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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7.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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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를 다시 보았다. <빌리 엘리어트>는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지만 요즘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간 왠지 모르게 불이익을 당할 것만 같은 분위기 팍팍 풍기는, 그렇다. 바로 그분께서 ‘감명 깊게 본 영화’로 직접 꼽으셨다는 영화다. 따라서 본 영화, 전 국민 필수 교양 영화로 본격 지정해야 마땅함을 역설하고 싶다.

 

다들 아시다시피 현재 대한민국의 분위기, 모두가 즐겁고 즐겨야 할 연말연시임에도 불구하고 썩 좋지 않다.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 정책에 대한 철도 노조의 파업과, 그에 대한 정부의 대응, 그리고 나아가 민주노총의 총 파업 선언일 것이다. 이 뒤숭숭한 시기에 좋은 영화라도 한 편 보시며 잠시나마 마음 훈훈한 연말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그분께서는 <빌리 엘리어트>의 어떤 부분에 감명을 받으신 걸까? 미천한 서민의 눈으로 과연 그 뜻을 감히 헤아릴 수나 있겠냐마는, 본 잉여 역지사지의 심정으로 그분의 마음 한번 헤아려 보고픈 마음에 본 영화를 자세히, 또 면밀히, 그리고 샅샅이 훑으며 감상해보았다.

 

이미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실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영화의 줄거리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국의 한 탄광촌에서 자란 평범한 소년 빌리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동네 발레교습선생의 지도를 받다가 왕립발레학교까지 진학하게 되어 결국 발레리나로 거듭나게 된다는, 뭐 그런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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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녀석이 주인공이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룬 소년 빌리의 이야기에 일종의 동지의식을 느낀 걸까? 흉탄에 부모님을 잃는 역경에도 불구하고 일국의 댓...아니,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는 점에서 그분께서 공감대를 형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위에서 언급한 줄거리는 말 그대로 요즘 네티즌들이 좋아하는 ‘한줄 요약’에 가까운 정리고, 사실 <빌리 엘리어트>의 서사를 세부적으로 파고든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일단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살펴보자. 1984년에서 85년 사이. 빌리가 사는 탄광촌은 당시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의 강경한 정책으로 인해 대규모의 구조조정과 나아가서는 폐광에 이르는 단계를 밟고 있었고, 빌리의 아버지와 형을 비롯한 탄광 노조원들은 이에 반발해 파업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당시 대처는 노조들의 파업을 막기 위해 파업의 요건을 까다롭게 만들고 그에 어긋나면 대규모의 경찰병력을 투입해 노조원들을 진압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빌리의 가족은 그야말로 ‘먹고 사느냐 마느냐’가 걸린 상황이었던 것이다.

 

마가렛 대처의 공과 과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고 하지만, 영국 일부에서는 그녀의 별세소식에 ‘The Bitch is Dead!’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축제를 벌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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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회생을 빌미로 수많은 공공사업을 민영화 시키고 노동자들을 탄압했던 대처의 죽음에, 영국의 영화감독 켄 로치는 심지어 “대처의 장례식을 민영화하자, 경매에 올려 가장 싼 가격의 장례업체에 맡기자, 그게 그녀가 원했던 방식이니까.”라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분과 마가렛 대처를 비교하는 칼럼을 심심찮게 보아왔다. 또한 그녀가 대처를 정치적 롤 모델로 삼았다는 얘기 또한 흔히 접할 수 있다. 본인이 졸라 혼란을 느낀 지점은 바로 여기다. 물론 영화 속에서 실제 마가렛 대처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그녀의 존재는 빌리의 가족을 힘들게 하는 악의 축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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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가운데에 ‘VS’라고 써놓아야 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


 

하지만 그분께서는 대처와는 달리 ‘절대 민영화 하지 않겠다’고 국민과 약속을 하지 않으셨던가? 아, 씨바 졸라 헷갈린다. 그렇다면 그분은 과연 이 영화의 어떤 부분에 이입해서 감명을 받으셨다는 걸까? 바로 이러한 혼란과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본인은 <빌리 엘리어트>의 장면들을 통해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독자들도 지금부터 집중해서 따라와 주시라.

 


가설 1. 빌리 엘리어트는 어머니를 여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이는 아버지와 형의 노조파업과 더불어 소년 빌리가 자신의 의사표현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억압이 된다. 그분 역시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와 영부인의 역할을 대리수행 해야 했으니, 어린 나이에 마음에 큰 짐을 지게 된 빌리의 입장에 크게 공감하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잠깐. 빌리 엘리어트와 그분이 놓인 상황은 구체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어머니를 잃었다는 공통점을 제외한다면 전혀 다르다. 우선 가정환경을 살펴보자. 앞서 언급했듯 빌리의 가족은 노동자 계급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릴 땐 군인이었고 자라서는 일국의 대통령이었다.

