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2013. 12. 17. 화요일

편집부 홀짝







 












1.jpg


지난 12월 5일, 전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타계했다. 향년 95세. 이미 지난 6월 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당시 만델라의 가족들은 회의를 열어 그의 마지막을 준비했다고 한다. 한평생 인종차별 극복을 위해 헌신한 노(老) 운동가이자 정치인인 만델라는 95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 쪽으로 방향을 돌이켰지만 끝내 2013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만델라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이목이 순식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집중됐다. 무려 91개 국 정상과 10명의 전직 국가 수반이 영결식에 참석했다. 이는 지난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다. 며칠간 전 세계 언론은 만델라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데에 시간과 지면을 할애했고, 장례식이 진행되는 실황을 시시각각 보도하며 추모 분위기를 전달했다. 세계는 말 그대로 슬픔에 잠겼다. 만델라의 장례 기간 동안 만큼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 자리에 넬슨 만델라가 누워 있었다.


찌질한 위인전의 여섯 번째 인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막 걸음을 멈춘 넬슨 만델라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식민 지배의 역사


여느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또한 식민 지배의 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 한다. 17세기 중반(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케이프타운 상륙 이후 본격화된 네덜란드인의 이주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위치한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 지역은 여러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이 넓게 산재하여 살고 있는 땅이었다.


그리고 식민 지배가 시작된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 영역을 확보하려는 정복자들과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원주민 사이의 치열한 전투-사실상 살육이라 불러도 좋을-가 100년 이상 이어졌다. 훗날 남아프리카공화국 영토가 되는 이 지역을 처음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출신 백인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어’인이라 불렀는데, ‘보어(Boer)’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한다. 이들 보어인의 후손을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남아프리카 지역에 최초로 정착한 백인’원주민’이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서 네덜란드어를 사용했던 보어인들은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에 정착하여 오랜 세월 살면서 네덜란드 본국어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언어의 변천을 겪게 된다. 아프리카너들이 사용하는 이 언어를 아프리칸스어(Afrikaans language)라고 부르며, 지금도 아프리칸스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용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18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남아프리카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식민 지배의 패권이 네덜란드에서 영국 제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남아프리카에 상륙한 영국은 이미 1세기 앞서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보어인들을 북쪽으로 밀어내고 영향력을 점차 확장시켜 나간다. 이에 맞서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 내에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건설하여 영국과 대립한다.


2.jpg 3.jpg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 국기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와 오렌지자유국의 접경 지대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트란스발공화국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면서 사태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침공한 것이다. 보어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1899년에 발발하여 1902년에 그 끝을 보는데, 결과는 끝까지 저항한 보어인들의 처참한 패배였다. 승자인 영국은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영연방에 병합하면서 남아프리카 전역을 제국의 깃발 아래 두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남아있는 보어인들과의 공존을 꾀하기도 한다.


이미 17세기부터 백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남아프리카의 흑인 원주민들이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부족 차원의 국지적 저항은 이어나갔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피의 보복을 부를 뿐이었다. 보어인들에게 짓밟힌 삶의 터전에서, 이제는 서로 다른 백인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의 틈바구니에 갇힌 흑인 원주민들은 그들의 땅과 부족이 유린 당하는 꼴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보어인이 지배하든, 영국인이 지배하든, 보어인과 영국인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 간에 흑인 원주민들의 지위는 어차피 가장 아래였다. 백인들이 멋대로 갈라놓은 문명과 야만의 구분으로 인하여 그들의 검은 피부 위에 야만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야만’의 원주민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아프리카 대륙에서 살아오면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다이아몬드와 황금 때문에 ‘문명’의 백인들은 서로를 살육했다. 원주민들은 너무나 야만적이어서 황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때문에 저들이 왜 그렇게 악착같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21세기가 된 지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은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제는 ‘문명화’된 흑인들은 이제 그곳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들의 하루를 바친다. 예전에는 문명의 발굽 아래 짓밟혔던 이들은 이제는 자본의 발굽 아래 목숨을 잃고 있다. 2012년,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대규모 광산 파업으로 인해 진압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 45명이 사망했다. 아무튼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문명의 야만 정복은 남아프리카도 예외가 아니었다.


롤리흘라흘라 만델라


넬슨 만델라는 1918년 7월 18일, 남아프리카 트란스케이의 음베조에서 태어났다. 갓 태어난 만델라는 롤리흘라흘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갖게 되는데, 롤리흘라흘라는 코사어로 ‘나뭇가지를 잡아당기다’라는 표현으로 보통은 ‘말썽꾸러기’를 뜻하는 말로 통한다.


