참을 소원했던 데미안에게 보냈더니 데미안은 척하니 아래와 같은 꿈 해몽서를 보내온 것.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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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압락사스에 꽂혀 본의 아니게 열심히 책을 뒤지는 모범생으로 거듭나게 된 나는 대학씩이나 가게 되고, 대학에 가서는 또 우연히 교회 앞을 지나다 오르간 연주를 듣게 되는데 역시 또 우연히 그 연주자는 압락사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기인이었던 것. 캬캬캬.

 

이 모든 것이 다 우연 같지만 사실은 운명이란 걸 직감한 나는 옛날 데미안처럼 사람마음을 꿰뚫어 보는 독심술에도 능숙해지고, 생각을 집중하면 그 생각이 실재 이뤄지는 마음의 연금술도 경험하면서 결국 또 우연 같지만 결코 우연이 아닌 데미안과의 재회를 갖게 되고, 처음으로 데미안 집에 놀러 가서는 그의 어머니가 바로 내가 그려왔던 미지의 여인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지만 이 역시 우연이 아닌 운명임을 알기에 기쁜 마음으로 매일같이 데미안의 집에 놀러 가게 된다.

 

나와 데미안, 그리고 에바 부인과 함께 단란한 한 때를 보내던 어느 날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껴, 텔레파시로 에바 부인을 애타게 부르던 중(내가 왜 에바 부인을 애타게 불렀는지는 읽은 척 세부 스킬을 참조하시라.) 에바 부인 대신 빌어먹을 데미안이 나타나 전쟁소식(1차 대전)을 알려준다.

 

이후 전쟁터에 끌려간 나는 폭격에 부상을 입고 쓰러지지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잘 안 가는 가운데 에바 부인이 아닌 빌어먹을 데미안의 키스를 받고서 깨어난다.

 

 3) 읽은 척 세부 스킬

 

- 위대한 고전의 찌질한 주인공

 

유명 고전을 읽은 척 할 때 범하기 쉬운 자충수 중 하나가 유명 고전의 주인공이니만큼 당연히 반듯하고 훌륭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에서 비롯된 인물에 대한 과대평가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전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해진 작품은 벅찬 감동에 대한 수 많은 사람들의 간증으로 자리매김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읽은 척의 팔할은 유사간증, 혹은 묻지마 오두방정으로 이뤄지는 것이 통상적이라 하겠다.

 

특히 당 작품에 대한 가장 흔한 요약이 ‘한 소년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인만큼 어른이 되어서도 못 찾는 자아를 수소문하는 독일 소년이라면 왠지 철학적이지만 창백하고, 조숙하지만 늘씬할 것만 같은 예감이 들면서 주인공에 대한 닥치고 찬양 모드가 읽은 척에 효과적일 것 같은 반사적 생존본능이 들겠으나 오히려 이때가 읽은 척의 고 난이도 변칙 스킬인 까대기적 읽은 척을 구사해볼 만한 절호의 순간이라 하겠다.

 

이는 마치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샥스핀에 대하여 유명 음식이니 당연히 맛있을 거라는 천편일률적 감수성으로 먹은 척을 하는 것보다는, 양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탈색이 덜 된 msg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불쾌했다’는 식의 까대기가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젊은 나이에 샥스핀을 먹어봤음엔 틀림이 없어 보인다는 식의 공감대를 좌중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오히려 효과적인 먹은 척의 원리와 유사하다 할 것이다.

 

게다가 실재로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까대기적 읽은 척의 풍부한 빌미를 제공한다. 주인공이 겪는 소위 성장의 아픔들은 대체로 자신의 허세가 초래한 자승자박의 참사들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에피소드는 다음과 같다.

 

 (1) 좀 놀아본 척의 허세가 불러온 참사

 

주인공 싱클레어의 생애 첫 참사는 바로 동네 초딩 일진 크로머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독일에서 좀 있는 집 애들이 다니는 사립학교라 할 수 있는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주인공은 크로머를 비롯한 공립학교의 불량한 무리들과 어울리던 중, 어느 날 자신이 경험한 비행에 대한 고백, 말하자면 어둠의 무용담 소그룹 발표회를 갖게 된다. 왜 술자리에서 남자들이 많이 하는 거 있잖은가. 17대 1로 싸워봤다느니, 군대에서 간첩을 잡았다느니, 자기를 못 잊는 여자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한다느니 하는 진실과 거짓의 경계선 사이를 마치 줄타기하듯 넘나드는 대하 구라마들 말이다.