 

그런 그녀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하며 파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빌리의 아버지와 형을 보면서 빌리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할까? 그녀는 20대 때 이미 강남 아파트를 30채는 살 수 있는 재력을 얻지 않으셨던가. 그러므로 빌리에게 감정이입 했다는 설은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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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의 가족은 파업의 여파로 겨울에 난롯불을 켜기 위해 어머니가 아끼던 피아노까지 쪼개어 장작으로 써야 했다. 그녀의 삶과는 여러모로 거리가 먼 장면이다. 


게다가 이공계 출신인 정치가 그분과는 달리, 빌리는 예술 계열 전공자 아닌가. 무용수의 퍼포먼스가 아름다울지는 모르지만, 4대 보험이나 적용 되는 직업인가? 관련분야 전문가들께 제보 부탁 바란다. 하물며 빌리의 가장 절친한 친구 마이클은 보수적 정치관을 가진 그분과 당의 입장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성애자 아니었던가. 성 소수자를 친구로 둔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하다니, 언감생심 가당치도 않은 얘기다.

 

그럼 다음 가설로 넘어가 보자.

 


가설 2. 파업이라는 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덕분에, 이 영화에선 빌리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전투경찰들의 모습이 수시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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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빌리가 친구 데비와 함께 하교하는 장면에선 경찰들이 매우 자연스레 배경으로 등장한다. 데비는 막대기로 건물의 벽을 긁으며 빌리와 대화하며 걷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벽이 사라지자 경찰들의 시위 진압용 방패가 마치 벽을 대신하듯 나타난다. 이렇듯 동네 어딜 가나 무장한 경찰들이 있는 주변 풍경은 그녀가 한창 젊었던 시절의 추억, 그러니까 70년대 한국의 풍경을 되새기게끔 만들어준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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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서울발 사진종합>, 정태원

 

 

얼마 전 경찰이 영장도 없이 경향신문 사옥의 유리문을 깨트리고 진입하는 장면을 중계하던 모 종편방송 앵커의 ‘이게 바로 공권력이죠!’라는 멘트가 바로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있던 그분의 심정과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분이 젊은 시절엔 늘 그런 장면을 보고 살았으니 말이다.

 

추억이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약간은 미화되기 마련이다. 당장 우리도 <응답하라 1994>같은 드라마와 <건축학 개론>같은 영화로 90년대를 추억하고, <써니>같은 영화로 80년대를 추억하며 이런저런 공감대를 서로 나누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녀로 하여금 70년대를 추억하게 할 드라마나 영화는 국내에 충분치 않았을 터. 저 머나먼 영국 땅의 영화를 보며 과거를 추억했을 그분의 심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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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런 고색창연한 드라마 말고, 

제대로 7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양질의 컨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그분의 당선에 혁혁한 공을 세운 기성세대들 역시 70년대 뽕에 취해 한 표를 던진 분들이 꽤 되지 않을까. 2000년대 하고도 십수 년이 지난 시대에 ‘새마을 운동’같은 걸로 경제발전이 가능할 거라고 믿을 정도면 그러고도 남는다. 마치 우리가 <건축학 개론>을 보며 ‘첫사랑은 이루어질 거야!’하며 거나하게 취하는 것처럼. 그러나 꿈에서 깨면 현실은 매번 참 쓰다. 씨바, 그때 그 여자를 잡았어야 하는데...씁.

 

아직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다.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자.

 


가설 3. 사실 그분께서 실제로 감명 깊게 본 것은 이 영화의 세계관이다.

 

이게 무슨 얘기냐. 그러니까 그분께서 정말로 ‘대처리즘’을 지향하신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분은 단순히 감정에 치우친 추억 뽕이 아니라, 냉정하게 거시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탄광의 노동자 구조조정으로 인해 빌리의 아버지와 형이 파업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와 환경, 영화에서 한 번도 등장하진 않았지만 늘 그곳에 있었던, 마가렛 대처, 그러니까 말하자면 전지적 대처시점으로 영화를 바라보셨을지 모른다는 얘기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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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고 있느니라...

 

 

잘 이해가 안 된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어찌 그분의 높고 깊은 경지를 쉬이 간파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본인 열심히 썰을 풀어보도록 하겠다.

