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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조사(弔詞)

2013-12-1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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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3. 금요일

딴지일보 국제부 Samuel Seong







1989년 봄. 갓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던 춘천의 작은 사립대학교 본관 1층에서는 매일 소수의 인원들이 집회를 열고 있었다. 요구사항은 20% 인상된 등록금 인상 철회. 대학 본부는 완전히 생까고 있었지만, 집회 참여자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한달이 지나지 않아 전교생 2100명인 학교에서 각 학과 단위로 무기한 수업 거부가 결의되고, 이 결의는 100여 일이 지나 대학 본부가 등록금 반환을 하면서 끝난다. 

 

그때 마이크가 필요 없었던 사람이 하나 있었다. 종합대학으로 갓 승격되었던 까닭에 학생회도 아니고 ‘학회체제’였던지라 그 학회들의 연합체의 대표였던 사회복지학과 학회장. 마이크가 없으면 안되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정말 마이크가 필요 없었다. 그는 정말 마이크 없이 대학 본관이 떠나가라고 구호를 외쳤었다. 대학 본부의 항복과 동시에 치워진 단대 학생회장 선거에서 그는 비교적 손쉽게 제1대 사회대학 학생회장에 당선이 된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거의 모든 대학은 집회로 학기를 시작해 종강 시험으로 학기를 마쳤다. 유독 나이가 많았던 그는 거리 집회에서 정장 차림으로 자주 나타났으며 그 행색으로 뛰어다녔던지라 눈에 쉽게 들어왔다.


그래서 그를 두고 몇몇 선배들은 ‘프락치 아니냐’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때 그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던 이들, 사회주의 혁명을 심심찮게 이야기하던 그 선배들은 소소하게 잘 산다. 그가 2008년에 독립PD협회장으로 공중파 방송에서 완전히 축출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공중파 방송사들의 파업에 지지 연설을 하던 당시, 그게 참 새삼스러웠다.


인도아 대륙을 좀 다녀봤다는 이들에게는 ‘똠방’이라는 아이디로 많이 알려진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제작자인 이성규 씨는 나의 대학 선배다.


대학 다닐 무렵에는 서로 ‘그런 사람이 있다더라’ 정도로만 알고 지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성규 형은 사회대였고 난 자연대였다. 그리고 둘 다 발만 걸쳤던 운동권에서, 정파조차 달랐기 때문에 굳이 알 관계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조금 친해졌던 것은 1994년 즈음 천리안에 대학 동호회가 생기면서부터였다. 우습게도 둘 다 ‘통일된 조국’, 혹은 ‘제국주의’, 혹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말을 대자보에 쓰는 것을 혐오했기에 그랬던 거 같다. 쉽게 말하면, “저거 누가 알아먹으라고 쓴 거냐.”


해가 흐르면서 선배와 종종 술자리에 합석할 일은 있었지만, 속내를 털어놓을 만한 관계까지 되진 않았었다. 그는 방송쟁이였고, 나는 유학이랍시고 캐나다 갔다가 IMF 맞고 돌아와 생선팔이부터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후 부쩍 가까워진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인도 비하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인도의 마오이스트 그룹, 낙샬들을 취재하겠다는 취재 기획서를 학교 PC통신 동호회에 올려놨을 때, 내가 그것을 발편집하여 딴지 기사로 올린 일이었다. 

 

그때 홍대의 옥탑방에 있었던 딴지일보 사무실을 한 독립 다큐 팀과 같이 썼고, 그도 이 다큐 팀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함께 어울일 일들이 조금씩 있었다. 당시 나는 인도 대륙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편집을 했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사진들을 넣었지만, 그것을 보고도 ‘응원한다’는 열성 딴지 독자들의 메일도 꽤 있었던 것 같다.


10년간 10명도 안되는 이들을 개종시켰다는 극도로 불성실한(?) 선교사 부부 집에서 그가 E메일 확인을 하기 위해 메일함을 열었을 때, 업무와 상관없는 응원 E메일이 로딩되는 시간 동안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모뎀을 쓰던 인도의 구리구리한 인터넷 때문인지 메일이 많이 가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이후 그가 만든 6개월에 걸쳐 만든 다큐멘터리 ‘비하르, 보이지 않는 전쟁’은 그해 인권영화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당시 인도 보안대의 감시와 낙샬들의 불신 때문에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 싸우고 있는가를 보다 극명하게 담을 수 있었던 이 작품은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감독과의 대화에선 이런 질문까지 나왔다고 한다. “당신 누구 편이오?”

 

그러니까… ‘당신 누구 편이냐?’는 질문 하나로 수백만이 죽어갔던 나라에서 ‘세상을 바꾸겠다’고 하던 분들 중의 상당수가 그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성찰 없음’을 증명했던 셈이다. 그것을 보고 나서 나도 ‘무슨 파’라는 입장은 버렸다. 그해 겨울, 문화대혁명을 옹호하던 후배 앞에 ‘문화대동란’이라고 거침없이 반박했었으니까.

 

그즈음에 그는 사랑에 빠졌고, 결혼한다. 그때 그의 통장 잔고는 30만 원이 안되었다. 천만 원으로 결혼하려고 해도 그렇게 하는 법을 찾아 봐야 하는 세상이었는데 이 부부는 별종 중에서도 별종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었다.

 

수많은 대학 선배들 중에 한 명이었던 그가 내 인생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2005년 겨울이었다.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부모님이 계시던 삼천포에 몸을 의탁하러 가던 길에 대구를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선배는 “내가 연락할 일이 있을 거야”라면서 용돈을 좀 넣어 줬었다. 


