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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5. 수요일

독일특파원 타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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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나 까자 - 아부나이 대마초]

[알고나 까자 - 네오나찌]

[알고나 까자 - 나찌 수용소(上)]

[알고나 까자 - 나찌 수용소(下)]

[알고나 까자 - 회장님의 재테크, 미술품()]

[알고나 까자 - 회장님의 재테크, 미술품()]

[알고나 까자 - 오바마의 미저리]

[알고나 해라 - 경주 월성]

[알고나 까자 - Life of 대학생]

[알고나 까자 - 언론과의 싸움 <1> 빌트지와 대학생]








지난 번 빌트와 조선일보의 행태를 비웃으며 글을 썼는데 딴지 내부의 적색테러분자인 누군가가 마빡에 올라가는 그림에 빌트=조선일보+딴지일보 라는 선동적이고 악랄한 글귀를 박아 넣었으므로 민족정론지 대딴지 그룹은 빠르게 내사를 진행해서 빨갱이 분자를 색출하여 종북말고 월북시키기를 바란다.

 

(사진 달아주시는 꾸물님 ... 사....사.....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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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사진이 왜 올라가지?

좌측 손가락이 잠시 미끌어 진 것 같다.


지난번 글의 말미에 언급한 오네조르그의 사망은 분명 많은 대학생과 시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빌트의 비틀고 꼬고 왜곡한 기사는 그 불에 기름을 아니 항공유를 부은 거나 다름 없었다.


Ein junger Mann ist gestern in Berlin gestorben. Er wurde Opfer von Krawallen, die politisch Halbstarke inszenierten. Gestern haben in Berlin Krawallmacher zugeschlagen, die sich fur Demonstranten halten. Ihnen genugt der Krawall nicht mehr. Sie mussen Blut sehen. Sie schwenken die rote Fahne, und sie meinen die rote Fahne. Hier horen der Spaß und der Kompromiß und die demokratische Toleranz auf. Wir haben etwas gegen SA-Methoden. Die Deutschen wollen keine rote und keine braune SA. Sie wollen keine Schlagerkolonnen, sondern Frieden.


한 젊은이가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는 정치적 반동세력이 주도한 폭동의 희생양이었다. 어제 베를린에서 데모 인파에 끼어있던 폭동의 주 세력들은 폭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이제 폭동 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들은 꼭 피를 봐야만 한다. 그들은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붉은 깃발의 사상을 따른다. 이제 모든 재미와 화해, 민주주의적 관용을 멈춘다. 우리는 대학생들의 폭력을 동원한 방식에 대응할 채비를 다 갖추었다. 독일인은 빨갱이와 히틀러 친위대를 원치 않는다. 독일인들은 폭력적 행렬을 원치 않는다. 다만 평화를 바랄 뿐이다.



이런 기사 따위가 신문에 버젓이 실리자 앞뒤 가리지 않고 데모하는 대학생들이 문제라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망한 오네조르그의 임신한 부인에게 편지도 쓴다.


Liebe Frau Ohnesorg! Der Tod Ihres Mannes kann nur noch einen Sinn haben, wenn es Ihnen gelingt, dem Kind, das Sie erwarten, klarzumachen, daß sein Vater ein Fehlentwickler war.


존경하는 오네조르그 여사! 당신 남편의 죽음은 단지 한 가지의 의미밖에 가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다면 앞으로 나올 그 아이에게 확실히 주지 시키세요. 아이의 아버지는 틀린 생각을 가진 이상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이죠.



이를 보는 사람들은 열이 뻗치기 시작한다. '뭣 같은 언론사와 그들에 동조하는 세력들... 게다가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고 사회적으로 더 많은 힘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반대의 입장에 있는 빌트 구독자들 역시 열이 받는다. '아니 젊은 것들이 공부하고 애국하라고 대학 보내 놨더니(등록금도 공짠데) 맨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몰려 다니면서 데모질이나 해댄단 말이야? 썩을 놈들'



빌트의 전략은 명확했다.


