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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왕 랭킹을 매기자면 세 번째 이하로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는 왕이 있다. 바로 숙종이다. 그의 빈번한 사극 출연은 그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다. 한때 그가 목매고 사랑했던 희빈 장씨, 장희빈이 무슨 한국형 팜므파탈 여배우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배역처럼 돼 있는지라 숙종은 싫건 좋건 호출이 돼야 하는 것이다. 김지미, 남정임, 윤여정, 이미숙, 정선경, 전인화, 김혜수, 김태희... 이름만 들어도 황홀해지는 연기자들이 나래비로 줄을 서 왔으니 숙종은 저승에서 뿌듯할까 아쉬울까.


대개 드라마상에서 숙종은 찌질한 존재로 그려진다. 여자들의 사랑 싸움에 놀아나고 베갯머리 송사에 홀딱 넘어가는 무능한 에다가 한 번 삐지면 한이 없고 애정이 끓을 때는 그렇게 구수할 수가 없다가 한 번 식으면 개도 고개를 돌리는 죽무더기가 되는 나쁜 남자 말이다. 하지만 숙종은 몸은 좀 약했을 망정 조선 왕조 왕 가운데 영조 다음으로 긴 치세를 누렸고 신하들의 머리 위에서 권력을 행사할 줄 알았던 몇 안되는 왕이었다. 한 예로 숙종은 그 치세 기간 몇 번씩이나 “위로부터의 정권 교체”를 단행한다. ‘환국’(換局)이다.


숙종 초기에는 남인 정권이었다. 조정의 중심 세력을 갈아치우기보다는 편들어 주기 전술을 썼던 아버지 현종이 어머니 인선왕후가 죽은 뒤 일어난 제 2차 예송논쟁에서 남인을 지지하면서 남인, 그 중에서도 탁남(濁南)이라 불리는 세력이 숙종 초반의 집권 세력이 돼 있었다. 그 영수는 영의정 허적이었다.


이 무렵, 청나라에서는 삼번의 난이 거세게 일어났다. 청나라가 축출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일었고 ‘북벌’의 기치가 다시 등장했다. 숙종 2년 실시된 과거에서는 무려 1만 8천명의 무과 별시 급제자가 탄생(?)했는데 정묘호란이 일어나던 해인 1627년 5천 명의 무과 별시 급제자를 배출(?)했던 사실을 떠올려 보면 그 의도가 들여다보인다. 1만 8천 명의 무사들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런데 북벌은 흐지부지됐고 이 1만 8천 대군(?)은 허울만 좋은 급제작 됐다. 별시에 급제하고도 그 대부분은 관직을 받지 못하고 그저 ‘선달’로 불릴 뿐이었다. 봉이 김선달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각설하고 이 군비 확장의 주도 세력이 남인이었고 군의 지휘권을 쥐었다. 이는 곧 나이는 어리지만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숙종의 비위를 거스른다. 즉위하자마자 열 네 살의 어린 임금으로서 서인의 대원로 송시열과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맞장을 떴던 숙종이었다. 숙종은 스무살도 되기 전 환국을 단행하여 탁남파 정권을 무너뜨리고 서인에게 정권을 넘긴다. 이를 역사에서는 경신환국이라 부른다. (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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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경신환국의 중대한 계기로 얘기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기름천막 사건이다. 이미 나이 일흔에 이른 허적에게 숙종은 궤장을 하사하는 한편, 그 아버지 허잠에게 시호를 내려 원로 대신 대접을 해 주었다. 이런 성은을 입은 집에서는 당연히 잔치를 벌이게 마련인데 마침 비가 왔다.


허적의 집에서 잔치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던 숙종은 궁중에서 쓰던 기름천막을 가져다 주어 잔치에 차질이 없게 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숙종의 피를 펄펄 끓게 만들어 놓았다.


