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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번호 503. 이름이 필요 없다. 관리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숫자는 진가를 발휘한다. 사람을 관리할 때 숫자를 쓰면 훨씬 편리하다는 걸 우리는 학교를 다니면서 이미 겪었다. 선생님들이 출석부를 펴고 랜덤으로 숫자를 부를 때의 그 불안한 떨림. 일일이 이름을 불러야 했다면 훨씬 적었을 그 순간을 기억한다면 말이다.


A와 B가 각각 범죄를 저지른 후 정신병원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고 하자. 교도소에서는 환자가 정신적 능력을 회복해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돕겠지만, A와 B 외에도 수많은 환자를 관리하기 때문에 환자의 현재 상태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할 수는 없다.

 

A와 B를 포함한 환자들은 같은 정신병원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겠으나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다르다. 이것들을 무시하고 모두를 ‘환자’로 분리해 퉁칠수는 없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법으로 이들의 상태를 분류한다. 쉽게 말해 환자의 상태나 상황 변화에 따라 단계를 나눈다. 마치 영어학원에서 레벨에 따라 학생을 분류하듯 숫자와 기호로 환자의 상태를 분류하는 것이다. 이 코드는 Penal Code, 줄여서 PC라고 부른다. PC 뒤에 붙는 숫자를 보면, 이 수감자들이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의 코드랄까. 이 코드 중 다섯 개만 알면, 환자들이 어떤 상태로, 어느 단계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다시, A가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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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로 온 A의 정신적 상태가 의심스러운 경우에 A에게 적용되는 코드는 PC1367, 1368, 그리고 1369 세 가지다.

 

PC1367 - 법정에 서지 못할 정도의 정신상태란?

이 코드는 법정에 서지 못할 정도의 정신상태가 어떤 상태인지에 대한 정의다. A는 정신병, 언어적 문제, 발달 장애 등의 이유로 변호사와 협력해 스스로를 변호할 능력이 없다. A가 이 상태일 때, 법은 A를 처벌할 수 없다. 이때 A의 정신병이나 발달 장애 등에 대한 증거가 필요하며, 판사는 A가 법정에 설 수 있도록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낸다. 예를 들어 내가 일하는 정신병원 교도소로 보내질 경우, A에 대한 첫 중간 보고서는 90일째에 법정으로 보내지는데, 그런다고 해서 A가 90일 만에 의무적으로 다시 법정에 서야 하는 것은 아니다.

 

PC1368 - 형사재판 보류

PC1367에 의거해 A의 정신적 능력에 대한 의심이 있는 경우, A에 대한 형사재판은 일단 보류된다. 이 코드에서는 A의 정신적 무능력이 확실해진 상태이다.

 

PC1369 - 정신 감정 단계

PC1368로 판명된 A가 정신 감정을 받는 단계다. 이때 두 명 이상의 정신과계 전문가나 면허가 있는 정신과 의사, 혹은 심리학자가 A의 정신 감정을 하고 정신 감정서를 판사에게 보낸다. 이 감정서를 기준으로 피고가 재판에 참여할 능력이 있으면 재판을 진행하고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피고를 정신병원 교도소로 보낸다. 드물지만, 치료 목적을 위해 ConRep (the County Conditional Release Program) 으로 보내기도 한다. 정신병원 교도소로 오게 된 대부분의 환자, 즉 내가 일하는 곳에 수감된 환자들은 PC1370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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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1370 - 정신병원 감옥에서 치료

현재 내가 일하는 곳에서 수감되어 있으면서 법정에 다시 설 준비를 하고 있는 수감자들이 바로 이 코드에 해당한다. A가 정신적으로 법정에 설만큼 준비가 되면 형사소송은 다시 재개된다. A가 준비가 되지 않으면 상태가 호전되어 법정에 설 준비가 될 때까지 형사소송과 판결이 미뤄진다. 소송이 미뤄지는 동안 법정은 A를 정신병원 교도소로 보내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거나, 외래 환자 자격으로 사설 병원에서 치료받게 할 수 있다. 외래 환자가 되는 경우는 정신과계 전문가가 허락한 환자에 한하기 때문에 실제로 대부분의 환자는 정신병원 감옥으로 오게 된다.

 

이곳에서 A와 같은 환자들은 평균적으로 100일 정도를 보낸다. 중범죄자나 흉악범일 경우는 의무적인 수감상태가 90일에서 3년이고 경범죄나 비행 정도를 저지른 환자들은 최고 일 년 정도 수감된다. 위에서 설명했듯, A가 수감되면 첫 중간 보고서를 90일째에 법정으로 보내야 한다. 하지만 A가 정신병원 교도소로 나갈 날짜까지 자동으로 정해지지는 않는다. 수감되어 있는 동안 치료를 통해 A가 법정에 설 준비가 되면, 보고서를 써서 법정으로 보낸다.

