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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4. 화요일

편집부 홀짝







 





 


지난 일요일에 터진 이슈로 인하여 

월요일에는 그와 관련한 많은 기사들이 본지의 마빡을 장식했다. 

물론 필자의 연재가 월요일이 아닌 화요일에 올라온 것이 

이슈 기사에 밀린 탓이라는 변명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요일을 보내면서 아마도 월요일에는 보다 시의성 있는 기사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필자의 게으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일 게다. 


결국, 내가 게을렀다는 얘기다.

 

넬슨 만델라 편을 준비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정치를 하기 위한 권력이 아닌 권력 그 자체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한 권력은 

시대와 인종, 국가를 초월하여 참 많은 점이 서로 닮아있다는 것이다. 

필자의 <찌질한 위인전> 넬슨 만델라 편에서 이러한 것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는 관계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만델라의 자서전을 비롯한 관련 도서를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대한민국의 오늘이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가를 확인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국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법은 필연적으로 국민 권익 보호 운운하며 제정되게 마련이었다.


-넬슨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中



폭력과 비폭력 


앞서 말한 바(上편)와 같이, 만델라는 간디와 몇 가지 유사한 면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만델라 또한 간디처럼 비폭력 저항 노선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1950년대 초반 만델라는 ANC의 투쟁 노선을 지휘하는 핵심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백인 정권에 맞서 비폭력 저항을 실천했다.


당시 ANC의 비폭력 저항의 시작은 비교적 적은 수의 운동가들이 인종차별 법안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불복종 운동이었다.


불복종 운동만으로 국민당 정권이 태도를 바꿀 리 만무했기 때문에 이것은 일종의 상징적 의미가 강했다. 불복종 운동의 주된 목적은 흑인 저항 운동가들이 강경한 백인 정권에 담대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더 많은 흑인 대중의 참여를 촉발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음은 이를 바탕으로 전국적인 총파업과 함께하는 대규모 저항운동의 전개였다. 비폭력 노선의 핵심은 얼마나 많은 수의 참여 인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평화적으로 사회 기능을 마비시키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은 당연히(?)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흑인들의 저항을 ‘적법한 절차’에 의거하여 진압했다. 수백 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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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정권은 한편으로 교묘하게 ANC의 저항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ANC의 배후에 공산주의 선동가들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저항에 참여한 다수의 대중이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을 동안 저항 운동의 지도자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 이 지점에서 이미 등뼈가 찌릿해짐을 느끼는 독자들이 있을 줄 안다. 세상이 이렇다. 가진 권력을 지키는 것을 제1목적으로 하는 권력이 하는 짓이란 게 뭐 별다른 게 없다.- 만델라는 비폭력 저항의 한계를 절감하기 시작한다.


※이후로도 정부는 끊임없이 만델라와 ANC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가고자 하는데, 1957년 재판 당시의 재미있는 일화를 아래에 소개한다.


머리(Murray)는 처음에는 비교적 좀 알고 있는 듯했으나 베랑제가 반대신문을 시작하자 그 본질이 드러났다. 베랑제는 머리에게 여러 서류들에 있는 여러 구절을 읽어 준 뒤 그것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띠고 있는지 아닌지를 가려 보라고 말했다. 베랑제는 첫 번째 구절을 그에게 읽어주었다. 그것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서로 협력하고, 서로를 착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머리는 공산주의 사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베랑제는 그 성명은 남아프리카 전 수상인 말란(Malan) 박사가 쓴 것이라고 지적했다. 베랑제는 그에게 두 가지 다른 성명서를 계속해서 읽어 주었고, 머리는 둘 다 공산주의 사상을 묘사하고 있다고 했다. 이것들은 사실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험 링컨과 우드로 윌슨이 발언한 것이었다. 이 반대신문의 절정은 베랑제가 머리에게 어떤 문장을 읽어 주자 머리가 주저하지 않고 “철저한 공산주의 사상이다”라고 말한 순간이다. 그러자 베랑제는 그것은 머리 교수 자신이 1930년 대에 썼던 성명서라고 밝혔다.

 

-넬슨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中



병든 나라에서는 건강으로 가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그 병을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욕이다.


