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점령은 필리핀의 경제기반을 뿌리부터 흔들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대본영정부연락회의(大本營政府連絡會議)의 방침에 따라 필리핀에서도 『남방 점령지 행정실시요령』이 실행됐다. 그 중 첫 번째로 타격을 미친 건 ‘군의 자활’이었다. 본국에서의 보국을 기대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식량의 현지조달을 추진하게 된다. 문제는 당시 필리핀에서도 쌀은 부족했다.
상식적인 국가라면, 이 경우 점령지의 치안유지와 점령지 주민들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유예를 두려고 했겠지만, 일본군에는 그런 상식이 없었다. 당시 필리핀은 쌀이 부족했다. 그런데 이 부족한 쌀을 일본군이 빼앗아 가버렸다. 그 결과 아사자가 속출할 정도로 식량 사정은 나빠졌다.
더 큰 문제는 아예 필리핀 농업을 파괴했다는 대목이다.
일본이 점령하기 직전까지 필리핀의 최대 재배 작물은 사탕수수였다. 미국이란 든든한 판매처가 있기에 사탕수수를 재배했고, 이를 미국에 수출해 돈을 벌었다. 그러나 일본이 점령하면서 이 모든 게 어그러졌다.
“필리핀에서 면화를 재배해 충당하자.”
단순한 발상이었다. 그 결과 사탕수수밭을 다 갈아엎고 그 위에 목화를 키우게 된다. 결과는 참혹했다. 목화밭은 병충해로 흉작을 면치 못했다. 풍토를 무시한 무리한 시도가 가져온 참사였다. 그 결과 돈을 잃은 지주와 직업을 잃은 소작인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르게 됐지만, 곧 일본군의 총칼로 진압하게 된다.
일본군은 대본영이 만든 『남방 점령지 행정실시요령』을 충실히 지켰다. 그리고 그 결과 점점 더 필리핀인들의 반감을 사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구리 광산에서의 강제 노동이었다.
구리는 일본에게 있어서는 전략물자였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구리 생산을 계속 늘려야 했고,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생산인력을 늘려야 했다. 일본군은 필리핀인들을 강제로 끌고 와 구리광산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강제로 끌려온 필리핀 광부들은 밤이 되면 숙소를 빠져나와 도망쳤고, 날이 갈수록 탈출자는 더 늘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가족을 처단하고, 동료들끼리의 감시를 늘렸고, 도망자 색출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도망자들은 마을로 가지 않았다. 그들이 선택한 건 일본군에 대한 복수였다.
게릴라의 등장
필리핀은 게릴라가 활동하기 더 없이 적합한 지역이다. 7,100개가 넘어가는 섬으로 이루어진 국토는 행정력의 공백지대를 늘렸고, 적도에 가까운 열대우림 지역은 은신처를 양산해 냈다. 지금도 필리핀에서는 이슬람 반군 조직이 미다나오 섬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군대를 동원해 게릴라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은 어렵다. 즉, 정치적인 해법이 가장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이런 선택지는 없었다. 민간인에 대한 가혹한 억압만이 있을 뿐이다.
게릴라들은 점점 그 수를 불렸고, 맥아더는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무기와 식량, 각종 보급품들이 잠수함을 통해 필리핀 게릴라들에게 전달됐고, 게릴라들은 이를 가지고 일본군과 싸웠다. 당시 일본군은 게릴라들과 동수로 싸우게 되면 무조건 패하게 된다. 정규군이 같은 인원수의 게릴라에게 진다? 당시 필리핀에 배치된 병사들의 증언은 한결같다.
“같은 숫자라면, 반드시 진다. 왜?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게릴라가 정규군에 비해 가질 수 있는 우위라면, 지형적인 이점, 기습공격에 의한 주도권 확보 등을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 필리핀 게릴라 등은 이런 이점에 더해 ‘화력’의 우위도 가지고 있었다. 필리핀 게릴라 뒤에는 미군이 있었다. 미군은 아낌없이 장비를 지원했고, 그 덕분에 소규모 보병 전투에서는 게릴라가 화력으로 정규군을 압도하는 ‘괴랄’한 상황을 만들어 냈다.
일본군 스스로가 만든 수렁이었다. 자활을 핑계로 주민들을 수탈했고, 자원 확보를 위해 노동자를 강제 동원해 구리광산에 밀어 넣었고, 도망자 색출을 핑계로 애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주민 학살은 점령지 통제를 위한 행동이라며 본국에서도 허용한 일이 아닌가? 빈곤의 악순환이었다. 통제하기 위해 더 큰 압력을 가하니, 주민들의 저항은 더 거세지고, 통제의 강도는 더 강해졌다.
이제 게릴라들은 철도를 포함한 기간시설의 공격에까지 나서게 됐다. 필리핀의 게릴라 조직은 이미 100개가 넘어갔고, 그 수는 30만 명에 이르렀다.
