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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제정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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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현종 5년(1014년) 음력 6월 6일 《고려사》 기록은 다음과 같다.


6월 경신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방수군(防戍軍) 중에 길에서 죽은 자는 관청에서 시신을 거두는 도구를 제공하고, 해골을 상자에 담아 역마(驛馬)에 실어 집에 빨리 보내도록 하라. 돌아다니는 행상(行商)으로 죽어 성명과 본관(本貫)을 알 수 없는 자는 소재지의 관사(官司)에 그를 위해 임시로 장사 지내고 늙고 젊은 정도의 용모 특징을 기록하여 실수가 없게 하며, 이를 영원히 법식으로 삼으라.”

라고 하였다.


고려는 거란과 치룬 전쟁에서 사망한 장병들의 유골을 집에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행상 중 신상 파악이 불가능한 이들을 관사에서 임시로 장사지내도록 했다. 이날이 24절기 중 벼나 보리처럼 까끄라기(깔끄러운 수염)가 있는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인 ‘망종(芒種)’, 6월 6일이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여 3년간 약 14만 명에 달하는 한국군이 사망했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 휴전 후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자 정부는 1956년 4월에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망종(芒種)’인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하고 공휴일로 정하였다. 위의 《고려사》 기록을 미루어 보아 시기적으로 ‘현충기념일’의 제정은 6·25 전쟁에서 사망한 전사자들을 추모하고 기념함으로써 안보 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제정 당시에는 추모 대상이 6·25 전쟁 전사자에 한정되었다가 1965년 3월 대통령령으로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 ‘순국선열’을 함께 추모하게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자유당과 민주당 정부의 무능을 드러냄으로써 쿠데타의 당위성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어처구니가 없다. 

 

 

국가보훈처의 태생적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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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顯忠日)’이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는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숨진 장병과 순국선열들의 충성을 기리기 위하여 정한 날’이다. ‘나라에 대한 충성’이라는 보수적이고, 때로는 국가주의적인 가치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근대적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였고, 그 이념적 반목에 편승하여 친일파들이 요직에 진출하였으며, 뒤이어 6·25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결과 충성을 바쳐야 할 나라는 이른바 ‘민족국가’가 아닌 ‘이념국가’로 변질되었다.

 

현충일을 주관하는 부처인 국가보훈처는 1961년 7월 5일 「군사원호청 설치법」이 공포되고 8월 5일 ‘군사원호청’이 창설되면서 출범했다(이듬해 ‘군사원호처’로 승격). ‘원호(援護: 도와주며 보살핀다)’란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해 온 말로 군사원호청의 뿌리는 1950년 4월 14일 제정된 「군사원호법」에 있었는데, 이 법의 제정 목적은 해방 후 극한 좌우 대립 과정에서 공비(共匪), 즉 좌익 세력의 폭동을 토벌하다 전사한 사람이나 군 복무 중 순직한 자의 유족에 대한 생계 지원에 있었다. 1985년부터 ‘국가보훈처’로 개칭되긴 하였으나 뿌리부터 강한 이념 대립에 근거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역대 보훈처장 대부분이 군 출신이라는 점에서 보훈처의 한계점은 명확했다. 초대 원호처장 민병권은 임기 만료 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을 두 차례 지내고 박정희 유신 정권 하에서 어용 전국구 의원 조직인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교통부 장관도 역임한 바 있다.

 

이처럼 현충일 제정의 배경,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현충일의 의미, 현충일을 주관하는 국가보훈처의 유래는 삼각편대를 이루어 ‘이념국가’에 대한 충성을 은연중에 강요하고 이념 대립 구조를 보다 공고화하는 장치로 작용해 왔다.

 

국가보훈처는 「정부조직법」 제24조 제1항에 따라, ‘국가유공자 및 그 유족에 대한 보훈, 제대군인의 보상·보호 및 보훈선양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며, ‘국가유공자’는 순국선열, 애국지사, 전몰·전상군경, 순직·공상군경, 무공·보국수훈자, 6·25 참전 재일학도의용군인, 참전유공자, 4·19혁명 사망·부상·공로자, 순직·공상공무원, 특별공로순직자, 5.18 민주유공자(「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등으로 규정되어 있다. 국가보훈처가 보훈 사무를 관장함에 있어 그 적용 대상인 ‘국가유공자’가 저렇게 세분화되어 있음에도, 역사학자 정운현 선생이 지적한 바 있듯 보훈 사업은 참전 군인에게 과도하게 치우쳐 있다. 이는 앞서 서술한 국가보훈처의 유래와도 밀접히 연관돼 있는 것이다. 일종의 태생적 한계인 셈이다.