-넬슨 만델라



<찌질한 위인전>의 간디 편에서 필자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이 확고한 신념이 아닌 전략의 일환일 수도 있다는 점(적어도 초기에는)을 언급한 바 있다. 간디 편에서의 그러한 언급이 필자의 ‘추정’이었다면, 만델라는 스스로에게 있어 비폭력 저항이 어떤 의미였는가를 그의 자서전에 뚜렷하게 밝힌다. 비폭력 저항은 어디까지나 전략적 차원으로써 투쟁의 한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만델라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저항하는 동안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은, 자신들이 어떤 투쟁 방식을 선택하느냐는 온전히 흑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상대에게 달려있다는 것이었다. 비폭력 저항으로도 상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폭력을 선택한다. 일단 폭력의 가장 낮은 단계인 사보타주로 저항한다. 그럼에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인명을 살상할 수도 있는 테러 전술로 전환한다. 이마저도 먹히지 않으면 국지적 게릴라 전을 비롯한 전면전도 불사할 것이었다.


만델라가 이렇게 확고한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에는 그 어떤 타협의 여지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놓고 양보와 타협이 존재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 따라서 자유는 폭력을 통하여서라도 반드시 쟁취해야만 하는 가치라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만델라의 입장은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는 그 순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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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폭력적 저항에 따르는 많은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흑인들이 무장 투쟁 노선을 선택하면서 다수의 백인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했다. 비록 남아공 내 흑인들의 무장투쟁은 만델라의 수감 후 본격화 되긴 했지만 그 기틀을 만델라가 마련한 이상 그 또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만약 만델라가 체포되어 수감되지 않았다면 그 자신이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을 것이기도 했다.(만델라는 ANC의 무장 조직 ‘민족의 창’을 만든 장본인이자 초대 사령관이었다)


그러나 백인 민간인 희생에 대한 비판에 맞서는 만델라는 당당했다. 당시의 만델라는 오히려 이렇게 되묻는다. ‘희생된 백인들에 대한 책임이 우리에게만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를 무장하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샤프빌 학살


ANC의 비폭력 저항이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서 만델라는 이미 폭력 노선으로의 전환을 마음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만델라 개인의 생각일 뿐이었다. ANC의 의장인 루툴리 추장은 비폭력 저항의 신념이 확고했으며 ANC 지도부의 대다수 또한 아직 폭력 저항에 대한 의지가 제대로 다져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만델라는 대중 연설에서 무장 투쟁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태도 변화를 섣불리 내비쳐 지도부 내에서 크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입장을 굽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중 1960년, 남아공뿐 아니라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터졌다.


1959년에 발족한 남아공 내 또 다른 흑인 운동 단체인 PAC(범아프리카 회의)는 1960년이 되자 본격적으로 통행증 거부 운동을 벌인다.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법안 중 하나였던 통행제한법은 흑인이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 통행할 때 반드시 허가 받은 통행증을 휴대해야 한다는 법안이었으며, 이를 어길 시 즉각 체포 및 구금될 수 있다는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통행증 거부 운동은 불복종 운동의 차원에서 흑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 구역을 넘어 제한 지역의 경찰서까지 행진하여 자발적으로 체포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으며(일부 운동원들이 비참가자의 통행증을 빼앗아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PAC 운동원들은 1960년 3월 21일, 샤프빌에서도 이러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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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흑인들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총 69명이 사망하고 18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른바 샤프빌 학살이다. 정황상 샤프빌 학살은 정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발생했다기보다는 다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샤프빌 학살은 남아공 내에서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충분히 예견되고 있었던 ‘우발’적 사건이기도 했다. 샤프빌 학살의 잔혹성은 희생자 중 어린 아이와 여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과, 뒤돌아서 도망치는 사람들에게도 총격이 가해졌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움콘토 웨 시즈웨(Umkhonto we Sizwe, 민족의 창)