 

유복하게 자라 이렇다 할 어둠의 추억이 없던 주인공이 순간의 존재감 위축을 견디지 못하고 택한 건 결국 거짓말. 그러니까 동네 과수원에서 최상급의 사과를 한 두 개도 아니고 자루째 훔쳤다는 거짓말을 그럴듯하게 해치운 주인공은 나름 의기양양하였으나 그 과수원 주인이 사과도둑에게 2마르크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크로머의 주장이 나오면서 상황은 급반전 되고 만다. 크로머가과수원집 주인에게 일러바치지 않는 조건으로 현상금 2마르크를 주인공이 대납할 것을 요구한 것(여기서 크로머의 현상금 관련 주장이 사실인지, 아니면 주인공의 구라를 간파한 또 다른 구라인지는 분명치 않다).

 

결국 주인공은 자신이 내뱉은 거짓말과 거짓 맹세로 발목이 묶여 크로머의 전용 셔틀이 되는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심지어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아래는 싱클레어가 크로머의 협박을 받은 직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졌던 상념들이다.

 

나는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나의 인생이 산산이 부수어져 있었다. 달아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거나 물에 빠져 죽을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러면 어떨지는 똑똑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중략) 유리문 곁의 옷걸이에는 아버지의 모자가 걸려 있었다. 어머니의 양산도 걸려 있었다. 이 모든 물건으로부터 왈칵 고향과 애정이 나에게로 밀려왔다. 나의 마음은 뭉클하게 그것들을 반겼다. 애원하며 감사하며, 탕아가 옛 고향의 방을 보고 냄새 맡으며 그러듯이.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밝은 세계였으며 나는 깊이 죄 지은 채 낯선 홍수에 잠겨있었다. 모험과 죄악에 얽혀들어, 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위험, 불안, 치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략) 나는 내 구두에다 더러움을 묻혀왔다. 발깔개에 문질러 닦아낼 수 없는 더러움이었다. 고향의 세계는 알지 못하는 그림자를 나는 끌고 왔던 것이다. (중략) 나의 죄악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었다. 나의 죄악은 내가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왜 나는 함께 갔던가? 왜 나는 일찍이 아버지 말에 귀 기울인 것보다 더 크로머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가? 왜 나는 저 도둑질 이야기를 지어내고 영웅적 행위라도 되는 양 범행을 뽐냈을까? 이제 악마가 내 손을 잡았다. 이제 적이 나를 뒤쫓고 있었다.

 

데미안p.23~24 민음사, 전영애 역



이건 말이지 정말… 병신 같지 않은가!


주인공의 이런 정황을 근거로 다음과 같은 까대기적 읽은 척이 가능하다 하겠다.

 

“싱클레어는 아무래도 좀 찌질한 거 같아. 지가 한 거짓말로 덫에 빠진 거면서 마치 무슨 거대악에 억압당하는 저주받은 영혼처럼 오바질을 하잖아. 자기가 한 말이 다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을 외면한 건 마치 거부할 수 없었던 운명처럼 과장하고 말이야. 물론 자존심 때문이었겠지. 그래 사람에게 자존심이란 중요한 거야. 하지만 잘못된 자존심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어야 한다고 봐.


이는 어쩌면 주인공의 부모한테 문제가 있었던 건지도 몰라. 주님께 기도하는 목회자의 집안이 무슨 대단한 선의 세계요 빛의 세계인 것처럼 규정하고 있지만, 보라고. 자식새끼가 거짓말 하나 때문에 영혼이 피폐해지고 있는데 그것도 눈치채지 못하잖아. 그냥 한숨이나 쉬는 게 다고 말이야. 그 동안 얼마나 겉보기에만 좋은 선의 세계를 강요해왔으면 애가 부모한테도 말을 못했겠냐고. 이건 선악에 대한 주입식 교육이 빚어낸 촌극이란 말이지. 주인공은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멍청한 짓을 한 거거든. 어린 나이에 얼마든 실수할 수도 있는 멍청한 짓을 부모가 얼마나 큰 나쁜 짓으로 규정하고 겁을 줘왔으면 애가 멍청한 짓과 나쁜 짓도 구분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멍청이가 돼버렸느냐 이 말이야.


