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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덜 위험한 열강”


진주만 기습 직전의 미국의 별명이었다. 스스로 고립주의를 자청하던 미국이었기에 어쩌면 이 별명은 미국에게는 ‘영광스런’ 별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루즈벨트는 어쨌든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과 함께 독일을 깨부수고 싶어 했지만, 미국의 국민과 의회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바로 얼마 전에 미 의회에서 전시 징병제를 실시하는 법안을 표결에 붙였는데, 겨우 2표 차이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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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공군으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미국은 일본 제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요청으로, 그들의 정부와 황제를 상대로 함께 태평양에서의 평화유지를 목표로 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사실, 일본 비행 편대들이 미국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 후, 주미 일본 대사와 그의 동료는 우리의 국무 장관에게 미국 정부의 최근 서한에 대한 공식답변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답변서는 외교 협상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지만, 군사적 공격 혹은 전쟁과 관련된 협박이나 암시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고려한다면 공격은 수일 혹은 심지어 수주 전부터 고의적으로 계획되었음이 명백합니다. 그 준비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유지를 희망하는 표현과 진술로 고의적으로 미국정부를 기만하였습니다.


하와이 제도에 대한 어제의 공격은 미국 해군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매우 많은 미국 국민들이 희생되었음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덧붙여, 샌프란시스코와 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들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어제 일본 정부는 또한 말레이반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어제 밤 일본군은 홍콩을 공격하였습니다.


어제 밤 일본군은 괌을 공격하였습니다.


어제 밤 일본군은 필리핀 군도를 공격하였습니다.


어제 밤 일본군은 웨이크 섬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군은 미드웨이 군도(群島)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은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벌어진 일들이 이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미 뜻을 굳혔고 우리 나라의 생명과 안전에 초래된 결과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미국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자로서 본인은 국가 방위를 위한 모든 조치를 지시하였으며, 이 조치는 모든 국민이 우리에게 가해진 침략의 성격을 기억하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획적 침공을 격퇴하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미국 국민들은 정의로운 힘을 모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우리 자신의 방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식의 배신 행위가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의회와 국민 모두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이제 침략의 위협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의 이익이 심각한 위험 사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 군대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결연한 의지로써, 우리는 기필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의 일방적이고 신의 없는 공격이 개시된 시점에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 상태가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 1941년 12월 8일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일전 선전포고 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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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사에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로 기억되는 루즈벨트의 선전포고 연설문이다. 루즈벨트의 연설은 절절했고, 이 연설직후 ‘전쟁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하원에서 388대 1이란 압도적인 지지로 가결됐다.


첨언하자면, 하원에서 유일하게 반대한 의원이 공화당의 지넷 P. 랜킨(Jeannette P. Rankin)의원이다. 이 사람이 특별히 일본에 대해 호의를 가졌기에 반대표를 던진 건 아니다. 최초의 여성의원이었던 랜킨은 반전주의자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1명이었고, 이후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일본과의 전쟁이 아니라 모든 전쟁을 반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1차 대전과 달랐다. 미국 국민들은 분노했고, 랜킨 의원은 신변보호를 받을 정도로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미국 국민들은 분노했고, 너나할 거 없이 군대로 달려갔다. 당시 미국인들의 자진 입대율은 90%에 이르렀고,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이들이 자살을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다.


이 대목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 당시 일본군이 미군에 비해 압도할 수 있다고 단언한 한 가지가 바로 ‘정신력’이란 대목이다. 공업생산력을 비롯한 모든 사회지표에서 압도적으로 미국에게 밀렸던 일본이지만, 그들에게는 황국의 신민으로서, 그리고 사무라이의 후예로서 미국을 압도할 수 있는 ‘정신력’이 있다고 선전했고, 실제로 이를 굳게 믿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정신력에 있어서도 미군이 일본군에 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미군의 인적자원들은 미군 역사상 최고의 정신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성장환경’이다. 이들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경제위기라 불렸던 ‘대공황’시기에 태어나 자란 이들이었다. 돈이 없어서 자식을 팔고, 가족이 해체되고, 술에 찌든 아버지가 집안을 내팽개치고, 가죽혁대를 뽑아들고 아들과 아내를 두들겨 패는 걸 온 몸으로 겪은 이들이다.


