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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본 기사는 지난 7월 12일에 게재된 편집부 cocoa님의 글

<수능은 공정한가?>에 대한 반론입니다.

다양한 반론과 재반론 모두 환영합니다.





cocoa기자의 새 기사를 보고 솔직히 그냥 넘기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이미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무슨 말을 더 할까. 그러나 반론에 대한 지적을 포함하면서 다시 통계자료를 근거로 삼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나는 논쟁을 좋아하지 않고, 댓글 쓰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그러할 것이라 여기지만, 객관적인 근거의 부족으로 논쟁을 피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싫었다. 나는 여전히 학종이 차악이라는 글쓴이의 결론이 합리적 근거를 갖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박터지게 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한번 해보자.




1. ‘경희대 특수성’에 대하여


"학종으로 입학한 학생들의 국가장학금 수혜율이 수능과 논술 전형보다 높았다는 경희대 데이터는 '경희대 특수성'이라는 반론을 받았다. 특목고, 외고, 자사고에서 경희대 정도 레벨의 대학을 갈 이유가 없으니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7년 입시 결과에 따르면 경희대에 수시로 입학한 학생 1,657명 중 외고는 8.5%, 자사고 10.6%, 과학고 1%로 일반고 출신이 아닌 비율이 20% 가량 되었다. 이는 경희대 정시 전형으로 입학한 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인용은 좀 이상하다. ‘경희대 특수성’을 반박하기 위해선, 경희대의 고교유형별 수시입학 비율이 ‘대학 서열에서 앞서는’ 타 대학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왜 정시입학 비율로 비교를 하는 걸까? 정시야말로 이미 나온 수능 점수로 판가름 되니, 출신고교 유형은 유불리의 변수가 아니다. 물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야 지원 여부에 영향을 주겠지만. 어쨌든 글쓴이가 인용한 자료에서는, ‘고교 유형에 따른 수시와 정시의 지원 차이가 적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 다음 자료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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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출처: 베리타스알파


여기선 신입생의 수시/정시 분류를 해놓지 않고 있다. 글쓴이의 자료를 근거로 그 차이가 적다, 즉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보자. 경희대의 영재학교 / 과고 / 외고 및 국제고 출신 신입생 비율은 각각 0.2 / 0.3 / 5.3 %이다. 이를 다른 대학의 수치와 비교해보면, 경희대 레벨을 기피한다는 주장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경희대는 위 대학들 중에서 입학정원이 가장 많다는 것도 참고하면 수치 차이가 더 강하게 와닿을 것이다. 사실 이 표에서 경희대보다 하단에 있는 대학들과 비교해보고 나선, 그래도 경희대가 특목고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꽤 노력하고 있다는 정황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전 글에서 중앙대가 서울 소재 특목고 출신들의 마지노선이라 그랬는데, 경희대도 포함시켜줘야 될 것 같다.


자사고의 경우 얘기가 좀 복잡하다. 내가 말한 자사고는 위 표의 ‘자율형사립고’에 해당하고 서울 지역에서도 좀 실력있는 학교를 의미한다. 교육 현장에서 쓰는 그런 애매한 표현을 나 역시 사용했음을 인정해야겠다. 처음 자사고 개념이 생겼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너무 많아져서, 학력 수준에서 일반고와 다를 바 없는 곳도 많다. 또 표에는 ‘자율형공립고’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표의 수치로 자사고 진학 경향을 얘기하긴 어렵다.


다음으로 네오르네상스 전형의 학생부 등급 분포는 글쓴이의 의도와는 반대 성향의 결론이 더 크게 부각된다. 학종의 평가지점이 모호하기 때문에 내신이 사실상 좌우한다는 결론 말이다. ‘내신 평균 2등급’을 받으려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서 몇 점 받아야 될까? 학교 따라 편차가 심하겠지만 90점 이상은 무조건이고, 95점 정도? 하나 틀려 3등급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일반적으로 말하기가 참 어렵다. 경희대 네오르네상스 전형은 교과 전형이 아닌데, 그럼에도 합격자의 내신 등급 분포가 저렇다는 것은 학종 전형이 소위 ‘종합적’ 평가가 아니라는 하나의 예시다.