이런 면에서 보면 크로머도 그냥 민주 시민의 투철한 신고정신을 밑천 삼아 용돈 푼이나 벌려고 했던 멍청이에 불과해. 악의 화신이 아니라 그냥 멍청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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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춘기 위악의 허세가 불러온 참사

 

데미안의 일방적인 도움으로 크로머의 멍청한 지배행위에서 벗어난 주인공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하숙집에 들어앉는다. 당연히 외로웠을 것이다. 자기를 늘 지켜 봐주던 가족이라는 충실한 관객의 부재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때 사람은 외로워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주인공이 당시 선택한 허세의 처세는 또 이러했다.

 

하숙집에서 나는 처음에는 사랑 받지도 주목 받지도 못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나를 놀리다가, 그 다음에는 나로부터 물러났으며 나에게서 음침하고 패기 없는 사람, 불쾌한 괴짜를 보았다. 그런 역할을 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어, 나는 그 역을 더 과장했으며, 고독 속으로 칩거하였다. 남몰래 자주 비애와 절망의 좀 먹히는 발작에 짓눌렸는데도 그 고독은 바깥에서 보면 지극히 남자답게 세상을 경멸하는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데미안p.93~94 민음사, 정영애 역


싱클레어가 불쾌한 괴짜로서 남자답게 세상을 경멸하는 사람처럼 위악을 떨게 된 그 시작은 바로 사랑받지 못함에 있었다는 얘기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남자답게. 그러고 보면 많은 경우 남자답다는 표현은 병신답다로 바꿔도 맥락 상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아무튼.

 

이후 주인공은 같은 하숙집의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인 알폰스 벡을 만나면서 그 동안 3년 묵은 변비처럼 삭혀왔던 존재감을 일거에 싸지르기 시작한다. 어디서? 술집에서.

 

우리는 어느 조그만 교외 술집에 앉아, 품질이 수상한 포도주를 마시며 두꺼운 유리잔을 부딪쳤다.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건 뭔가 새로운 것이기는 했다. 나는 술에 익숙지 않은 터라, 곧 몹시 말이 많아졌다. (중략) 벡은 즐겁게 내 말에 귀기울였다. 마침내 누군가가 내 말에 귀기울이고, 그에게 내가 무언가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를 굉장한 녀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고 뭔가를 전하고 싶은 고이고 고인 욕구를 실컷 쏟아내는 기쁨에, 인정을 받는다는 기쁨에, 연장자에게서 다소 인정받는다는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올랐다. 그가 나를 천재적인 멋들어진 녀석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 말이 감미로운 독주처럼 영혼 속으로 번졌다.

 

데미안p.96민음사, 정영애 역


 

그리고 다음날, 그러니까 처음 먹은 술기운과 더불어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호의적 청중 앞에서 주둥이로 존재감을 배설하는 동안에는 천재가 된 것도 같고, 세상도 다 가진 것 같았던 주인공의 패기가 술이 깬 다음 날엔 이렇게 바뀐다.

 