1960년에 일어난 샤프빌 학살로 인하여 남아공 흑인 운동과 아파르트헤이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흑인 운동가들은 샤프빌 학살을 계기로 본격적인 무장 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이에 더욱 더 가혹한 탄압으로 맞서면서 복수가 복수를 부르고 피가 더 큰 피의 원인이 되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샤프빌 학살을 계기로 만델라는 ANC 내에서 더욱 강한 어조로 무장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실상 당시에는 이미 흑인들이 자발적으로 곳곳에서 무장을 시작하고 있었던 터라 이들을 하나의 지휘 체계 하에 두고 무장 투쟁을 이끌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한 채 정권의 흑인 탄압 구실만 더 만들어 줄 위험이 있었다. 더욱이 정부는 샤프빌 학살 이후 흑인 탄압의 고삐를 더 바짝 조여 들어와 계엄령을 선포하고 ANC 활동을 전면 금지 시킴으로써 흑인 운동 조직 자체를 불법화 시켜버린 상황이었다. 만델라는 밤샘 토론 끝에 루틀리 추장까지 설득해낸다. ANC 지도부는 만델라에게 ANC 산하의 무장 투쟁 단체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긴다. 움콘토 웨 시즈 웨(MK)의 탄생이었다. 움콘토 웨 시즈 웨는 ‘민족의 창’이라는 뜻으로 창은 아프리카 흑인의 전통적 무기다. 만델라는 MK의 초대 사령관이 되었다.


이미 수 차례 감옥을 들락거린 바 있는 만델라는 자신에게 내려진 금지령과 계엄령 때문에 대외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처지였고, 요하네스버그를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만델라는 민족의 창이 발족하기 이전부터 지하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가지각색의 변장으로 백인 경찰의 시선을 따돌리며 활동의 폭을 오히려 넓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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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 당시의 만델라


1962년, 만델라는 민족의 창 활동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 등의 조달과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국외로 빠져 나와 아프리카 12개 국을 돌며 각국의 정상들과 만남을 갖기 시작한다. 만델라는 이 기간 동안 흑인 지도자가 국가를 통치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움을 갖기도 하고(어찌 보면 그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남아공의 현실에 비추어 보며 감상에 젖기도 한다.


모로코와 에티오피아에서는 스스로 사격과 행군 등의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한 40대 중년의 만델라. 이제 본격적으로 민족의 창을 이끌고 무장 투쟁 전선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사명을 안고 국내에 잠입한다. 그러나 만델라는 그 해조차 넘기지 못하고 체포된다. 이제 막 국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려 하고 있던 만델라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날개가 꺾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여권 없이 국경을 넘은 죄, 노동자 파업을 선동한 죄로 만델라는 5년형을 선고 받고 수감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1963년, 리보니아의 한 농장에 위치한 민족의 창 본부가 정부에 발각되면서 MK 최고 사령부의 거의 모두가 경찰에 체포되고, 이미 수감중이던 만델라 또한 이들과 함께 반역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기에 이른다. 무장 투쟁 준비 내용까지 완전하게 발각되어 재판은 사형 선고가 거의 확실시 되는 분위기였다. 만델라는 죽음의 문턱에 섰다.


만델라는 시간이 지난 뒤 당시의 심경을 회고하면서 자신과 동료들이 실제로 사형을 ‘준비’했었노라고 말했다. 심지어 사형 선고를 받더라도 항소는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불의한 정권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자신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대의명분을 고무시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나는 사형을 받을 준비를 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진실로 준비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 믿어야만 한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 한 구석에서 믿고 있으면 준비를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용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준비했다.”


그것은 마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세네카가 그의 친구에게 ‘만약 자네가 모든 근심을 날려버리기를 원한다면 자네가 두려워하고 있는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게’라고 조언했던 것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아니, 만델라는 사형이 일어날 가능성을 두고 근심에 떨고 있지는 않았으니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마음가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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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만델라는 재판의 최후진술에 임한다. 지금까지도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 만델라의 최후진술이다.


“저는 제 일생을 이러한 아프리카인의 투쟁에 헌신해 왔습니다. 저는 백인 지배에 맞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흑인 지배에 맞서 싸웠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그리고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함께 사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의 이념을 소중히 생각해 왔습니다. 저는 이 이념을 위해 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저는 이 이념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27년 간의 수감 생활


만델라를 포함한 피고인들은 반역죄 혐의가 인정되었음에도 사형이 아닌 종신형 선고를 받는다. 재판 결과를 둘러싸고 국제 사회의 압력이 있었다는 점과 판사의 양심이 그래도 조금은 작용한 것이 그 배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만델라를 비롯한 민족의 창 조직원들이 제대로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체포되었다는 불운한 사실이, 오히려 이들을 사형으로까지 이끌지는 못한 주된 원인이 되었다. 종신형을 선고 받은 만델라는 역시 항소를 하지 않는다.