 

 

박승춘 전 보훈처장의 마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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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태생적 한계를 최근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인사가 바로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이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1년 2월 24일부터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5월 11일까지 6년 3개월간 보훈처장을 역임한 박승춘은 역대 최장수 보훈처장이라는 기록에 걸맞게 이명박근혜 정권 입맛에 꼭 들어맞는 사업들을 줄줄이 내놓았다. 취임 후 3개월여 만인 2011년 6월에는 “젊은 세대에 대한 균형 잡힌 역사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해 ‘나라사랑교육과’를 신설하여 “안보와 보훈의식이 상대적으로 미흡한 20~30대 청년층을 대상으로 올바른 역사교육과 호국안보교육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출처: 서울신문, “보훈처 창설 50주년을 맞으며”, 2011년 8월 4일자 기고문). 이른바 ‘나라사랑교육 사업‘이다.

 

무언가 오버랩 된다. 2015년 10월 8일, 당시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국회 교문위(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교육부에 내린 큰 지침은 ‘균형 잡힌,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라’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개인적으로는 황우여 이 자도 반드시 청산해야 할 적폐라고 본다. 더 이상 사회의 어느 분야에도 진출할 수 없도록 말이다). 그리고 나흘 뒤 교육부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을 발표하면서 이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 이름 붙였다. 현대사 부분 필진 전원이 뉴라이트 성향이면서 한국현대사 비전공자인 국정 한국사 교과서. 수감번호 503 박근혜 씨가 그의 아비 영전에 바치고자 했던 교과서. 마치 박승춘 전 보훈처장의 가이드라인이라도 있었던 듯, ‘나라사랑교육’에 대한 박 전 처장의 워딩과 ‘올바른 역사교과서’에 대한 황우여 전 부총리의 워딩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보며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011년 말에는 소위 ‘종북 DVD’ 1천 세트를 제작한 후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에 맞춰 전국의 보훈관서와 민간단체 등에 배포하였다. 이 DVD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을 ‘신화’라 찬양하는 반면, 반유신·반독재 운동을 민주화 투쟁을 빙자한 종북좌파 세력의 준동으로 매도함으로써 법률상의 보훈 대상자인 ‘4·19혁명 사망·부상·공로자’, ‘5.18 민주유공자’를 종북좌파라 낙인찍는 자기분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해서는 홍보성 멘트를 담으면서 광우병 촛불집회를 북한의 지령을 받은 종북세력의 반정부 투쟁으로 묘사하였고, 쌍용차 노조 파업에 대해서도 종북세력의 활동이라 지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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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한 행보는 끊임이 없어 대선을 앞두고 있던 2012년 1월 5일 국제외교안보포럼 조찬강연에서는 “… 금년에 우리 국민이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세력·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남북공조를 중시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것인가, 여기에 국가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라 함으로써 사실상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였고, 이듬해 1월 9일 호국보훈안보단체연합회 신년교례회에서는 “… 2년 동안 국가보훈처가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을 함양시켜서 이념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선제 보훈 정책을 추진하는 업무를 했는데, 제가 보니까 국가보훈처가 이 업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부서입니다."라 함으로써 국가보훈처가 이념대결의 선봉장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특히 이듬해의 발언은 국정감사에서도 이어져 당시 민주당 강기정 의원이 “보훈처가 이념대결 하는 조직이냐 아니냐. 그런지 아닌지 그것만 답하라”고 묻자 박 전 처장은 “이념 대결을 위한, 이념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업무를 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박근혜 정권 하에서 날개를 단 호랑이는 거침이 없었다.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는 변태적 인식마저 드러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 기념곡 지정을 방치하고 제창을 거부한 건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2015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는 관례상 광주지방보훈처장이 해 왔던 기념식 경과보고를 묘지관리소장이 하도록 해 기념일의 위상을 격하시키는가 하면, 작년 6·25 전쟁 기념 광주 시가행진에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시민을 잔인하게 유혈 진압한 제11공수특전여단을 참여시키기로 했다가 강한 반발에 부딪혀 취소하기도 했다. 11공수여단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 집단 발포에 이어 오후 4시에는 광주 외곽인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버스 승객을 상대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주남마을에서 학살당한 시신 중에는 좌측 가슴에 자창을 입은 여성도 있었다. 그러한 11공수여단을 광주 시가행진에 참여시킨다는 건 광주시민들을 능욕하는, 굉장히 악의적이고 변태적인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5·18 민주유공자는 국가보훈처가 마땅히 예우해야 할 국가유공자임에도 이런 짓들을 자행하는 건 자기 분열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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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및 그 유족에 대한 보훈, 제대군인의 보상·보호 및 보훈선양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는 설립 취지가 무색할 정도로 이념 대결의 선봉장 내지는 자기 분열 조직의 면모를 보여주던 국가보훈처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변화의 기회를 맞았다. 피우진 예비역 중령이 국가보훈처장으로 임명된 것. 지극히 남성적인 조직인 군대에서 여성 1세대 헬기 조종사로 근무하였고, 술자리에 여군을 부르라는 군사령관의 지랄명령을 거절하여 미운털이 박히기도 하였으며, 유방암 수술로 유방 절제를 하며 받은 장애 판정 때문에 전역 조치되자 복직 소송을 진행하여 승소, 복직 후 중령의 연령정년까지 복무하여 만기 전역한 인물. 복직 소송 중인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는 진보신당 비례대표 3번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장교 출신으로서 군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은 기본으로 갖고 있으면서도 여성 차별이 만연했던 시절, 다른 곳도 아닌 군대에서 온갖 편견과 차별, 부당한 지시에 맞서 온 행적은 역대 처장들, 특히나 전임 박승춘 처장과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보여줄 거란 기대를 갖게 한다.

