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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턱이 있어요."

촛불 시위 때 직접 경험한 것들 가운데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 하나를 꼽으라면 처음으로 청와대 앞까지 갔던 날 효자동에서 만난 한 여고생 (짐작)의 외침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엄청나게 사람이 몰려나온 날이었다. 11월 12일 '총궐기' 때는 시청 앞에서 이러다 누구 하나 넘어지면 대참사가 나겠다 싶을 만큼 사람들로 거리가 그득했는데 처음으로 청와대에 진출한 날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그야말로 '꾸역꾸역' 청와대 앞으로 밀려들었다.

최전방(?)은 그나마 한산했으나 청와대로 통하는 대로는 청와대 쪽으로 가는 사람, 돌아 나오는 사람이 한데 엉켜 대단한 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11월 12일 사람들 사이에 끼어 홀쭉해졌던 기억을 떠올리며 야 이거 잘못하면 사고나겠다,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어디선가 앳된, 그러나 목청을 짜내서 부르짖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여기 턱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턱이 높아요. 조심하세요."

보도에 결코 낮지 않은,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턱이 있었던 것이다. 빽빽히 들어찬 사람들이 발 밑을 주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충분히 발을 헛디딜 수 있는, 또는 걸려 넘어질 수 있는 턱이었다. 잠바를 입고 귀여운 귀마개를 한, 대학생은 결코 아닌 중학생은 넘어선. 딱 고등학생, 아마도 세월호에서 죽어간 학생들의 평균 외양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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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 곁을 지날 때 사람들은 저마다 아래를 조심했고 거대한 사람의 흐름은 별 탈없이 청와대를 향했다. 청와대 가서 박근혜 나와라 어째라 소리 지르고 난생 처음으로 와 보는 청와대 전방 100미터 전 풍경을 감상한 후 다시 돌아 내려오는데 인파의 체증은 여전했다. 아주 서서히 시속 1킬로의 속도로 기어내려오는데 아까에 비하면 완연히 상해 버린, 그러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학생이었다. 여전히 똑같이 외치고 있었다. 힘에 부쳤는지 손나팔을 불고 서 있었다.

"여기 턱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턱이 높아요 조심하세요."

그 턱을 통과해서 청와대 앞까지 다녀오는데 족히 40분은 걸린 것 같다. 그 동안 학생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누구도 그다지 알아주지 않는 '오지랖'을 떨며 서 있었던 것이다. 귀에서 멀어질 때에도 그 소리는 여전했으니 얼마나 더 있었는지, 아니 얼마 전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거의 경복궁역까지 왔을 때에야 나는 무릎을 쳤다. 그 학생이 충분히 가능했고 있을 수 있었던 사고를 막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누가 그런 사고가 있을 수 없다고 장담할 수 있었을까. 그 인파에, 그 시간에.

아마도 학생은 걷다가 거기에 넘어지거나 휘청거렸을 것이고 '어마, 큰일날 뻔 했다.'고 툴툴 털고 자리를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잘못하면 다른 사람도 큰일나겠다'는 마음을 먹었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턱 위에 올라가서 내가 본 것만 근 1시간 동안 똑같은 몇 개의 단어를 반복해서 외쳤으리라.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일순 나는 되돌아섰다. 다시 돌아가서 집에 갈 때 떡볶이라도 사 먹으라고 지갑에 있던 돈이라도 털어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사람의 홍수 앞에 바로 되돌아서고 말았다. 맙소사. 저길 어떻게 다시 가. 조심하세요 턱이 있어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그 소녀가 다시 떠오르는 이유는 엄청나게 뜨겁게 달궈진 타임라인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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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원래 개싸움이 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지닌다. 모르긴 해도 '품위 있고 격조 있는' 선거전 따위는 지구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상대방이 넘지 못할 선을 넘었다고 흥분할 수도 있고 상대방이 난리가 날만큼 금을 밟을 수도 있고 너 이럴 줄 몰랐다며 상대방에게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 후보들 뿐 아니라 누구를 지지하거나 호감을 지닌 이들간에도 마찬가지다.

개싸움을 벌일 때는 벌이더라도, 화날 때는 화나더라도 그래서 너같은 새끼들 내 확, 하고 쉐도우 복싱을 할 때 하더라도, 사람들에 대한 '신뢰' (내 친구들도 지금 사방으로 다 갈렸다)는 놓지 말고, "이건 못 참는다."는 분노로 무능하고 사악한 통치자를 끌어내렸던 촛불 광장, 옴짝달싹도 못할만큼 밀어닥쳤던 사람들 중의 하나임을 서로 인정하면서 끝난 뒤 상종 못하겠다는 정도로 '타락'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아차, 하면 넘어지고 뒤엉켜 서로의 체중이 서로에게 흉기가 될 수 있는 압사사고의 위험은 촛불 시위 내내 존재했다. 하지만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넉 달을 버텼다. 그건 바로 발걸음을 조심하는 백만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고, 자신의 위기를 넘어서 남의 발걸음을 염려하는 학생의 마음이 보태졌기 때문이 아닐까.

죽 쒀서 개 주는 건 차라리 괜찮지만 죽 쒀서 제 허벅지에 쏟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음이 삐딱해지고 강퍅해지고 단단해지고 입에서 상소리가 퍽퍽 튀어나올 때 작년 겨울 어느 여학생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련다.

"여기 턱이 있어요. 조심하세요."

싸우지 말라는 건 아니다. 싸울 테면 싸우고 욕할 테면 욕하시라. 단 끝난 뒤에 다시 볼 생각은 하고. 섣불리 실망하지 말고.

실망도 기대도 하지 말자. 세상은 그러기엔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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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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