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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여자가 다섯이었는데도 생리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사람이 한 명 없었다. 언니들이 읽던 <소라의 봄> 같은 만화책마저 없었다면 정말이지 까맣게 몰랐을 것이다. 90년대에 유행했던 ‘소라 시리즈’ 중에서도 <소라의 봄>은 건전한 어린이 성교육 입문서를 표방했지만, 나에게 그 책은 이불 속에서 몰래 읽고 어른들이 나타나면 황급히 숨기는 일종의 금서였다. 지식서로서의 역할은 아주 미약했던 그 책은 여성의 유방 발달을 ‘부풀어 오르는 꽃봉오리’로 표현하는 등 이차 성징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은유적으로 전달했음에도, 얼굴을 붉히며 몸을 꼬거나, 놀라거나, 부끄러워하는 인물로 그려지던 주인공 소라가 남자친구와 ‘진도’를 빼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에로틱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쨌든, 엄마도, 언니도 아닌 소라 덕분에 나는 ‘월경’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그것이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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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 만화 '소라의 봄'

사진은 일본어본


중학교 1학년 때 초경을 했다. 가족 여름 휴가차 설악산으로 떠나던 길이었다. 휴게소 화장실에 들렀는데 속옷이 빨갛게 젖어 있었다. 난감했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화장실 휴지를 팬티 위에 깔아서 뒤처리를 했다. 갑작스러웠던 생애 첫 생리는 다행히 부정출혈 같은 피 비침으로 끝났고, 진짜 생리를 시작하기까지는 또다시 몇 달이 걸렸다. 용돈을 들고 TV 광고를 통해 가장 자주 접했던 브랜드 생리대를 편의점 매대에서 찾았다. 외음부에 생리대의 테이프 단면을 접착시켰는데, 활동이 무척 불편하고 이상할 정도로 흡수가 안 되어 패키지를 정독하고 나서야 내가 생리대를 뒤집어 사용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여전히 생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공유하지 못했다. 나의 엄마마저도 화장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나 쓰레기통에 쌓여있는 생리대로 딸의 생리 시작을 눈치챘을 것이다.


생리는 그렇게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었다. 그나마 과거에는 ‘월경’이나 ‘멘스트루에이션(menstruation)’에서 따온 ‘멘스’라는 명칭이 혼용되기도 했는데, ‘다달이 발생하는 일’이라는 암시적 뉘앙스를 제거한 ‘생리’가 대표적인 용어로 채택되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생리를 생리라고 부르지 못했다. 매스컴에서는 생리를 ‘마법’, ‘그날’이라고 에둘러 표현했고, 공중에 오르내리려면 월경 증후군에 빗대어 예민하게 구는 사람을 면박 주려는 목적에서만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생리하냐?’). 친구들에게 생리대를 빌리고 싶을 땐 소곤거리며 ‘그거’ 있냐고 물었고, 외부 활동 중 생리대를 교체하고 싶으면 밑장 빼는 꾼처럼 신속하게 숨겨 자리를 뜨거나, 최대한 생리를 연상시키지 않는 예쁜 파우치에 내용물을 휴대해서 다녀야 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여성이 빠르게는 10대 초반부터 늦게는 50대 중반까지, 21일에서 35일 주기로, 생리 기간 매일 평균 20~200mL의 생리혈을 쏟아내고 있는데도 남녀노소 합심하여 필사적으로 그 존재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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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킴벌리 ‘좋은느낌 - 입는 오버나이트’ 광고 중 한 장면


작년 여름 케이블 TV, 특히 CJ 계열사 채널에서 한 시간에 네 번은 상영되었던 유한킴벌리의 ‘좋은느낌’ CF는 이 ‘생리 지우기’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물을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유한킴벌리가 같은 해 일사분기에 론칭했던 ‘좋은느낌 입는 오버나이트’ 제품 광고는 그 전조였다. 에펠탑이 바라다보이는 궁전풍의 집에서 백인여성 모델이 잠자리를 준비하는 콘티는 ‘백인여성=고급스러움’이라는 한국 광고 소구의 공식을 기계적으로 답습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어가 고급스럽게 들린다’는 수준의 스테레오타입을 극복하지 못한 불어 대사는 형편없는 악센트로 해외 시청자들의 웃음을 사기까지 했다. 불필요하고 낡은 연출이었다.