 

그 일환으로 지난 5월 30일 국정기획자문위원회 보훈처 업무보고에서 “이념 편향 논란이 있었던 나라사랑교육을 전면 개편하겠다”고 밝혔다. 즉, 안보를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교육 대신 “민주화 정신을 체험하고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보훈단체에 대해서는 관리 감독을 강화하여 수익 사업의 문제나 정치적 편향성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며, 2019년에는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기념관 개설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구상이 비정상으로 치닫던 보훈처를 정상 궤도에 다시 안착시키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국가보훈처가 국가적 예우를 갖추어야 할 대상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민주화’라는 큰 틀 안에서 안보를 조망하고 느껴볼 기회를 제공하는 건 바람직하다. ‘안보강연’을 통해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 역시 거꾸로 가던 시계바늘을 제 방향으로 돌려놓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조직 내의 극우 편향성을 극복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그간 소홀했던 독립 유공자들을 기리고자 하는 계획은 국가보훈처가 설립 취지에 걸맞는 조직으로 정상화될 것이라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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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두에서 다룬 현충일 제정의 배경,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현충일의 의미와 현충일을 주관하는 부처인 국가보훈처의 태생적 한계를 곱씹어 보면 보훈처를 정상화 시킨다는 건 만만치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단순히 일제 부역의 문제, 이념의 극한 대립과 분단, 군사독재 잔재, 권력과 자본의 집중화 등으로 대표되는 적폐의 청산뿐만 아니라 국가란 무엇인가, 충성의 현재형은 무엇인가, 충성을 기꺼이 바칠 대상은 과연 존재하는가 따위의 철학적이고도 보다 구체적인 분석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대중 – 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개혁 세력이나 진보 세력이 연이어 정권을 잡았다면 이러한 논의와 분석은 활발했을 것이고 지금쯤이면 훨씬 나은 대안들이 나왔을 법 하지만 도로 유신 시대를 경험해야 했던 상황에서 체질 개선이나 일대 혁신을 기대하는 건 무리가 있을 터다. 다만 망가질 대로 망가져 더는 손쓸 수 없을 것 같은 낡은 집의 기둥을 새로 세우는 심정으로, 썩은 기둥은 과감하게 버리되 새 기둥은 더욱 견고한 나무를 구하겠다는 심정으로 우직하게 과업을 수행한다면 점진적이나마 바탕이 바뀌어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가져 본다.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잘 끼웠다.

 

내일이면 현충일이다. 900여 년 전 거란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고려 병사들의 유골을 집으로 돌려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한 날. 그날이 농경사회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날인 ‘망종(芒種)’, 한국인의 주식인 벼와 보리의 종자를 뿌리기 적당한 시점이라는 건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종자를 뿌려야 싹을 틔우고 풍족한 낟알을 거두 듯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충성이야 말로 국가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초석이 된다는 의미를 취하고 싶었던 걸까. 그런 의미라면 썩 달갑진 않다. 난 충성이라는 딱지를 덧씌우며 가공해 낸 이념국가의 허상들은 추모하지 않는다. 가족이 되었든, 내가 속한 소규모의 공동체가 되었든, 실체 없는 조국이 되었든, 희생만을 강요한 국가가 되었든, 꿈꾸는 새 나라가 되었든 결국 자기가 아닌 타인을 위해 몸 바쳐 싸우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들을 추모할 뿐이다.






쫄깃한 기타


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