“이미 가져갔다고 하옵니다”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데가 없다”(普天之下 莫非王土)는 세계관이 지배하던 무렵, 왕의 물품은 곧 국가의 것이기도 했다. 그걸 허락도 받지 않고 스스럼없이 가져갔다는 말에 나이 열아홉의 숙종은 대로한다. “이 싸가지없는 것들 봐라!” 식으로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는 우선 병권부터 정리한다. 할아버지 효종의 총애를 받아 무신으로서는 임금의 최측근이라 할 승지에 임명되는 파격을 연출했던 당대의 무장 유혁연을 아웃시키고 외척 김만기로 하여금 군대를 장악하게 했고 서인들이 고변한 역적 모의를 근거로 허적 윤휴 등 남인들을 싹쓸이한다. 경신환국, 그 규모와 충격이 커서 경신대출척이라 불리기도 한다.


기름천막 사건은 실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 평소 허적을 좋게 생각하던 숙종이 기름천막 하나에 꼭지가 돌아 남인을 박살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 사건이 역사를 바꾼 중대한 사실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유는 권세를 빌미로 제 권리 밖의 일을 하거나 공공의 소유를 건드리거나 공적인 영역을 사적인 놀이터로 쓰는 행각이 어떤 참변을 가져다 주는가를 보여주는 적절한 예화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이전에도 자신의 칠순연이든 자식 혼례연이든 궁중에 있던 기름천막 정도 갖다 쓴 일은 수도 없었을 것이다. 숙종 자신도 별 생각 없이 “비가 오니 기름천막이 필요하겠다. 그거 좀 갖다 주려무나.” 했으니 ‘알아서’ 가지고 간 것에 대해 허 동작 한 번 빠르구나 웃고 넘길 ‘관행’일 수도 있었으리라. 어디 기름 천막 뿐이랴. 조선왕조실록에는 ‘관물’ (官物)을 사사로이 가져다 쓰고 ‘관노비’를 제 편하자고 맘대로 써먹은 ‘윗것’들에 대한 탄핵이 끊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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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년 동안 상상 이상으로 무능하고 무지한 데다 공사를 완벽하게 헛갈려 버린 대통령 치하에서 대한민국은 무진 고생을 했다. 지난 겨울 주말을 촛불로 불태우며 얼마나 “주말이 있는 삶”을 목메어 갈망했던가. 어찌 어찌 감옥소 방도 제 방으로 착각하며 “도배해 줘!”를 부르짖는 저 철딱서니없는 사람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감옥까지 보내긴 했으나 우리는 절실하게 알고 있다. 자신의 공적인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사람들을. 뼈아프게 경험해 왔다. 공공의 역량을 제 발품, 머리품 줄이는 데 쓰던 이들의 개념 없음을. 또 진저리치게 겪어 왔다. 공사를 헛갈리고도 그걸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관행인데 뭐가 문제야?” 하던 이들의 당당함을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대한민국은 경기도 의왕의 교도소에서 제2 국무회의를 꾸리고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고 한 번 체한 음식은 그 뒤로도 꺼려지는 게 사람이다. 이런 공과 사의 혼용, 그 자체에 대한 무덤덤, 그 일이 불거진 뒤의 형식적인 사과의 도식은 이제 알러지를 넘어 조건반사적으로 짜증이 난다. 국회의원인 남편의 보좌관을 자신의 강연 일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잡무에 동원했다는 안철수 후보 부인의 이야기에 혀를 찼던 이유가 되겠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했던 것은 그 보좌관이 남편의 사비를 들여 채용한 비서가 아니라 나랏돈을 받고 일하는 국회의원 보좌관이며, 대선 후보로서가 아니라 국회의원으로서의 책임과 권능을 수행하기 위해 공적으로 채용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남편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 목포에 가든 울릉도에 가든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나랏돈을 들여 운영되는 국회의원 보좌관이 김미경 씨의 시다바리가 되거나 강의 자료를 손봐 줘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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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머 나만 이렇게 했나 국회의원 300명 중 안그런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말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 가운데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은 그분의 남편 뿐이지 않은가.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다. 잘 닦아야 한다. 그런데 사과의 방식이 ‘공보실을 통한’ 사과인 것이 매우 목에 걸린다. 앞으로 숱하게 마이크 앞에도 서야 하고 카메라 앞에도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될 공인이 될 텐데 이 정도 사안에서는 당당하고도 공손하게 제일 중요한 거, '공개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이 일로 안철수 후보 사퇴를 논하는 건 오버다 . 그러나 억울해 해서도, 소나기만 피하자 해서도 안된다. 기름천막 하나도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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