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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사마천이 되었나


2009년 7월, 논산 육군 훈련소에 입대했다. 나라를 지키고, 공기 좋은 곳에서 수양하며, 나에 대해 돌아보는... 그딴건 모르겠다. 나라를 (강제로) 지키며, 공기 좋은 곳에서 유배...아..아니 수양하는 건 맞았는데 도통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늘 지시에 귀 기울여야 하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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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뭘 생각하다보면 이런 상황이 되곤 했다.


분명히 시간이 없는 건 아닌데 시간을 내서 생각이란 걸 하긴 쉽지 않았다. 반복적인 생활. 이대로 있다간 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낭비할 것 같은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에겐 뭔가가 필요했다. 집중을 할 수 있게 하는 행위.


그래서 펜을 들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부터 기록을 좋아했지만, 그렇다고 뭘 돌아보거나 생각하기 위한 기록은 아니었다. 그때의 기록은 성적을 좀 더 잘 받고, 중요한 걸 잊지 않기 위한 메모에 가까웠다. 불안한 상태에서 하는 기록은 사뭇 달랐다. 잠깐 허락되는 휴식 시간에 일기를 쓰거나 메모를 하다보면 왠지 군대가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 상실의 시대에 느낀 공허함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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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이식 책상을 펴고 모나미 펜과 수첩을 든 나는, 그렇게 사마천이 되어갔다.

출처 (링크)




아, 그렇다고 궁형을 당한 건 아니다...


...아니라고(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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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에 이런 깜찍한 기록을 시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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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형을 당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냥 이런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불안감 해소를 넘어, 쓰는 행위가 주는 손맛은 전역 이후에도 계속됐다. 스쳐가는 것들이 글감이 되는 순간의 그 찰진 손맛을 느끼며 뭘 자꾸 쓰다보니 '여기 저기에 쓴' 기록물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각종 플래너나 책 사고 받은 굿즈 노트에 마구 쓴 것들을 나중에 찾아보려면 책장도 뒤지고 서랍도 뒤지고, 그러다보면 뒤지고 싶고...


그래서 하나의 크기가 필요했다. 프린터로 뽑은 A4요지와 시중에서 파는 플래너를 관통하는 하나의 규격화된 기록 도구. 쓰는 것 자체만을 생각하면 규격화는 중요하지 않지만, 기록물의 가치와 효용성을 생각하면 규격화가 필요하다. 사마천의 메모들이 사마천의 사기가 되기까지는 그런 과정이 있었던 게다. 


    

평생의 소울메이트도 아니고 기록인생의 소울메이트를 만난 건 전역 후다. 학점을 맞추려고 채워 들었던 1학점짜리 수업에서 3P바인더를 만났다. 3P바인더를 모르는 사람이 있거나 3공 바인더랑 착각할 수도 있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지에 펀치를 뚫어 A5 규격의 바인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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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3P바인더 공식홈페이지



요즘 시대에 펀치 뚫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랭클린 플래너를 써왔고, 문구점에서 파는 일반 플래너부터 책을 사면 주는 굿즈 다이어리까지 다 써본 결과, 3P를 따라갈 게 없다. 그 수업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가죽 바인더 한 권을 포상으로 받은 후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었다. 쓰는 행위의 손맛에 이어 3P의 단맛까지 맛 본 이상,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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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6년이 넘게 지났고...(할말이 없군요-편집자 주)



난 이미 틀렸어...    



내지를 출력하는 일도 잦고 펀치 뚫을 일도 생기는 게 3P바인더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굳이 3P를 고집하는 필자를 변태라고 생각, 아니 착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유명한 플래너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플래너의 내지를 다 쓴 후엔, 판매하는 전용 내지를 다시 구매해야 한다. 돈도 돈이지만 나에게 100% 꼭 맞는 양식이 없다. 그냥 쓰긴 아쉬우니 양식을 만들어 쓴다 치자. A4용지에 출력한 다음 가내수공업으로 크기를 맞추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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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



유명한 플래너는 A5나 B6 같은 표준 사이즈가 아니라서 내지를 만들어 쓰기가 번잡하다. 3P바인더를 끊을 수 없는 이유는 이거다. A5 규격이라 A4로 출력한 다음 반으로 접으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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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P바인더의 참맛인 규격화를 맛보고 나서야 이전에 사용하던 플래너들이 얼마나 불편하게 만들어졌는지 깨달았다. 비싸더라도 해가 지나면 다시 구입하는 수 밖에 없었고, 속지가 맞지 않으면 번거로워도 만들어야 했다. 플래너를 쓰려면 원래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했다. 지문인식이 나오기 전까진 밀어서 잠금해제의 불편함을 딱히 느끼지 못한 것처럼.


