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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2014 우리나라는 9억 2752만 4 배럴의 원유와 3억 2662만 3 배럴의 석유제품(나프타, LPG, 휘발유 ) 수입하고 4억 4882만 2 배럴의 석유제품을 수출하였다. 상암월드컵 경기장을 가득 채우면 1500 배럴이 들어가니까 62 분량의 원유를 수입했다. 지역별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중동이 84.0%, 파푸아뉴기니 아시아가 9.6%, 아프리카 2.7%, 러시아 기타 지역이 3.7% 차지한다. 동해-1가스전에서 나오는 콘덴세이트(가스 개발 상압에서 액체로 산출되는 경질유의 일종) 소량이라 거의 100% 원유를 수입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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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보성 강골마을의 이정민씨 기둥에 걸려 있는 남포등.

19세기 조선인들이 접한 신문물이었다. (출처: 오마이뉴스)


석유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개화기 서양인들에 의해서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1880 개화파의 일본 사절단에 동행한 승려 이동인이 귀국할 석유와 석유램프, 성냥을 들여온 것이 기록이다. 미국에서 석유를 상용 개발한 것이 1859년이니까 불과 20 뒤에 우리나라까지 들어왔다. 석유는 국내에서도 빠르게 시장을 확보했다. 당시 어두운 밤을 밝혀 아주까리나 들깨 기름보다 등유는 2배나 오래 타고 값은 그보다 훨씬 쌌다. 빠른 일본과 중국 상인들이 미국과 러시아에서 수입해 팔았다.


조선이 구미열강과 통상조약을 체결하면서 1897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이 조선 정부의 허가를 얻어 인천 월미도에 저장소를 설치했다. 1898년에는 한양 거리에 석유 가로등이 등장했다. 한일합방 뒤에는 자동차가 늘어 서울역에 역전주유소가 문을 열었다. 경유는 1926 서울과 온양온천 디젤 기동차가 등장하면서 들어왔다. 1920년대에는 차량, 선박, 공장 등의 석유 사용이 늘어나면서 미국의 텍사코와 영국의 쉘이 들어와 스탠더드 오일과 경쟁했다. 스탠다드 오일은 솔표와 승리표, 쉘은 붉은 조개를 상표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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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석유 상표들. SOCONY Standard Oil Company of New York 첫글자다.


1930년대 들어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화했다. 그에 따라 1934 석유업령을 공포하여 6개월분의 석유를 비축하도록 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석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38 원산에 연산 30만톤 규모의 정유공장을 처음으로 세웠다. 그러나 미국이 적성국인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을 제한하면서 원산 정유공장은 가동이 중단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총독부는 1938 7월부터 휘발유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1939년에는 배급마저 줄여 암매상이 활개를 쳤고 1940년에는 이마저 중단했다. 모든 휘발유가 군용차와 비축용으로 동원되어 급기야 민간에서는 숯불 자동차가 다시 등장했다. 목탄을 태우는 드럼통을 달아 숯을 피워 얻은 가스로 움직이는 목탄차는 힘과 속도가 휘발유차의 절반에도 미쳤으나 해방 이후는 물론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인 1950년대까지 운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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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목탄차 (출처: 청주생활과문화)


1945 해방으로 일제의 수탈은 없어졌지만 석유는 여전히 수입해야 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군정청은 석유배급 대행사인 PDA(Petroleum Distribution Agency) 통해 미군의 군용제품을 일반인에게 판매하였다. 남한 단독정부가 세워진 이후 1949 한국 정부는 스탠다드 오일과 칼텍스, 3 메이저가 주도한 외국법인인 대한석유저장주식회사(KOSCO) 설립하였다. KOSCO 저장만 담당하고 판매는 3 메이저가 시장을 나눠가졌다.


1950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3 메이저는 철수하고 KOSCO 직접 판매까지 담당하였다. 민간에서는 전투 장비 운용에 필요한 휘발유보다 경유를 소비하도록 하기 위해 정부는 휘발유 물품세를 60%에서 100% 인상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와 KOSCO 3 사이에한미 석유운영협정 체결하여 석유류 제품 구입을 위한 외화 조달은 미국 정부가 책임을 지기로 하였다. 미국의 AID 원조자금을 받아 메이저로부터 고가의 석유완제품을 수입하는 방식이었다.


