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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발트함대의 미친항로


발트함대는 일본의 연합함대와 싸우기 전 기항지와 보급품 확보를 위해 전투를 벌여야 했다. 프랑스령 다카르에 기항할 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워 보였던 여정이었지만, 인도양에 접어들면서부터 이야기는 미묘한 방향으로 흘렀다. 여순 요새의 함락으로 우선 목표가 일본해군의 격멸이 아니라 ‘선(先) 함대 보전’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여순항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우선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가 휴식과 정비를 취한 다음 일본 해군에 대한 공격을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너무도 당연한 결론이다. 220일간의 항해, 지구의 3/4 가까이 항해해온 함대가 아닌가? 배는 멀쩡하다 하더라도 함대의 수병들은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발목을 잡은 것이 기항지였다.


석탄을 보급받고 노지베를 출발했지만, 인도양과 남중국해는 이미 영국의 뒷마당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였다. 인도차이나의 캄란항에서 겨우 한숨을 돌리고, 보급품과 식수, 식품을 조달할 수 있었지만, 충분치는 않았다. 결국 캄란 항에서 90Km 떨어진 반퐁에서 석탄을 좀 더 보급받았지만, 이 역시도 충분하다고 말하긴 어려웠다(이후 남중국해를 통과해 일본 본토에 다다를 무렵이 되면, 함내의 모든 목제가구를 모두 갑판으로 끌어올려 땔감을 만들었다).


손자병법의 이일대로(以逸待勞, 적이 지칠 때까지 편안하게 기다린다) 전략에 이만큼 적확한 ‘예’가 있을까? 발트 함대는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미 승기를 놓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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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일본이 쥐어짜 낸 전함들


시바 료타로의 <언덕위의 구름>을 보면, 책장 여기저기에 ‘일본은 가난하다’란 말을 반복해서 썼다. 이 말대로 일본은 가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마시고, 안 먹으며’ 군함의 건조비를 충당했다. 당시 기술력과 산업기반에서 뒤처진 일본은 군함의 80%를 영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다. 가뜩이나 비싼 군함을 영국에서 수입하려 하니 그 비용은 일본 경제에 엄청난 부담이 됐었다.


러일전쟁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쓰시마 해전에서 활약한 시키시마, 하츠세, 미카사 3척의 가격만 5,851만 4천 엔이었으니(당시 일본의 세출이 1억 엔 내외였다), 얼마나 대단한 ‘출혈’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모든 세계열강의 고민이기도 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맞는 말이었다. 바다를 지배하지 못한다면(혹은, 최소한의 제해권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해외로 뻗어 나갈 수 없고, 해외로 뻗어 나가지 못한다면 식민지를 건설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국력의 쇠퇴로 이어지는 게 당시의 상식이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만의 ‘논리’라는 게이랬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세계는 제국이 되든가, 식민지가 되든가 둘 중 하나의 길밖에 없었다. 살아남으려면, 뻗어 나가야 하고, 뻗어 나가려면 다른 열강들처럼 강한 해군이 필요하다!”



정치적 해석에 대해서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군사적 측면에서 보자면, 해군은 필요했다. 더구나 ‘흑선’(페리호, 일본을 반강제로 개항시킨 미국의 군함)의 트라우마를 경험했던 일본에 있어서 해군은 생존의 문제와 결부됐었다(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화 과정은 어쩌면 해군 육성의 역사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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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승리 이후 받아낸 배상금, 이후 삼국간섭을 통해 뭉쳐진 일본 국민의 반(反) 러시아 정서는 일본 해군 확충의 원동력이 돼 준다. 그리곤 그들 표현처럼 안 먹고, 안 마시며 군함을 만들어 낸다(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전함’은 비싼 물건이었다. 1921년이 되면 국가 예산의 30%를 전함을 건조하는 데 투입했을 정도가 된다).


이렇게 피땀 흘려 만들어낸 전함이 이제 그 효용을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세계 최대의 해전이 시작되려고 한다.


러일전쟁 총 전비는 19억 8,400만 엔. 당시 영국과 미국이 12억 엔을 지원하긴 했지만, 아무리 영국과 미국이라도 화수분은 아니었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갔다간 일본 정부는 파산을 선언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 위기에서 일본을 구해 준 것이 쓰시마 해전이었다. 쓰시마 해전 덕분에 사실상 러일 전쟁은 끝이 났다. 세계의 모든 이목이 집중했던 러-일전쟁의 피날레를 장식한 전투였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기도 했지만, 순수한 ‘군사적 영역’에서도 쓰시마 해전은 수많은 군사 전문가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근대의 힘으로 무장한 ‘전함’들이 최초로 대규모 해전을 벌인 것이다(이전에 이런 대규모 해전은 없었고, 이후 10여 년간 이런 대규모 해전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유틀란트 해전 직전까지 ‘쓰시마 해전’은 세계 최대의 해전이란 영광스런 타이틀을 달게 됐다).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은 손에 땀을 쥐며 이 해전을 기대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목숨 걸고 ‘찍어낸’ 전함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궁금했었다. 그리고 러-일 해전은 각국 해군 관계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줬다.


