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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전역하고 대략의 어학 준비와 앞으로 마시기 힘들 소주로 배를 빵빵하게 채운 후 서울 촌놈이던 필자는 외국으로 나왔다. 한국을 떠나 하나 둘 야금야금 외국인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특히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타데우스는 진짜 졸~라 잘생겼다.” 다수의 외국인들의 찬양과 “한국인은 민족주의가 참 강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민족주의자라니...


그 전까지 한국에 살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이야기였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배운 것은 나라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닌, 내가 나라를 위해 애국을 해야 된다는 것이었으며, 국가가 부유해야 나도 편한 삶을 산다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때부터인 것 같다.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을 해본 것이 말이다. 사실 내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국가와 민족이라는 그 가치는 왜 그리 숭고하고 깨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의문이 들었다. 특히 다른 나라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한국의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 사이에서, 스스로에겐 당위성을 부여하면서도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를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런 나의 이중적인 잣대에 대한 반성을 해보기는 개뿔 ~ 그딴 거 없이 오늘도 저녁에 한 잔 할 생각만 하며 산다. 맥주 맥주~ 소세지 소세지~


민족주의가 어때서? 판단하기 나름이다.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민족이면서도 다른 민족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그래서 더 재미 있다.


이 둘의 관계를 주~욱 정리하려면 앞으로 책을 써도 백 권은 쓸 분량이 나오겠지만 필자의 깜냥이 부족하고, 정력도 부족하고, 지갑도 얇고 ㅜ.ㅜ... 하여 대략적인 것은 생략하고 나름 최근의 일만 좀 간추려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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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유대인과 무슬림이 한 집에 살았답니다.


사건의 발단


유대인과 무슬림은 종교색이 굉장히 강한 민족인 동시에, 두 종교가 거의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게다가 이 둘은 13세기 이상을 다른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지역에서 살며 좋아도 하고, 싫어도 하고, 전쟁도 하고, 사랑도 하고, 섹... 흠, 그건 내가 확인해 보질 않아서... 아무튼 그렇게 저렇게 살았다.


19세기 말 세계 각지에 특히 유럽에 많이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슬슬 자신들을 향한 반 유대인적 거부감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종교, 자신들의 문화를 강조하며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거부감은 그리 어렵지 않게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지 않은가. 그렇게 강한 민족주의 혹은 종교에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향한 적대감이 커져 갈 수록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국가를 가지기를 강력히 소망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유대인들은 스위스 바젤에서 모여 그들의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우리는 시온주의자, 시오니즘, 시오노 나나미 이라고 부른다.


1차 세계 대전이 있던 그 즈음에 영국의 취했던 전략은 결과적으로 이런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고 있는 아랍인들의 갈등을 본격적으로 점화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영국의 전략은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도와주면 전쟁 끝나고 너희 나라를 갖게 해줄게”라는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물려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또 반대로 팔레스타인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전쟁을 도와주면 전쟁 끝나고 너의 나라를 갖게 해줄게”라는 좋같은 제안을 한다. 이런 좋게된 상황을 모르는 양 민족은 영국을 양면으로 도우며 자신들의 찬란한 미래창조 땅따먹기 계획을 꿈 꾸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지덜의 제안을 쌩깠다. 그 사이 2차 대전이 터지며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이 나치의 수용소에서 죽어간 이후에,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던 혹은 그 주변국에 머물고 있던 무슬림들 사이에 지루하고 난잡한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차 대전 이후에


2차 대전 당시 엄청난 수의 유대인들은 나치를 피해 이리저리, 특히 팔레스타인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신들의 오랜 숙원 사업인 시오니즘을 앞세운 '우리나라 여기에 세울 꺼임!'을 실행한다. 그리고 전쟁 후 '안전함'이라는 것을 찾아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들어온다. 이 과정을 통해 당시 유대인들이 이미 한 번 일어난 안티 세미티즘(반 유대주의)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자신들의 국가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음은 두말 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국제 사회 역시, 다시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에 동의했고, 유대인들에게도 반드시 하나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했다.


영국 의회에서 개최된 유엔 회의에서 많은 국가들은 유대인들이 살기를 원하던 팔레스타인 땅에 살 수 있도록 하는 결정을 내린다. (33찬성, 13기권, 10반대)


당시 팔레스타인에는 124만명의 아랍인들과 55만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안티 세미티즘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유입되는 유대인들에 의해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를 바라보는 아랍인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데 이건 내 땅을 빼앗아가는 이웃들이 몰려들어오고 있는 형국 아닌가.