 

자, ‘필름 느와르’를 예로 들어보자. 필름 느와르라는 장르는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장르와는 달리, 서사의 구성이나 특정 요소가 아닌 영화 속 인물과 사건 전체를 둘러싼 세계관을 지칭한다. 일반적인 범죄 수사물에서 범인이 잡히거나 살인마가 처형당하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지만, 느와르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악당이 죽어도 여전히 인물들이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악은 세계 자체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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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한 건 다큐멘터리 <필름 느와르의 법칙>이란 작품을 참고해 주시길.

 


그러한 관점에서 봤을 때 <빌리 엘리어트>는 어떤 면에선 ‘필름 대처리즘’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무언가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을 곳곳에 심어주지만 결국엔 대처가 원하는 결말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지금부터 설명 나간다.

 

영화의 중반, 빌리가 발레를 추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하던 빌리의 아버지가 어느 날 밤 체육관에서 춤 연습을 하는 빌리의 모습을 목격하는 장면이 있다. 아들이 정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발레 교습 선생을 찾아가 왕립 발레단의 유학비용에 대해 물어보고, 다음날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고 저주했던 탄광 노동자 인력시장에 나가, 파업전선을 유지하고 있는 노동자 동료들을 배신하고 탄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바로 얼마 전까지 버스 밖에서 버스에 앉은 이들을 저주했던 빌리의 아버지, 이제는 그가 그 자리에 복잡한 마음으로 앉아있다. 그러던 중 버스 바깥에서 여전히 파업전선을 유지하고 있던 아들, 빌리의 형 토니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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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탄 버스를 쫓아 달려간 토니는 버스에서 내린 아버지가 탄광에 들어가기 직전 그를 붙잡고 울부짖으며 설득한다. 이러면 안 된다고. 이러면 여태까지 우리가 지키려던 모든 게 무너진다고. 그러자 아버지 또한 울면서 주저앉으며 말한다.

 

 

“우린 이제 끝났어. 우리에게 무슨 선택이 남았니? 빌리에게 기회를 주자꾸나.”

 

 

비록 조그만 탄광촌에서 어쩔 수 없이 대를 이어 탄광 일을 하며 삶을 이어왔지만, 더는 그마저도 불투명해진 현실에서 아들만큼은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고픈 아버지의 절실한 마음이 느껴지는 대사다. 여기서 눈물 안 나면 님들 진짜 냉정한 거다.

 

결국 아버지는 탄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발을 돌렸다. 대신 죽은 빌리의 엄마가 남긴 보석과 장신구들을 전당포에 갖다 팔아 돈을 마련한다. 동네 이웃 어른들까지 저금통에서 한푼 두푼을 모아 빌리가 런던까지 입학 테스트를 받으러 갈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가까스로 마련한다. 영국은 철도 민영화되어 다른 지방까지 가는 데에 표 값도 졸라 비싸다던데...

 

결과적으로 빌리는 왕립 발레단에 합격 통보를 받았지만, 과연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까? 빌리의 아버지와 형 토니의 삶에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노동조합은 결국 정부에 굴복했고, 빌리를 런던으로 떠나보낸 아버지와 토니는 다시 묵묵히 깊고 어두운 탄광으로 들어간다. 그나마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 보장이 되지 않는 곳으로. 바야흐로 이 모든 사건은 ‘대처리즘’의 세계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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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 4. 일각에서는 이러한 주장도 제기된다. ‘사실 그분께선 <빌리 엘리어트>를 보신 적이 없고, 보좌관 내지는 주변 다른 인사들이 그냥 유명한 영화 제목 중 몇 개 추려서 던진 것 중 골라서 언급했을 뿐’이라고. 물론 조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설마하니 그분씩이나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몰지각한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그분의 인품과 권력을 시기한 반대세력이 제기한 중상모략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본 가설은 필자의 재량으로 즉각 폐기하는 바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그분께서 <빌리 엘리어트>를 어떤 시각에서 보셨는지 나름대로 안 되는 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독자제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본인은 가설 2번도 꽤 믿을 만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가설 3번이 정답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그분께서는 빌리의 아버지가 자신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빌리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탄광으로 돌아가려 했듯이, 수천의 파업 노조원들이 결국엔 그네들의 아들, 딸들을 위해 입 다물고 업무현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계실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가설은 무지몽매한 본인의 추측일 뿐이다. 앞서 말했듯 나 같은 잉여 무지렁이가 높으신 분들의 깊은 뜻을 어찌 반 푼이라도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진짜 그분의 생각은 그분만이 아실 것 같다. 제발 아셨으면 좋겠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지만, 현실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것만큼 웃긴 일도 없다. 그냥 그 말씀을 드리고 싶다.


영화 속 빌리처럼, 정말로 ‘모두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길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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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촤

트위터 : @hamchwa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