잠깐 죽은 듯 잠을 잔 후 나는 고통스럽게 깨어났다. 술이 깨고 보니, 멍한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낮에 입었던 셔츠를 아직도 입고 있고, 내 옷가지며 신발은 바닥에 널려 있고 담배 냄새와 토사물 냄새가 났다. 두통과 메스꺼움과 심한 갈증 사이에서 내가 오래 직시하지 않았던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고향과 부모님의 집, 아버지, 어머니, 누이들과 정원이 보였다. 조용하고 아늑한 내 침실이 보였다. 학교와 시장 광장이 보였다. 데미안과 견진성사 수업 시간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환했다. 모든 것이 흐르는 광채로 에워싸여 있었다. 모든 것이 놀라웠다. 신성하고 깨끗했다. 그리고 모든 것, 모든 것이 어제만 해도, 몇 시간 전만 해도 나의 것이었고, 나를 기다렸는데 지금은, 지금 이 시각에는, 타락하고 저주받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나를 밀쳐내고 있었다. 구역질을 내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가장 먼 유년의 황금빛 정원들까지 되돌아가 부모님으로부터 경험한 모든 사랑스럽고 친근한 것, 어머니의 입맞춤 하나하나, 성탄절 하나하나, 집에서의 경건하고 환한 일요일 아침 하나하나, 정원의 꽃 하나하나, 이 모든 것이 황폐화되었다. 모든 것을 내 자신의 두 발로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지금 추적자가 와서 나를 묶어서 인간폐물이며 신전 모독자라고 교수대로 데리고 간다면, 나는 동의하고 기꺼이 따라갔으리라.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르고 합당한 처사라고 느꼈을 것이다.

 

데미안p.98~99민음사, 전영애 역



이건 말이지 정말… 남자답지 않은가!

 

부모가 비싼 돈 들여서 도시로 유학까지 보냈더니만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밤새 술이나 퍼마신 것이 분명 아름답고 건전한 일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고작 그깟 일로 과거 가족과의 시간에다가는 그냥 막 천사의 깃털을 처바르며 이제는 저주받고 타락했으니 기꺼이 교수대에서 박력있게 죽을 준비가 되었다고 포효하는… 그런 남자 중의 상남자말이다!

 

고로 이를 근거로는 대략 다음과 같은 까대기적 읽은 척을 구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존재감을 드러내고, 확인 받고 싶어하지. 왜냐하면 존재니까. 존재니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나 스스로 느끼고 싶고, 또 다른 존재를 통해서도 확인하고 싶은 거야. 인간에게 1차적으로 의식주 문제가 중요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는 거라 할 수 있어. 의식주와 관련된 행위, 즉 먹고 싸고 입고 자는 건 존재한다는 걸 스스로 확인(그게 만족이든 불만족이든)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 행위니까 말이야. 1차적 존재감의 갈증이 해결된 후에는 2차적 존재감을 욕망하게 될 거야. 타인을 통해서 얻게 되는 존재감 말이야. ‘나’라는 존재에 대한 타인들의 총체적 반응이 바로 2차적 존재감을 확인하는 지표가 되는 거지. 이때의 존재감은 크게 빛(양, 선, 긍정, 사랑, 존중 등)의 존재감과 어둠(음, 악, 부정, 증오, 폭력 등)의 존재감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아마도 모든 사람은 처음엔 빛의 존재감을 욕망할 것 같아. 그렇잖아. 갓 태어난 아이는 어둠의 존재감을 감당할 수도 없고 적극적으로 발휘할 수도 없을 테니까. 애초에 나약할 뿐이잖아. 어쩌면 누구도 위협할 수 없는 나약함 자체가 빛의 존재감인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애초에 약한 존재가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타인들(대체로 부모)의 호의, 즉 빛의 존재감에 기반한 보살핌을 욕망하고 그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거야.


하지만 욕망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이뤄지지는 않잖아. 환경의 문제든 개인의 역량 탓이든. 결국 아이는 커가면서 빛의 존재감 획득에 실패하는 경험을 흔히 겪게 돼. 특히 어려서는 부모에게 일방적인 보살핌을 받은 죄(?)로 커서 또 일방적인 기대(학업과 취업의 문제, 착한 자식 되기 등)에 부응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그런 좌절이 많을 거야. 좌절의 순간에 기어코 빛의 존재감 쟁취를 위해 노력하는 아이도 있겠지만 차라리 어둠의 존재감으로 방향을 틀게 되는 경우도 많아. 왜냐면 그게 더 쉽고 빠르니까.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나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게 더 쉽고 빨라.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기대에 부응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이유를 만들어 속이는 게 더 쉽고 빠른 거고 말이야(좀 더 생각해보면 그게 더 쉽고 빠르다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아. 대체로는 그게 더 쉽고 빠른 것처럼 느낀다고 하는 게 보다 정확한 표현일 거야. 게다가 애초에 누군가의 사랑, 기대가 모순된 욕망에서 비롯된 거라면 그런 모순된 사랑과 기대에 부응할 이유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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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면에서는 그런 어둠의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에서 비롯된 만족감이 보다 강렬하게 느껴지는 때도 많고 말이야(밀란 쿤데라가<불멸>에서 표현한 ‘배반의 쾌락’이란 게 아마 이런 상황을 말하는걸 거야).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어려서 멀쩡하다가 커서 이유 없이 비뚤어진 것만 같은 사람들이 많은 거야. 사실은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나름 가장 효율적 존재감 발산을 위해 벌인 치열한 투쟁의 결과물이라고나 할까.