아랍인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저들(유대인)이 가지는 문제는 유럽계 유대인과 유럽의 문제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민엔 우리도 동감하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그 원인은 유럽인들에게 있다. 우리는 유대인 개개인에 대해서는 좋게 좋게 지낼 마음이 있지만, 유럽인들은 유대인의 문제를 여기 이곳 우리의 땅에서 풀려고 하거나 이곳으로 떠넘겨서는 안된다.”


즉 한마디로 말해 아랍의 민족주의자들 역시 '웃기지 마셈, 여기 우리땅임!'을 외쳤다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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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땅 내꺼~


1947년 2월 영국 의회는 팔라스티나 지역의 점유권을 포기한다는 선언을 하고 만다. 그리고 그해 11월 영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나누어서 반은 유대인에게 반은 아랍인에게 주겠다 선언한다. 유대인은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환호했고, 아랍인들은 반발했다.


이 결정은 지금까지 13세기가 넘게 이어져 온 그들의 관계가 무참히 깨어져 버리고 마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대인과 아랍인은 즉시 내전을 시작했고, 결국 유대인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유대인은 이스라엘이라는 자신들의 국가를 선포하게 된다.


이 전쟁은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뒷통수를 오함마로 내려 찍은 듯한 충격을 전해 주게 되지만, 저 멀리 뉴욕부터 가까이엔 텔라비프까지 산재해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최고의 소식이 되었다.


하지만 이 선포는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이때까지 13세기가 넘게 함께 살던 이들이 사실상 자신들의 '적'이었다는 적대심이 팽배해 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쯤에서 이 내전의 원흉이었던 유럽은 한발 슬쩍 빼며, 은근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준다.


유럽에게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정치적 혹은 정신적 의미로 추악한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희망의 아이콘처럼 보였으리라.





자 이제부터 전쟁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마치 내전의 승리가 자신들에게 당위성이라도 부여해 준 것인 양, 전 세계 유대인들을 위해 확고하고 더 넓은 영토를 자연스럽게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땅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면적이 넓어야 많은 유대인들을 다시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를 들이밀며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의 현재 주인들인 무슬림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추방 당한 무슬림들은 돌아올 희망을 가지고 당장의 집을 버리고 떠났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이 살던 마을을 파괴하고 돌아오려는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만다.


단 몇 주 사이에 약 70만명의 아랍인들이 자신들이 살던 집을 버리고 왜 떠나는지도 모르는 추방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 추방의 과정을 아랍어로 나크바(아: ?? ?????? ,영: catastrophe , 한: 대재앙 앙~)라고 불렀다.


즉 1948년까지 자신의 나라, 자신의 땅이라 여기며 살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졸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잃고, 자신의 땅에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ㅆㅂ 갈 데도 없는데 내 쫓기는 거, 이거 참 거시기 한 거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국가가 생겼다는 기쁨에 도취되어, 불과 며칠 전까지 자신의 이웃이었던 아랍인들의 이러한 상실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이웃들은 저 거대한 아랍 제국, 혹은 무슬림 제국의 일부일 뿐이며, 그들이 가진 거대한 땅 덩어리의 한 귀퉁이에 자신들이 산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에게 그~닥 큰 피해는 아니라는 자위적인 해석을 도출시켜 버린 것이다. 내가 살 데가 없는데 니들이 좀 집 좀 비워라. 요런 마인드~


1948년 이후에도 약 15만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계속해서 유대인들의 구역에서 삶을 살아나갔다. 그들은 비록 유대인 경찰에 의해 강력하게 감시 당하긴 했지만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얻어서 계속 살아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경찰의 감시는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도 불과 몇 십 년 전에... 뭐 다 알지?





작용과 반작용


세상의 이치라는 게 왼쪽 싸다구를 맞으면 오른쪽 싸다구로 갚아 주는, 머 그런 거 아니겠는가. 예수를 믿지 않는 두 종교는 싸다구 날리기 재미를 제대로 알아버리고 만다.


