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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를 사랑한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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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향락으로 유명한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즐긴 유희 중 하나는 오페라였다. 그녀는 오페라를 몹시 사랑했다. 정략결혼으로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공주에게 이야기와 음악으로 혼을 빼놓는 오페라는 달콤한 위안이었다. 음악의 나라 오스트리아 출신답게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은 매우 뛰어났다. 하프 연주를 즐겼으며 오페라 아리아를 곧잘 흥얼거렸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정치적 도덕적 부적합을 이유로 공개 상연을 금지되자 적극적으로 왕을 설득한 것도 그녀였다.

 

 

또 다른 공주, 그리고 길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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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광화문에 촛불 물결이 출렁였던 지난해 겨울, 영국 순방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의 화장대 사진이 공개됐다. 스크린, 조명 10개, 거울 그리고 커다란 장막에 둘러싸여진 이 방을 박 전 대통령은 방문하는 어느 곳이든 고집했다. 방을 세팅하는 일은 해외순방 때 외교부와 현지 공관 공무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남이 쓰던 것을 질색하여 전용 변기를 들고 다닌다는 일화도 널리 알려졌다.


 

‘얼음 공주’ ‘수첩 공주’ ‘선거의 여왕’

 

박근혜 전 대통령에겐 유독 왕정 시대를 빗댄 별명이 많았다. 그녀는 권위주의 시대 대통령의 딸이었고, 어머니를 대신하는 퍼스트레이디였다.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청와대에서 보냈다. 긴 칩거 기간 그리고 다시 정치인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 그녀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학창시절을 제외하고는 보통 사람과 겹치는 삶의 영역이 매우 협소했다. 그녀의 삶은 당 대표와 대선후보 그리고 대통령이 될 때까지도 성안의 공주처럼 신비했고 아득히 멀어 보였다.

 

공주의 취향과 취미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극히 드물다. 국선도, 단전호흡, 서예, 독서, 산책 정도가 공식적으로 알려진 그녀의 여가 생활이다. 하나같이 절제되고 우아하며 품위 있어 보이는 것들 이외에 공주의 ‘은밀한 취미’로 의심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소프 오페라(soap opera),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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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박영수 특검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를 공개했다. 대통령에게 두 개의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을 추천하는 내용이었다. 프로그램들이 방영 기간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낸 시기를 추정해보면 2016년 10월. 최순실의 태블릿PC가 세상에 나와 국정 농단 게이트가 터진 시기다. 문자가 공개되자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평소에 드라마 광으로 알려진 박 전 대통령은 그러한 세간의 소문을 대통령 격무에 바빠 드라마를 볼 시간은 없다며 부인한 바 있다.

 

하지만 그녀의 드라마에 대한 애착은 상당해 보인다. 그 결정적인 증거는 차움병원 진료기록에 남긴 가명 ‘길라임’이다. 길라임(하지원 분)은 2010년 겨울에 방영된 드라마 SBS<시크릿가든> 여주인공 이름이다.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 주인공 이름을 아이디나 메일 주소에 활용하는 행위는 드라마 덕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버릇이다.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허구의 세계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며 만족감을 느끼는 극도의 애정 행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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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은 부잣집 도련님과 찢어지게 가난한 아가씨의 사랑을 다룬 전형적인 ‘신데렐라 로맨스’다. 길라임은 가진 것이 몸 밖에 없는 스턴트우먼으로 하루하루를 억척스럽게 살아간다. 공교롭게도 극중에서 소방관인 길라임의 아버지도 일찍 순직한다. 아버지의 이른 부재는 길라임의 삶 곳곳에서 애잔하게 오버랩 된다. 길라임이 삶의 무게를 묵묵히 버티며 살아가야 하는 힘은 때때로 나타나 딸을 보호해주고 보살펴주는 아버지의 영혼이다. 결국 길라임은 아버지가 목숨을 바꾸며 살려낸 부잣집 도련님 김주원과 사랑하며 잘 먹고 잘살게 되는 행복한 결말에 이른다.

 

<시크릿 가든>이 방영되던 때는 (2010년 11월~ 2011년 1월 사이) MB 정부가 집권 4년 차에 접어드는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친이계와 친박계가 당내 주도권과 차기 대권을 두고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지우마 호세프가(돈 장난을 치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슷한 시기에 사이좋게 탄핵되었다.) 브라질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되며 독일의 메르켈, 호주 길러드 총리 등과 더불어 국제사회에 ‘마담 프레지던트’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오세훈 서울시장, 거물 이회창, 정몽준 등이 보수 후보의 박근혜 대항마로 나섰지만 박근혜 대세론을 뒤집기에 역부족이었다. 드라마에서 길라임이 온갖 고초와 역경을 뚫고 김주원과 행복한 종영을 맞이할 때 즈음, 박근혜 의원의 대선후보 지지도는 40%에 육박했다. 온 우주의 기운이 그녀를 향하고 있는 시기였던 것이다. 고초와 역경을 뚫고 아버지와의 추억이 가득한 청와대로의 재입성하는 그 시기에, 아버지 영혼이 맺어준 재벌 남자와 행복한 인생을 맞이하는 길라임이 박 전 대통령에게는 남다른 애정이 쏟아졌을지 모른다.