한국 정부는 전후 복구와 경제 개발을 위해 석유류 제품의 국내 생산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자본이 들어가는 정유공장을 세울만한 민간 부문의 능력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부는 1962 7 대한석유공사법을 제정하여 10 대한석유공사를 설립했다. 대한석유공사에는 미국의 걸프사가 25% 지분을 투자하였는데 자금으로 울산정유공장을 건립한다. 일산 3만 5 배럴 규모의 울산정유공장은 1964 4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으며, 대한석유공사는 대한석유저장주식회사가 보유한 저장과 판매 시설을 인수하여 국내 정유업체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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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준공한 울산정유공장은 본격적인 석유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대한석유공사가 출범한 1962 에너지 소비 비중에서 9.8% 불과했던 석유는 1971 50.6%, 1978년에는 최고치인 63.3%까지 늘어났다.


석유 소비가 늘어남에 따라 민간의 투자도 활발해졌다. 1967 5 럭키(LG그룹의 모태) 미국의 칼텍스와 50 50 합작으로 호남정유를 설립하여, 1969 2 여수에 일산 6 배럴의 정유공장을 완공했다. 1968년에는 한국화약과 미국의 유니언오일이 50 50으로 경인에너지를 설립하고 1972년에 인천에 일산 6 배럴의 정유공장을 가동하였다. 한편 대한석유공사도 시설확장과 석유화학산업 진출을 위해 걸프사의 지분을 50% 늘리고 주식회사로 전환하였다. 자금을 바탕으로 대한석유공사는 처리 용량을 배로 늘리고 1972년엔 에틸렌을 생산하는 나프타분해센터를 세움으로써 석유화학산업의 본격적인 출발을 가능하게 했다.


대한석유공사와 호남정유, 경인에너지 3개의 정유사가 본격 가동하면서 석유류 제품의 생산이 늘어 자급이 가능해졌다. 3사는 공격적으로 시장 점유에 나섰고 정부는 1972 석유사업법을 제정하여 과당 경쟁이 벌어진 대리점과 주유소 허가를 잠정 중지할 정도였다.


1973년에 발생한 1 석유파동은 석유시대로 달려가던 한국에게 제동을 걸었다. 정부는 주유종탄의 연료정책을 주탄종유로 바꾸어 대중목욕탕, 서비스업의 난방연료를 석탄으로 되돌렸다. 그러나 중화학공업 드라이브를 시작한 산업정책이 지속되어 석유 소비는 꾸준히 증가했다.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1978 63.3%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편 시멘트 산업으로 일어선 쌍용양회는 1 석유파동으로 벙커C유의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를 겪은 정유사업에 진출하였다. 1976 이란 국영석유회사 NIOC 50 50 합작으로 ·이석유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온산에 정유공장을 착공하였다. 그러나 공장 준공을 앞두고 1979 이란 회교혁명으로 원유공급이 어려워지자 1980 쌍용양회는 이란 NIOC 지분을 전량 매입하여 쌍용정유주식회로 개명하고 일산 9 배럴 규모의 온산 정유공장을 가동하였다.


이로써 국내 정유업계는 공기업인 대한석유공사와 민간회사인 호남정유, 경인에너지, 쌍용정유라는 4 대형 정유사에 극동석유주식회사(일산 1 배럴)까지 5개사가 과점하는 시장이 되었다. 1964 설립한 극동석유공업은 부산에서 하루 3 배럴 규모의 정유시설을 갖추고 윤활유를 주종으로 아스팔트도 생산하는 업체였다. 1968 로열더치쉘과 50 50으로 합작하여 극동쉘석유주식회사를 설립하였으나 여전히 윤활유가 주종이었으며, 1978년에 일산 1 배럴 규모로 정유설비를 증설하였다.