물론 예외를 보자면 글쓴이처럼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내신 5~6 등급도 붙은 사례가 있는데, 그 친구가 특목고 출신도 아닌 정말 괜찮은 학생일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학종의 순기능이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 몇몇의 사례를 보자면, 또한 대다수가 내신 1등급권에 밀집돼 있는 현실을 볼 것이다. 여러 활동을 해왔지만 내신 3등급권인 학생이 바로 당신이라면, 학종의 순기능을 믿고 지원하기가 그리 쉬울까.




2. 입학사정관과 학생부종합전형의 혼동


"통계 자체보다 학종 사교육이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니 통계에 제대로 반영될 수 없다는 비판도 있었다. 글쎄. 참여정부 말기에 입학사정관 전형이 적극적으로 검토된 이래 10년이 흘렀다. 돈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산업이 그렇게 굼뜰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많이들 오해하는 지점이다. 지금은 입학사정관 전형이 아니라 ‘학종’ 전형이다. 2008학년도부터 시범 실시된 입학사정관 전형은 지금 연세대와 고려대에 남아있는 별의별 인재전형을 보면 이해가 쉽다. 여기선 고교 교과과정을 벗어난 스펙 기재가 가능하다. 이런 지점 때문에 입학사정관 전형이 공교육 정상화에 도움이 안 된다고 비판받았고, 2015학년도부터 개정교육과정으로 학종 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지금 학종이 가진 문제의 근원도 이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인해 특목고에게 절대 유리한 입시 환경이 조성되자, 학생부에 기재할 각종 프로그램들을 특목고가 먼저 개발하게 되었으며, 지금의 학종 체제가 도입되어서도 선발주자로서의 메리트를 여전히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다시 자사고, 서울 강남, 수도권, 지방 순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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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사정관 시절의 사교육은 특목고 및 일부 학생만을 대상으로 하는 컨설팅이었기에 그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2015년에 입학한 학생들이 입시를 치르게 된 지금이, 2015학년도 개정교육과정의 진정한 평가 시점이며 사교육의 시작 단계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사교육 산업이 그렇게 굼뜰 리가 없다고? 맞다. 다만 시기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이 시점에서 보면, 학종 전형에 사교육으로 대처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해도 된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지나치게 낙관적이지 않으면 좋겠다. 사교육 시장이 커진 데에 두 가지 근거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사교육 측면에서 고등 능력자들의 경쟁으로 교습에서 우위를 점한 것이다. 또 하나는 그 반대인 공교육 측면에서, 교사들의 능력 부족으로 우위를 뺏긴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일지 단언할 수 없겠지만, 과외가 없었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공교육의 부실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학종이라고 다르지 않다. 교내 토론을 대비해 사교육 선생에게 과외 받아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실험 보고서를 한번 점검 받는 것과 그냥 내는 것에 차이는 없을까? 이런 부분에서 사교육이 더 커질 가능성은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앞서 보았던, 내신이 학종에서도 중요 지표라는 지점을 생각해보자. 이건 이미 사교육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


교사들의 무능력 때문이든, 교육에 몰입하지 못하는 학교 시스템 탓이든, 공교육의 부실함은 결코 수능 영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수능 만능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학종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현실을 계속 반복하여 얘기하는 것이다. ‘수능 점수’가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건 신화에 불과하다는 말, 맞다. 그럼 학생부는 좀 더 그렇기라도 한가? 여기서 글쓴이는 다른 근거를 제시한다.




3. ‘타당도’는 해당 시점의 목적성이다


(…) 따라서 타당도가 높은 평가가 좋은 평가다.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그간 우리는 대학 입시에서 타당도를 간과해 왔다. 시험의 객관성에 온 신경이 집중돼 있었기 때문이다.


