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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팔의 여성 인권


MBC가 ㅇㅂㅅ이 아니라 마봉춘이라고 불리던 시절, W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세계 각국의 시사 이슈들을 쫓아갔었는데, MB가 대통령이 된 후 다루는 내용들이 상당히 자극적인 것에 집중되더니 결국은 없어졌다. 시청률에 대한 압박이 꽤나 컸던 모양이다. 그 자극적인 내용 중 하나가 네팔 여성에 대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남편을 잃은 여인들은 흰옷만 입어야 하고 마을 밖으로 쫓겨 나서 살아야 한다는 풍습은 꽤 여러 번 다뤄졌다.


힌두교 풍습 중에는 반여성적인 것이 꽤 있다. 피를 흘리면 불결하다며 생리 기간 중엔 사원을 방문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힌두 원리주의자 정당인 BJP가 전 인도를 석권한 이후부터 이런 꼴통들이 더욱 날뛰고 있다. 


(*관련 기사: 중앙일보, 힌두사원 '부정한 월경 검사'에 인도여성 '발끈'(링크), KBS, 인도 '미망인들의 도시'..인권 변화 바람(링크))


그나마 인도는 사람들과 교류가 워낙 많다 보니 어찌 되었건 간에 문제 있는 풍습들이 조금씩은 개선된다. 하지만 고립된 지역으로 가면 대법원 명령으로 금지된 악습이라고 하더라도 유지된다. 그런 것 중 하나가 '차우뻐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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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뻐디란 초경부터 완경 때까지 생리마다 7일간 저런 곳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풍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생리가 불경하다며 집 밖으로 쫒아내는 것이다. 이 기간 중엔 집에 들어갈 수 없을뿐더러 남자를 만져서도 안 된다. 심지어 신성한 소는 물론 소로 만들어진 음식 등 영양가 있는 음식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 위험한 곳에서 여름엔 야생동물의 위협에, 겨울엔 추위와 싸워야 하는 악습 중의 악습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몇 달 전인 2016년 12월, 두 명의 어른 소녀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차우뻐디에서 불을 피웠다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Teen Vogue, A Nepali Teen on Her Period Died After Being Banished to a Hut(링크))


2005년, 네팔 대법원이 이 풍습을 금지시켜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라졌으나, 남서부 지방에선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네팔 여인들을 고난에 들게 하는 악습은 이뿐만이 아니다.


'카마이야'는 타루족 말로 '집안일을 돕는 것'이라는 뜻의 말이었다. 이것이 '땅을 가지지 못한 농부들이 지주가 허용하는 최소한의 식량만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한 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거의 노예 상태의 소작농). 최근에는 가난한 소작농이 자신들의 딸을 하녀로 일 년 혹은 다년간 부농에게 파는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로 불리기도 한다. 하녀로 팔려가 있는 동안, 성폭행이 다반사로 발생한다.



2. 네팔의 여인, 미라 라이


사회제도 혹은 풍습이 여성을 억압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따르지만은 않는 것이 네팔의 여인들이다. 누구나 그렇듯, 부당한 일에는 반발하기 마련이다. 그 분들 중 한 분을 모시고 살고 있어서 내가 잘 안다. 불패의 전사들이다.

 

농민에 대한 지주의 착취가 극에 달하면, 이 구조를 깨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가장 먼저 채택하는 투쟁강령은 모택동식 공산주의, 마오이즘이다. 인도 대륙에 처음 마오이즘이 소개되었던 것은 1960년대였다. 인도 북동부의 낙샬이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소작쟁의가 처참하게 진압당하는 것을 본 켈커타 대학생들이 조직화된 이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 중 한 명이었던 차루 마줌달이 현지화한 인도식 마오이즘은 간단했다. 농지를 경작하는 농민을 제외한 지식인, 자본가, 국가 행정인력 등은 모두 '인민의 적'이니 죽여라. 인도는 중국과의 관계를 의식해 이들이 봉기를 일으킨 낙샬 지역을 따서 낙샬바리라고 부른다. 이들이 네팔에 수입된 것은 1994년이었고, 1996년 2월 4일. 인민 전쟁을 선포한다. 네팔에선 이들을 마오바디라 불렀다. 