1978 시작된 2 석유파동은 선진국에게 1 때만큼의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설립해 소비국의 국제 협력을 강화하고 비축을 늘렸으며 대체에너지 개발에도 나섰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학공업 드라이브에 매달려 석유 소비가 급증한 한국에는 1 때보다 충격이 컸다. 배로 물가와 경기 침체는 고조되는 정치 위기와 맞물려 10.26 사태를 불러왔다.


당시 대한석유공사에 50% 지분을 갖고 운영권을 행사하던 걸프사는 원유공급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권마저 허수아비 대통령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신군부 체제로 이원화되자 1980 8 지분을 한국 정부에 양도하고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바지 사장 최규하 대통령의 사표를 수리하고 821 대통령이 전두환은 대한석유공사의 민영화 방침을 결정했다. 민영화 방침에 반대한 유양수 동력자원부 장관은 불과 3개월만인 91 교체되고 박봉환 동자부 장관이 1128 유공의 인수자로 선경을 최종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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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한국을 방문한 야마니 석유상을 집으로 초대한 최종현 선경 회장.

선경은 유공을 인수하면서 재벌 서열이 급부상했다. (출처: SK에너지)


당시 동자부 차관 최동규와 국보위 상임위원이었던 안병호 수방사령관(노태우계) 따르면 이를 주도한 것은 노태우라고 한다. 최동규에 의하면 전두환은 후일 골프 모임에서 유공을 선경에 넘기도록 사람은 보안사령관 노태우야. 나도 몰랐어.”라고 했다고 한다. 말이 사실이라면 전두환은 취약한 정권 안정을 위해 비자금이 마련되는 일이라면 내용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은 듯하다.


이렇듯 당시 국내 최대 기업이었던 공기업 대한석유공사의 민영화는 하는지, 대안은 없는지 등에 대해 아무런 논의나 공론화도 거치지 않은 종로구 소격동 국군보안사령부 회의실에서 결정되고 동자부는 그대로 실행하였다. 선경으로서는 주종인 섬유산업에 필요한 화학섬유 원료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사우디 아라비아와 관계를 맺고 2 석유파동이 발생하자 사우디와 원유도입계약을 진행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최종현은 이를 바탕으로 정권 안정에 매달려 있는 신군부의 상황을 활용하여 유공을 인수할 있었다. 당시 언론은새우가 고래를 삼켰다 썼다.


1981 이래 석유산업은 민간기업이 주도하는 판이 되었다. 1986년부터 하향 안정세를 유지한 국제유가에 힘입어 석유의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정유업체들도 성장을 거듭했다. 유공을 인수한 선경은 1996 하루에 81 배럴(현재 111 배럴) 원유를 처리할 있는 정제 시설을 갖추었으며, 1997 회사 이름을 SK주식회사로 바꾸었다. 2006년에는 인천정유를 인수하여 부동의 1 자리를 공고히 했다. 1968 한국화약과 미국 유니언사가 합작으로 설립한 경인에너지는 1983 한화가 유니언사의 지분을 회수하고 1995년에는 이름도 한화에너지로 바꾸었다가 한국경제가 금융위기에 빠지면서 1999 현대정유오일뱅크에 매각되었으나 2001 법정관리에 들어가 결국 SK 품으로 귀착하였다.


호남정유는 1986 한국측 단독 경영체제가 출범하였으나 지분은 여전히 셰브론(아시아 브랜드는 칼텍스) 절반을 가지고 있다. 1996 이름을 LG칼텍스정유주식회사로 바뀐 LG그룹이 나누어지면서 GS홀딩스의 자회사로 편입되어 GS칼텍스주식회사가 되었다. 지금은 2012년에 설립된 GS에너지가 한국측 지분을 갖고 있다. 현재 일산 78 배럴 규모의 정유시설을 갖추었다.