(…) 서울 소재 10개 사립대(경희대 고려대 서강대 서울여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연세대 중앙대 한국외대 한양대) 15, 16년도 입학생 6만 5천여 명의 학점을 분석한 결과, 학생부 교과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의 평균 학점이 3.37점으로 가장 높았다. 이어 학생부 종합(3.33점), 논술(3.24점), 수능(3.17점) 순이었다.


수능 입학생보다 학종 입학생의 대학 수학 능력이 높다는 결과다. 수능보다 학종의 타당도가 높을 수 있다는 간접 증거다. 어찌 보면 모든 과목을 공부한 후 점수에 맞춰 대학을 결정하는 수능에 비해 전공 적합도를 반영하는 학종의 결과가 좋다는 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학점뿐 아니라 전공 만족도와 중도 탈락율 역시 수능보다 학종에서 더 나은 결과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해석할 수 있다.


글쓴이는 ‘측정하고자 한 것을 측정하는 것’ 즉 타당도 면에서 수능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나는 이 지점을 인정한다. 시험이란 제도는 어떻게 운용하든 ‘인위적 기준’이다. 대학의 목적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해당 시점에서 우리는 어떤 목적을 중시하게 되어 있다. 이에 부합하는 인위적 기준을 마련한다면, 이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은 운 없게 떨어진다. 조선시대 최고의 수재라는 율곡 이이도 지금 수능을 보면 낙제일 것이다. 재수하면 서울대 가겠지만


수능이나 예전의 학력고사 모두 근대적 지식이 부족하던 시대의 산물이다. 일자무식이 많았고 고등학교만 나와도 글줄 아는 축에 속하던 시대가 있었다. 여자라고 학교 안 보내던 시기가 그리 멀지 않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바뀌어, 이젠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서 문제다. 단순 암기 위주의 공부는 현 시점에 맞지 않고, 객관식 찍기 시험에서 하루빨리 탈피해야 하는 게 옳다(이 지점에서는 학력고사 때 있던 주관식과 서술형이 왜 수능에서 사라져야 했는지 의문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전형별 평균 학점을 인용해 학종이 타당도 면에서 나쁘지 않다고 주장한다. 학점이라는 근대적 지식 수준의 판별법을 다시 들고 나와 근거로 삼았다는 건, 내가 위에 밝힌 수능의 비판점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학 학점 역시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인위적 기준이다. 현재 대학의 시험이 예전보다도 오히려 후퇴했다는 증언이 많지만 일단 넘어가보자. 어쨌든 점수를 통해 학생의 수준을 판별하는 일이, 고교 수준에서는 비판되고 대학 수준에서는 이해된다? 대학 학점, 전공 만족도 조사, 중도 탈락율은 개인의 수학 능력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브 잡스를 꼭 인용해야 될까? 게다가 겨우 평균 0.2점 차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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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이라는 인위적 기준은, 시점에 따라서 타당성을 가지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전혀 타당하지 않은 양면성을 가진다. 암기 지식 수준을 측정하는 수능 체제가 현 단계에서 타당성 문제가 있더라도, 효력을 다했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장 글쓴이의 인식에서도 이율배반적인 면이 보인다. 대학의 목적이 지식인의 양성이고, 그 지식인에게 일정 수준의 지식을 평가하기 위해 대학 학점이 있다면, 대학이 진학하고자 하는 고교생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게 옳으며 수능이 비판 받을 이유가 상당부분 상쇄된다. 나아가 논술과 본고사가 더 나은 입시 전형이라고 말할 근거가 된다.