A5 규격 바인더를 사용하면서는 집에서 별도로 A5를 구입해 사용한다. 물론 A4용지를 그대로 사용해 인쇄 후 반으로 잘라도 된다. 나 역시 회사에서는 이 방법을 사용한다. A4는 어디서든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용지를 구입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양식을 출력할 수 있다. 블로거들이 만들어서 공유하는 양식이 다양하기 때문에 양식을 매번 만들 필요도 없다. A5는 여러모로 후리덤이다. 후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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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5 덕분에 현재 메인 바인더와 서브 바인더를 사용한다. 메인 바인더는 일정관리, 서브 바인더에는 가끔 보는 자료를 모으거나 메인 바인더에서 자료를 옮길 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봤던 군 생활일지는 일정관리가 아니기 때문에 서브바인더에 기록한다. 주고받은 편지도 서브 바인더에 보관한다. 이런 자잘한 덕질의 세계는 추후에 살펴보겠다. 


가장 중요한 정보를 담는 메인 바인더는 나와 이런 식으로 하루를 함께 한다. 


1. 아침에 일어나서 바인더가 담긴 가방을 챙겨서 출근한다.

2. 회사에 도착하면 30분 남짓 책을 읽는다. 

3. 업무 시작 시간 10분 전에 책을 덮고, 컴퓨터를 켠다.
4. 그때 동시에 바인더의 주간계획을 펼친다. 
5. 1-4번의 항목을 시간표(Time Table)에 기록한다, 적어뒀던 오늘 해야 할 일을 확인한다. 그리고 새로운 할 일이 생겼으면 아래에 추가적으로 적어놓는다. (업무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바인더보다 원노트에 기록하고 있다.)
6. 오전 업무를 보고,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업무 시작되면 다시 한 번 바인더를 확인하고 오전 업무 및 점심시간에 했던 것들을 기록한다.
7. 오후 업무를 보고, 퇴근하기 전에 오늘 해야 할 일의 경과를 확인한다.(완료, 연기, 취소 등의 플래그를 표시)  
8. 잠들기 전 다시 한 번 바인더를 펼쳐서 놓친 부분이나 내일(+또는 이번 주에) 해야 할 것들을 적어놓는다.




간단히 정리하면 아침(오전 업무 시작), 점심(오후 업무 시작), 저녁(퇴근 전), 저녁 (잠들기 전)까지 최소 4번의 바인더를 펼쳐 기록을 한다. 회의를 하거나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등 비정기적인 일들이 발생하면 그 횟수는 더 늘어난다.(왜냐면 이런 기록을 남기는 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그등...) 보통 한 번 기록을 할 때 약 10분 정도 소요되고, 업무 시간에는 언제든지 메모를 할 수 있게 바인더를 펼쳐놓기도 한다. 메인 바인더에 남기는 기록, 그리고서브 바인더와 함께하는 자잘한 덕질의 세계는 앞으로 슬슬 살펴보도록 하겠다.



나는 어쩌다 영구적 사마천이 되었나


한 해가 끝날 때쯤 뒤를 돌아보면서 '올해는 뭐 했더라...' 이런 생각 안 해본 사람 없을 거다. 나도 늘 공허했다. 군대에 있을 때 불안해서 시작한 기록이 전역 후에도 이어진 건 공허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록을 한다고 해서 24시간이 48시간으로 늘어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을 수 있다. 연말에 한 해를 돌아보면 부족한 게 금방 보여 새해를 계획하기도 쉬웠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강점을 갖고 있고 또 어떤 것들을 좋아하는지 발견하게 되는 건 쓰다보니 저절로 따라왔다. 그래서 군대를 다녀온지 한참 지났는데도 몇 권의 바인더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궁형 없이도) 영구적 사마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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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짤은 필자의 상태와 관련이 없습니다






누군가피워놓은모닥불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