'저 운동을 하는 학생들은 위험하고 빨갱이 사상에 전이되어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그런 놈들인 것이고, 이러한 사회를 지켜야 할 경찰이나 당국의 힘은 조금 약하다. 우리는 보수 우파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국자들이다.'


이러한 방식은 물론 지지자들에게 굉장히 잘 먹혀 들었다.


어라? 한국 얘기 아니냐고? 어허 의심을 하지 말라니까. 우리는 지금 1968년 독일이다. 전 세계가 냉전의 시대이자 이데올로기만 가득한... 사상이 전부인 그런 암울한 시대 말이다.

 

 

지난번에 잠깐 언급한 루디 두치케의 전면 부상이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 이 동독에서 탈출하여 서독으로 온 젊은 청년이 주장하는 바는 명확했다. 어렵지도 않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였다. 한마디로 정리 하자면 ...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이것이 바로 그가 목에 힘주어 부르짖던 구호였다.

 

두치케는 혁명이 한번에 짠하고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도 꿈꾸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경계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만약 저런 식으로 한번에 조직적으로 성공한다면, 결국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사회의 엘리트 계층에 의해서 다시 사회가 재편되는 엘리트주의를 강력하게 경계했다.

 

그가 굳이 어린 나이에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온 것도, 그 이후에 러시아와 동독의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 닿아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결국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고, 그렇게 혁명은 성공이 되어야 하며, 이는 독일이나 유럽의 몇 개국의 지엽적 혁명이 아닌 전 세계적인 운동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상당한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는 어쨌든 독일과 유럽 내에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관한 반대 여론을 환기 시키는 데 주요한 운동을 주도했고, 마틴 루터 킹의 암살 사건에 대해서도 (적어도 유럽내에서) 많은 이들의 동조를 이끌어 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 이유에서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러도 좋고 아나키스트라고 불러도 좋으며 혁명가라고 불러도 좋다.



이런 루디 두치케에 대한 빌트의 미움은 극에 달했다. 빌트는 특히나 루디 두치케에 대한 반감을 대 놓고 드러냈는데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이 미움이 악셀 슈프링어가 대학을 안 나와서 그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두치케의 사회주의적 이상향이 빌트의 사상과 너무 맞지 않아서 그랬다는 해석도 있지만, 글을 쓰면서 찾아본 자료를 토대로 생각한 필자의 견해는, 빌트가 혹은 그 신문사의 편집장들이 일부 여론을 움직이는 힘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잘 알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면 상대를 짓밟지는 못할지언정 사회의 또 다른 그룹과 지들끼리 싸우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빌트의 치밀한 까대기, 빨갱이, 요즘 젊은이들 쯧쯧 정신 등 이 모든 것을 융합한 미래창조 전략과 이로 인해 형성된 독일의 보수적 여론에 의해 1968년 2월 베를린에서는 학생운동에 반대하는 데모의 규모가 눈덩이 처럼 불어나기 시작한다. 무려 8만여 명의 어버이 연합 보수적 시민들에 의한 이 상황을 본다면 일개 황색 언론이라 치부하던 빌트의 위엄을 실감할 수 있다.



그니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조선일보가 설치자 오프라인 일베와 어버이연합이 손잡고 나타난 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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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트지 기사(젊은 빨갱이들의 테러를 당장 멈추게 하라)


Stoppt den Terror der Jungroten jetzt!


Man darf uber das, was zur Zeit geschieht, nicht einfach zur Tagesordnung ubergehen. Und man darf auch nicht die ganze Drecksarbeit der Polizei und ihren Wasserwerfern uberlassen... Unsere Jung-Roten sind inzwischen so rot, dass sie nur noch rot sehen, und das ist gemeingefahrlich und in einem geteilten Land lebensgefahrlich. Stoppt ihren Terror jetzt!


젊은 빨갱이들의 테러를 멈추게 하라!