결국 싱클레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어려서는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엄친아로서의 존재감을 발휘하며 그에 대한 타인의 반응에 흡족해하다가는, 가족이 없는 환경,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감에 무감각한 하숙집의 타인들 앞에 섰을 때 싱클레어는 또 겁을 집어먹은 거지. 얘들은 자신을 빛의 존재감으로 인식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그래 줄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였을 거거든. 그래, 사실은 또 겁을 먹은 거야. 크로머 앞에서 존재감을 입증하기 위해 거짓 도둑질을 꾸몄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지. 싱클레어가 거짓말을 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거짓말의 이유가 존재감을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서였다는 게 중요한 거야.

 

양치기 소년의 우화를 통해 거짓말쟁이의 비참한 말로라는 교훈만을 얻어서는 안돼. 혼자 들판에서 하루 종일 양만 돌보던 어린 소년의 절절한 외로움을 가늠해봐야 한다고. 나 같으면 늑대가 나타났다 정도가 아니라 늑대와 양의 불륜동영상을 갖고 있다 소리치고 싶었을지도 몰라. 그러니 제발 나한테 좀 와달라고 말이야. 그냥 솔직하게 내가 지금 좀 많이 외로우니까 나한테 좀 와달라고 소리치면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것 같아서, 그 솔직함이 가져다 줄 잔인한 결과가 너무 두려워서 거짓말을 한 건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중요한 건 거짓말 자체가 아니라 거짓말을 하게 된 맥락이 중요하다는 거지. 거짓말쟁이의 비참한 말로가 다가 아니라 사람이 외로우면, 즉 자기 존재감이 충만하지 않으면 그렇게 거짓말을 반복해서라도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어한다는 거, 그리고 존재감 확인을 위해 거짓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골탕먹이는 건(즉 어둠의 존재감을 통해 사람들의 반응을 도모하는 건) 처음 몇 번은 통할지 몰라도 결국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드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는 거, 그게 바로 진짜 중요한 교훈이라고.

 

싱클레어가 딱 그랬단 말이지. 사랑 받고 싶었지만 사랑 받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는 싫었던 거야. 못나 보이니까. 자존심 상하니까. 남자답지 않으니까. 그래서 마치 사랑 따위 개나 줘버리라고 외치는 사람의 냉소와 위악을 택한 거고 말이야. 사랑에 대한 갈증과 정확히 비례하는 사랑에 대한 혐오인 거지. 술은 그냥 위악하는 남자에게 딱 어울리는 소품에 불과했던 거고.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어. 남자, 아니 병신이 돼버렸잖아. 자신의 유치한 허세를 불가사의한 절대악의 강림으로 비약하는 그런 병신 말이야. 빛의 존재감 획득에 연연하는 병신처럼 보이기 싫어서 택한 어둠의 존재감이 결국 더욱 적나라한 병신 인증의 길로 인도한 셈인 거지.

 

말을 하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 어때, 나 정말 읽은 것 같지 않아?”


 (3) 주인공의 남다른 성적 취향?

 

앞서 내용 요약에서 언급한 바 있듯, 당 작품의 대미는 주인공과 데미안의 키스씬이 장식한다. 다분히 동성애적, 혹은 야오이적 분위기를 풍기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싱클레어는 데미안에 대해 얘기할 때 연정 깊은 관찰자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수위의 비릿한 묘사를 되풀이 한다.