일본의 위정자들이 보기에 미국은,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상태에서 사치와 향락만을 찾는다.”


라고 그들을 쉽게 단정했지만, 그들의 정신상태는 전쟁이 끝난 직후 그들이 보여준 행보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오늘날 전 세계에 하나의 ‘환상’으로 자리 잡은 ‘Sweet Home’은 제2차 세계대전을 참전하고 돌아온 참전군인들, 즉 베이비 붐 세대(Baby Boom Generation)들의 아버지들이 만든 이미지다. 아니, 그들의 피와 땀과 노력이 만든 ‘백일몽’같은 현실이라고 해야 할까?


가정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아무리 행복한 가족이라도 갈등과 고민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겉으로 본다면, 이 시기 가정들은 행복해 보였다. 이유는 뭘까? 이들이 유년시절에 가졌던 공통된 트라우마가 그 원인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대공황기에 유년생활을 경험했다.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가정적으로 음울했던 대공황기를 겪었던 이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자기가 경험해보지 못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따뜻한 가정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꼈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가장의 권위가 부정되더라도 그 의무를 수행할 의지를 보였다. 여성의 경우도 행복한 결혼과 단란한 가정의 꿈을 이루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며 자신들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의문을 애써 무시하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대공황은 하나의 기준점이었다. 자신들의 유년을 포기해야했던 대공황에 대한 보상심리로 가정에 더 집착을 했고, 그 반대로 불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이나 의문점이 생겨도 대공황기에 견주어 보면, 그래도 낫다는 생각에 결혼생활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이들은 공동체가 해체되는 경험을 했던 세대였기에 공동체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가정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있었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강렬한 의지, 만약 소속된 공동체가 있다면, 지켜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가 있는 존재. 그들은 그런 존재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진주만을 공습했다.


일본은 ‘미군’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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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2차 세계대전을 둘러싼 수많은 음모론이 존재하지만, 그 중 백미가 바로 진주만 공습 유도론이다. 루즈벨트는 진주만 공습작전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참전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일부러 ‘한 방’ 맞아줬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자주 회자되는 것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어야 할 항공모함을 모두 피신시키고, 진주만 내에는 구식 전함들로만 정박시켰다는 것. 그리고 루즈벨트에게 수많은 ‘공격 정보’들이 사전에 보고됐다는 것을 거론하며 진주만 공습 유도론, 혹은 묵인론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과에 과정을 대입한 것 일 뿐이다. 하나씩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첫째, 항공모함 대피.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 승리에 환호작약하는 참모들에게,


“이 작전은 실패했다. 항공모함을 놓쳤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과연 그럴까? 우선 진주만 공습 직전까지 ‘항공모함’에 대한 미 해군의 인식을 생각해 봐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진주만 공습 직전까지 미 해군에서 최고의 전력으로 분류 된 것은 ‘전함’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이때까지 항공모함은 함대의 주력이 아니라 보조전력 취급을 받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바로 비용대비 효과. 즉, 가성비 논쟁에서 항공모함이 전함에 뒤쳐졌다는 이유에서였다.