종신형 선고를 받은 만델라는 최종적으로 석방이 되었던 1990년까지 무려 27년 간의 수감 생활을 지속한다. 1964년에 만델라는 이후 약 17년 동안 복역하게 될 로벤 섬으로 이감된다. 로벤 섬은 원래 나환자 수용소가 있던 곳으로 그 후 교도소가 지어져 오로지 흑인 죄수들만을 수감시키기 위한 곳으로 활용되었다.


당시 정부의 인종차별정책은 교도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혹독함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면에서는 치졸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교도소의 수감자들은 인종에 따라 식사의 양과 질에서 마저 차별을 받았다. 인도인 죄수나 혼혈 죄수들은 흑인 죄수에 비해 하다못해 설탕 한 스푼이라도 더 배급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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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갇혀 있던 감옥에서


로벤 섬에서 만델라는 같은 흑인 수감자들과 함께 항상 최악의 대우를 받으며 생활했다. 최악의 보급, 최악의 노동 환경, 최악의 배식이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외부와의 연결을 거의 차단하다시피 한 당국의 처사였다. 면회는 6개월에 단 한 번, 30분 동안만 허용되었으며 면회중 주고 받는 대화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남은 시간과 상관 없이 면회를 중단시켜버렸다. 편지는 오직 6개월에 단 한 통만을 외부로 보낼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150단어로 그 길이를 제한했으며, 오는 편지와 가는 편지는 모두 검열관에 의해 감시되어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을 경우 해당 부분을 칼로 도려내어 전달하기 일쑤였다. 그들이 받는(그리고 보내는) 편지는 언제나 구멍투성이가 된 너덜너덜한 상태가 되었다.


악조건 속에서도 만델라는 낙관과 끈기를 잃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런 만델라가 가장 크게 좌절했던 순간은 가족이나 동료의 죽음 앞에서였다. 1968년, 만델라의 어머니가 사망했다. 만델라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무시당한다. 이듬해인 1969년 만델라의 장남 템비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사고 자체에도 의문이 많다고 전해진다) 만델라는 다시 한 번 장례식 참석을 요청했지만 역시 무시당한다.


그러더니 수감 기간이 지남에 따라 만델라의 동료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다. 그때마다 만델라는 무기력과 슬픔에 빠졌다. 만델라는 말한다. ‘내가 돌아갔을 때 그들이 살아있었으면 했는데, 모두 세상을 떠났다. 세상 자체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교도소 - 육체적 속박에서 이루어낸 정신적 자유, “정말 육체의 쇠사슬이 정신에는 날개일 때가 많다오”


감히 단언하건대, 만델라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위인으로 전세계인의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절대적인 계기는 바로 27년에 걸친 수감 생활이었다. 비록 몸은 감옥 안에 갇혔지만 이 긴 시간을 통해 만델라는 스스로를 속박했던 것들로부터 자유 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몇 가지 이상의 감옥 안에 갇혀 살아간다. 그것은 선천적 환경으로 인한 감옥이 될 수도 있고, 경험적 한계가 만든 감옥이 될 수도 있다. 분노와 증오가 만든 감옥은 특히나 그 창살이 두꺼울 게다. 한 쪽으로 치우쳐진 지식 또한 사람의 정신을 속박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 인간 정신과 사유의 자유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리는 이러한 형태의 감옥이 많이 존재할수록, 그리고 넓게 존재할수록 사람은 찌질해지게 마련이다. 또한 감옥의 존재를 인지하지조차 못하는 사람일수록 찌질함의 정도는 더 강해진다.


다시 만델라로 돌아와보자. 만약 지구상에 사람이 특정 시대의 특정 지역에 골라서 태어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194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나 저항 운동에 앞장선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정신적 감옥 중에서도 가장 두꺼운 쇠창살 안에 갇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델라는 그 자신이 흑인이면서도 지하활동 당시 그가 탔던 비행기를 흑인이 조종한다는 사실에 필요 이상으로 불안해 했고, 백인 거지를 보며 더욱 안타까워했으니 그 태생적 환경이 만들어낸 감옥이 얼마나 굳건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하겠다.