유한킴벌리 ‘좋은느낌 플리마켓 편’ 60초 CF


이어서 약 네 달 뒤 공개된 ‘좋은느낌 플리마켓 편’은 더욱 노골적이다. 광고에 등장하는 20대 여성 A와 B는 ‘그날’까지 똑같을 만큼 붙어 다니는 ‘베프(베스트프랜드)’로, 혼자 플리마켓을 돌아보던 A가 문득 전화를 걸어보니 공교롭게도 B의 ‘그날’이란다. 발랄한 목소리로 “나두! 그럼 오늘은 쉬자”고 답하는 A는 새하얀 셔츠에 연분홍색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있다. A가 ‘전 그날이라고 집에만 있지는 않아요’고 내레이션하며 꽃과 쿠션을 구경하는 사이, A의 등을 툭 치며 나타나는 친구 B. 밝은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다. "야, 너 쉰다며" 하는 B의 인사에 A가 받아치는 대답이 가관이다. "이런 게 쉬는 거지 뭐~". 광고는 푹신푹신한 솜방울 위에 앉아 환하게 웃는 A와 B를 한 숏에 잡으며 끝난다.


생리대 광고의 제1 목적이 위생용품으로서의 기능성 강조라 한들, 생리하는 여성의 육체적 고통 및 정신적 고통을 들어내고 판타지 상황극을 판매하는 CF는 여성 시청자를 화나게 한다. 생리대야말로 여성 소비자가 100% 전유하는 상품목인데도 그 광고를 컨펌하는 인간이 생리의 ‘생’ 자도 구경 못 해본 모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서다. 생리는 욕 나오는 물건이다. 나는 생리 기간이면 끊어질 듯한 요통에 송장처럼 누워있는 언니들을 보고 자랐고, 나 자신도 셀 수 없이 많은 진통제를 먹어가며 백 번이 넘는 생리를 ‘버텨’ 냈다. 생리통은 자궁 수축으로 발생하는 분만통과 매우 흡사하다(물론 분만통의 강도가 훨씬 세다). 운 좋게 생리통이 없다 하더라도, 고약한 냄새를 동반한 피와 덩어리 혈이 질을 통해 며칠씩 흘러나오는데 유쾌할 리가 만무하다. 양이 많은 날에는 두세 시간에 한 번씩 패드를 갈아줘야 하고, 자는 동안 생리혈이 흘러나와 옷과 이불을 망칠 수도 있으며, 덥고 습한 여름에 바스락거리는 생리대를 일주일 내내 차고 있으면 회음부 근처 피부가 짓무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광고의 여성들은 생리 기간 가운데서도 최악인 첫날(!) 옷장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밝은색 하의를 꺼내 입고, ‘여자여자한’ 소품들을 구경하러 시장에 출두했다. 하하호호 웃으며 “이런 게 쉬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좋은느낌’이 최고의 기술로 100%순면감촉매직쿠션생리대를 개발해냈다고 해도, 제시된 상황이 현실에서 일어난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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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생리에 관한 금기’에 저항하는 파키스탄 대학 내 시위에서 사용된 생리대들