 

 

공주들의 시크릿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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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의 오페라에 대한 애착은 베르사유 궁 ‘프티 트리아농’에 호화롭고 은밀한 개인 전용 오페라 극장을 짓는 데까지 이른다. 그녀는 그곳에서 자기와 가까운 친구들만을 불러 모아 향락의 꽃을 피웠다. 그녀의 오페라 사랑은 감상에 그치지 않았다. 직접 작품을 기획하고 출연하기까지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시골처녀나, 하녀 같은 미천한 신분을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인 그녀가 하층민들의 삶을 연기하는 것을 즐겼다는 것이 퍽 의외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트리아농 주변에 오두막집을 지어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는 서민체험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왕비의 마을’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왕비의 최측근 이외에는 출입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어느 백작 부인이 트리아농과 왕비의 마을에 초대받았다는 것은 그녀가 왕가의 실세가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한때 적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서 동맹을 위해 시집온 15살 황태자비에게는 시샘 어린 왕궁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칠 공간이 필요했다. 후에 왕비가 되어서도 그녀는 왕비의 의무를 뒤로 미루고 트리아농에 몸을 숨겼다. 매일같이 오페라를 보고 도박과 유흥에 취했다가 그마저도 지겨워지면 오두막에서 홀로 서민 소꿉놀이를 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드라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트리아농 같은 공간이었을지 모른다. 성안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립시켜왔던 그녀의 삶에서 드라마는 세상을 내다보는 작은 창문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흙수저녀 길라임의 성공에 대한 애착과 자기 투영은 아버지의 부재에서 시작된 삶의 굴곡에 공감하면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은 고요한 시크릿 가든에서 작가가 그려놓은 행복한 세상을 지켜보며 공주는 홀로 앉아 외로움을 달랬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 그랬지 안봤다고 하지 않았다.

 


드라마를 많이 볼 시간은 없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면 지금껏 여러가지 일들을 해왔는데 해낼 수 없었을 것


- 2017년 1월 , 정규재 TV 인터뷰 中



격무에 시달려 드라마 볼 시간이 없었다는 박 전 대통령의 항변과는 달리, 공주의 은밀한 취미는 청와대에 입성한 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녀는 드라마에서 국정운영의 아이디어를 얻어 정말 많은 것을 해내기도 했다.



'별에서 온 그대' 드라마를 본 수많은 중국 시청자들이 극중 주인공들이 입고 나온 의상과 패션잡화 등을 사기 위해 한국 쇼핑몰에 접속했지만, 결제하기 위해 요구하는 공인인증서 때문에 결국 구매에 실패했다고 한다. 


- 2014년 3월 20일 규제개혁장관회의 대통령 모두발언 中



이 한마디에 공인인증 프로그램 ‘액티브 X’는 하루아침에 창조경제를 저해하는 ‘암덩어리’와 ‘처 부숴야 할 원수’로 급부상했다. 수년 전부터 여러 단체와 개인들이 계속 제기했던 공인 인증 문제가 ‘천송이 코트’프로젝트로 단숨에 해결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은 발언에 드라마 대사를 인용하는 진정한 드라마 덕후의 면모도 뽐냈다.



“수술이 무섭다고 안 하고 있다가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구조조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 2016년 4월 22일 국가재정전략회의


 

이는 KBS 드라마 <태양의 후예> 주인공인 의사 강모연(송혜교 분)이 동료들이 수술을 앞두고 망설이는 장면에서 “위험하다고 손 떼면 이 환자 죽잖아요”라고 말하는 대사를 응용한 것이다. 이 발언 이후 ‘공공·노동·교육·금융’ 등 이른바 4대 구조개혁과 성과연봉제 확대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공교롭게도 대사가 인용된 회의는 드라마가 종영된 다음 날이었다. 인기 드라마가 종영되면 드라마 제목을 줄여 ‘@@ 덕후’라고 자처하는 팬들의 ‘@@ 앓이’가 한층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개인 블로그나 SNS 등에 드라마의 명장면과 명대사를 포스팅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덕질 방법이다. 공식석상에서 보란 듯이 ‘태후 덕후’임을 인증한 박 전 대통령의 ‘태후 앓이’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아마도 <태양의 후예>는 그녀의 ‘인생드라마’ 인 것으로 추정된다(박 대통령 “‘태후’는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모범사례朴 대통령 “송중기, 실제로도 진짜 청년 애국자…든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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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선의 우국충정

 