핍박 받는 자신과 주변의 흑인들을 보면서 키워왔던 백인에 대한 분노와 울분은 또 다른 형태의 감옥을 쌓아나갔을 것이다. 게다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현실의 감옥에 갇혀 흑인 민중은 물론 가족과 동료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서 오는 무기력함의 감옥도 빼놓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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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역중인 만델라와 시술루


현실의 감옥 안에서, 만델라는 정신의 감옥에 쳐진 쇠창살을 하나씩 뜯어내고 있었다. 그가 수감 생활 중 보였던 모습과, 특히나 출소 후 걸어갔던 정치적 행보를 살펴보면 그가 27년 간 뜯어낸 쇠창살로 인하여 만델라 자신은 물론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전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만델라를 정신적 속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이다. 애초에 아프르트헤이트가 아니었다면 만델라는 저항 운동에 투신하지도 않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더 나아가 남아공의 극우 백인 정권은 만델라를 투쟁의 순교자로 만들 수 없었던 나머지 그를 사형시키지 못하고 평생을 감옥 안에서 썩게 만들고자 했는데, 실상 남아공의 감방이야말로 만델라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만델라가 투옥되지 않고 60년대 이후 계속해서 무장 투쟁을 지도했다면, 정부와의 총격전 속에 숨졌을 수도, 흑인 진영 반대파에 의해 암살을 당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만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상황은 불안정했다. 국민당 정부는 만델라의 수감 초기 독극물을 통한 암살이나 탈옥 유도를 통한 제거를 꾀하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만델라의 건강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발빠르게 조치를 취하기 바빴는데, 안 그래도 거세지고 있는 국제 사회의 압박 속에서 자칫 만델라가 수감 중 숨지게 된다면 더 큰 비난 여론에 시달릴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썩지 않은 육체와 정신, 전설의 만델라


만델라 스스로가 말했듯, 만델라는 교도소에서 육체가 쇠사슬에 묶였지만 정신적 측면에 있어서 만큼은 날개를 달 수 있었다. 그렇다고 육체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지는 않은 것이, 만델라는 수감 생활 내내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매일 같이 좁은 감방에서 하는 규칙적인 운동을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년의 나이에 교도소에 수감되어 27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음에도(마지막 몇 년은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보내긴 했지만) 만델라가 95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렇게 꾸준하게 지적, 육체적 자기 관리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감옥에서 보내는 세월을 ‘썩는다’고 표현하지만, 만델라는 27년 동안 감옥에서 ‘썩지’ 않았다. 1990년, 그가 출소한 이후 곧바로 열정적인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27년의 세월을 외부와 격리되어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적응력을 보여준 만델라는 다만 출소 당시 기자가 들고 나온 검고 길쭉한 어떤 물건이 뭐냐고 되물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을 뿐이었다.(그 검고 길쭉한 무엇은 다름아닌 ‘마이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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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감 당시의 만델라


오히려 외부의 대중들이 만델라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르겠다. 만델라가 갇혀 있던 27년 동안 바깥 세상의 사람들에게도 만델라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인물이었기 떄문이다. 만델라의 얼굴, 그가 했던 말, 그가 썼던 글들은 모두 바깥 세상에서 금지된 것이었고, 때문에 흑인에게든 백인에게든 만델라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전설일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만델라가 수감된 이후 오랜 시간 동안 흑인 대중에게 만델라는 전설의 투사였을 테고, 백인 대중에게 만델라는 호시탐탐 백인을 죽여 바다에 던져버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악마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1990년, 기나긴 수감 생활의 끝.


국민당 정권의 당수가 보타에서 데 클레르크로 바뀌고 소련이 무너지는 등의 국내외 정세 변화 속에서 남아공 정권은 더 이상 만델라를 가둬 놓고만 있을 수도, 아파르트헤이트를 유지할 수도 없게 되었다. 냉전 기간 동안 국민당 정권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치졸한 구실 하나로 영국과 미국 등 서방 세계의 암묵적 방관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소련이 무너지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명분까지 사라지게 된 것이다. 거세지던 국제사회의 압력은 이를 기점으로 정점에 달하게 되었고 남아공에 대한 정치, 경제적 봉쇄수위는 점차 높아져 남아공 정부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져버렸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 속에 만델라에 대한 교정 당국의 대우(?) 또한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1988년, 폴스무어 교도소에서 빅터버스터 교도소로 이감된 만델라는 그곳에서 사실상 자유인과 수감자의 중간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


수감 말년에 만델라는 이미 죄수라기 보다는 정부의 협상 파트너에 가까운 위치가 되어 있었다. 정부 고위 인사는 물론 대통령과도 모임을 갖고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향후 정부 조직 구성 및 개편에 대한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0년 2월 11일. 만델라는 공식적으로 죄수의 신분을 벗고 자유인으로 교도소를 걸어 나오게 된다.