“항공모함 함재기 30대가 출격해 떨어뜨리는 폭탄의 양보다 전함이 같은 시각에 발사할 수 있는 포탄이 더 위력적이고, 수적으로도 우세하다. 그런데 유지비용은 전함이 항공모함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해전의 패러다임은 거함거포주의였다. 대구경의 함포를 장착한 전함을 중심으로 한 함대결전이었다. 일본이 예외였다. 그 예외도 비상상황에서 찾아낸 일종의 ‘사기’ 같은 접근법이다. 당시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전함은 12척(건조중인 전함 포함)이었는데, 이를 가지고 진주만을 공격하는 건 무모해 보였다. 만약 전함으로만 진주만을 공격하려면 진주만에 있는 미군 전함보다 최소한 같거나 더 많은 전함을 보유해야 하는데,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본 해군은 고작(?) 12척의 전함 밖에 없었다. 이때 눈에 들어온 게 영국 해군의 타란토 공습이었다. 이를 좀 더 확장해 6척의 항공모함을 집중 동원해 공중에서 어뢰를 투하해 전함을 폭침 시키겠다는 것이 당시 일본 해군의 생각이었다. 즉, 일본 해군도 ‘모험’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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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진주만 공습 직후 일본의 항공모함 운용을 벤치마킹해 기동함대를 편성해 태평양 레이스에 뛰어든 걸 보고,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알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때는 미 해군이 항공모함을 쓴 게 아니라 항공모함 ‘밖에’ 쓸 게 없었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쓸만하다는 걸 확인했고, 이후 태평양 레이스에서 100척 이상의 항공모함을 찍어내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만약, 미국이 정말로 항공모함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했고, 그 준비를 했다면 전쟁 전에 미리미리 항공모함 함재기 개발을 완료했을 것이다. 진주만 공습 당시까지 미 해군 항공모함에 배치된 함재기는 ‘F2A 버팔로’였다. 당시 이 버팔로를 수입한 영국군은 이를 가지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과 싸웠는데, 일본의 주력 전투기 제로센과 하야부사에게 철저히 학살을 당한다. 영국군은 이를 만회해 보겠다고, 방탄설비를 들어내고, 기관총도 다운 그레이드하고(무게를 가볍게 해 기동성을 올리기 위해), 무전기를 들어내는 등 다이어트를 한 다음 일본군의 제로센과 하야부사의 기동성에 맞서보려 했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이런 버팔로의 활약상(?)을 본 미 해군은 황급히 버팔로를 버리고, ‘F4F 와일드 캣’을 채용하고 이를 보급하게 되는데, 진주만 공습 직전에 와일드 캣이 보급된 곳은 엔터프라이즈 전투비행단이 고작이었다.


물론, 이 와일드 캣도 확실하게 제로센이나 하야부사 같은 일본 전투기들을 압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버팔로 보다는 나았다. 끈질기게 잘 버텼다고 해야 할까? 미숙한 조종사와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전투기로 끈질기게 태평양 전쟁 초창기와 중반기를 미 해군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와일드 캣 덕분이지만(의외로 저평가된 전투기다), ‘압도적인 공중우세’를 보여주는 전투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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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이 일본 전투기들을 압도할 수 있는 기종을 확보할 수 있었던 건 태평양 전쟁의 승기가 미국으로 넘어온 시기였다. 이때 등장한 F6F 헬캣과 F4U 콜세어는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일본군을 압살하게 된다.


“항공모함의 무기는 갑판이고, 그 갑판에서 날아오르는 전투기가 항공모함의 전투력이다.”


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미 해군의 항공모함에 대한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모론이 나온 건 ‘천운(天運)’과 같은 행운 덕분이다.


진주만 공습 직전 항공모함들은 다 어디에 있었을까? 당시 태평양 함대에 배속되어 있던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정비 중이었고, 렉싱턴은 진주만을 떠나서 미드웨이로 항공기를 수송 중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엔터프라이즈호.


당시 엔터프라이즈는 7시 30분에 진주만에 입항했어야 하는데, 파도가 거친 탓에 구축함의 보급이 늦어져 진주만 공습 당시 진주만에서 1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보급이 정상대로 이루어졌다면, 나구모의 공격에 격침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둘째, 진주만에 정박한 미 해군 전함들은 모두 구식이었다.