하루 39 배럴의 원유 정제 시설을 갖춘 현대오일뱅크의 출발은 부산 용당동에 있는 윤활유 제조 회사 극동석유공업이다. 1964년에 창업하여 3 배럴 규모의 정유시설을 갖춘 극동석유공업은 윤활유를 주종으로 아스팔트도 생산했다. 1968년에 로열더치쉘과 50% 지분으로 합작하여 극동쉘석유주식회사가 1972 일산 5 배럴로 증설했다. 1977 현대가 지분을 인수하면서 극동정유주식회사가 되어 정유 능력도 1978 일산 1 배럴을 늘렸다. 그러나 극동이 본격적인 정유회사로 성장한 1988 미국 게티오일과 합작하여 서산시 대산읍에 일산 6 배럴의 정유시설을 준공하면서다. 1993 현대그룹이 인수하여 현대정유주식회사가 되었으며 1996 20 배럴의 정유시설을 준공했다. 2002 아랍에미리트연합 IPIC사와 합작한 2010 현대중공업이 IPIC사의 지분을 매입하면서 계열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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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윤활유로 시작한 극동정유는 충남 대산정유공장으로 메이저에 진입한 현대에 인수되었다.


현재 업계 3위인 에쓰-오일은 하루에 669 배럴을 정제할 있다. 1991 사우디아라비아의 ARAMCO 쌍용정유의 지분 35% 매입하여 28.4% 가진 쌍용그룹과 공동 경영하였다. 1995 25 배럴 규모의 3정유시설을 가동하며 성장하던 쌍용정유는 1999 쌍용그룹의 구조조정으로 계열을 분리하고 9천억원에 지분과 경영권을 아람코에 매각하였다. 2000년에 이름을 에쓰-오일주식회사(S-OIL) 바꾼 2007년에 자사주 28.4% 한진그룹(한진에너지) 매각하여 공동 경영하다가 2015 1 아람코가 한진그룹의 매각 지분을 인수하여 단독 대주주가 되었다. 2014년에는 한국석유공사가 울산석유비축기지의 지상 시설을 지하화하면서 지상 부지 92만㎡와 지상탱크 14기를 이웃한 에쓰-오일에 매각하였다. 5190억원의 매각대금을 들여 부지난을 해소한 에쓰-오일은 이곳에 잔사유고도화설비와 올레핀다운스트림 설비를 세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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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이 건조한 44만톤급의 유조선.

높이는 아파트 13, 갑판에는 개의 축구장과 개의 풋살 경기장이 들어설 있다.


현재 원유는 모두 배로 들여와 곧바로 해당 정유회사나 비축 시설에 하역한다. 시베리아의 석유나 가스를 공급받게 된다면 파이프로 들여오는 방안도 강구될 것이다. 편이 훨씬 싸기 때문이다. 국내의 석유 수송은 정제를 거친 석유제품이다. 이들은 주로 유조차와 선박, 송유관으로 운반된다. 유조차가 45% 정도, SR(5~1만톤) 선박이 28%, 송유관이 25% 나르고 기차는 1.4% 정도에 불과하다.


포항에서 서울을 잇는 414km 송유관이 선을 보인 1970 12. 그러나 TKP(Trance Korea Pipeline, 한국종단송유관)라고 불리는 이것은 미군 송유관이다. 1973년에 의정부까지 연결된 TKP( 452km) 미군 기지에 유류를 공급하였다.


한국 정부는 1985년이 되어서야 장거리 송유관사업 기본계획을 확정하였다. 이듬해 8 대한석유개발공사가 51%, 극동석유가 49% 출자하여 한국송유관㈜을 설립하고 1989 서산-천안간(93km) 송유관을 개통했다. 1990년에는 정부 주도로 정유 5사와 항공 2사를 끌어들여 대한송유관공사를 만들어 전국 송유관망 건설에 나섰다. 대한송유관공사는 1992 경인송유관(인천-고양, 인천-김포공항) 준공하고, 1995년에는 대전저유소를 완공하여 울산-대전간과 여수-대전 구간의 송유가 시작되었다. 1996 11월에는 대전-과천 구간이 개통되어 남북송유관(SNP)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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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길이 1208km 송유관이 설치되어 있다.

북한을 지나 러시아,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송유관이 있다면 에너지 안보와 가격 안정에 도움이 것이다.


대한송유관공사는 1998 한국송유관㈜을 흡수 합병하고 2000년에는 인천-영종도간 송유관을 준공했다. 그리고 2001 1 민영기업으로 전환된 대한송유관공사는 6 SK그룹의 품에 안겼다.