같은 논리로, 새로운 입시 시스템인 학종도 양면성이 있다. 그것은 교사의 권위를 강화하여 이에 순종하는 학생상을 양산하는 부작용이 있지만, 점수로 드러나지 않은 학생의 가능성을 인정해줄 수 있는 순기능이 있다. 그렇다면 현재 시점에서 무엇이 더 중요할까, 이것이 논의의 핵심이 된다. 수능이 가진 공정성이 객관적 측정이 편한 대신 목적 부합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더 중시하는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특히 정유라의 경우를 본 후 특기자와 학종 전형이 현재 우리로선 어울리지 않는 시스템이라고 확신한다. 수능의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공정성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선, 교육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도사린 ‘가진 자들의 불공정성’을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래서 글쓴이가 자주 쓰는 표현처럼 수능을 ‘차악’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종이 가진 ‘불공정성’은 바로 우리 사회 전반의 모습이기 때문에, 꽤나 구체적인 대안이 아니고서는 차악조차 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수능의 문제점을 몰라서가 아니니 이를 강조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글쓴이가 말미에 ‘학종은 개선되고 있지만 (…) 꾸준히 개선해나가야 한다’라고 한 부분, 거기서 어떻게 공정성을 실현시키겠는가가 의문의 핵심이다.




4. 교육 주도권은 누구에게 좋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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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중앙일보>


글쓴이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표를 왜 삽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급을 해보자. 학생들과 학부모 답변에서는, 숫자를 크게 강조한 것 때문에 왜곡돼 보이긴 하지만, 위 물음에 대해 ‘그렇다’보다 ‘아니다’라고 답한 사람의 수가 더 많다. 특히 학부모가 싫어한다. 반면 교사의 경우 확연하게 긍정적 답변의 수가 월등하다.


상식적 수준에서 생각해보면, 교사의 긍정적 답변은 당연한 측면이 있다. 글쓴이는 그 측면을 ‘교육의 주도권을 되찾았다’고 표현했는데, 그 주도권에 대한 해석은 좀 다를 것이다. 아주 긍정적인 해석으로, 제대로 교육다운 교육을 할 수 있게 되어 좋다는 교사가 77%에 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이 맞다면 내가 잘못 생각해 온 것이다. 내 해석으론, 학생들이 이제 내 말을 들어먹는 것 같아 좋다는 교사가 77% 정도 된다는 것이다. 이건 독자들이 알아서 해석할 것이다. 그 해석에 따라서, 글쓴이가 말한 구절도 달리 해석될 것이다. ‘교사들은 학종으로 인해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는 경향이 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수의 교사가 긍정적인 이 학종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에게선 왜 온도차가 보이는 것일까? 글쓴이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으니 내 의견 중심으로 해석해보자. 비교적 긍정적인 해석으로, 학교 현장의 변화가 실질적인 영향을 주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부정적인 해석으로, 각자 입장에서 스트레스 요인이 덜어지지 않거나 더 심화시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학생의 입장에서는 ‘학업’이 공부뿐만 아니라 활동까지 영역을 넓혀 부담이 가중될 수 있는데, 성적이 좋을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학부모 입장에선 둘 중 하나다. 첫 째, 신경쓸 일이 그대로거나 더 많아졌다, 둘 째, 돈 나갈 일이 그대로거나 더 많아졌다는 거다.


위 표에 링크된 중앙일보 기사는 부정적인 해석에 좀더 가깝다. 기사 말미에 눈여겨 볼 지점이 있는데, 교육부가 학종 확대를 위해 대학에 450억 가량의 고교 정상화 사업 지원 예산을 편성하고 있지만, 정작 일반고가 이를 수행하기 위한 재정 지원이 없다는 지적이다. 이를 감안하면, 교사들의 긍정적 답변은 현실보다는 희망에 좀더 근거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과 학부모의 부정적 인식은 불안감에서 기인할 것이다.