 

나는 독특하게 나를 매료시키는 데미안의 얼굴을 자주 건너보았다. 그 총명하고, 환하고, 엄청나게 단호한 얼굴이 작문 과제 위로 주의 깊고도 명민하게 숙여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전혀 숙제를 하고 있는 학생처럼 보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문제들에 전념하고 있는 연구자 같았다. 사실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반대로 왠지 거부감을 주었다. 그는 나보다 우월하고 침착했다. 그 본질에 있어서 너무나도 도전적일 만큼 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아이들이 결코 좋아하지 않는 어른의 표정을 띠고 있었는데, 약간 슬픈 냉소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를 줄곧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호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반감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데미안p.37민음사, 전영애 역



나는 데미안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소년의 얼굴을 가지지 않고 어른의 얼굴을 가졌다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았다. 보았다고, 혹은 감지했다고 믿었다. 그것이 남자의 얼굴만이 아니며 또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여자 얼굴도 조금 그 안에 들어 있는 듯했다. 특히 그 얼굴은 내게, 한 순간, 남자답거나 어린이답지 않고, 나이 들었거나 어리지 않고, 왠지 수천 살은 되게, 왠지 시간을 초월한 듯, 우리가 사는 것과는 다른 시대의 인장이 찍힌 듯 보였다. 짐승들이 아니면 나무들, 아니면 별들이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데미안p.69민음사, 전영애 역


 

어쩌면 바로 이 은은한 야오이적 서사가 많은 문학소녀들로 하여금 <데미안>을 필독서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게 만든 밀알 중 하나였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주인공의 관념적 엽색행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래는 친구 엄마, 그러니까 데미안의 엄마인 에바부인에 대한 끈적한 묘사를 발췌한 부분이다.

 

그녀의 목소리, 또 그녀의 말은 아들과 매우 닮았으면서도 전혀 달랐다. 모든 것이 더 성숙하고, 더 따뜻하고, 더 자명했다. 그러나 막스가 예전에 그 누구에게도 소년의 인상을 주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그의 어머니는 전혀 장성한 아들을 둔 어머니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과 머리카락 주위로 감도는 숨결은 그토록 젊고 감미로웠다. 그녀의 금빛 도는 피부는 그렇게 팽팽하고 주름이 없었다. 입은 그렇게 꽃피고 있었다. 내 꿈속에서보다도 더 당당하게 그녀는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 곁에 있음은 사랑의 행복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성취였다.

 

데미안p.188민음사, 전영애 역



내가 그녀 곁에서 관능적 욕구로 불타며 그녀가 닿았던 물건들에 입맞추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점차 관능적이며 비관능적인 사랑이, 현실과 상징이 서로 포개지며 밀려왔다. 그 다음에는 내가 내 방에서 고요히 열렬하게 그녀를 생각하면, 그럴 때 그녀의 손이 나의 손에,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 느껴진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

 

데미안p.202민음사, 전영애 역



사실 이 부분은 주인공의 찌질함을 방증하는 요소라 단언할 수는 없는 부분이라 단언할 수 있겠다. 사랑은 죄가 아니잖아.씨바! 그 상대가 친구 엄마가 됐든, 친구 애완견이 됐든.

 

하지만 본 매뉴얼의 존재 목적이 등장인물에 대한 속 깊은 공감이 아니라 어떻게든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밑거름으로 삭혀지는데 있다 할 것이므로, 마치 <상실의 시대>에서 난데없이 펼쳐지는 섹스씬을 들먹임으로써 읽은 척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듯, 주인공 싱클레어가 그야말로 허를 찌르듯 고백하는 중년 페티쉬적 취향을 거론하는 것은, 비록 지성인이라면 취해서는 안 될 편협한 태도라 하겠으나 읽은 척에는 매우 유용한 어둠의 스킬이라 할 수 있는 바, 제 살을 베어먹는 심정으로 여기에 기록하는 것이다.