이제 사람들은 현재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일상시처럼 그냥 지나쳐선 안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제 이 모든 더러운 일들을 단지 경찰들에게 해결하도록 놔 두어서는 절대 안된다. 우리의 젊은 빨갱이들은 그러는 동안 너무 나도 빨개졌고 그들의 눈에는 빨간색 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의 위험이 되었고, 우리처럼 분단 된 국가에서 시민들이 목숨을 위협 받는 상황이 연출 된다. 그들의 테러를 당장 멈추게 해라!



그리고 그 바로 밑에는 두치케의 사진이 대문짝 만하게 걸려 있었다.


당시 독일의 대학생들이 주로 정부에 대해서 데모를 한 이유를 크게 보자면, 대연정(Große Koalition), 긴급조치법(Notstandgesetz)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였다.


각 항으로 들어가면 논지에서 벗어나므로 일단 그러려니 하자. 절대 내가 모르거나 머리 아픈 얘기라서 그런 거 아니다. 한 번만 믿어주라 !!



사실 당시만 해도 많은 학생들의 시위의 형태는 마치 우리나라의 촛불 시위처럼 제자리에 앉아서 서로 서로 몸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구호나 외치고 있으면, 경찰이 와서 '너님들 해산 할 시간이다.' 혹은 '너님 지금 금 넘었다.' 혹은 '너님이 교통의 흐름을 방해한다' 등의 이유를 대며 친절하게 질질 끌어내 닭장차에 잠깐 잡아가고 경찰서 가서 "어이~ 대학생이라 놈들이 쯧쯧..." 하는 그런 식의 시위를 진행하곤 했다.


각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선언, 시위, 토론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사회의 지식인 계층과 대학생들 그리고 티비 토론도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하지만 빌트는 이런 논쟁의 중심이 주요한 것이 아니라 데모하는 대학생과 그로 인한 티끌 만큼 자그마한 피해를 부각하는 데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라곤 해도 아직 추위가 가득했던 1968년 4월 11일 16시 40분 경 루디 두치케는 평소와 같이 자전거로 베를린의 사회주의 대학생 연합(SDS)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 그 곳에서 동료에게 전할 몇 가지 서류를 챙기고 밖으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약국에서 아들에게 줄 감기약을 사고 자전거를 다시 타고 돌아 가려는 순간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걸어오더니 말을 건넸다.


Bachmann : 혹시 루디 두치케씨 아니세요?


Dutschke : 예 전데요.

 

상대는 자전거 앞을 막아 서서는 품 안에 있던 권총을 꺼내어 얼굴에 두 발, 어깨에 한 발을 발사한다.


루디 두치케는 길에 쓰러졌으나 다행히 빠른 시간 안에 발견되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몇 시간의 대수술 끝에 심각한 뇌 손상을 입긴 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는 데 성공한다.

 

두치케를 저격한 인물은 요세프 바크만이라는 네오나찌 당원이었다.

 

그가 타고 온 차의 보조석에는 네오나찌용 신문이 있었는데 그 1면에는 “Stoppt Dutschke Jetzt!” (두치케를 당장 멈추게 해라)라는 타이틀이 걸려 있었다.


네오나찌 당원지를 보고 있던 바크만과 빌트지가 무슨 상관이냐고 반문할 의심 많은 너님들을 위해 친절한 독일어 문법 설명 들어간다.


빌트               “Stoppt den Terror jetzt” (테러를 당장 멈추게 해라)

네오나찌 당원지 “Stoppt Dutschke Jetzt” (두치케를 당장 멈추게 해라)


 

문법 설명이라고 썼지만 뭐 그냥 눈으로 보면 해석되는 독일어이므로 대강 넘어 간다. 스톱은 스톱이고, 테러는 테러고, 두치케는 사람 이름이고, jetzt는 지금 이라는 뜻이다. 이제 너덜도 독일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레벨업~

 

아니 그게 아니고... 쿨럭... 아무튼 네오나찌 당원지나 빌트나 그 선동 문구라던가 제목의 수준이라는 것이 비슷할 정도로 당시의 신문 수준이라는 것이 극단적이었다. 바로 적대화 방식, 그것이 저 신문들의 주요한 특징이다.