5. 비슷한 활동이라도 수준이 다르다


학생부종합전형 합격 사례에 대해서는, 추가 자료를 나열하지는 않겠다. 인천시교육청이 발간한 사례집이라 공개 자료이지만, 어쨌든 개인 정보가 들어가 있는 자료이므로 매체에서 다루기엔 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합격사례집 자료는 소위 ‘교내상 몰아주기’ 현상을 반박하는 근거가 되기 힘들다(교내상 몰아주기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특정 활동을 제한된 학생들만 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교내상이 있을 때 몇 명이 응시했는가, 얼마나 자주 열렸는가, 발표나 실험의 수준은 어땠는가가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참가하기만 해도 주는 장려상이 있다면 웃긴 일이지만, 그게 현실이기도 하다.


학생부 기재활동에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느슨한 활동도 꽤 많이 포함되어 있다. 학교별로 엄격한 곳도 있지만, 참가만 하면 되는 봉사활동이나 각종 캠프, 개설만 하면 얻을 수 있는 동아리 부장 타이틀, 점수 올랐으면 다 주는 학력향상상, 수행평가로 요구하는 멘토-멘티 활동, 전교생 대상인 진로학습체험 등등이 그렇다. 이런 것도 부실하다면 애초에 학종 전형을 포기하는 게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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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실질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활동인지를 판가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학력향상상을 받은 학생은, 비록 지금 성적이 아쉽더라도 향후를 기대할 수 있는 학생인 것일까? 그래서 화학 7등급에서 4등급으로 오른 학생을 뽑아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2등급을 꾸준히 유지한 학생을 뽑는 게 옳을까? 발명품경진대회에서 은상을 받았는데 1주일 걸려 만들었다면 충분히 성실한 것일까? 반대로 한 달을 끙끙댔다면 머리가 둔한 게 아닐까? 실험에서도 교과 내용을 확인하는 수준이 있고, 이를 응용해 새롭게 시도한 수준이 있어 평가가 같을 수는 없다.


이를 보완하는 장치가 서류상으로는 학생부의 행동발달사항 및 특기사항의 기재, 그리고 자기소개서이며 절차상으로는 면접이 된다. 소수 상위권 학생들이 독점하는 활동이란, 위 활동들의 수행 수준에서 차이가 나며, 특기사항 기재와 자기소개서에 그 내용이 적혀 있다. 같은 자료집에 최상위권 대학들 합격사례도 있으니, 찾아보면 역시 그 합격자들도 중하위 대학 합격자와 비슷한 활동을 수행했음을 볼 수 있을 테지만, 얼마나 어려운 수준이었는지 또는 오랜 성실성을 필요로 했는지는 알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이 자료집에서 합격사례를 비교해 보노라면, 사실 차이점이 먼저 보인다. 일단 내신등급 차이가 확연한 대학들이 있다. 경인교대의 경우 위 자료집에서 최하 내신등급은 1.31이다. 글쓴이가 사례로 들었던 경희대의 경우, 내신 3.0대 합격자가 있지만 체육학과 학생이며(사실 체육학과가 3.0대라는 건 무시무시한 거다), 이를 제외하면 2.5가 최하이며 1점대도 꽤 많이 눈에 띈다. 최상위권 대학들은 말하면 입 아프지만, 고려대의 경우 특별전형을 제외하면 1.45가 최하였다. 인천교육청 자료이니 너무 일반화하지 말라고 하고는 싶지만…


또한 상위권 대학 합격자들의 정보에는 ‘누구나 할 수는 없는’ 교내상이 들어가 있다. 교과우수상, 교과경시대회 수상 내역이 그렇다. 이 상들은 수상자를 남발할 수가 없기 때문에, 활동 평가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며 금상인지 은상인지도 변별력이 있다. 잘 모르는 지방 고교라도, 어쨌든 그 학교서 금상 받을 실력이라면 가능성 있다고 봐주는 면이 있다.


위 사실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교내 활동과 내신 성적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성적 좋은 학생이 더 수준 높은 팀에서 활동할 가능성이 높고, 그들 사이에서도 다시 교과상이나 경시대회에서의 입상으로 변별력이 가려진다. 다른 학생들도 다 동아리 활동을 하고 발표나 실험을 수행하지만, 그걸 모두 동일한 수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교내 활동에는 성적으로 인한 일종의 장벽이 생기게 되고 이를 불평등 요소라고 지적한 것이다.