만델라의 집안은 남아프리카 원주민 부족 가운데 하나인 템부의 왕족이었다. 왕위를 계승하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쿠누 마을의 마디바 부족 추장을 지냈고 만델라의 집안은 대대로 템부족 왕의 조언자 역할을 맡아왔다고 한다. 남아프리카 원주민 부족의 일원으로 태어난 만델라는 원주민 전통의 생활 환경 속에서 비교적 서양 문명과는 거리를 둔 채 성장하지만 한편으로는 만 7세에 서양식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이때, 학교 교사가 만델라에게 넬슨(Nelson)이라는 영어식 이름을 지어 준다.


4.jpg

청년 만델라


만델라의 인생에 첫 번째 변화가 닥친 것은 1927년, 그의 나이 이제 만 9세 때였다. 만델라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만델라의 어머니가 템부족 섭정에게 아들을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시 템부족은 왕위를 계승해야 할 왕자의 나이가 너무 어린 관계로 왕족 가운데 하나였던 욘긴타바가 섭정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하루 아침에 템부족의 대궁전으로 맡겨진 만델라는 그곳에서 섭정의 아들과 거의 동등한 대우와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다. 섭정은 교육의 필요성을 꽤 중요시 했던 인물이었으므로 만델라는 섭정의 지원 하에 계속해서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만델라는 어린 시절부터 서양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20세가 되기 전까지는 아프리카 원주민 전통의 영향을 더 깊이 받았다. 그가 태어난 쿠누나, 템부족 궁전이 위치한 음케케즈웨니는 남아프리카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따라서 학교를 제외하면 주변의 백인이라고는 치안판사 정도 뿐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만델라는 템부족의 궁전에서 부족 원로들의 회의를 보고 들으며 자랐고, 자연스럽게 그들에게서 삶의 방식과 지혜를 터득했다.


만 16세의 만델라는 아프리카 전통 할례의식을 치른다. 할례는 일종의 성인식으로 남자 아이의 성기에서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인데, 할례를 통하여 비로소 부족의 성인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할례를 치른 만델라는 ‘달리붕가(Dalibhunga)’라는 새 이름을 받는다. 코사어 달리붕가는 ‘새로운 권력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만델라의 이름이 말썽꾸러기라는 뜻의 롤리흘라흘라에서 새로운 권력자라는 뜻의 달리붕가로 변한 것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말썽꾸러기에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는 그의 인생역경과 묘하게 닮아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할 수 있겠다.


식민 교육의 아이러니


청년이 되기까지 만델라가 자라온 환경과 행적은 앞선 <찌질한 위인전>에서 다루었던 간디의 그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약간의 구조적 차이는 있지만 간디와 만델라는 모두 제국의 식민 통치를 겪고 있는 땅에서 피지배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그러면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서양식 교육의 기회를 보장받으며 성장했다. 간디와 만델라는 모두 초기에는 서구 문명이나 백인들에게 별다른 큰 반감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며 그곳에 거주하는 인도인들의 민권을 위해 싸우던 간디가 막상 보어 전쟁이 일어나자 영국 제국의 일원으로 부상병을 수송하는 부대에 지원하여 참전한 이야기는 이미 간디편에서 다룬 바 있다. 간디가 남아프리카에 이주해 온 인도인들의 민권을 위해 싸우면서도 흑인 민권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차치하자.


만델라 또한 그의 자서전에서 비록 그가 받은 학교 교육이 식민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그 자신은 '그들이 주는 혜택이 불이익보다 많다고 믿었다'고 고백한다.


그랬던 이들이 차별과 억압을 피부로 겪으면서 점차 저항과 투쟁의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실상 식민지배집단이 제공하는 피지배계층에 대한 제한적 교육의 기회는 그들의 식민지배 혹은 착취를 영속화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지배의 영속화를 위해 뿌린 씨앗이 한편으로는 자신들에 대한 저항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는 아이러니. 그들이 원치 않게 뿌린 저항의 씨앗은 심지어 그들이 행하는 가혹한 차별과 압제라는 양분을 먹고 자라났다. 억압의 강도가 더해질수록 저항의 열매는 더욱 빠르고 풍성하게 열리기 마련이다. 하(下)편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겠지만, 넬슨 만델라라는 시대의 위인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역사상 가장 지독한 인종 차별 정책이 없었다면 절대로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세상의 이치는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5.jpg

백인 전용 알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의 시작


클라크베리 기숙학교와 힐트타운 칼리지를 거친 만델라는 1939년에 남아프리카 유일의 흑인 대학교인 포트하레 대학교에 입학한다. 포트하레에서 만델라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1940년, 학생회와 관련된 문제로 인하여 학교 측과 마찰을 일으킨 만델라는 학교 측의 최후 통첩을 거부하고 퇴학을 사실상 ‘선택’한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만델라에게 더욱 충격적인 일이 닥친다. 사실상 만델라의 보호자나 다름없는 섭정이 그의 아들과 만델라에게 혼인을 명령한 것이다. 당시 부족의 관례에 따라 만델라는 섭정이 정해주는 신부감과 혼인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를 견딜 수 없었던 만델라는 거의 야반도주하다시피 섭정을 피해 섭정의 아들과 함께(섭정의 아들 또한 결혼을 피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친다. 이는 만델라 인생의 커다란 몇 가지 변곡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로써 만델라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하게 되었다.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인 요하네스버그에서 만델라는 우여곡절 끝에 훗날 투쟁 동지이자 기나긴 수감 생활을 함께 하게 되는 월터 시술루를 처음 만나 그의 도움으로 백인 변호사가 운영하는 법률회사의 견습서리로 채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6.jpg