마오바디가 인민 전쟁을 선포하고 '여성에게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고 선언하자 네팔 각지에서 여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략 2만 명 수준을 유지했던 네팔 마오바디 인민해방군의 절반은 여성이었다. 미라 라이는 2003년에 마을로 찾아온 마오바디 인민해방군이 '여성에게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자 바로 합류했던 소녀들 중 한 명이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열 네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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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거넨드라 국왕이 하야를 선언하면서 네팔 내전이 끝났던 것이 2006년이다. 내전 종식 협상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네팔 인민해방군과 네팔군의 통합이었다. 2008년 네팔 육군참모총장은 이 통합을 거부했고, 이 문제 때문에 네팔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겸 네팔 수상이었던 푸스파 카말 다할이 사임한다. 통합은 2011년부터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국 남자에게 군대란 국가에 저당 잡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징병제가 아닌 자원 입대하는 국가에서 군대란, 나쁘지 않은 직장이다. 특히 네팔군은 전 세계에 평화유지군으로 많이 참여하며, 이들이 받는 대우는 네팔 사회 기준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러나 내전이 끝나 정부군으로 편입되어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라 라이에게 네팔 인민해방군이 준 것은 제대명령서였다. UN 기준에 따르면 미성년자들은 소년 소녀 병사들이었기 때문. 그녀는 정식 군으로 편입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3. 미라 라이, 산길을 달리다


열 살부터는 쌀부대를 이고 산을 오르내렸던 미라 라이가 마오바디 인민해방군 시절 가장 좋아했던 것은 무술과 산악 구보였다고 한다. 전역 이후, 그녀는 인민해방군 시절의 무술 사범을 따라 카트만두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좋아하는 뜀박질을 계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쉬바뿌리 나가르준 국립공원에서 조깅을 하고 있던 그녀에게 다른 조깅족들이 며칠 뒤에 대회가 있으니 참가해보는 게 어떻느냐는 제안을 한다. 


별 생각 없이 참가하겠다고 말한 그녀. 그녀는 이 경기가 카트만두 분지 서쪽 해발 2200에서 2700을 넘나드는 50km를 달리는 것이라는 걸 당일에서야 알게 됐다. 때문에 간단한 음식물을 준비한 대부분의 선수들과 달리 그녀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응원 왔던 친구들이 급히 과일과 국수를 주긴 했지만, 산길 50km에 필요한 에너지로는 부족했다. 이렇게 시작한 이 경주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달리 먹을 것 하나 갖고 오지 않은 그녀는 유독 눈에 띄는 존재였다. 아무 준비 없이 나와 산길 50km를 완주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산악 경주 대회를 주최한 이 중 한 명인 영국인 리차드 불은 그녀의 재능을 바로 알아봤다. 그는 바로 그녀에게 살 곳과 음식,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산악 경주에 참여할 수 있도록 비자 발급을 도와줬고, 대회 참가 경비까지 지원했다.


그렇게 해외 경기에 참여하기 시작한 지 1년만인 2015년. 그녀는 스페인에서 열린 스카이러닝 세계 챔피언스 쉽에서 2위를 차지했다. 상금은 1,000유로. 


2016년에는 십자인대파열로 경주에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파스타를 팔고 벤프 산악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된 다큐멘터리 '미라' 출연비를 합친 돈으로 운동화 90컬레를 걸고 자신의 마을에서 산악 경주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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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말, 네셔널 지오그라피는 그녀를 2016년을 빛낸 모험가 후보 열 명 중의 한 명으로 꼽았다. 우리가 광장에서 박근혜를 끌어내리기 위해 촛불을 드는 동안 네팔인들은 느려터진 인터넷으로 그녀에게 몰표를 던졌다. 미라 라이는 이 몰표에 힘입어 네셔널 지오글라픽 모험가로 선정되었다.



지금 네팔의 연합정부를 이끌고 있는 것은 3당이었던 마오바디 정당, 통합공산당이다. 징집 때는 미라 라이를 낼름 받았다가 정규균 편입 과정에서 소녀병이라며 뭐 하나 챙겨주는 것 없이 집으로 보냈던 그 정당이다. 그게 미안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올해 2월 네팔 체육청소년부는 네팔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공으로 그녀에게 3천만 원 상당의 상금을 수여할 것이라 발표했다. 


미라는 더 많은 네팔의 여성들이 산악경기에 참여해 자신을 이기길 바란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달리기를 통해 네팔의 차우뻐디와 카마이야 같은 악습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처럼 네팔의 모든 여성들이 이런 폐습을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말고 거기에 맞서 싸우는 수단으로 산악 경주에 참여하길 바란다고. 


악습이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믿고 10대에 입대했던 그녀는 군대로부터 버려졌음에도 다시 일어나 수많은 네팔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미라 라이. 그녀의 건투를 빈다.




Samuel Seong

트위터 @ravenclaw69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