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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9. 금요일

산하








11월 26일 어느 특이한 목사의 소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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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앞 전철역을 통과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동묘가 누구를 모신 곳인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한때는 임금까지 거동하여 이곳에 모셔진 이를 향해 경배하고 제사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이곳의 주인은 우리 역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중국인들의 영웅이다. 바로 삼국지의 한수정후 관우 운장. 삼국지의 어느 주인공보다도 관우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은 날이 가고 왕조가 바뀔수록 드높아져 청나라 때에는 관성대제라고 해서 황제의 칭호를 얻는 데에 이른다. 또한 관우의 무덤을 ‘관림’이라 일컬으니 이는 공자의 무덤 ‘공림’과 맞먹는 그레이드를 의미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나온 명나라 장수들도 관우가 자신들을 도와 준다고 믿었고 조선을 윽박질러 관우 사당을 세우도록 한 것이 동묘의 시초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 민족은 뭐가 들어오든지 종교가 되는 종교적인 민족이다. 이 관우 숭배는 20세기 초 ‘관성교’라는 종교로 정립(?)되기도 하거니와 많은 이들이 관우를 신으로 숭배하고 섬기며 그 은혜를 빌며 도를 닦았다. 그 중에는 평안도 안주 출신의 한 젊은이도 있었다. 기울어가는 나라의 무과에 급제한 지방군관의 아들로서 누나 같은 아내를 열 한 살에 맞아 엄마와 아내의 손에 컸던 청년이었다. 무슨 일로인가 척을 졌던 동네 왈패들에게 두들겨 맞은 이후 그는 힘을 기르려는 마음에 ‘도를 아십니까’에 빠지게 되는데 그게 관우를 섬기는 도였다. 그는 이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보인다. 이런 저런 도인들을 만나 공력을 늘려가던 그는 쇠약했던 건강을 도력을 통해 회복하는가 하면 한약의 대가가 되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는 등 전우치급의 도술을 부리는 ‘도사’로서 유명해진다. 그의 이름은 길선주, 그래서 길도사, 길장사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그런데 이 ‘도사님’이 또 다른 도에 접하게 된다. 절친한 친구가 기독교인이 된 탓이다. 그는 끊임없이 친구 도사에게 복음을 전했고 긴가민가하던 길도사는 자신이 그때까지 믿던 신령님에게 열렬히 기도를 올리게 된다. '예수라는 거 믿어도 되는 겁네까? 아니면 어드렇게 하까요?' 열정적인 기도의 와중에 이 도사님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하는 세 마디의 부름이었다. 지금껏 도 닦고 약 짓고 차력 쓰던 길도사는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여, 제 죄를 사하여 주시고 저를 살려주옵소서.”라고 신앙 고백하는 어린양으로 돌변한다. 한국 기독교의 유별난 풍습(?) 중의 하나라 할 ‘새벽기도회’는 어쩌면 이 길도사에게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도사 시절 몸에 뱄던 새벽 예불을 ‘새벽기도회’로 바꿔 적용한 것이 바로 길선주였기 때문이다.


도사님은 목사님하고도 통했는지 그는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한 끝에 목사가 됐고 곧 한국 기독교사, 아니 한국 역사에 남을 사건인 ‘평양 대부흥’의 단초를 제공한다. 일설에 따르면 1903년 신년 무렵에 기도회가 열렸다. 평범한 기도회라기보다는 특별한 하느님의 역사를 바라며 선교사와 신도들이 한 덩어리가 돼 지성으로 열심히 기도에 나선 ‘용맹정진’이었다. 이른바 ‘성령의 불길’을 경험하고자 하는 목적의식적인 기도였다. 그런데 별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다들 집에 가자는 상황에서 길선주가 나섰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아간이란 여호수아기에 나오는 인물이다. 하느님에게 돌아가야 할 전리품을 슬쩍 했다가 여호수아에게 사형당하는 사람이다. 길선주는 그를 자처한 것이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친구가 임종 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니 내 집 살림을 돌보아주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잘 돌보아드릴 터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산을 관리하며 미화 100달러 상당을 훔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는 그 돈을 미망인에게 돌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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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선주 목사


길선주의 이 통렬한 반성은 내 죄를 용서하소서 기도는 하면서도 속에 꽁꽁 숨겨 놨던 동료들의 죄의식의 수문을 열어 놓았다. 불길 같은 성령(?)이 좌중을 휩쓸었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회개와 감사 눈물범벅의 기도가 이어졌다. '그는 길선주가 아니라 예수였다.'고 까지 동료가 얘기했으니 길도사는 바야흐로 길목사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었다. 이런 유형의 회개와 고백, 신앙과 열정이 범벅이 된 집회는 바야흐로 새로운 신앙에 눈뜬 사람들을 자극했고 전국 각지에서 대부흥운동의 형태로 일어나게 된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도 그랬다. 선교사 헌트의 말에 의하면 수천 명의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6명의 ‘힘있는’ 남자들이 극심한 성령의 고통 가운데 자기 죄를 고백하며 참회하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때 길선주는 찬송을 부르며 청중을 고조시켰고 자신도 죄를 고백하는 대열에 동참한다. 이즈음 또 하나의 ‘한국 스타일’ 예배 양식이 태동하는데 바로 ‘통성기도’다.


길선주는 3.1운동의 33인 대표로 이름을 올렸고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는 그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1만 번도 더 넘게 읽으며 말세론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한때 도를 연마하고 스스로 상당한 경지에 오르는 수행 생활을 한 탓이었을까 그는 현실 사회보다는 절대적인 하느님의 때를 강조하고 그에 이르는 환난의 세상과 그를 이겨내는 신앙의 힘을 많이 강조했다. 만보산 사건 때 평양 시민들이 화교들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학살하자 평양이 어찌 이런 죄악의 도시가 되었느냐며 개탄하기도 했고 공산주의자들의 습격을 받기도 하는 와중에도 각지를 돌면서 선교에 힘쓰던 길선주 목사는 1936년 가을 새벽 기도회에서 쓰러진 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1936년 11월 26일. 불도와 선도를 두루 섭렵하고 ‘도가 터서’ 도사로 불리웠고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는 성령 충만한 목사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새벽기도 통성기도의 원조 길선주 목사의 소천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70여 년쯤 뒤 ‘아간’을 자처했던 그의 회개를 기묘하게 컨닝한 사람이 있다. “제가 바보 같아도 실지 바보는 아닙니다. 우리 집사람이나 애들이 성자는 아니고 훌륭한 사람은 아닐찌라도 도둑놈은 아닙니다. 도둑놈이 되도록 내버려 놓지는 않았습니다. 왜 제가 이 말을 하냐면 제가 아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길선주 목사는 친구로부터 100달러를 훔쳤다고 자신이 아간이라고 땅을 치고 통곡했지만 이 목사는 자기는 아간같은 사람은 아니라고 우겼다. 그의 이름은 조용기다. 교회 돈으로 아들 신문사 사장 시켜 주고 다양한 수단으로 신도들의 헌금을 자기 것처럼 주물렀던 사람.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아간이 아니라고 그런 놈이 아니라며 강변하고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배를 내밀었다. 한국 기독교의 타락상을 ‘아간’이라는 구약 시대 사람의 이름은 그렇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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