- 찌질한 주인공의 위대한 고전

 

앞서 당 작품에 대한 까대기적 읽은 척이 가능한 부분을 소개했다고 해서 고전 <데미안>을 주인공 싱클레어의 찌질함 그 자체로 혼동하는 것은 금물이다.

 

당 작품의 미덕은, 믿기지 않겠지만 주인공의 바로 그 찌질함에서 싹트기 때문이다.

 

자신이 저지른 찌질함을 인지하고, 그 찌질한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의 살풀이가 있은 후, 결국 그 혐오의 살풀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애쓰다 보니 어느 순간 덜 찌질한 인간이 돼있더라, 이게 바로 고전문학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리얼 월드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의 인간 각성 과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뭔가 시적인 표현으로 바꿔 말하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태초에 병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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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인즉슨 애초에 훌륭한 사람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이다. 날 때부터 존귀했다고 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전설은 그야말로 종교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SF일뿐, 거의 모든 사람은 자기 욕망에 눈이 어두워 탐욕을 부리고, 그 탐욕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떠벌리는 찌질이에서 출발한다는 얘기인 것이다. 예외 없이. 다만, 자신이 태초에 찌질이였다는 걸 사는 동안 지각하느냐 못하느냐, 혹은 나의 병신성을 좀 더 빨리 깨닫느냐 늦게 깨닫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러니까 나의 내면의 모습이 그랬던 것이다! 빙빙 돌며 세상을 경멸하던 나! 정신에 있어서 자부심이 충만했고 데미안과 생각을 함께 했던 나! 나의 모습이 그랬다, 취하고 더럽혀지고 , 구역질 나고 비열한 인간 폐물이자 잡놈, 야비한 충동의 기습을 받은 살벌한 야수였다! 모든 것이 정결함, 광채 그리고 우아한 사랑스러움인 저 정원에서 온 내가, 바하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를 사랑했던 내가! 아직도 속이 메스껍고 격분한 내 귀에 자제력 없이 멍청하게 헉헉 터뜨려대는 취한 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게 나였다!

 

데미안p.99~100 민음사, 전영애 역


 

고로 이쯤에서 아래와 같은 대사를 쳐준다면 읽은 척은 물론이고 대화의 물꼬를 <데미안> 따위와는 체급이 다른 실존주의적 거대담론의 방향으로 틂으로써 읽은 척 자체가 다 부질없어 보이는 경계해제의 상황으로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잠언인<너 자신을 알라>는 사실 <너 자신이 병신임을 알라>는 말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인 지도 모르겠어. 그래서 진정한 ‘나’를 찾는 게 어려운 거지. 찾는 거는 ‘나’인데 자꾸 병신만 보이니까 내가 아닌 거 같거든.”

 

그렇다면 우린 모두 태초에 병신이니 앞으로도 계속 병신인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건 첫 번째, 자신의 병신성을 평생 인지조차 못하거나 두 번째, 인지했다 하더라도 다종다양한 이유(게으름, 불신, 망각, 착각 등)로 그냥 널부러진 채 결국 병신으로 일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아니면 남의 병신성을 위안 삼아 안분지족하거나.

 

아닐 수도 있는 경우는 그럴 수도 있는 경우의 두 번째 상황을 공유하면서 출발한다 하겠다. 즉 병신성의 ‘인지’에서, 인지했지만 계속 병신이 되는 경우와 인지했으므로 병신 탈출에 성공하는 갈림길이 앞에 놓인다는 얘기이다. 자신이 사실은 병신이었음을 인식하는 바로 그 절망의 순간이 병신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출발선도 동시에 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암에 걸렸다는 진단이 치명적인 병에 걸렸음을 선고 받는 절망임과 동시에 이제 알았으니까 그에 적합한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이 공존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것이다. 하지만 치료를 게을리 하거나, 객기로 술을 처마시거나 함으로써 그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는 더 큰 절망이 다시 그 앞에 닥칠 수 있다. 하지만 또 더 큰 절망의 지점에는 이제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자는 보다 절박한 희망 역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앞에는 절망, 또 그 뒤에는 희망.