최초의 여성 게릴라부대 훈련 1941. 마닐라.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유화책을 동원한다. 주민들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일본은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한다. 호세 라우엘 대통령을 수반으로 한 필리핀 정부를 구성하고(제2공화국), 권력을 필리핀 정부에 넘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건 꼼수일 뿐이었다.
필리핀 독립의 뒤에는 이면합의가 하나 있었다.
“필리핀의 방위는 일본군이 담당하고, 필리핀은 필요한 협력을 한다.”
일본은 그때까지 해왔던 물자조달이나 자원개발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필리핀 정부는 허수아비였을 뿐이다.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필리핀 영토 중 일본군이 실효 지배한 구역은 채 30%가 되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게릴라들의 땅이었다.
게릴라들은 맥아더의 눈과 귀가 되어 필리핀의 상황을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이들은 맥아더가 필리핀에 상륙하기 전까지 약 7,000여회의 정보보고를 맥아더 사령부에 보냈다. 이미 일본은 미군과 싸우기 전에 지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레이테 섬이다.
레이테 섬을 방어하기 위해 일본 제16사단, 2만 명이 주둔했는데, 이들은 사단 사령부 주변 지역 정도만을 제압 했을 뿐 그 나머지 지역은 게릴라들에 의해 장악 당했다. 만약 이들이 게릴라들만 상대했다면,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겠지만, 당장 이들 앞에는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미군에 대비한 방어선 구축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16사단은 병력의 1/3은 게릴라 토벌에, 그 나머지는 진지 구축과 방어전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게 부족했다. 시멘트가 부족해 토치카를 만들 수 없었고, 시시때때로 공격해 오는 게릴라 덕분에 공사는 계속 지연됐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일본군은 게릴라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필리핀 주민들의 반감은 더 커져갔다.
맥아더가 필리핀 탈환작전을 펼칠 때 레이테 만에 상륙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게릴라 세력이 가장 많이 포진 해 있어서 지원과 정보 확보에 용이했다. 게다가 수비하는 일본군 세력은 게릴라를 상대하기도 힘겨울 정도로 부족한 상황. 맥아더는 이 모든 정보를 필리핀 게릴라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대본영이 만든 『남방 점령지 행정실시요령』은 실패했다. 그들의 다급함과 절박함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다급함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무차별적인 수탈과 억압은 필연적으로 반동을 일으키게 됐고, 이 반동은 점점 커져 필리핀 국민들의 저항으로 이어졌다.
1944년 10월 22일 맥아더는 약속대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레이테 만에 집결한 700여척의 함선은 일제 사격으로 레이테 섬에 있던 일본군 수비 병력을 쓸어 버렸다(함포 사격만으로 5천 여명의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미군은 별 저항 없이 레이테 섬에 상륙했고, 맥아더는 자신의 선전을 위해 기록영화를 찍으며 여유 있게 해변에 상륙했다. 허겁지겁 가족만 데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간 지 2년 7개월만의 일이었다.
'I shall return'
필리핀 사람들에게 미군은 해방자의 모습이었다.
“일본군은 뺏어가기만 했다.”
이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전쟁 전의 미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앞 다투어 미군에게 달려갔다. 아니, 전쟁 전 미국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누가와도 일본군 보다는 나을 거라는 기대! 그 기대는 현실이 됐다. 미군은 식량을 줬고, 의료품을 지원했으며, 무기도 건넸다. 맥아더는 필리핀 게릴라와 필리핀 국민들을 착착 무장시켜 일본군과 싸우게 했다.
필리핀 국민으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일본군을 죽일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덤으로 식량과 돈도 준다지 않은가?
레이테에 있던 일본군 제16사단은 잔존 병력을 수습해 후퇴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식량과 보급품의 부족, 게릴라들의 공격, 그리고 주민들의 비협조.
필리핀 주민들은 미군의 눈과 귀가 되어 이들의 행로를 알려줬다. 이들은 미군의 길 안내를 해줬고, 보급품을 운반해 줬다.
압권은 레이테 만 해전 이후다. 일본 입장에서 필리핀의 함락은 ‘패전’을 의미했다. 남방자원지대의 자원이 있어야지만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데, 그 수송루트의 목줄이 되는 필리핀이 점령된다는 건 곧 사형선고를 의미한다. 일본군은 결사항전을 천명하며 모든 걸 쏟아 부었다. 함대와 병력들... 함대는 레이테만 해전에서 박살이 났고, 축자적으로 투입된 6만의 병사는 미 함대에 걸려 수장이 됐다.
일본군 입장에서 안타까운 게, 미군의 공격에 살아남아 결사적으로 해변까지 기어 나온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필리핀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당연하게도 들고 있던 몽둥이나 농기구로 일본군을 때려 죽였다. 좀 똑똑한 필리핀 사람들은 이들을 미군에게 끌고 가면 돈이나 음식을 받을 수 있다며, 죽지 않을 만큼만 팬 다음 미군에게 넘겼다.
대본영의 『남방 점령지 행정실시요령』의 결과였다.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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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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