이는 당연하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링크)을 읽어봤다면, 알겠지만 당시 열강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건함경쟁을 포기했다. 이 덕분에 1921년부터 10:10:6의 비율로 주력함의 톤수를 한정하고, 1936년 일본이 협정에서 탈퇴하기 전까지 신규전함의 건조를 중단하게 된다. 당시 일본이 협정을 탈퇴한 뒤 야마토급 전함을 건조하기 시작했을 때 미 해군이 부랴부랴 노스캐롤로나이나급 전함을 건조했지만, 이들이 실전에 얼굴을 보일 수 있었던 건 1942년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다. 그 당시 미 해군이 보유했던 전함은 태평양에 12척, 대서양에 12척, 총 24척이지만, 이들 중 신규 전함은 고작 2척 뿐이었다. 그나마 이 2척도 대서양에 있었다.


대서양에 있었던 이유도 간단한데, 전함이 건조되던 곳이 버지니아의 뉴포트 조선소였기 때문이다(버지니아는 대서양에 접해있다).



셋째, 루즈벨트는 일본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 미국은 일본의 J시리즈 암호를 해독하고 있었다. 그러나 암호를 해독하는 것과 전쟁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달랐다. 말장난 같지만, 당시 루즈벨트와 전쟁지도부들은 수백건이 넘는 엄청난 정보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국무성, 육군, 해군, 심지어 FBI 등등에서 일본의 침공에 대한 정보가 흘러들었고, 이들 중에는 가짜정보도 섞여 있었다. 당시 워싱턴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정보가 하나 있는데,


“일본군의 공격이 예상되는 지역은 버마, 태국, 말레이시아, 네덜란드 령 인도차이나, 필리핀, 소련의 연해주이며, 이들 중 어느 곳을 공격할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41년 11월 27일 미 육군 참모총장 마셜이 루즈벨트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육군 참모총장도 일본군의 공격지점을 특정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수많은 정보들 사이에서 진주만 공습에 대한 정보도 섞여 들어가 있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이 정보들은 묻혔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 이후 이 정보들이 빛을 보게 됐고, 음모론의 단초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결정권자들에게는 수많은 정보가 전달된다. 이 정보들 중에는 제대로 된 정보도 있지만, 말 그대로 ‘첩보’ 수준의 미확인 정보도 많다. 언뜻 이해가 안 가겠지만, 박정희의 5.16 쿠데타 몇 달 전에도 수많은 쿠데타 정보가 장면 정부에 올라갔지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점을 상기해 보라. 수많은 곳에서 각기 다른 정보가 올라왔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이를 컨트롤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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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으로 ‘진주만’이란 판돈이 너무 컸다. 진주만은 미 해군의 태평양 전선의 교두보였다. 당장 태평양 함대의 유류저장시설이 있었고, 해군 공창, 잠수함 기지가 있었다.


당시 유류저장시설에는 태평양 함대 전체 필요 연료량의 두 달 치가 있었는데, 이 정도면 태평양 함대 전체를 고사시킬 수 있었던 분량이다. 만약, 이 연료가 날아갔다면 남아 있던 함대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 본토에서 수송함을 보낸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진주만은 그 자체로 태평양의 전진 보급기지였고, 정비창이었다. 니미츠 제독이 진주만의 유류저장시설이 멀쩡한 걸 보며,


“유류저장시설은 목표로 삼기에 꽤 컸는데...”


라며 쾌재를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군의 공창, 드라이독이 멀쩡한 것도 이후 미 해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을 펼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산호해 해전에서 중파당한 요크타운을 단 3일 만에 전선복귀 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드라이 독 덕분이다.


그렇다고 일본 해군을 탓할 수만도 없는 것이 당시 일본 해군의 우선 목표는 전함과 함정들이었고, 유류 저장고는 애초에 목표로 표시되지 않았다(지도의 업데이트가 늦어서 표시가 안 돼 있었다), 드라이독 같은 경우에도 함재기의 일회성 폭격에 무너질 시설물이 아니었다. 이들을 폭격해 사용불능 상태로 만들려면, 미군이 유럽 전선에서 했었듯이 대형 폭격기를 동원했어야 한다.