협상과 타협. 남아공 최초의 전국민 참여 총선거


만델라는 국민당 정권 사이의 밀고 당기는 협상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되었다. 백인들은 인종차별철폐 후 자신들이 소수자로 전락하여 보호 받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하고 있었고, 흑인들은 그런 백인들에게 조건 없는 국민 총선거를 요구하고 있었다.


만델라는 단 한 가지 조건에 있어서 만큼은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는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흑인들이 자유와 민권을 보장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의 것들에 있어서는 전향적인 자세를 취하며 협상에 임했다. 일부 흑인 진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만델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윽고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역사상 최초의 인종차별 없는 민주적 선거가 치러졌다. 같은 해 5월 넬슨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의 나이 76세. 27년 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자유인이 된지 불과 4년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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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만델라, 그 명과 암


대통령이 된 만델라가 임기 중 가장 주력한 것은 흑백이 공존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무지개 나라’를 만드는 것이 그가 세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참혹한 과거사를 청산하기 위해 그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발족시킨다. 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일어난 과거의 인권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구로써 진상은 철저히 규명하되 법적인 책임은 묻지 않고 사면한다는 취지를 갖고 만들어졌다. ‘용서하되 잊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1960년 샤프빌 학살부터 1994년 만델라 대통령이 취임하기까지의 기간 동안 벌어진 사건을 대상으로 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조사에 접수된 인권 유린 사건은 약 21,300여 건에 달했으며 추정되는 피해인원만 약 305만 명인 것으로 밝혀졌다.


흑백인종간의 용서와 화해라는 상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흑백 양쪽의 불만을 모두 들어야만 했다. 특히 흑인들의 불만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사 내용이 공개되면 될수록 백인들의 인권유린은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드러났다. 이유 없는 학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부 차원에서 과학자들을 시켜 흑인 인종을 말살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했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서 공포에 가까운 행위였다. 이러한 행위를 한 자들이 진실을 고백하는 것 만으로 법적 처벌 없이 사면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 더욱이 조사를 거부하고 입을 닫은 사람들에게 특별한 처벌을 가할 수 없었다는 점을 대다수의 흑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델라는 꿋꿋하게 양 쪽 모두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무엇보다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과 백인이 앞으로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더 이상의 증오와 보복은 결국 공멸을 초래하게 될 것임을 강조했다.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식 당시 자신을 감시하던 교도소 간수들을 초대한 바 있으며,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던 럭비 국가대표 경기에 남아공 대표팀을 상징하는 초록색 유니폼을 입고 나와 손을 흔들었다. 한 때 흑인을 핍박하는 백인의 상징이었던 그곳에서의 만델라가 보여준 모습은 그 자체로 흑백 화합을 향한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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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가 이렇게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얻은 정신의 날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좁은 관점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바라보면 피해자는 오로지 흑인이며 따라서 백인들이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피해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내의 모든 흑백 대중들이었다. 피해의 정도에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작은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큰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받고, 향후 보복을 당할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델라가 시대의 위인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인종차별정책 하에서 누구 못지 않게 고통을 받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적 한계를 넘어서 더 넓은 관점에서 시대의 비극을 바라보는 안목을 가졌다는 것에 있다.


대게 증오와 분노는 한 인간의 개인적 동기부여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그러한 동기부여의 결과는 대부분 복수와 같은 부정적 에너지로 치환되기 마련이다. 만약 그러한 증오와 분노의 에너지가 집단적 차원의 것이라면,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참혹해질 것이다. 만델라가 집권할 무렵의 남아공은 정말 그러한 일이 현실로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만델라 한 사람의 개인적 힘만으로 그러한 사태를 막았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그러나 만델라 개인의 기여가 그 어떤 집단의 기여보다 훨씬 컸다고 평가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대통령 만델라의 그림자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ANC는 전통적으로 경제정책에 사회민주적인 요소를 채택하고 있었다. 1955년에 ANC가 발표한 자유헌장에도 잘 나타나있듯이 국가 기반 산업에 대한 사유화 금지는 ANC가 오랜 세월 동안 일관되게 유지해온 입장이었다.


