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실세를 비판한 날, 하늘에선 하얀 눈이 내렸다. 서울 여의도의 허공이 하얗게 보였다. 머리와 땅에 닿은 눈은 금세 녹았다. 검게 탄 속에서 눈처럼 하얀 입김이 나왔다. 그가 든 피켓에는 검은색, 붉은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런 사람은 안 된다고 전해라."
"중소기업진흥공단 취업청탁 채용 비리?"
"청년 구직자의 노력을 비웃는 채용 비리 인사가 공천되어선 안 됩니다."
피켓에는 친박 실세 최경환 당시 새누리당 의원 얼굴 사진도 담겼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눈 속에서 '최경환 공천 반대'를 주장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20대 총선을 2개월여 앞둔 2016년 2월 16일 낮 12시께 일이다. 장소는 국회의사당 앞이다.
김민수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20대 총선을 2개월여 앞둔 2016년 2월 16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최경환 당시 새누리당 의원 공천반대 1인 시위를 진행했다.
ⓒ 청년유니온
1인 시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약 40분에 불과했다. 이 짧은 시간이 많은 것을 바꿔 놨다. 얼마 뒤, 김민수 위원장은 영등포경찰서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검사도 그를 불렀다. 김 위원장은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섰다.
그날의 1인 시위 이후, 눈은 쌓이고 녹고 꽃은 피고 지며 다섯 계절이 다섯 번 바뀌었다. 최경환 의원이 모시던(?) 박근혜 대통령은 파면돼, 결국 구속됐다. 김 위원장은 아직도 피고인 신분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재판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다.
거리에서 40분 동안, 친박 실세를 비판하며 공천을 반대한 게 그렇게 큰 죄일까? 문제의 핵심은 공직선거법(선거법)이다. 현행 선거법은 깨알 같은 조항으로 선거일 기준 180일 전부터 유권자가 누구(정당 포함)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걸 가로막는다.
여러 잘못과 비리 의혹을 받는 사람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해도, 어떤 후보자와 정당이 시민의 재산권과 기본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내세워도, 한국의 시민은 이를 자유롭게 비판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반대 사례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훌륭한 인물이 출마해도, 시민의 행복과 기본권 확대를 위한 정책을 내세운 후보자와 정당이 있어도, 유권자는 마음껏 지지할 수 없다.
김민수 위원장 사례를 보자. 그가 총선을 앞두고 1인 시위를 한 건, 친박이 괜히 싫거나 최경환 의원에게 개인적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경환 의원은 20대 총선을 앞두고 '취업청탁, 채용 비리 의혹'을 받았다. 그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일할 때 불거진 의혹으로, 결코 작은 사안이 아니다.
최 의원 지역구인 경북 경산사무소에서 일했던 황아무개씨가 2013년 중소기업진흥공단(이하 중진공)에 취업할 때, 최 의원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내용이다. 중진공은 청년들에게 인기 좋은 직장이다. 당시 36명을 모집하는 채용시험에 400여 명이 지원했을 정도다.
황 씨는 1차 서류 전형, 인성·적성 검사에서 탈락 범위에 속했다. 최종 면접시험에서는 최하위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합격자 명단에 들어갔다. 정권 실세 최 의원과 박철규 당시 중진공 이사장이 독대한 뒤 합격자 명단이 달라졌다는 의혹이 크게 제기됐다.
검찰은 작년 1월 최 의원을 상대로 서면 조사만 한 뒤 불기소 처분했다. 중진공 임직원들만 재판에 넘겼다. 이쯤 되면, 여러 시민이 최 의원을 상대로 합리적 의심을 품고 비판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청년 실업과 부당 노동 등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청년유니온 처지에서는 더욱 그렇다.
게다가 20대 총선이 끝난 뒤인 2016년 9월에 열린 재판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박철규 전 중진공 이사장이 법정에서 "최 의원이 특혜 채용을 압박했다"고 폭로했다. 검찰은 재수사를 시작해 최 의원을 최근 불구속기소 했다.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
ⓒ 뉴시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청년 실업률은 34.2%, 약 400만 명에 달했다. 사상 최고치 수준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좌절과 열패감을 안고 살아간다. 김민수 위원장 변론을 맡은 김선휴 변호사는 1심 국민참여재판 최후 변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럴 때 정권 실세 현역 국회의원이자 경제부총리라는 사람이 청년들이 선망하는 공기업에 자신의 인턴 출신을 채용하도록 청탁과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 얼마나 청년들을 허탈하게 합니까. '내가 결혼까지 시킨 아이니까 합격시켜라'는 압력. (공채 당시) 2,000등이 넘던 그 인턴을 합격시키기 위해 어떤 청년은 분명 자신의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렇게 청년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채용 비리 후보자를 공천하지 말아 달라고 잠시 피켓에 써서 들고 서 있었다는 이유로 형사처벌까지 한다면, 그건 정말 우리 사회 청년들을 두 번 좌절하게 하는 일입니다."
김 변호사 말대로, 오늘날 많은 청년의 처지와 정권 실세가 받는 의혹을 고려하면 "채용 비리 인사가 공천되어선 안 됩니다"라고 요구한 김 위원장의 1인 시위는 너무 온건해 보인다.
그럼에도, 선거법은 기어코 김민수 위원장을 법정에 세웠다.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지지, 반대 내용이 포함되어 있거나 정당-후보자의 성명이 들어간 현수막, 벽보, 사진, 인쇄물 등을 게시했다는 이유에서다. (선거법 제90조) 선거법은 유권자의 이 모든 행위를 금지한다.
유권자가 '나는 OOO을 지지합니다' 혹은 'OOO은 대통령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라고 종이에 적어 외부에 게시도 못하는 사회라니. 김 위원장은 지난 1월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김 위원장의 행위를 선거운동이 아닌 단순한 지지-반대 의견개진 및 의사표시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누군가는 "무죄 나왔으면 문제 해결된 거 아니야?"라고 할 거 같다.
선거법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검찰이 항소해 곧 2심 재판이 열린다. 대법원까지 갈 수도 있다. 40분 동안 거리에서 친박 실세를 비판했던 김민수 위원장. 그는 앞으로 오랫동안 법정에서 지긋지긋한 싸움을 해야 한다. 문제는 핵심은 김 위원장의 행위가 유죄냐, 무죄냐가 아니다. 자유롭게 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누군가를 지지-반대할 수 있는 민주공화국 시민의 당연한 권리가 왜 법원의 '유죄-무죄' 판단 대상이 돼야 할까?
핵심은 이것이다. 선거 때마다 인간의 기본권을 법정에 세우는 선거법, 이걸 바꾸지 않으면 김민수 위원장의 자리에 우리가 설 수 있다. 수개월 전까지 대통령으로 일한 사람을 합법적으로 탄핵하고 구치소까지 보낸 민주공화국의 시민인 우리가 선거법 때문에 이렇게 쩔쩔매야 하다니. 뭔가 굴욕적이고 불편하지 않은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법원으로 향한 3월 30일. 최경환 의원은 박 전 대통령 서울 삼성동 자택을 찾아 이렇게 말했다.
"이런 날 가서 뵙는 게 당연한 도리 아닌가."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비리 의혹을 받는 정권 실세 인물을 비판하고, 공천 반대를 요구하는 건 민주공화국 시민의 당연한 도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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