월터 시술루


만델라가 처음으로 아프리카 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ANC)와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 ANC는 1910년 남아프리카연방이 결성된 후 2년이 지난 1912년에 ‘남아프리카 원주민민족회의’로 결성되어 남아프리카 내 흑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에 맞서 반인종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였다.(1923년 ANC로 개명) ANC는 맨 처음 결성할 당시부터 요하네스버그에 거주하는 아프리카인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만델라가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던 시절에도 요하네스버그에는 ANC 회원들이 대다수 분포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만델라는 같은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는 가우어 라데베의 소개로 ANC 모임에 비공식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만델라는 정치와 관련하여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론이나 회의에 가담하기 보다는 주로 관찰자의 입장에서 모임에 참석했다.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면서 겨우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었던 만델라는 그러면서도 돈을 아껴 대학의 통신 강좌로 문학사 학위를 따내고 이어서 법학사 학위 취득을 위해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에 진학한다. 이곳의 학생들 가운데 만델라는 거의 유일한 흑인이었기 때문에 학교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한편으로는 조 슬로보와 루스 퍼스트, 브람 피셔와 같은 백인 친구들을 사귀면서 인맥과 사고를 넓혀나갔다. 이들은 모두 만델라와 함께 평생 동안 남아프리카 흑인의 자유를 위해 싸우게 된다. 이와 동시에 만델라는 ANC 내에서도 본격적으로 활동의 영역을 넓혀 나가기 시작하여 1944년에는 ANC 청년동맹을 공동 결성하고 1948년에는 청년동맹의 전국 서기로 선출되는 등 흑인민권운동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려 나갔다. 그리고 같은 해인 1948년, 남아프리카연방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시작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 악마적 인종차별 정책


1948년, 남아프리카연방에서 실시된 백인 보통선거에서 영국계 백인 중심의 정당인 통일당과 네덜란드계 백인인 아프리카너 중심의 국민당이 맞붙었다. 이 선거에서 국민당이 통일당을 꺾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면서 보어 전쟁 이후 아프리카너들이 영국계 백인들에게 내줬던 정국의 주도권을 다시 획득한다.


다니엘 말란 박사가 이끄는 국민당은 선거 전부터 백인 우월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흑인과 유색 인종의 권리를 제한할 것임을 공언했으며, 선거에 승리한 이후 아파르트헤이트의 도입으로 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아프리칸스어로 ‘분리, 격리’를 뜻하는데,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상식적인 인종차별 제도로 전 세계에 악명을 떨친다. 


아파르트헤이트는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제외하고는 그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마적인 인종 차별 제도였는데, 국민당은 대외적으로 나치에 대한 지지 의사를 공공연하게 밝히기도 했다. 국민당의 당수 말란은 신문사의 편집장이면서 전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다. 


7.jpg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


비단 말란 뿐 아니라 대다수의 백인에게 인종차별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신의 뜻’이었다. 인간은 대개 가장 몰상식하고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때 신의 지위를 이용하고 그것을 남용하게 마련이다. 신은 죄가 없다. 다만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죄를 저지를 뿐이다. 


남아프리카 지역 내에서의 인종차별은 이미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이전까지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관습 같은 것이었다. 사회적 통념상 흑인에 대한 차별과 천대가 자연스럽기는 했으나 그것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문제였다. 개인 인격에 따라 흑인에 대한 멸시의 정도가 달랐고 경우에 따라서는 흑인을 백인과 거의 동등하게 존중하는 백인 또한 존재했다. -물론 극소수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면서 인종차별은 이제 법률적인 문제가 되었으며 차별이 규격화 되었다. 그것도 아주 극단적인 인종차별의 형태로 규격화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흑인은 '법적으로' 백인과 결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 백인과 다른 인종 간의 성관계도 불법이 되었다. 피부색에 따른 인종의 '등급'이 법률화 된 것은 물론 흑인들은 통행증 없이 특정 구역을 돌아다닐 경우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구금까지 당할 수 있게 되었다.(이전에도 통행법은 존재했으나 아파르트헤이트 이후 훨씬 강화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각종 차별법 가운데 가장 악랄한 것은 흑인들을 정부가 정해놓은 10곳의 집단 거주지역에 가두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으로 인하여 남아프리카연방 인구의 16%를 차지하는 백인이 남아프리카연방 영토의 87%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머지 84%의 흑인은 불과 13%의 땅에 갇혔다. 그나마 13% 땅의 대부분은 제대로 경작조차 하기 어려운 척박한 토지였기 때문에 흑인들이 경제적으로도 백인들에게 영구히 종속되는 것 또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앞서 말했듯이 투쟁과 저항의 씨앗은 가장 악랄한 형태의 억압을 최고의 자양분 삼아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은 20세기에만 세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1960년 앨버트 루툴리 추장, 1984년 투투 주교, 1993년 넬슨 만델라가 그 주인공이다.(만델라는 드 클레르크와 공동 수상했다.) 불과 30여 년 사이에 한 나라에서 세 명의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온전히 아파르트헤이트 덕분(?)이었다. 그만큼 아파르트헤이트는 악명이 높았고, 오랜 기간 한 집단의 자유와 존엄을 철저하게 짓밞았다. 