이미 그 전에도 사이가 좋지 않다 못해 서로를 적대시 하던 빌트와 대학생들은 위의 두 사건을 계기로 한쪽은 글로 한쪽은 행동으로 양 극단을 치닫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다.


빌트 : 옛말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다. 어디 함 해봐라! 우리의 독자들이 너덜을 가만 놔둘 것 같냐?


대학생 : 좆까! 구라치다 걸리믄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안배웠냐? 아그야 오함마 가져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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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악셀 슈프링어사 몰수운동 평화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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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빌트 배달용 승합차를 다 태워버린 과격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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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슈프링어 출판사 앞 집단시위!

경찰들 수 봐라~ 막을 수 있겠냐?

한국에서 한 수 배워가야 할텐데....

 

빌트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구호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베를린에서는 악셀 슈프링어 사로 쳐들어간 시위대가 빌트 배달 트럭에 불을 질러 버린다. 함부르크에 있던 빌트지 인쇄소는 시위 군중에 둘러싸여 신문 자체를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뮌헨에서는 편집부 사무실이 시위 군중에 의해 때려 부서지고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시위대는 경찰에 잡혀가고 뚜드러 맞고, 빌트는 아이 ㅆㅂㅆㅂ 하면서 계속 글은 써 나가고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보다 못한 여러 지식인들도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학생을 어르고 달래려는 교수들, 학생편에 같이 서는 문학가들, 학생들보다 더 익스트림하게 나가는 기자들 등 일대 혼란이 야기되고 그렇게 독일의 68운동이 점점 더 극우로 극좌로 치닫는다.



아도르노, 귄터 그라스, 페터 륍코프, 클라우스 스텍, 하인리히 뷀 등의 이름을 하나도 모르면 어떠리 그냥 저런 사람들이 같이 비판하던 주류 학자들 이라고… 대충 넘어가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인 사회학자 아도르노 같은 경우에는 당시 빌트를 비판하면서도 학생들이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것에 비판적이라는 의견을 내비쳤는데, 나중에는 아도르노가 연단에 오르자 학생들이 당장 꺼지라고 야유했던 사건은, 당시의 학생들의 분위기가 얼마나 빌트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척도라 하겠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항상 극 중의 극을 치닫는 애들이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 아니냐.


새누리가 통진당과 이석기를 적군단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은 시각이 느껴지던데... 얘들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초... 초... 초극단을 달리는... 하긴 공주님한테 통진당도 초... 극단을 달리는 애들 일테니 뭐...


이제 RAF(적군단)라는 조직이 이미 존재하던 많은 대학생 조직들을 제치고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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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적군단 사진.

졸~라 남녀평등 실천 하셨다.

머리 길이의 차이뿐~


적군단이라는(DE. Rote Armee Fraktion , EN red army faction)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극 좌파 테러조직이다. 이들이 조직된 주 요인은 앞의 두 청년의 사건이었으며, 이들은 현대에 일어나는 도시형 테러(알 카에다 같은)의 원조격인 많은 업적을 세움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아주 좆 되게 만든 경험을 가지고 있다.


앞의 두치케도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현재의 독일 제1 야당인 사민당(SPD)역시 일정 정도 사회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등 독일에서의 사회주의는 상당히 보편적인 사상이다.


다만 적군단은 그들의 정신적 멘토를 두치케로 삼으면서도 그들의 희생을 위한 피의 복수와 적들을 섬멸하자는 의지로 다져진 공산주의 테러 조직에 그 정신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RAF의 이야기는 The Baader Meinhof Komplex(바더 마인호프 컴플렉스)라는 영화에 자세히 나와 있다. 한 번쯤 보는 것을 추천한다.