어쨌든 이 모든 시설물이 있는 진주만을 ‘참전 명분’을 위해 일본군에게 고스란히 내놓는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이 시설물들을 별 무리 없이 복구할 수 있었지만, 미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주도권을 잡는데 걸린 시간은 2년이나 걸렸다. 그것도 미드웨이 해전과 같은 일본군의 ‘실수’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무리 미국이라지만, 본격적인 전시경제로 넘어간 것은 1943년부터였고 그때까지 미국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을 상대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껴야했다.


오죽하면 진주만 공습 직후 니미츠가 항공모함을 동원해 대규모 작전을 벌이려 했을 때 가장 힘들어 했던 건 주변 참모들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했을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미군이 태평양에서 동원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항공모함 몇 척이 다였다.


“전술적인 승리, 전략적인 패배”


를 말할 때 가장 적확한 예가 바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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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이후


일본은 파죽지세였다.


진주만 공습 직후 남방작전으로 일본은 착실하게 동남아시아의 미국, 영국 식민지를 점령해 나갔다. 일본은 열광했다. 이대로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부분은 잠시 생각해 봐야 하는데, 당시 일본 해군은 러일 전쟁 당시의 쓰시마 해전 이후로 ‘함대결전사상’에 매몰돼 있었다. 단 한 번의 함대결전으로 전쟁의 향방이 결정되기에 이 한 방에 모든 걸 건다는 것. 이것이 당시 일본 해군의 생각이었다.


이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가는 당시 일본 해군의 준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당시 일본 해군에는 ‘예비’란 개념이 없었다. 증원이나 보충이란 개념이 아예 없고, 단 한 번의 불꽃같은 전투에 모두 불사르겠다는 전쟁준비 개념.


이 덕분에 일본 해군의 인적, 물적 토대는 단 한 번의 결전에 모든 게 맞춰졌다.


그 결과는 참담했는데, 진주만 공습과 이후 남방작전을 준비하자 각 군항의 탄약 창고는 모두 텅텅 비었다. 보병으로 치자면, 정확히 1회 전투 분량의 탄약을 맞췄더니 탄약고가 빈 것과 마찬가지였다. 일본 해군의 모든 전함과 군함은 사전에 정확히 예비한 탄약을 갖추고 전쟁터에 나갔다. 예비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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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은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물론, 민간의 생각도 대동소이했다.


진주만공습과 뒤이은 남방작전의 성공 뒤 일본 외무성은 당연하단 듯 ‘강화조약’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고, 외무성의 이런 움직임을 본 대본영과 육, 해군의 전쟁 지도부들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 정도 타격을 입혔으니, 미국이 먼저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이다. 협상은 그때 가서 천천히 응해주면 된다.”


동상이몽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정말 생각이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 아니,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를 못 했다고 해야 할까?


재미난 것은 적을 줄이기도 부족한 마당에 일본은 하염없이 적을 늘려갔다는 점이다. 세계 최고의 인구대국인 중국 전선에서 허우적거리는 마당에 세계 최강의 공업생산력을 자랑하는 미국을 기습 공격했고, 뒤이어 영국과도 싸우고, 호주와도 싸울 태세에 들어갔다.


미쳤다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의 고질적인 군벌문제가 재등장하게 된다. 해군의 성공을 보면서 육군은 해군에 딴지를 걸었고, 해군은 그런 육군에게 ‘자신들의 전략’을 강요했다. 이 다툼의 핵심은 ‘호주’였다. 당시 일본 해군은 호주를 점령하면 미국이 겁을 먹고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정작 호주를 점령할 일본 육군은 자신들이 남방작전으로 점령한 지역만으로도 미국은 충분히 협상에 나올 것이니 지금은 남방작전으로 확보한 동남아를 다지면서 지켜보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육군이 조금 더 상식(?)적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하나의 꼼수가 숨어 있었다.