한편 TKP 독자적으로 운영하던 미군은 세월이 흘러 시설이 노후해지고 한국측의 송유관망이 틀을 갖춰가자 1992 한국 정부에게 TKP 인수할 것으로 요구하여 계약을 한다. 그리고 2002 TKP SNP 연결 공사를 완료하고 2004 8 한미간에 주한미군 유류지원 전환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인수 당시 이미 스무살이 넘어 요실금이 일상화된 TKP 2004 이후 철거 작업에 들어간다.


2005년부터 국방부가 TKP 성남-평택 구간 76km 제외한 나머지 392km 철거하는 들어간 비용은 969억원. 시설철거비와 사유지 보상비보다 많이 들어간 돈이 오염토양복원비인데 77% 745억원을 차지한다. 2013년에 국방부가 추산한 바로는 아직 남아 있는 성남-평택 송유관 철거비로 191억원, 왜관저유소 131억원, 평택저유소 52억원 374억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여기서도 오염토양복원비가 얼마가 들지는 미지수다.


돈이 아까웠던 한국 정부는 차마 미군에게는 요구하지 못하고 TKP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한 대한송유관공사와 SK 상대로 소송을 냈다. 토양 오염 조사와 정화에 들어간 4966천여만원을 보상하라고. 그러나 2014 5 26 대법원은 SK 대한송유관공사에겐 책임이 없다고 판시했다. 제대로 정부라면 도널드 트럼프와 미국에게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당신들이 치우는 값은 당신들이 내시오!”


이렇듯 현재 우리나라의 석유 수입과 정유, 그리고 유통·판매는 모두 민영화 되었다. 공기업으로 시작한 곳도 하나둘 민영화 되어 민간기업의 품에 안겼다. 다만 1979 한국석유개발공사로 발족하여 1999 이름을 바꾼 한국석유공사만이 공기업으로 존재한다. 한국석유공사는 국내외 유전·가스전 개발과 석유의 비축 업무를 담당한다. 울산 4개소의 원유기지와 구리 4개소의 제품기지, 그리고 평택에 있는 LPG기지 9 비축 기지의 규모는 1억 4600 배럴로 현재 정유사들의 공동비축물량을 제외하고 9400 배럴을 비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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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0만배럴이래봤자 한 달 소비량 조금 넘는 양이다.

우리에게 석유는 전량 수입해야 하는 귀한 자원이다.


1·2 석유파동은 석유가 바닥나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국제정치 지형의 변화나 수급 불균형이 국제 경제에 파장을 불러온 사례이다. 그리고 셰일가스 개발에서 보여지듯 이제 값싼 석유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오늘날 배럴 50달러 대의 국제 유가를 우리는 저유가라고 느낀다. 2010년대 전반기 배럴 100달러대의 고유가를 경험한 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6년부터 2000년까지 국제 유가는 20달러 대에서 움직였다. 지금의 50달러도 때의 배다. 더구나 내년이면 60달러대로 올라갈 것이고 유가 하락에 따른 투자 부진의 결과가 나타나는 2020년대 초반이 되면 다시 급등하는 예상되는 수순이다.


우리가 에너지 체제의 전환을 통해 재생가능에너지를 중심에 세우고 화석연료 의존 체제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석유와 가스의 안정적인 공급이 에너지 안보의 중요한 과제이다. 더구나 모든 분야가 민영화된 석유산업에서 한국석유공사의 해외자원개발 기능은 에너지 안보에서 핵심적인 정책 수단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 성급한 투자로 아직까지 손해를 보고 있는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다. 유전개발이 항상 성공하는 사업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실패의 과정에서 인적, 물적 경험과 성공의 토대가 마련되어야 함에도 그마저 의심이 되는 상황이니 말이다. 지난 시절 자원외교에 대한 조사는 실패한 사업과 성공한 사업에 대한 복기를 통해 해외자원개발의 매뉴얼이 있는 보고서를 만드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일은 국회 또는 독립적인 위원회에서 있다. 우리나라의 국회가 그런 국회가 되든지 그런 위원회를 구성할 있는 능력을 갖춘 정부가 들어서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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