후술하겠지만, 쓰시마 해전 덕분에 세계 해군 건함史 는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물길을 틀어버린다. 쓰시마 해전 직전의 전함들은 철갑으로 무장하고, 대규모 함포를 달고, 증기의 힘으로 바다를 가르는 정도에서 만족했었다. 시쳇말로 ‘실험적인 성격’의 프로트타입의 전함들의 향연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대구경 함포뿐만 아니라 선체 여기저기에 빽빽이 소구경 부포를 우겨 넣기 바빴다. 과연 이런 무장형태가 올바른 것인가란 해답을 쓰시마 해전은 보여줬다. 쓰시마 해전의 전술을(분명한 ‘삽질’이었지만) 확인한 영국의 피셔 제독은 이에 영감을 받아 ‘신개념 전함’의 아이디어를 구체화 했고, 그 결과 전 세계를 충격과 공포. 그리고 국민의 원성으로 이어질 ‘드레드노트(Dreadnought)’ 급을 만들어 내게 된다(이 부분은 러-일 전쟁에 대한 총평을 말할 때 다시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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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사람들이 러시아와 일본의 마지막 혈투를 기대하고 있던 그때, 정작 그 ‘무대’가 돼 주었던 중국(청)과 한국(대한제국)은 완전히 소외됐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에는 21세기까지 이어지는 엄혹한 영토침탈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바로 ‘독도’이다.



...그리고 독도


1894년 일본인 사토가 울릉도를 탐방한 뒤 일본 시마네 현의 지방지인 <산인 신문>의 울릉도 탐방기를 발표한 적이 있다. 이때 이 탐방기의 제목이 <조선 죽도 탐방기>다. 당시의 기사를 잠깐 발췌하자면,



“(상략) 본 섬은 팔도 중의 하나인 강원도에 속하는 섬으로, 본명은 울릉도라고 한다. 본방인(일본인)은 죽도라고 말한다. 내지에 있는 울진에서 350간리에 위치해 있고, 순풍이면 2일 만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하략)”

 

“(상략) 죽도는 오키에서부터 서북쪽으로 80여리 되는 바다 가운데 고립해 있다. 배를 빨리 해 50여 리에 다다랐을 때 1개의 외로운 섬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섬을 리앙코 섬(독도)이라고 부른다.(하략)”



여기까지만 보면, 이때까지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로 부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 당시까지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 독도는 송도(松島: 마츠시마)라 불렀다. 그런데 1905년 2월이 되면 정말 생뚱맞은 일이 벌어지게 된다.




오키의 신도는 북위 37도 9분 3초 동경 131도 55분에 있으며, 오키섬으로부터 서북 85해리의 거리에 떨어져 있다. 이 섬을 죽도라고 칭하고, 지금부터 오키 도사(오키섬의 행정책임자)의 소관으로 정한다고 현지사로부터 고시해 졌다. (하략)


-1905년 2월 24일 시마네현 지방지 산인신문의 내용 중 발췌




산인신문에 2단짜리 짤막한 기사가 올라온다. 바로 독도가 시마네 현에 편입됐다는 내용이다. 재미난 사실은 불과 10년 전에 송도. 즉, 마츠시마라 부르던 섬을 다케시마로 개명해 자기네 영토로 불법적으로 편입한 것이다. 이 부분이 정말 재밌다. 조선시대 내내 일본은 독도에 대한 야욕을 품고 있었는데, 안용복을 비롯해 우리 선조들의 단호한 대처에 밀려 그 야욕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일본이 동해 한가운데 있는 두 개의 섬. 그러니까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욕망 때문에 애꿎은 섬들의 이름이 뒤바뀌고, 심지어 제3의 섬이 등장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1667년의 기록을 보면, 일본인들은 울릉도는 죽도, 독도는 송도라고 부른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재미 난 사실이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죽도를 끝까지 지키려 하자 ‘죽도’란 가상의 섬을 만들어 울릉도와 독도 사이 어디쯤 있다며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자 그런데 말이다. 어째서 멀쩡했던 죽도와 송도의 이름이 뒤바뀌었던 걸까?