진주만 공습과 뒤이은 싱가포르 전투에서 일본 해군의 혁혁한 전과는(영국 동양함대의 주력함대가 일본 해군 육상항공대에 의해 박살이 난다) 육군을 조바심 나게 만든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군신(軍神)의 반열에 올랐고, 해군의 쾌속진격은 중국전선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육군과 대조됐다. 당연하게도 육군은 태평양 전선의 확대를 반대하게 된다. 태평양 전선을 현상유지하고, 그 사이 중국 전선에서 승리를 한다면 스포트라이트는 다시 육군에게 비춰질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 사이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육군을 데리고 호주도 점령하고, 하와이도 점령하면 미국이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이고, 태평양 전쟁은 조기에 끝날 것이라 주장한다.


누가 더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때까지 일본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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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폭


진주만 공습 이후의 국제정세는 요동쳤다. 독-이-일의 추축국(樞軸國) 동맹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결정적 이유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만약,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전쟁의 향방은 어떻게 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물론, 미국이 참전하지 않더라도 추축국이 승리할 확률은 연합국이 승리할 확률보다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만 참전하지 않았다면 한 번 해 볼만 한 전쟁이었다(미국의 전시무기 대여법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문제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고 나흘 뒤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대목이다.


당시 히틀러는,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천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동맹국이 생겼다.”


라고 말하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의 외무장관 리벤도르프(Ulrich Friedrich Wilhelm Joachim von Ribbentrop)가 만류했었다. 리벤도르프의 논리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당할 때에만 독일이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은 눈여겨봐야 하는데, 만약 이때 독일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유럽전선에 병력을 보낼 명분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미국을 때린 것은 일본인데, 왜 가만히 있는 독일을 공격해야 할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주 전선은 태평양이 아니라 대서양이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 수 있다.


만약 독일과 이탈리아가 삼국동맹의 조약을 들고 나와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이후의 미국과의 전투에서 소극적으로 반응했던가, 아예 삼국동맹을 파기했다면 미국이 유럽전선에 그렇게 깊숙이 개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경제원조나 무기 대여법에 의한 무기원조는 있었겠지만, 미국의 대규모 참전은 막았을지도 모른다. 백보 양보해 독일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더라도 미국이 삼국동맹을 빌미로 참전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하나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였다. 내부 구성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들을 설득할 명분과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이를 너무도 가볍게 무시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바로 ‘욕심’ 때문이다.


일본이 소련의 등 뒤를 찔러줄지도 모른다는 헛된 기대다. 동부전선에서 쾌속진격을 하던 히틀러는 러시아의 동장군과 진흙장군(rasputitsa)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었던 때였다.


“러시아에는 두 개의 수호신이 있다. 하나는 동장군이고, 나머지 하나는 라스푸티차이다.”


동장군의 경우는 일반인도 익히 알고 있겠지만, 진흙장군이라 불리는 라스푸티차는 생소할 것이다. 말 그대로 ‘진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봄 해빙기와 겨울로 넘어가는 가을에 발생하는(첫 눈이 내리고) 진흙구덩이라 생각하면 된다. 모든 길이 진창으로 뒤바뀌기 때문에 군대의 발이 모두 묶여버리는 것이다. 나폴레옹도 당했던 이 두 장군을 히틀러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모스크바 100킬로미터 앞까지 군대를 진격시킨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소련의 등 뒤에서 칼을 뽑아든다면 어떨까?


그러나 히틀러의 이런 기대는 ‘망상’이었다.


일본은 노몬한 전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결국 추축국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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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일본의 반인반신, 덴노(天皇)의 오판과 태평양 전쟁

미국과 일본의 외교와 태평양 전쟁

정신력으로 전쟁을 결정한 일본

미국의 최후통첩, 헐노트(Hull Note)

진주만 공습, 두고두고 욕먹는 이유

인류 역사상 가장 병신같은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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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괴물로 변해가는 일본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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