박근혜 전 대통령을 드라마 덕후의 길로 인도한 것은 전여옥 전 의원이었다. 박 전 대통령의 함량 미달의 언어와 화법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한 기자의 조언에 따라 드라마 시청을 권했다고 한다. 베이비 토크 같은 언어능력을 일반인 수준만큼이라도 끌어올려 보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무척 마음 짠한 계기였지만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덕분에 좋은 취미를 얻는 기회가 되었다. 월화 드라마도 재미있고 수목 드라마도 재미있어서 주말을 기다리는 것이 그리 퍽퍽하지 않은 삶. 보통의 시청자들이 일상에서의 드라마처럼, 그녀의 삶에도 드라마가 국정의 고독함을 달래는 일상의 작은 위안과 휴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현실을 다루지만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는 재벌 2세가 억척같이 사는 스턴트우먼과 몸이 바뀌는 일이나 별에서 온 외계인이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없다. 자신의 삶에 길라임이나 천송이같은 반전이 있을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는 시청자는 없다. 중 2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다음날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매우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공주의 비극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드라마가 세상을 내다보는 유일한 창문이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공주의 마지막 친구 조윤선 전 장관은 그 점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별에서 온 외계인에게 푹 빠져있다가 중국 관광객의 쇼핑이나 염려하는 주군의 모습에서 교보재가 잘못되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가 대통령에게 보낸 문자 행간을 잘 살펴보면 묻어나는 주군에 대한 염려와 애정을 읽을 수 있다.




“대통령님! 시간 있으실 때 혼술남녀, 질투의 화신이라는 드라마나 예능 삼시세끼 세 번째 시즌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대통령님! 시간 있으실 때 (제발 아무거나 보고 이상한 말 하지 말고) 혼술남녀, 질투의 화신이라는 드라마나 예능 삼시세끼 세 번째 시즌 보시면 (세상 물정 공부에) 좋을 것 같아요.” 



 

SBS <질투의 화신>은 방송국 내 아나운서와 기상 캐스터의 치열한 경쟁을 묘사하면서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겪는 차별과 서러움을 비판한 드라마다. CJ e&m tvn <삼시 세끼>는 경치 좋은 시골 어딘가에서 연기자들의 안분지족하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야근에 지친 사람들에게 영상으로나마 슬픈 위안을 건네주는 예능이다. 그녀의 TV 추천 목록에서 지금 진정으로 살필 문제가 무엇인지 눈높이 교육을 시전하는 문화체육부 장관의 면모가 엿보인다. 특히 CJ e&m tvn <혼술남녀>를 추천하는 대목에서는 충신의 우국충정마저 느껴진다.

 



“특히 혼술남녀는 요즘 혼자 술 마시는 젊은이들 분위기, 취직 안돼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학원가 분위기를 그린 재미있는 드라마에요. 저도 드라마를 꼭 한 편 보지 않으면 잠이 안와요.”



“특히 혼술남녀는 요즘 (사는 게 힘들어서) 혼자 술 마시는 젊은이들 분위기, (실효성 없는 취업정책으로 인해) 취직 안돼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고)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학원가 분위기를 그린 (CJ가 좀 핍박했다고 앙심 품고 정부를 엿먹이는) 재미있는 드라마에요. 저도 (스트레스 받아서) 드라마를 꼭 한 편 보지 않으면 (대통령님 때문에) 잠이 안와요.”



 

대통령의 TV 시청의 취미가 흉이 될 수는 없다. 정무직 공무원이 여가시간에 드라마로 피로를 풀고 국정 운영의 아이디어를 얻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 다만 국정 농단 사태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탄핵에 직면해 있는 그 위기의 순간마저도 드라마나 추천하고 있는 장관의 문자가 우리에게 허탈감을 주는 이유는,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을 그 순간에도 여염집 아낙이 나라를 농단할 때도, 이토록 사태 파악에 아둔한 자들이 대통령이고 정무수석이었다는 두려운 사실 때문이다.

 


공주를 보내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 이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망언의 장본인으로 영원히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그녀가 파탄 난 나라 살림과 배곯는 백성의 신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트리아농에서 박혀 왕비의 여가만을 즐겼기 때문이다. 성난 프랑스 민중들에게 왕비가 그런 망언을 했다는 오해가 쉽게 퍼졌다. ‘우리의 왕비는 그런 말을 하고도 남을 여자’라는 경험이 백성들의 가슴에 응어리져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와 향락은 실은 당시 유럽의 왕족과 귀족이 누렸던 그것에 비하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자 부인이라 불리며 백성들의 미움과 분노를 한 몸에 받았다. 공주로 태어나 왕비로 죽을 때까지 그녀는 그저 성안에서 본대로 배운 대로 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무는 왕정의 시대에 성난 민중은 혁명으로 그녀를 심판했다. 스스로를 시민으로 자각한 군중들로 둘러싸인 단두대 앞에 선 그녀는 끝까지 당당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 곁에 끝까지 남아 운명을 같이한 마지막 친구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

 

오페라를 사랑했던 공주의 최후. 그리고 지금 여기 어딘가 닮아있는 또 다른 공주의 최후. 탄핵 이전에도 이후에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공주로 살았던 그녀의 마지막 항변이다. 츠바이크는 마리앙투아네트 평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죄과이지만 그녀가 산 시대의 죄과이다.'

 

 


 

 근육병아리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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