 

결국 절망과 희망의 무한 반복, 니체의 표현을 빌자면 영원회귀,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을 예로 들자면 거울과 거울이 마주섰을 때 펼쳐지는 무한 반사의 이미지가 바로 인간이 병신성을 극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운명을 예고하는 무엇이라 할 수 있다.

 

절망과 희망 말고도 선과 악, 사랑과 증오, 탐욕과 결핍 등 관념적으로는 완전히 상반되어 보이는 여타 대립항들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쌍들 같지만 사실은 뒤통수끼리 붙어있는 야누스여서 어떤 얼굴을 대면할지는 전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선정과 시선고정에 달려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바로 여기에 <데미안>의 가장 중요한 테마인 압락사스에 대한 이해와, 데미안은 과연 어떤 종류의 인간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맥락이 존재한다.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혔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압락사스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처음에 겁을 먹고 느꼈던 것처럼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또한 더 이상 내가 베아트리체의 영상에다 바친 것 같은 경건하게 정신화된 숭배 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둘 다였다. 둘 다이며 또 훨씬 그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보였다. 나는 운명을 동경했고,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운명은 늘 거기 있었다. 늘 내 위에 있었다.

 

데미안p.128 민음사, 전영애 역



결국 어떤 한 지점에서만 볼 수 있는 야누스의 얼굴 한쪽만을 두고 ‘이것이 야누스다.’라 규정하는 건 그것이 얼마나 명백하건 간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모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다른 반대편의 야누스를 명백히 배제한 규정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데미안>의 신(神) 압락사스는 천사와 사탄, 남과 여, 인간과 동물, 선과 악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원론적 관습에서는 둘을 동시에 품는다는 게 있을 수 없는 모순처럼 여겨지겠지만 압락사스의 세계에서는 둘을 한 몸으로 여기는 맥락의 연장, 범주의 확대가 오히려 모순을 없애는 방법이니까. 혹은 모순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관점이니까.

 

바로 또 여기서 당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데미안의 정체가 밝혀진다 하겠다.

 

앞서 등장인물 소개에서 살짝 언급한 바 있듯 미소년이라서, 아니 곤경에 처한 싱클레어를 아무런 조건 없이 구해주니까 천사일 것만 같은 데미안은 또 어떤 면에서는 악마라고 볼 수도 있다. 일반적 기독교인이라면 혐오할 수밖에 없을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이 사실은 뭔가 남다른 능력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왜냐하면 아벨을 죽였음에도 이마의 표식으로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보호받았다는 기록은 뭔가 모순돼 보이니까)을 갖기도 하고, 예수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 중 끝까지 개종하지 않은 한 명이 악마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의리 있는 남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이단적인 생각과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천사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마도 선과 악을 동시에 갖는 신 압락사스의 신봉자로서의 데미안을 평가하는 가장 모범적인 대답이라 할 것이다.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다. 천사의 맥락과 악마의 범주를 동시에 인지함으로써 모순을 최소화하려 했던 각성인(人).’


이것은 필자가 생각하는 데미안의 정체이다. 적절한 선택은 상황에 따른 독자의 몫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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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본 읽은 척 매뉴얼은 누군가에게 잘 알지 못하는 책 얘기로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때 자신의 자아를 방어하기 위한 호신용 매뉴얼일 뿐이다. 결코 자신보다 더 책을 읽지 않는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한 나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편집부 주


글은 잘 읽어 보셨능가?

요러코롬 주옥 같은 글들이 꼬깃꼬깃 가득가득 들어가 있는

무규칙 이종 매거진 <더딴지>의 구매 의사가 막 부풀어 오르지?

뭐라구?

어차피 딴지일보 전문공개 기다리고 있다가 읽음되지 않겠냐구?


우리도 바보는 아니다!

너님들의 심장이 가장 바운스한 시점에서 

글을 싹둑 자르고 '더딴지에서 확인하세요~' 하는

야멸찬 짓을 더는 하기 싫다구!

그러니 웬만하면...


얼른 사서 읽어라. 

세계최초 2013년 결산특집 <더딴지> 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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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어봐서 아는데...


대따 재미짐.



딴지마켓









편집장 너부리

트위터 : @newtoilet


편집 : 홀짝,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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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