이후 나는 다른 일을 준비하다가 그것도 엎어졌는데, 그즈음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해보지 않겠냐고.

 

2006년 4월,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인도에 갔다.


99년부터 줄곧 IT바닥에서만 밥을 벌어먹다가 처음 접하게 된 방송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그래서 많이 싸우기도 했다. 감독의 말이 절대적인 방송가와 달리 IT판에선 논쟁은 일상다반사였으니까. 더군다나 요소 투입에 따른 산출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에 대한 꼼꼼한 기획이 전제가 될 수 밖에 없는 분야에서 일하다가 온 넘에게 ‘무조건 죽치고 앉아서 카메라 돌린다’는 현장은 깼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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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뭄바이

 


하도 싸워서 지원금을 줬던 단체에 내야 할 영수증 내역과 제작 내역은 네팔에서 나 혼자 정리해서 제출했다. 게다가 그때 촬영 장소들 중의 한 곳이었던 뭄바이 통근열차가 폭탄 테러로 날아갔음에도, 한국인 팀은 아무도 신경을 안 썼을 정도. 현지 코디는 겁을 잔뜩 먹고 다른 넘을 집어 넣은 후 도망갔는데도 말이다.

 

여튼 그해에 그렇게 만들어진 몇 편 중에서 두 편은 KBS의 일요스페셜을 통해 방영되었다. 선배와 다시 일할 일은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2006년에 인도를 경험했기에 인도아 대륙에서는 뭐든 할 수 있게 되었고, 7년째 여기서 밥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 선배에게 고마웠던 것은 나름 좌절하고 자빠져있던 넘에게 진짜 힘든 현실은 그 고통을 말하는 법도 모르는 단계’라는 것을 리얼타임으로 겪게 해 줬던 것이다. ‘인도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인도에서 인사하는 거’ 라고 불리는 이질을 하필이면 인도에서도 가장 깡촌인 비하르에서 당했을 때, 나를 일으켜 세웠던 것은 20대에 40대의 피부를 가진 현지 코디의 누나가 가져다 준 과일 몇 개였다.


돼지 움막 수준인 집에서 오락가락 하는 정줄을 과일 몇 개로 잡는 동안, 내가 삶도 접으려고 했던 그 어려움이 여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더라.

 

선배는 이후 지원금을 받는 몇 개의 프로젝트들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꽤 잘 나갔다. 나야 그가 네팔의 해발 5천미터 산골 마을 무스탕에서 급류에 휘말려 정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마누라 못 볼뻔 했네’ 같은 대사친 걸 두고 평소에 형수에게 얼마나 잘못하면 그런 작위적인 대사를 치냐고 놀렸지만.

 

정권이 바뀌자 잘나가던 그가 무진장 힘들어 졌었다. 방송국 노조에서 파업을 하면 방송사에서는 외주회사 인력을 불러들인다. 그러니 노조에서 파업을 하면 그에게는 한동안의 일거리가 생기는 셈인데, 그가 초대 대표를 맡았던 독립PD협회는 ‘방송을 장악하려는 권력에 빌붙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던 것이다.

 

전임 가카의 주특기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사람 밥줄 끊기. 방송일이 뚝 끊겼다. 일년에 두어 편 정도의 다큐를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데, 제작비는 외부 지원을 받고 공중파로 방송이 되면 딱 개인의 인건비를 돌려받는 게 수입원이었는데 끊어진 것이다. 식당도 운영하고 있긴 했지만, 주방장의 심기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로 바뀌는 것이 당연한 나라에서 온 주방장에게, 본인의 기분과 상관없이 항상 똑같은 맛을 만들어내게 하는 거, 쉽지 않다. 특히 학교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방학이 되면 손님은 끊긴다.

 

불안정한 소득은 사람을 안에서부터 괴롭힌다. 선배의 평생 꿈이 극장 개봉용 장편 다큐멘터리 제작이었지만, 공중파에서 쫓겨나 작업을 하게 되면서 사실은 무척 힘들어했다. 화면의 여백이 주는 힘에 대해 강조하던 사람이 화면 가득 하고 싶은 말을 담아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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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이상엽

 

 

굶어죽는 지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토록 애정하던 ‘비하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종편에서 방영하게 되었을 때 폭언을 쏟아부었었다. 백이·숙제처럼 살려고 해도 고사리 값이 비싸서 못사는 시대에. 그는 공중파와의 불합리한 저작권 계약 관행을 종편과는 다르게 하기 위해 애썼고, 그것을 안착시켰음에도.

 

그는 원칙과 전통을 사랑한 보수주의자였다. 신세대의 스타일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겉으로 표시내지 않을 만큼의 교양과 예의를 갖춘 꼰대였다. 클래식과 풍물을 사랑했고, 종가의 전통을 깊은 애정으로 화면에 담아냈던 그가 보수와 맞섰던 것은 자신을 보수라고 하는 이들이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를 무시하는 양아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2006년부터 디스크와 당뇨를 앓고 있었던 그는 2011년에 <오래된 인력거>와 그의 유작이 되어버린 <시바, 인생을 던져>를 만들면서 간도 많이 망가졌다. 간염은 간암이 되었고, 올 여름부터 싸우기 시작했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2시 20분, 그가 태어나 컸던 춘천에서 숨을 거뒀다.

 

이 두서없고 개인적인 글을 올리는 이유는 그와 함께 했던 이들의 글과 그가 생전에 썼던 글들을 책 한 권으로 엮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 세상을 먼저 살고 있는 꼰대의 의무라고 하던 그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공유하기 위해서.

 

그의 유작인 <시바, 인생을 던져>는 12월 19일 개봉한다.

 

 






딴지일보 국제부 Samuel 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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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