타데우스의 졸~라 적정 관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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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과 극좌파의 당시 상황을 이해하고 싶다면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는 지금 빌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므로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고까운 빌트지를 적군단이 그냥 놔둘리가 없었다.



1972년 5월 19일 함부르크에서 빌트를 인쇄하던 악셀 슈프링어 출판사에 의문의 전화가 온다.


RAF : 이봐 내 귀에 도청장치가 지금 건물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전부 밖으로 대피해!


Bild : 휴 ~ 또야? 알겠어~.


RAF : 지금 농담 하는 거 아니야.


Bild : 알겠어. 그런데 우리 이런 전화 하루에도 몇 번씩 받거든. 좀 그냥 내버려 둘래?


쿠 쾅 ㄴ어ㅏ리마ㅓㅇㄹ~~~ 쾅 쾅 니ㅏ얾


테러범들은 폭탄 테러 이전에 2번의 전화를 걸어 대피하라고 알려줬다. 하지만 악셀 슈프링어 인쇄소는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1968년 악셀 슈프링어가 그리고 빌트가 두치케를 ‘국가의 주적 No.1’ 이라고 선포한 이후로 이런 식의 협박 전화에 이미 익숙해져 있던 직원들은 그들의 경고를 그냥 넘겨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총 세 발의 폭탄이 터졌고 터지지 않은 세 발은 폭탄 제거반에 의해 나중에 해체 된다. 즉, 적군단은 슈프링어 건물에 무려 여섯 개의 사제 폭탄을 사무실과 화장실 등에 숨겨 놓고 떠뜨려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17명의 직원이 부상 당했고 그 중 두 명은 심각한 중태에 빠지게 된다.


적군단은 폭탄테러 며칠 후에 성명을 발표하고 선언문을 공표한다.



슈프링어는 자신의 직원과 노동자들을 폭탄 테러의 위험에 노출 시키는 것을 선택했다. 몇 시간 알람을 울리고 직원들의 노동의 시간을 줄이기만 했어도 될일을.. 자본가들에겐 이득이 전부이다. 그 이득을 만드는 노동자들은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우리는 부상당한 직원과 노동자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슈프링어를 (회사와 개인의) 몰수하라! 국민의 주적을 (슈프링어)몰수하라



- 6월 2일의 코만도로부터-


- 울리케 마인호프- (전직 저널리스트이자 적군단의 핵심 브레인)


 

6월 2일의 코만도는 오네조르그가 쿠라스라는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바로 그 날을 기리며 오네조르그의 이름으로 테러를 자행한 것이다.


물론 RAF의 테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피의 5월’이라는 구호 아래 독일에 머무는 프랑크푸르트 미군기지와 뮌헨 주 경찰서, 아욱스부르그의 경찰국등의 테러와 판사를 죽이는 등 5월 한 달 동안만 무려 41명의 사망자를 낸다.


만 이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가장 큰 사고가 바로 무고한 17명의 악셀 슈프링어 직원들의 부상이었다. 군인이나 경찰을 상대로 한 테러에 비해 무고한 희생 만을 낳은 이 사건으로 적군단 내부에서도 이견이 생기고 국민들의 여론이 완전히 돌아서는 계기도 되었다.

 

 

이들의 행위는 국가나 보수단체, 우파, 빌트 뿐만 아니라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치명적인 뇌의 손상으로 더 이상 대외 활동을 전혀 못하고 외국으로 망명한 두치케에게서도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가 사회적 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으므로 직접적 목소리를 낼 순 없었지만, 두치케 사후에 공개된 그의 일기장에는 적군파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실려있다.

 

빌트지는 적군파가 극을 달리며 스스로 좆되는 길을 선택 했으므로 여론이 그들의 반대 편에 서 있는 자신들에 대해서 조금은 긍정적으로 변할 것을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일이 어디 그렇게 뜻대로 돌아가나...

 

그들은 흑백으로 세상을 보았을지 모르나 세상은 빨주노초파남보였는지, 이 즈음 국가가 적군단에 대한 범죄와의 전쟁 선포와 동시에 빌트 역시 제재를 받기 시작한다.