팔레스타인 나크바 프로세스의 결과는 결국 그동안 근처 아랍 국가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대신 지불하게 되는 처지에 이르게 한다.


당시 이스라엘 근처에 살던 유대인들은 하루 아침에 동네 으르신들한테 욕을 먹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마치 2차 대전 때 나치가 저지른 것 처럼 장사도 안되고, 욕을 먹고...


이게 생각해보면 참 뭣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가족이 대대로 살던, 무려 천 년이 넘게 살던 우리 동네에서 졸지에 옆 마을에 이사 온 내 동포라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이 저지른 일 때문에 내가 직장에서 짤리고 동네에서 욕먹고, 탄압 받고. 대략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종교가 거의 대부분인 그들의 삶을 비추어보면 가장 '개종'이라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나라면? 뭐 종교 따위 하루에 200번도 바꿀 수 있다만, 저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그들 중 유대인으로 남길 원했던 이들은 추방 당했고, 그렇게 그들은 가족과 형제를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떠나야 했다.


실제로 늙은 부모는 떠날 힘도 돈도 없어 무슬림으로 개종하고, 젊은 자식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간 케이스도 많다.


그렇게 자신이 살던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갔고, 시오니스트들은 찾아온 그들에게 집과 빵을 약속했다.


즉 유대인들 역시 아랍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천 오 백년 이상 살던 땅을 떠나 이스라엘로 옮겨야 했다.


유대인의 역사는 길고 또 기구 하다. 우리는 북한과 단지 70년 가량 떨어져 살았지만 그 이질감이 굉장하다. 하물며 유대인은 전 세계 여기저기에서 최소 천 년 이상을 따로 살아온 민족이니...


당시 유럽의 유대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에 아프리카계 유대인들의 이질감은 굉장했고, 그들에게 아프리카계 유대인들은 마치 아랍인들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내 머리가 삐쭉 삐쭉 솟은 쌩머리라며 몽골의 피가 섞였을 거라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아 ~ 나도 유사시에 추방 당하지 않게 파마를 하기로 결정했다.)


엘라 하비바 쇼핫이라는 뉴욕대의 유대인 교수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녀의 부모님이 이스라엘에 도착 했을 때, 그들은 최고의 옷과 선물들을 가지고 그 곳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그동안 타국에서 들었던 민족의 소식과 시오니스트들의 홍보를 떠올리며 잔뜩 부푼 기대를 안고 버스에서 내렸을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은 DDT 살충제와 난민촌 텐트였다고 한다. 유럽계 유대인과 아프라카계 유대인이 한 민족이라는 허울 속에 숨어있는 이질감이 여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의 일상은 그 전까지의 지위와 명예, 빈부의 격차 따위와 전혀 상관없이 국가에 의해서 통제되고 똑같은 삶을 강요 받으며 하루 하루 살아나가게 된다.


즉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의 국가 아래 모였으면서도 이제 또 다른 인종차별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래. 그래. 욕 나올만 하다. 자. 외쳐라 쿠쓰 아흐막~~ (유대인이 쓰는 '욕' 이란다.)





민족주의


1956년 모로코와 튀니지가 프랑스로부터 해방된다. 그리고 그 곳에 살던 아랍인과 유대인은 모두 시민권을 받게 된다. 글쎄 모로코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인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너덜이 고딩 때 책을 베게로만 사용했다면 모를 수도 있으니 친절히 설명하겠다. 모로코 역시 북 아프리카의 대부분이 그렇듯 아랍 국가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기 전에도 왕국이었고, 해방 후 모로코라는 나라를 세운 후에도 여전히 왕국이었다. (튀니지는 그냥 좀 넘어가자. 내가 바로 고딩 때 책을 베고 자던 그런 놈이닷!)


흠... 아무튼 이들의 해방에 있어서 무슬림뿐 아니라 당연히 유대인도 적극적인 참여를 했다. 이 곳에서 오래 살았으니 '이 곳이 내 조국' 아니겠는가. 그들은 2차 대전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프랑스도 이스라엘도 아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조국 모로코 또는 튀니지를 위해 싸운 것이다. 당시 새로 구성된 내각에는 유대인 장관도 있었고 유대인도 무슬림도 마치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같이 어울려 살아갔다.