6. 과거의 고통을 되살리지 말자


마지막으로 글쓴이의 언급을 인용해보자.


"억지로라도 이것저것 할 수 있으니 좋다"는 교사의 증언은 학종의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수능으로 인해 과거의 교실이 얼마나 황폐해졌던 것인지 상상케 한다.


(…) 학생들이 자기주도적으로 임했으면 베스트겠으나, 입시를 위한 형식적 활동이었다 하더라도 수능 문제 찍기보다 이런 활동이 유의미하고 보다 교육적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난 반론의 말미에 학교를 군대에 비유한 적이 있다. 위 언급은 다시 그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물어보자. 군대에서 경험할 수 있는 비자율적이고 형식적인 활동은, 20대 초반에 매일 술 처먹고 놀던 그 비생산적 활동보다는 그래도 유의미한 것일까.


글쓴이는 ‘논의가 주관적 경험과 인상비평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머물러선 안된다’고 하지만, 주관적 경험이 논의의 시작점임은 부인할 수 없다. 가치 판단의 문제는 현재와 얽혀있는 것이고, 나의 삶과 무관하게 형성될 수 없다. 경험의 토로는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한다. 입시라는 터널을 먼저 빠져나온 사람이 대개 생산적인 의견을 갖지 못하는 건, 다시는 뒤돌아보고 싶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마치 군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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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입시 공부를 통해 나에게 유용하게 남은 건 그 지식들 뿐이었다. 열심히 노력하는 태도? 공부의 희열? 그 따위는 대학 합격 후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훗날 다시금 떠오른 건 남아있는 지식이었다. 그때 배운 게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되새겨지는 순간, 혹은 그때 이렇게 배웠는데 왜 안 그렇지 하고 의문을 품는 순간에, 원하지 않았지만 남아있던 지식이 뜻밖의 유용성을 가짐을 느꼈다. 그러면서, 애초에 왜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하는 원망의 마음이 생겨났다. 학생이 무얼 궁금해하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고민한 선생님이 기억나지만, 그러노라면 다 널 위한 것이니 까라면 까라는 고압적 태도를 유지한 선생님도 기억나게 된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 것은, ‘공부에 대한 압박’으로 기억되던 그 입시 경험에서, 실은 공부가 아닌 ‘압박’이 고통의 핵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선생님들은 그 압박을 권위로서 행사했다.


이제 주관적 경험을 확장시켜보자. 권위에 대한 복종을 유독 부작용으로 우려하는 이유는, 이것이 우리 교육계와 사회 전반의 과거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상까지도 아니다. 지난 정권의 대통령이 보인 모습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권위와 복종이 가진 순기능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단결된 공동체를 만들며 전체의 성과를 개인의 행복으로 치환했다. 그리고 덕분에 희생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현실이라 믿는다. 그러니 학종이 권위의식의 부활과 확장이라는 부작용에 대해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한다면, 불과 몇 개월 전까지도 그 폐해를 겪었던 마당에, 나는 그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이를 찬성할 수가 없으며, 그래도 좀더 교육적일 거라는 글쓴이의 소망에도 동의할 수 없다. 부족함을 개선하기보다 포장하는 데 훨씬 능한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입시 전형을 논의하든, 결국 그 궁극의 해답은 대학 평준화 내지는 최저임금의 상승이라고 생각한다. 선호 대학이 없거나, 대학을 안 가도 충분히 먹고 살만 하게 되어야 이 미친 입시 열풍이 사그라들 여지가 생긴다. 그래서 무슨 시도를 하든 결국 고통을 더할 뿐이니, 입시 체제를 함부로 흔들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은 최대한 균형을 맞추는 일이고, 그런 면에서 비대해진 학종을 축소하고 특기자를 없애자는 것이 내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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