 

머 적군단 이야기 보다는 빌트의 이야기이므로 이쯤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들의 공과 과의 평가에 있어서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면 찬반 양론이 나뉘어져 있었고 뭐 그런 졸라 복잡한 얘기 나오니까 말이다. 적군단의 이야기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써보는 것으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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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단 수장 안드레아스 바더가 잡히던 날

빌트는 신이 났을까?

(바더가 적군단의 폭발물 창고에서 체포되었다.)


지금껏 빌트의 적대화 방식이 잘 먹혀든 것과 그들의 언론의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도 전부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펜 하나로 영원한 권력을 잡을 순 없었다.


펜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빌트보다 더 강자가 나타날 테니 말이다.


하인리히 뵐이라는 먹물 좀 먹어본 사람들은 다 알 만한 유명한 독일의 문학가가 대표적으로 빌트의 반대편에서 힘을 주어 펜대를 세웠다.


역시 사람은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듯 스펙 왕 뵐은 거침없이 신문에 글을 쓰고 소설을 출간했다.


그의 화려한 스펙은 일단 1970년 부터 독일 PEN-클럽의 (국제 문학가 협회poets essayists novelists)회장 이었다. 그러다가 71년부터 전세계 PEN 클럽의 회장이 되더니 72년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거침없이 받아 버린다.


원래 이렇게 이름 빨 날리는 사람 함부로 못 건들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는 신문에 그리고 소설로 거침없는 비판을 가한다.


그 중 특히 유명한 것이 그가 슈피겔 이라는 신문에 기고한 에쎄이 <울리케는 용서 받거나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까?(Will Ulike Grade oder freies Geleit?)>라는 제목의 글이다. 노벨상을 받았다고 감히 적군단을 감싸다니 대단한 깡다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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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 빌트 1면: 바더 마인호프 그룹이 살인을 계속하다.

은행강도: 경찰을 쏘다.

(下) 당시 뵐이 슈피겔 신문에 기고한 에쎄이

 

이 글에서 그는 적군단에서 테러 활동을 하던 울리케 마인호프에 대한 그리고 적군단 자체에 대한 동기와 방식을 서술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논의를 사회 밖으로 끌어 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톤을 높여 빌트와 악셀 슈프링어사 출판사의 행태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함으로써 사람들의 의식을 많이 바꾸기도 하였다.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을 탄 누군가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를….


참, 우리나라는 노벨상 돈 주고 사 왔다고 앞에 가서 데모하고 그러지… ㅜ.ㅜ



아무튼 그의 이러한 행적이 당시 보수적인 정부나 빌트에게는 당연히 맘에 들지 않았고, 그에 따라 그의 집이 압수 수색을 당하기도 하고, 뵐 반대 데모도 일어나고, 보수 신문에서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까이고 등 그런 뻔한 고초를 겪다가 1974년 한 권의 소설을 발표한다.

 

물론 뵐의 소설쓰는 작업이 또는 그가 양심에 따라 투쟁한 방식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가 6대 6천만의 전쟁이라고 표현한 적군파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은 당시의 반대편 시민들과 빌트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이 옳다는 신념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글을 쓴다는 사명감으로 현재 뵐은 2차대전 이후 독일 최고의 작가로 꼽히고 있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제목의 소설은 딱히 빌트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빌트에 대한 비판이 응축되어 있는 책이다.



타데우스의 읽은 척 매뉴얼 드간다. 라고 하고 싶지만 나도 영화로 봤다.


이 소설은 평범한 27세 여성 카타리나 블룸이 한 일간지 기자를 살해하게 된 배경을 줄거리로 한다. 블룸은 카니발 기간에 벌어진 파티에서 은행강도에 살인혐의까지 있는 괴텐을 사랑하게 되어 하룻밤을 보낸다. 그녀는 이 일로 경찰에 소환된다. 일간지 <차이퉁>은 조사과정을 필요 이상으로 공개해 블룸을 괴텐과 공범인 것처럼 몰아간다.