하지만 상황은 짧은 시간 안에 변해 갔다. 젊은 무슬림 민족주의자들이 큰 힘을 얻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감에 따라 힘 없는 소수민족은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갔고, 자신의 아이들을 이런 곳에서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은 또 다시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이스라엘이 시작한 민족주의적 정책은 결국 주변국의 반발을 사고 서로가 싸다구를 쉼 없이 날리는 싸다구 퍼레이드를 시작케 한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 싸다구를 얻어맞는 피해자가 국가 혹은 민족이 아닌 유대인이든 무슬림이든 힘 없는 개인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이즈음 이집트 카이로에 자말 압둘 낫세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강력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은 그는 비단 이집트 뿐 아니라 전체 아랍 국가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르게 된다. 그는 이집트의 이득을 위한 정책이 아닌 전체 아랍인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민족주의적 정책을 펼쳤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된다. 1956년 수에즈 전쟁도 이런 낫세르의 도발로 인해 시작된다.


낫세르는 '여기 우리 바다야 너들 여기 지나가지 마'를 시전하고, 이에 안 그래도 2차 대전 이후에 심심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당연히 전력에선 상대가 안되니 이집트는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패배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기에 숟가락 살포시 얹어 놓기 신공을 발휘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공격하는 와중에 이스라엘도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세계 정세는 사실 학교와 다르지 않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일진이 괴롭히면 억울해도 좀 참지만, 일진 가방 들고 다니는 애가 옆에서 한 마디 하면 그게 더 열 받아서 들이 받는 거. (왜 이래 ? 나만 그런거야? 아, 아니지?)


물론 전쟁은 미국과 러시아가 '너거덜 조용히 좀 못하냐? 확 쉐리뿌까 마 !' 한마디 하자 영국이고 프랑스고 다덜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는 것으로 종결된다.


근데 몇 달 후 낫세르는 우리의 주적은 시오니스트이며 모든 유대인이 곧 시오니스트라고 선포하며 주변 아랍국들 모아서 '아자 아자 화이팅'을 외친다.


그러자 이번엔 이스라엘이 낫세르를 히틀러와 동급으로 놓고 많은 유대인들 모아 모아서 아자 아자 화이팅을 외친다.


그러는 와중에 또 이스라엘에 살던 무슬림들은 재산을 몰수 당하고 추방 당한다.


민족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이런식으로 전방위 적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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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ll 24 doesn´t answer(1955)의 한 장면이다.

 이스라엘 군인이 전쟁 중에 이집트인을 구해줬는데 알고보니 그가 예전 나치의 일원이었음이 밝혀진다.

 그 울분을 참으며 그래도 적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오글 거리는... 오글 오글 





민족주의의 최전선


1967년 새로운 전쟁이 발발한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연합군 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를 6일 전쟁이라고 부른다. 초반에는 이스라엘이 고전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이 엄청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쟁은 여러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자긍심을 심어주게 된다. 그 동안 세계 각지에 퍼져 있던 유대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비록 25년 전 나치에게 탄압이나 받던, 국가도 없는 민족이 이제 3:1 패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아니 대승을 거둬 버리는 전과를 올렸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유대인 축하 가두행진이 펼쳐졌고, 나라 안팎으로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를 본 러시아의 한 시인은 '유대인이 히틀러의 무덤 위에서 춤 췄다'라는 문장으로 표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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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의 승전 축하 시가 행진(프랑스 파리)


이스라엘은 이 전쟁을 통해서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고, 모든 아랍 국가들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아랍 국가들은 이 전쟁의 패배가 너무나 뼈 아팠다. 하지만 어려울 때 일수록 서로 돕는다고 더 많은 아랍인들이 이들의 편에 섰으며, 이는 그들의 연대의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무슬림들과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사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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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하라 아랍 국가들이여!  너희의 땅을 위해 싸워라! 


위의 문구에 대한 아랍인들의 회답은 굉장했다.