그러나 만델라는 대통령 재임 중 많은 국가 산업을 민영화 시켜버렸다. 그간의 정체성을 일거에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경제 정책의 추진으로 남아공의 흑인들은 비록 정치적 자유는 쟁취했지만 오늘날까지 경제적 착취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만델라는 반쪽 짜리 대통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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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일단 만델라가 취임할 당시의 남아공 경제 상황을 살펴보자. ANC와 만델라는 남아공의 정치권력을 잡았지만 여전히 경제 자본은 소수 백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했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백인 자본가들이 만약 흑인 집권 하의 남아공에서 조금의 불안함이라도 느꼈다면 아마도 남아공 내에 투입된 자본을 모두 해외로 빼돌리려 했을 것이다(실제로 만델라 집권 초반 많은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었다). 만약 그러한 상황이 악화되었다면 남아공의 경제 상황은 완전히 파탄 났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만델라는 자본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영국과 미국 등 서방 세계에서 남아공 경제의 재건을 위해 투입한 막대한 자금을 생각해보자. 만약 만델라가 집권하자마자 경제 정책에 사회민주적인 요소를 들이댔다면, 과연 서방 세계는 남아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을까? 해외 자본이 유입되기 위한 첫 번째 전제 조건이 국가 산업의 민영화임을 굳이 상기할 필요도 없다.


만델라는 반쪽 짜리 대통령이 아니었다. 한편으로, 어떤 국가 지도자도 완전할 수는 없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통령 만델라의 업적을 평가함에 있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만족시켰냐 보다는 당시의 시대상황에 가장 필요한 부분을 얼마나 충족시켰냐는 기준이 필요하다. 이는 만델라뿐 아니라 모든 국가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에도 필요한 잣대이다.


그렇다면 만델라가 재임하던 시절 남아공의 시대정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인종 간의 화해였다. 그 점에 있어 대통령으로서의 만델라의 업적은 충분히 인정 받아 마땅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과 인종화합이 만델라 시대의 시대적 요구였고, 만델라는 이에 훌륭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발생된, 그래서 지금까지 남아공을 괴롭히고 있는 흑인에 대한 노동 착취 문제와 거대 자본의 횡포는 지금 시대의 남아공이 해결해야 할 시대적 요구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시대에 남아공이 겪고 있는 그러한 문제가 남아공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런 ‘찌질한 위인전’의 만델라 같으니.


만델라의 이야기도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원래 본 연재의 기획이 ‘찌질한’ 위인들의 이야기(傳)를 다루는 것이었으나 이번 만델라 편은 필자의 위인전 자체가 찌질해져 버린 ‘찌질한 위인전’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필자는 만델라의 인간적인 찌질한 면모를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필자 개인 능력의 한계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해본다. 가끔은 이렇게 덜 찌질한 위인 한 명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라는. 물론 이러한 생각도 그 중 절반쯤은 핑계에 불과할 게다.


끝으로, 만델라가 평생을 가져온 생각 하나를 소개하고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만델라는 그 스스로 단 한 번도 ‘성인’ 혹은 ‘위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만델라는 늘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고 말했다. 만델라의 그 말이 사실이라면, 보통 사람 만델라가 시대의 영웅이 된 것이다. 이 글 내내 수 차례 말했듯 보통 사람 만델라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미친 제도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 세상에 제 2의 만델라 따위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한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그 말. 난세가 없다면 영웅 따윈 나타나지 않을 테니.


영웅이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며, <찌질한 위인전> 넬슨 만델라 편의 정말 길었던 이야기를 마친다.



감옥에서 심히 걱정했던 것 하나는 내가 나도 모르게 바깥 세상에 투사한 허상, 내가 성인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며, ‘성인은 계속 노력하는 죄인’이라는 세속의 정의를 따르더라도 아니다.


-넬슨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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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를 상징하는 숫자 46664.

64년도에 입감한 466번째 죄수라는 의미이다.




※뱀발

1. 만델라는 결혼을 세 번이나 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사실 만델라의 가정사나 두 번째 부인 위니 만델라의 의혹 등의 사실도 다루고자 하였으나 글이 많이 길어진 관계로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2. 만델라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은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아마 감동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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