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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1. 14. 화요일

딴지대북정책연구소장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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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조선일보가 동시에 통일의 긍정론을 이야기했다. 물론 우연일 수는 없겠지만 양자의 정치적 목적은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낀다. 통일이란 단어가 주로 진보세력으로 분류된 이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는 것, 조선일보와 새누리당이 이 단어에 극히 부정적이었다는 것에도 관심 없다. 조선일보가 햇볕정책에 대해 '퍼주기'를 넘어 무려 핵개발을 지원했다고까지 한 데 대한 반성 혹은 자기합리화 없이 말을 바꾼 것도 뭐, 딱히 불쾌하지 않다. 일관성에 대한 신뢰랄까. 박근혜가 통일의 이상향만 내놨지 그 방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는 것도 같은 이유로 노 프로블럼. 기대하지 않은 바에 대해서는 실망할 필요도 없다.


내게 흥미로웠던 건 박근혜와 조선일보가 통일을 말하는 방식의 솔직함이었다. 통일은 '대박'이다. 참 날것의 언어다. 대박은 횡재 즉 큰 불로소득을 뜻하며 도박장에서나 쓸법한 말이다. 투자나 장사에 갖다 쓸 때도 어디까지나 비유의 의미로다. 이게 핵심이다. 이들에게 통일은 수지맞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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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MBC


조선일보의 행간을 읽어보면 통일은 하나의 상태로 온전히 되돌아가는 '복원'이 아니다. EU와 같은 통합도 물론 아니다. 흡수통일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 또한 아니다. 이들이 상상하는 통일은 '팽창'이다. 통일 전망이 ‘대박’인 이유는 북한의 영토와 인구를,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의 눈에 비친 신대륙과 다를 바 없이 보기 때문이다. 거기엔 자원이 있고 새로운 시장이 있고 순진무구한 노동력이 있다. 그리고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신자유주의와 자본이 연장전에 돌입할 공간이 있다. 그런 면에서 이들의 통일은 한일합방과 다를 바 없다. 가쓰라 태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이 한반도를 찜한 것처럼, 북녘 땅의 소유권에 한국만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경쟁자는 없다. 북한은 개척권이 주어진 미개척지다.

 

간지럽게 동포니 한 핏줄이니 하는 말은 삼가겠지만서도, 우리와 북한 인민들은 동일한 문명의 구성원이다. 한 문명의 수혜를 받았고 같은 상황에 고통 받았다. 현재 북한의 모습이 영 에러지만 이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스페인이 아니고 북한 인민은 인디오가 아니다. 정부의 통일 인식은 근본부터 뒤틀려 있다. 통일이 결과적으로 여러가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전제가 될 수 없다. 지금 윤리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통일을 경제적 기회로 바라보는 관점이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바로 이 경제적 논의의 전제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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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조선일보>에서 연재중인 통일 시리즈 기사

 

나는 통일이 '민족경제'-통일 이후의 가정이므로 '국민경제'가 아니라-에 결정적 공헌을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은 남한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이 북한이라는 숙주를 만나 수명을 연장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자살률이 고공행진을 시작한 지 오래인 한국의 경제구조의 문제는 더 이상 규모의 문제가 아니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 노동계층의 처참한 삶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영국 '국민'들의 삶이 본격적으로 개선된 것은 외려 영국이 종이호랑이가 되고 나서였다. 남북전쟁이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세계사적 진보인 이유는, 경제적으로만 보자면 노예노동을 운용하는 자본(주로 지주)에 대한 임금노동자(백인 자영농 포함)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와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말만 통일일 뿐 실상은 자원, 시장, 인구에 대한 남한 자본의 무혈정복을 뜻한다. 그렇기에 그토록 낙관적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자본의 입장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통일을 향한 남북한의 대화나 협의는 옵션에 없다. 이 사람들한테 그런 옵션이 있다면 백인이 땅문서에 인디언 추장 서명받은 것처럼 형식뿐인 절차일 것이다. 서독에 의한 동-서독 흡수통일처럼 북한 인민을 '책임'져야한다는 전제적 의무 역시 희박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이 청사진은 남한 국민의 삶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조선일보가 통일을 걸고 말하는 국민행복의 본질은 낙수효과다. 어차피 낙수의 수도꼭지는 자본의 손이 쥐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 철지난 경제적 신앙이 현재에 소환된 대표적인 사례가 4대강 사업이다. 경제적 수치들이 활개 칠 공간이 사라지자 더 높이, 더 많이 짓고 세우던 삽날을 강바닥으로 돌린 것이다. 정권의 비리 문제는 거론하지 않겠다. 다만 경제적으로만 봐도 4대강은 자해에 해당한다. 영양공급이 멈춘 신체가 지방을 다 소모하면 근육 손실을 일으켜 활동에너지를 얻는 것과 같다.

 

통일은 자해의 공격성을 외부로 돌리는 약탈적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2차대선 시기의 군국주의자들에겐 크고 아름다운 대포를 찬양하는 남근숭배가 내재되어 있었다. ‘거포(巨砲)주의’는 다분히 정치적이다. 대통령과 언론사가 입을 맞춘 통일론에 드러난 자본주의적 욕망의 속성도 거포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욕망을 대변해주는 언어를 쓰자면, 북한은 ‘처녀지’다. 제국주의자들이 남의 땅에 모국의 깃발을 ‘삽입’할 때 쓰던 말 그대로다.


팽창을 통한 성장은 지속가능한 성장이 아니다. 중산층이 붕괴하고 분노가 누적, 확산되는 지금의 한국에서 삶의 지속성은 내적 조건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경제성장은 온 국민의 십시일반으로 이뤄졌지만 그 단물은 자본이 독식했다. 자본은 유전자변이를 일으켜 신자유주의로 진화했건만,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성장을 강요한다.


대통령과 조선일보의 통일 전망은 일견 신선해 보이지만 실은 식상하며, 그들의 일관된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성장제일주의의 창으로 본 풍경이다. 신년벽두에 출몰한 통일은 70년대가 2010년대에 내놓은 사업계획서다.










딴지대북정책연구소장 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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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홀짝,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