 

또 그녀의 지인을 인터뷰해 그녀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만든다. 조서의 토씨 하나도 다시 점검하고 서명하는 꼼꼼한 성격의 카타리나 블룸은 <차이퉁>에 등장한 자신의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인터뷰 내용을 점검한 뒤 그것이 사실과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고, 결국 <차이퉁>기자를 살해한다.


어머니조차 딸을 범인으로 생각한다고?


뵐은 살인 사건의 전말을 알리기 위해서 블룸이 경찰 수사를 받는 날부터 5일 간 그녀의 행적을 재구성하여 보고한다. 작가는 소설 곳곳에 직접 등장하여 사건의 이해를 돕는 논평을 한다. 그 덕분에 독자는 블룸이 왜 <차이퉁>기자에게 반감을 갖게 되었는가에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소설을 읽어 내려가게 된다.

 

<차이퉁>의 왜곡보도는 도가 지나쳤다. 블룸과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보도사례에서 왜곡은 절정에 이른다. 블룸의 어머니가 “왜 그런 결말이 날 수밖에 없었을까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말한 것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듯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겠지요”라고 바꿔 보도한다.

 

블룸의 어머니는 건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기자는 의사의 만류를 뚫고 병원직원으로 변장해 몰래 잠입한 뒤 딸의 혐의 사실을 알리고 인터뷰를 강행한다. 놀란 어머니가 충격으로 사망하자 오히려 블룸을 ‘어머니를 사망하게 한 불효녀’라고 매도한다.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분노한 블룸이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장례식에서 눈물을 꾹 참자, <차이퉁>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않는 냉혈녀’라고 보도한다.

 

‘색깔’ 공격에 동원되는 것들

 

<차이퉁>은 블룸이 ‘빨갱이’라는 색깔공격도 빼놓지 않는다. 그 근거로는 블룸이 일하는 집 주인인 블로르나 변호사의 부인이 진보성향이라는 것과, 블룸의 아버지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든다. 이는 블룸의 성향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지 못 할뿐더러, 설사 블룸이 사회주의자라 하더라도 괴텐을 숨겨주고 도망치게 한 혐의와는 무관한 인신공격일 따름이다.

 

언론에 대한 작가의 시각은 당대 현실과 관련이 있다. 68혁명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의 독일 한 소도시에서 은행강도 사건이 일어나 시민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한다. 통속적인 일간지 <빌트>는 별도의 확인절차와 증거도 없이 이 사건을 68혁명 당시 도시게릴라였던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바더 마인호프 그룹, 살인 행각을 계속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뵐은 <빌트>지의 보도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슈피겔>지에 쓰지만 대중들은 오히려 ‘뵐이 테러조직을 옹호한다’며 분노한다. 이 사건은 <잃어버린 명예>의 직접적인 배경이 된다.

 

저널리즘에 대한 이 소설의 묘사는 현실의 여러 장면들과 겹친다. 뵐은 이 책의 서두에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은 자유로이 꾸며 낸 것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와 유사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라고 썼다. ‘불가피하다’라니, 작가가 저널리즘을 생각할 때 <빌트>의 보도행태를 짚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빌트>의 흥미위주 가십보도가 <빌트>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일까?

 

- 출처 단비뉴스 (??하인리히 뵐, '한국식' 왜곡보도를 고발하다)


 

*위의 차이퉁(Zeitung) 이라는 단어는 '신문'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한 신문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설 속 차이퉁은 누가 보아도 빌트-차이퉁의 줄임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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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주인공과 하인리히 뵐


이쯤 되면 빌트고 뭐고 시끄러운 것을 국가에서도 조금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68혁명부터, 테러, 언론의 보도, 시민들의 죽음 이런 것들이 국가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도가 지나쳤을지 모른다.



또 한번 투비 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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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너 언론 분석 특집 관련기사>


[프랑스 언론의 스펙트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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