“우리는 언제든 팔레스타인 형제들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더 이상 무슨 질문이 필요한가. 명령만 내려라. 우리는 진군 한다.” -당시 BBC와의 인터뷰에서 알제리 시민-


프랑스 파리엔 벨빌(Belleville)이라는 지역이 있다. 이곳은 굉장히 특이한 곳으로 유대인과 무슬림이 같이 지내고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나라 밖 사정이 시끄러워도 이 곳에서 만큼은 유대인 사장 밑에서 무슬림 종업원이 일하고, 반대로 무슬림 사장 밑에서 유대인이 일하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 조차 넘처나는 극한의 감정 대립으로 마침내 무슬림과 유대인이 다 때려부수며 싸우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은 전세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연대를 강화하는 동안, 아랍인들 역시 그들의 종교를 매개로 여러 국가들이 연대를 강화하는 것을 잘 보여 준 케이스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일들이 비단 프랑스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프랑스보다 규모는 작지만 미국에서도 이러한 유대인과 무슬림간의 갈등이 자주 표출됐다. 하지만 군사비를 천 조씩 써주시며 열심히 도청하는 미국은 저 멀리 중동 민족들 간의 싸움 따위 '우리의 기름에만 지장 없다면... 뭐~' 하며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증오를 부르는 증오


이렇게 여기저기서 '투닥 투닥' 하는 동안 1968년 그 이름도 유명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그는 다들 알다시피 굉장한 강경파로 유대인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 혹은 종교적 교리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길거리에 매달아 두고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기도 했다.


즉 후세인과 그의 추종자들은 유대인에 대한 공격뿐 아니라 자신들에게 부합하지 않는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여 처형 한 것이다.


후세인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죽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은 무고하고 힘 없는 사람들 이라는 것을, 하지만 정치적 종교적 단결을 위해 그는 스스럼 없이 이러한 일들을 행하였다.


이러한 만행들은 아랍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두 민족 모두에게 점점 더 강한 민족주의를 심어주는 동시에, 그 안의 소수인 평범한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해 질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 갔다.





이 뿐만이 아니다.

 

1972년 9월 5일 독일의 뮌헨에서 올림픽이 한창이던 그 때, '검은 9월단' 이라는 테러조직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선수단의 납치 과정에서 2명이 죽고, 9명이 납치되었다. 당연히 올림픽은 중단되었고 독일은 이스라엘이 군대를 파견해 직접 해결한다는 제의를 쌩까시고 협상에 돌입한다.


검은 9월단은 234명의 팔레스타인 동지들을 이스라엘 감옥에서 풀어주고 자신들을 안전하게 탈출 시켜 달라는 요구 조건을 내건다. 독일 경찰은 맥주와 소세지를 먹다 말고 화들짝 놀라 다 들어 줄테니 사람은 죽이지 말라며 그들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다. 테러리스트들을 헬기로 공항까지 친절하게 이동 시켜주고 “잘가~ 잘가~ 아우프 비더제헨(다음에 또 봐요)"를 외치던 찰나, 미리 준비하고 있던 독일 스나이퍼가 테러범을 향해 헤드 샷을 날려주시는데… 아뿔사~ 빗나갔다.

 

그리고 이어진 테러범들의 대응 사격과 학살, 양측은 미친듯이 총질 해대고 ......

 

그 결과 선수단 9명 전원 사망, 테러리스트 5명 사망, 3명 생포라는 최악의 삽질에 이르게 된다.

 

이 사건은 전 세계인의 머릿속에 굉장히 강렬하게 각인 되었고, 아랍인 = 테러리스트라는 공식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당연히 유대인은 복수를 꿈꾸기 시작했다.(그에 대해 궁금한 독자들은 유대인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을 보면 된다.)



이런 증오로 증오를 덮어버리는 이들의 삽질은 끝날 줄을 모르고 투 비 컨티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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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9월단이 탔던 헬기다. ㅎㄷㄷ

 위에 다 어디갔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평화를 위하여~


아무리 세상이 그지 같이 돌아가도 항상 어디든 실낱 같은 희망은 있는 법이다.


1977년, 11월 사나이 중의 사나이 암마 아 사닷트 이집트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전격 방문한다.


이는 많은 이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깜짝 선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잘하면 중동 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 하였다.


당시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갈등을 겪는 아랍권 국가 중에 가장 큰 나라였으며, 다른 아랍 국가들도 사닷트 대통령의 결정에 함부로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다음 해인 1978년, 그 유명한 켐프데이비드 협정에서 지미 카터의 주선하에 이집트 대통령과 이스라엘 총리를 주체로 평화 협정을 맺는 결실을 얻어낸다. 미국은 이를 위해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고, 서로 서로 좋게 좋게 분위기는 흘러간다.