피 냄새 안 나는 생리대 광고의 양산은 무지의 소치라고도 하겠지만, 그 이면에는 생리를 여자 거시기에서 피가 나온다니 민망하기도 하고 야시꾸리하기도 한 무엇으로 여기는 저급한 인식이 깔려 있다. 작년에는 새누리당 박삼용 의원이 저소득층 생리대 지원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생리대라는 말이 듣기 거북하다"며 관련 단어의 등장을 제한하려 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참고 기사: "생리대란 말 쓰지 마" 새누리 의원의 이상한 요구), 한국 중년 남성이 공유하는 이 황당무계한 ‘생리 엄숙주의’는 실제로 생리대 광고를 검열한다. 그래서 온 가족이 시청하는 광고에 생리하는 여성이 굳이 등장해야 한다면, 누구도 그가 생리 중인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름답고, 산뜻하고, 꽃향기가 나고, 정서적으로 평온한 상태로 묘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청색 혹은 연보라색의 맑은 액체가 생리대 속으로 쏙 흡수되는 기능성 테스트 시뮬레이션은 어떠한가.


생리하는 여성에게 공공연히 이미지 관리가 요구되고, 허위적인 광고들이 생리의 고충을 축소하는 가운데, 형편없는 수준의 안정성 및 품질 관리를 거친 생리대들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은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업체들은 새하얀 생리대를 팔기 위해 표백제의 일종인 형광증백제를 사용해 백도를 증가시킨다. 최근 여성환경연대는 국내 생리대 제품 10여 종에서 벤젠, 스티렌 등 휘발성 유기화합물과 유해물질이 미량 방출되었다고 발표하면서(기사링크) 적절한 유해물질 관리 기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국내에서 의약외품으로 분류되는 생리대는 제품성분 공개 의무를 면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0년 전 제정된 포름알데히드 규제 이후 관련 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여성들은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얼마나 위험한지조차 모르는 생리대를 일평생 만 개씩 쓰고 있는 것이다. 품질은 최선인가? 냄새, 피부 트러블, 월경통, 가격 면에서 비교했을 때 신생아 기저귀가 여성용 생리대보다 낫다고 판단한 여성들, 그리고 출산 후 산모패드로 사용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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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보다 신생아용 기저귀가 훨씬 싸고 좋습니다. "

(출처: 새송 - 일인가구 살림법 @saesong_)


여성을 햇살 아래서 미소 짓고, 솜방울을 기분 좋게 껴안고,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순결하고 산뜻한 이미지로 묘사하는 생리대 광고의 관심은 남성들이 보기에 ‘불편하지 않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 같은 광고는 제품 소비자군(여성)과 광고 타깃(남성)을 연결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광고 이미지를 접하면서 생리를 ‘뭔진 모르겠지만 할만한 것’으로 학습하는 소년들을 양산한다는 점에서 유해하다. 이제는 고릿적부터 누덕누덕 쌓여 온 클리셰에 안녕을 고할 시점이다. 나는 생리혈이 바지를 뚫고 나와 찬물로 빨래를 하는 여성, 생리 중이라는 데도 관계를 요구하는 남자친구를 잡는 여성, ‘나와 같은 세계를 사는’ 여성이 등장하는 생리대 광고를 원한다. 젊고 예쁜 20대 여성이 아니라, 완경(폐경)을 맞은 중년 여성도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생리대 광고를 보고 싶다. 명색이 여성 생필품 광고인데 공감을 사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여성의 행동에 한계를 부여하는 관용어구 ‘여자답게(Like a girl)’에 도전했던 ‘위스퍼’의 캠페인(2015)은 유의미한 시도였다. 이러한 메시지조차 불쾌하다는 유튜브 상의 수많은 댓글이 우리를 슬프게 할지라도 말이다.



#여자답게 위스퍼 광고 캠페인


이 모든 불상사는 생리가 ‘부끄럽거나’, ‘성스럽거나’,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라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남성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라는 이유로 지속적인 타자화를 축적한 결과다. 그러나 여성의 삶에서 생리는 그냥 생리다. 조금 많이 짜증 나지만, 왔으면 왔구나 싶은 일상일 따름이다. 자유롭고 중립적인 ‘호생호리’가 가능해지려면 판에 박힌 생리대 광고들부터 가장 먼저 치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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