1880년에 일본은 군함 천성호를 울릉도 인근 해역에 파견한다. 천성호의 임무는 이 지역을 정밀 측량하는 것이었는데, 이때 이들에게 난감한 상황이 발생했다. 분명 울릉도를 찾아간 것이 맞는데, 지도와 대조해 보니 송도 즉, 독도의 위치였던 것이다. 결국 이때부터 울릉도는 죽도 대신에 송도로 불리게 된다. 그럼 독도는 어떻게 됐을까? 일본은 여기서 뭔가 '중립적'인 느낌이 나는 이름을 가져다 붙이게 되는데, 바로 리앙코 섬이다. 이 리앙코 섬의 연원을 따지자면, 184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이때 프랑스의 포경선 리앙쿠르 호가 독도를 발견하고는 이를 처음으로 국제 해도에 올리게 된다. 이때 배 이름을 따 리앙쿠르 암(岩)이라는 이름이 나온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내에서도 독도를 리양코 시마(リヤンコ島)라 적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즉, 독도를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서는 죽도와 리앙코섬이라 병기해서 불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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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독도의 침탈이 러-일 전쟁.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쓰시마 해전’ 때문에 기획, 실행됐다는 사실이다.


쓰시마 해전 직전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휘하의 함대를 진해만에 집결시킨 걸 보면, 독도의 침탈과 활용 정도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1905년 2월 22일 러일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그때! 강제로 독도를 일본 제국 시마네 현에 편입시킨 배경에 군사적 배경이 있었다는 점은 오늘날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돼 줄 수 있다.


일본은 1898년 4월 쿠바에서 벌어진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 해군 장교 아키야마 사네유키(‘언덕위의 구름’을 보면 나름 ‘멋있게’ 나온 주인공이지만)를 파견하게 된다. 이때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미국의 승리 뒤에 통신과 해저케이블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 당시 미 해군은 각 전함에 무선 전신장비를 탑재하고, 실시간으로 정보를 취합 명령을 내림으로 스페인 해군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전쟁을 참관한 아키야마는 1899년 6월 본국으로 돌아와 당시 외무대신에게 장차 있을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해 무선기술 확보와 망루 설치를 제안하게 된다. 여기서 말한 망루란 전투 지휘를 위한 것이었는데, 이때 그 대상으로 지목된 곳이 한국의 울진, 울산,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독도였다. 이곳에 망루와 해저케이블을 설치 해 동해 상에 하나의 ‘덫’을 놓자는 것이다. 이 계획은 석 달 만에 통과된다.


이는 아키야마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게 쓰시마 해전의 영웅이었던 도고 헤이하치로 역시,



"동해에서는 독도, 서해에서는 풍도를 차지해야 한다.“



라며, 이 두 섬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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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도는 서해의 다른 섬과 달리 갯벌과 해수욕장이 없고 항시 수심이 깊어 큰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천혜의 항만 조건을 가지고 있고, 그 위치상 서해 상에서 배들의 출입을 감시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이미 조선 말기 이양선의 출몰 지역으로 정평이 난 곳이었고, 지금도 이곳에는 한국군의 레이더 기지가 설치 돼 있다. 풍도를 갔다 온 관광객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하루에도 수 백 척의 배들이 풍도 앞바다를 지나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30분 정도만 바라보면, 서해 상에서 풍도가 가지는 전략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까운 건 섬 자체로 보면, 정말 ‘아름다운 섬’이었는데, 개발의 등쌀에 밀려 지금은 골자재 채취를 위해 섬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 필자 역시 2번 풍도를 방문했는데, 추천할 만한 섬이다. 청일전쟁, 러일해전의 무대였다는 점에서도 한 번쯤 방문해 볼 만하다.


일본은 자신들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이미 1899년부터 독도에 대한 야욕을 불태웠고, 러일전쟁이 한 참 진행 중이던 1904년 9월 25일 해군 군령부 주도하에 독도를 조사한다. 그리고 1905년 2월 22일 불법적으로 시마네현에 독도를 편입시키더니, 쓰시마 해전이 끝나고 두 달 뒤인 1905년 7월 25일 독도에 망루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일본이 왜 하필 1905년에 독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이 당시 대한제국은 나라가 아니었다.


이 정도에서 끊어야겠다. 러-일전쟁의 하이라이트인 ‘쓰시마 해전’을 쓰려면 기를 모아야겠다. 짧아서 미안하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http://hohodang.com/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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