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은 대놓고 이집트를 적으로 규정 하지는 못했지만, 거리에서는 이 평화협정에 반대하여 엄청난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저쪽나라 형들 데모하면 좀 무서운 거 알지?

(우리처럼 촛불 들고 안해! 걸리면 아주 주~옥 같이 되는 거여~.)


아랍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많은 전쟁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것이 죽기보다도 싫은데 갑자기 이집트 대통령이 가서 "그래 이스라엘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할게." 이러고 온 거다. 거기에 더해 평화협정은 이집트 만을 위한 것이지 아랍권 국가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평화 협정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얄미운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대다수의 무슬림들의 눈에는 정말 미운 놈 그 자체로 보였다.


결국 1981년 10월 9일, 사닷트 대통령은 결국 자신의 평화 협정의 댓가로 테러리스트에 의해 행사 도중 연단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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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길어서 쓰는 내가 너무 힘들다. 너님들은 얼마나 더 힘들겠냐...

잠깐 쉬어가는 타임으로 교양 있는 샹송샹송 한 곡 듣고 가자. 내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다.

엔리코 마시아스가 부른 사닷트 대통령 추모곡 <Un berger vient de tomber>

 번쩍이는 인중의 기름기가 매력적인 가수이다.

 번역은 프랑스에서 레이디 가카를 따뜻하게 촛불로 맞이하고 있을 

아까이 소라 특파원이 시간 남으면 해주겠지…

 아무튼 평화에 대한 희망은 그렇게 허무하게 꺼져 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7년, 이스라엘의 점령 지역에서 인민봉기가 발생하였다.


이를 전쟁이 아닌 인민봉기라 하는 것은 수많은 아이와 아녀자들이, 새총, 짱돌을 들고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짱돌로 군인과 싸우는 모습은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전해지며 충격을 주었다.


PLO라는(팔레스타인 리버레이션 올가니제이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민중들에게 총을 들지 못하게 하였다. 무조건 짱돌로만 싸우라고 가르쳤다. 그 결과 전세계 여론은 총을 든 경찰과 군인 앞에 어린 아이가 짱돌로 맞서는 그림을 떠올리며 들끓기 시작했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는 것이다. 애초 전쟁에 옳고 그름이 어디 있으랴~


또 저러한 고통의 시간이 흐르고 1993년, 오슬로에서 정력 넘치는 클린턴 행님의 감시 하에 이번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평화협정을 맺기에 이른다. 당시의 악수하는 사진은 굉장히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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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 알지? 악수해 ~ 웃으면서 해 ~

 


당시 이스라엘의 총리는 라빈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협정은 두 민족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 “어라 쟤들 이제 정말 잘 지내는거 아냐?”라는 기대감을 부풀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2년 후인 1995년 어느 날, 이번엔 평화협정을 맺은 라빈 총리가 유대인 극우파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만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거시기 하지만 저기도 만만치 않다 정말...)


라빈의 암살은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에게 슬픔과 동시에 평화에 대한 희망도 꺼버리는 결과와 공포를 가져왔다.


그렇게 라빈의 죽음은 평화의 시작 단계이던 그들의 사회에 평화의 종결을 알리는 시발점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게 극우 세력의 진정한 힘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을 한 번에 꺼 버릴 수 있는 힘, 생각보다 한 발 더 나가는 익스트림 함... 우리나라에도 참 많았다.


그렇게 그 둘의 관계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로 들어갔다.


이들의 갈등은 그 후로 점점 더 악랄한 테러와 폭탄, 또 테러와 폭탄, 또 테러와 폭탄의 반복으로 끝나지도 않는 지루한 불운한 역사의 반복을 부추기고 있다.

 

젊은 유대인과 이슬람인들은 점점 더 우경화 되어가고 있으며, 그들의 결속력도 공격도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몇 천년의 역사와 종교라 믿음은, 그들의 민족주의적 믿음은 사실 그리 오래 된 것도 그리 단단한 것도 아니다. (내가 이말 하면 맞아 죽겠지만…)


그렇게 둘 사이가 악화 일로를 걸을수록 그 안에서 항상 더 약하고 힘 없는 자들은, 즉 평화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의 희망은 점점 더 멀어지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이스라엘과 무슬림의 이야기는 마치 좁은 골목에 있는 두 사람의 관계와 비슷하다. 좋을 땐 아무 문제 없었지만, 좁은 골목 안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상 문제가 도저히 풀리지 않는 그런 사이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루한 전쟁이 누구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가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용서하려는 마음 뿐'이라는 교과서에나 나오는 뻔한 결론일 수 밖에 없다.