8.jpg

앨버트 루툴리


아파르트헤이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지배했던 그 오랜 시간 내내,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과, 그들을 돕고자했던 백인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극한의 인종차별이라는 뜨거운 쇳물에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담금질했던 이들의 모습은,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가치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나갈 때 어느 정도까지의 인내와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러한 이들의 모습이야말로 남아프리카의 광산에서 채굴되는 그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더 빛나는 보석일 게다. 


투쟁의 만델라 '불 붙은 막대기'


국민당이 정권을 잡고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면서 만델라와 ANC를 비롯한 남아프리카의 흑인들은 저항의 불씨를 더욱 거세게 당기기 시작했다. 만델라는 1951년에 ANC 청년동맹의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52년에는 ANC의 부의장으로 선출되면서 명실공히 투쟁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열정적으로 저항을 이끌었던 당시의 젊은 만델라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노년의 만델라와는 그 모습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권투를 취미로 즐겼던 만델라는 덩치가 큰 편이었으며 얼굴 표정은 험상궂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노년의 만델라가 얼굴에 항상 웃음을 띤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9.jpg


이 시절 만델라의 별명 가운데 하나는 '불 붙은 막대기'였는데, 그의 전투적이고 과격한 투쟁 스타일 때문이었다고 하니 그것 또한 쉽사리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이다.


만델라가 흑백 인종의 구분이 없는 남아공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과 종신형을 선고 받았던 재판의 최후 진술에서 자신이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는 물론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와도 맞서 싸웠다고 말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만델라에게도 마음 속에 백인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과 배타적 민족주의가 싹 텄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ANC의 청년동맹 결성할 당시 백인을 배제한 단체를 결성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고, 일부 극단적인 흑인들처럼 '남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백인들을 모두 바다에 수장시키고 싶다'고 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할 수만 있다면 남아프리카에서 백인들이 모두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미 그에게 대학에서 만난 조 슬로보와 그람 퍼시와 같은 훌륭한 백인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만델라가 한 때 보였던 이러한 모습들을 놓고 만델라의 '찌질함'을 논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만델라가 운동 초기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 집단이 오랜 시간 다른 집단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다보면 처음에는 그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꿈꾸지만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복수'를 원하거나 상대를 '저주'하는 식으로 사고가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또한 마찬가지여서 백인의 차별과 압제를 견디다 못한 흑인이 하나로 뭉쳐 자유를 위해 싸우면서 동시에 배타적 민족주의로 노선이 굳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심화되면 목표는 '자유의 쟁취'를 넘어서 '관계의 역전'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ANC 내의 과격파가 분리되어 결성한 PAC(범아프리카회의)는 활동과 노선에서 백인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강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아파르트헤이트와는 또 다른 의미의 분리가 되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흑백인종이 공존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어서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만델라가 세기의 위인의 반열에 올랐던 것은 그가 처음부터 올바른 사상과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만델라 또한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하면서 개인의 명성을 위한 행동과 발언을 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토론과 합의에 앞서 성급하게 자신의 의견을 공개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만델라는 남아프리카에서 억압 받는 흑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며 한 단계씩 높은 수준으로 자신을 끌어올렸기에 전세계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투쟁의 초창기, 어느날 백인 거지를 보며 스스로에 대해 놀랐던 만델라. 길거리 곳곳에 있는 흑인 거지들은 무심하게 지났쳤던 그가 백인 거지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흑인인 자신조차 흑인의 가난과 고통을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에 놀랐다고 한다.


이어지는 하(下)편에서는 비폭력에서 폭력으로의 투쟁 노선 변경, 그리고 27년 간의 긴 수감 생활과 그 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만델라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1.jpg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넬슨 만델라(1918~2013)










편집부 홀짝

트위터 : @holjjak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