 

A는 치료 후에도 환상, 환청 등의 증상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증상들이 A가 피고의 자격으로 법정에 서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라면 A는 법적으로 괜찮은 상태로 인정받는다. 법적으로 괜찮은 상태가 되려면 A는 법정에 대한 기본 상식과 변호사에게 협조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변호사에게 협조할 능력은 변호사의 질문에 거짓 없이 사실 그대로 대답하고 자신의 항변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복잡한 법률 용어나 지식을 습득할 필요는 없고 자신을 항변할 능력만 있으면 된다.

 

PC1372, PC1372(e) - 치료가 끝난 후

A가 PC1372가 되면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회복되어 법정으로 돌아간다.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 A는 구치소에 수감된다.

A가 PC1372(e)가 된다면, 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은 회복되었으나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상태다. 이 경우 A는 구치소에 수감되지 않고 정신병원 교도소에 남아 계속 치료를 받으면서 법정 출두 날짜를 기다린다.

 

PC1372나 1372(e)가 되기 위해 A는 스태핑(Staffing)을 통해 교육받은 법률 지식을 검사받고, 컨퍼런스(Conference)에 참여해 법정에 설 능력이 있는지 진단받는다. A는 이런 미팅에 대비해 그간 교육받은 법률 용어 해설을 읽어 보고 본인의 기소 죄목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암기해야 한다.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단정히 해야 하고 자신의 의견과 차이가 있더라도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채용 면접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이렇게 해서 컨퍼런스를 통과하고 나면 스태프들은 A가 준비를 마쳤다는 보고서를 법정으로 보낸다. 이제 A에게는 재판만 남는다.

 

A는 법정에 서기 전에 네 가지 항변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A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다음 네 가지다. 유죄, 무죄, 항변 포기, 그리고 정신병으로 인한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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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유죄(Guilty)를 선택하면 죄를 인정하고 결과를 받아들인다. 이 경우 재판까지 가지 않고 판사가 바로 A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후 형을 선고한다.

 

A가 무죄(Not Guilty)를 선택하고 혐의를 부인하면,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에서 무죄로 판결 날 경우에 석방되겠지만, 유죄로 판결 나면 교도소나 구치소에 가게 된다. 가석방되거나 재판까지 구금되어 있던 기간을 감안해서 석방되는 경우도 있다.

 

A가 항변 포기(No Contest)를 택한다면, A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 상태가 된다. 이 경우 판사는 검사가 제시한 증거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 A가 중범죄를 저질렀다면, 형량을 선고할 때 항변 포기가 유죄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마지막으로 A가 정신병으로 인한 무죄(Not Guilty by Reason of Insanity)를 선택하면 A는 범죄를 저지르긴 했지만, 범죄 당시 정신병으로 인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것을 주장하면 배심원이나 판사에 의한 재판을 하게 되고 두 번의 재판이 있을 수 있다. 재판에서 정신병의 유무에 대한 판단은 법에 의거한 것이지 임상적인 진단이 아니다.

 

정신병으로 인한 무죄 판결을 받게 되면 A는 형사적인 책임이 없고 치료가 필요하므로 일반 교도소 대신 정신병원 교도소(State Hospital)로 보내져 장기치료를 받게 된다. 반대로 정신병으로 인한 범죄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유죄판결을 받게 되면 A는 재판의 결과에 따라 교도소나 구치소에 가게 된다. 이때도 무죄를 선택했을 때처럼 경우에 따라 가석방이 되거나, 재판까지 구금되었던 기간을 감안해서 석방이 되는 경우도 있다.

 


네 가지 항변 외에 A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죄질협상(Plea Bargain)이다. 죄질협상은 유죄를 인정하거나 항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검사가 형을 삭감해 주는 것이며, 재판까지 가지 않고 사건을 종결하는 것을 말한다. 변호사는 A를 위해 가장 유리한 조건을 검사와 협상하며, 죄질협상이 이루어지면 보통 최고 형량에 비해 형량이 줄어든다. 검사가 감형 조건을 제시하면 변호사는 그 제시 내용을 A에게 전달하고, A가 제안을 받아들이면 판사가 최종적으로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죄질협상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피고의 권리가 아니고 결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A는 유죄를 인정하거나 항변을 포기해야 한다. 재판받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A는 죄질협상의 결과를 수락하거니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피고인 A가 겪는 과정은 현재 우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환자들이 겪는 과정과 같다. 이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대략 저런 과정을 통해 법적인 절차를 밟게 된다. 전반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로 하고, 다음은 다시 PC1370이 있는 정신병원 교도소로 돌아가 ‘금지된 것들’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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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