위의 두 민족의 지난 한 세기 동안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략 정도의 차이가 있지 우리에게도 비슷한 사건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국민들에 대한 민족의식 심어주기, 평화를 갈구하던 지도자의 죽음, 공포를 통한 통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적을 만들기, 모든 증오를 그 적에게 풀어 버리기, 사람들을 나누고 가르기.


따라서 글을 쓰는 내내 많은 역사적 사실의 나열 보다는, 권력자 혹은 민족이 아닌 개개인이 겪었던 일들을 쓰고 싶었다. 근데 뭐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말이다. 물론 몇몇 아랍인을 알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저 문제를 물어보느니 MB가카의 먹방이나 찾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 더 정신적 스트레스가 적을 것이다.


지금까지 두 세력간의 다툼에 있어 유엔의 중재 혹은 세계 열강들의 중재 따위는 개뿔도 약발이 받지 않았다.


게다가 의미있는 지도자들의 화해 노력도 결국은 극우 세력에 의해 전부 좌절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개인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이유는, 저 문제는 일반 시민들의 의식 변화에 기대해 풀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친구 놈과 싸우고 나서 선생님을 통한 화해, 부모님을 통한 화해, 친구들을 통한 화해 따위 결국 먹혀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앞에서 보이는 모습은 어떨지 몰라도, 썩어 문드러진 서로의 감정은 결국 둘이 같이 오락실 가서 100원이라도 나눠 가져야 풀렸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툭하면 북한과의 문제에 있어 미국, 중국, 일본의 핑계를 대기에 여념이 없다. 조선 TV인지 북조선 TV인지 알 수도 없는 방송에서는 북한에 대한 증오심만 키워낼 생각에 오늘도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하겠지만, 모든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지는 않는다.


이전의 김구 선생이 또 김대중 대통령이 남의 나라 힘을 등에 업고 북에 올라가서 평화를 논한 것이 아닌 것 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서 또 그 반대에 서있는 무슬림 국가들에서 요즘 아주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운동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작년 한창 이스라엘과 이란의 사이가 안 좋았을 때 로니 에드리라는 이름의 이스라엘의 디자이너는 자신과 딸의 사진을 찍고 '이란 사람들이여,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문구를 박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 페이스북 페이지는 순식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이란을 향해 '우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메세지를 보내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곧이어 바로 이란에서 같은 문구로 사랑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들은 서로 SNS를 통해 소통하고 사진을 올리며 평화를 희망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사랑합니다'라는 포스터도 올라왔다.


이들의 이런 노력이 큰 결과로 다가올 거라는 기대는 하기 힘들다. 당췌 저쪽 나라 애들 워낙 강경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은 불씨가 생겼다는 점에, 그것도 위에서가 아닌 밑에서부터 타오르는 작은 불씨가 생겼다는 점에 아주 쥐톨보다도 작은 희망을 갖고 싶은 것은, 아마도 내가 슬슬 나이를 먹어가는 증거인 것 같다.



에잇~ 그만들 싸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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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니 에드리의 테드 강연이다. 시간이 남으면 한 번 보는 걸 추천한다.

 물론 여기도 댓글로 쌈질중이고 악플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떠리 하루 아침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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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지마~ 한글자막버젼 여깄다. ^^


111.JPG

로니 에드리 페이스북 페이지 



뱀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도자였던 아라파트를 암살한 정황이 스위스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이스라엘 ㄱㄱㄲ... 그런데 그와 동시에 유럽에 요즘 불고 있는 극우주의 덕분에 반 유대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유럽 내 유대인들에 대한 대놓고 적대감과 테러에 대한 긴장감도 동시에 높아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결국 작은 불씨를 살리고자 하는 일반 시민의 몇몇의 열망은 또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며 몇 년간 조금씩 앞으로 가던 걸음이 한 방에 뒤로 후퇴하게 될지도 모르는 기로에 있다.

 









독일특파원 타데우스

트위터 : @tadeusinde


편집 : 너클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