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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21. 화요일

타데우스







2010년 한적하고 포근한 9월의 어느 날 밤... 취리히에서 뮌헨으로 가는 기차 안에는 늘 그렇듯 수많은 여행객과 피곤에 지쳐 보이는 사람들이 저마다 창밖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기차가 독일의 국경에 다다르자 국경 경찰들이 올라탔다. 항상 있는 여권 검사와 세관검사... 스위스가 유럽연합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서 이런 검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승객의 입장에선 달갑지는 않았다. 순종적인 아시아 관광객들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기분 좋게 검사를 하던 경찰은 그 뒤쪽에 앉아 있는 중년의 노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애써 눈길을 피하며 신문을 보는 노인의 행동에서 경찰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경찰: 안녕하십니까?


노인: 네 안녕하세요.


경: 신고하실 거 없으시구요?


노: 네, 없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하루 이틀 해오던 일이 아녔다. 아무래도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이 든 경찰은 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이어지는 질문에 노인은 갈수록 긴장했다.



경: 일단 신분증 제시해 주시구요. 성함이?


노: 코넬리우스 구를리트입니다.


경: 오스트리아 분이시군요. 사시는 곳은요?


노: 뮌헨이요.


경: 아, 주소 좀 알려주실래요?


노: 그런 게 왜 필요하죠?


경: 아니, 그냥 절차입니다.


노: 뮌헨 예술의 거리 164번지에 삽니다.



뒤에 서있던 신참이 무전으로 정보를 확인했다. 경찰은 무언가 잡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신참이 귓속말로 그 집의 거주자 등록인이랑 이름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경: 선생님 자리에서 일어나시죠. 그리고 짐 검사 좀 하겠습니다.


노: 어허 나 뭐 없다니까 그러네.



노인의 얼굴에 불안감이 역력했다. 그의 주머니에서는 500유로(75만 원)짜리 지폐 18장이 나왔다. 무려 9000유로. 아무래도 스위스 계좌에서 신고 없이 돈을 찾아오는 늙은 노인네일 가능성이 컸다. 의심이 가는 것은 많지만 관세청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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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관 검사에 걸리면 아주 주옥 되는거야...



수 개월 후 구를리트에 대한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다. 이 노인 이상한 구석이 하나둘이 아녔다. 주거지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로 되어있지만 독일에 살았고, 정작 뮌헨에 있는 아파트는 거주지 등록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니 당연히 연금을 받아야 하지만 어디에도 등록이 되어 있지 않았다. 하다못해 건강보험 기록조차 없었다.


베테랑 세관원인 토비아스는 의문을 품고 이 노인의 집을 찾아갔다. 뮌헨의 슈바빙지역에 있는 허름한 아파트. 위에서 시키는 대로 수색 영장을 들고 나오긴 했지만 이 노인네는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유령... 그래 유령이 있다면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모든 기록이 없는 남자 본인이 누릴 수 있는 그 어떠한 문명 혜택도 거부하고 사는 그런 사람. 핸드폰도, 하다못해 집전화도 없다. 정부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한평생을 산 노인.

 

도대체 왜?

 

그는 동료 한명과 구를리트라는 이 의문의 노인이 사는 집 벨을 눌렀다. 한참을 기다리자 늙은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토비아스: 구를리트씨? 세관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코넬리우스 구를리트: 나 같은 늙은이에게 무슨 일이죠. 일 없으니 돌아가 보쇼.

 

토비아스: 이러시면 저희가 경찰을 대동하고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노인은 체념한 듯 그들을 안으로 들였다.


구를리트의 집은 낡았다. 게다가 집 안에서는 이상한 냄새도 났다. 집 현관을 지나며 세관원 토비아스는 아연실색했다. 정리되지 않은 집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것들로 꽉 차 있었지만 그보다 집안을 더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수많은 그림이었다. 이 많은 그림이 어떻게 이 좁은 집안에 다 들어차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집안은 그림으로 가득했다.

 

세관원은 도대체 이 많은 그림이 다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세관에 연락했다. 뒤에 서 있는 노인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이 사건은 그 후 엄청난 스캔들을 몰고 오는 작은 서막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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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발견된 구를리트의 아파트

 

 

히틀러와 그의 그림


젊은 시절의 히틀러.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을 그릴 때 사람들은 그를 예술가로 대해 주었고 그러한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남들에게 인정을 받는 그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하지만 고전적인 그림들은 이미 구시대의 산물로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에 나오는 그림들은 도저히 뭐가 좋은 그림인지 나쁜 그림인지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히틀러는 ‘예술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20세기의 미술이라는 그림들은 고전적 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자기 변명에 불과한 작품이라고 느꼈다.

 

이런 아돌프 히틀러의 기술들을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미 세 번이나 오스트리아 비엔나 미대에서는 그를 거절했다. 자존심의 문제가 아녔다. 자존감마저 낮아져 그림을 계속할 의지조차 없었다. 그저 연습용으로 그린 풍경화들을 관광객에게 팔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고 그림조차 제대로 그릴 수 없자 히틀러는 군대에 지원했다.



몇십 년 후 그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다. 독일의 최고 권력이 되어 그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국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도 얻게 되었다.


이제 세상은 그의 편이었다. 무엇을 하던 그의 뜻을 거스르는 자가 없었고 설령 있다고 해도 간단히 제거해 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는 예전의 힘든 삶을 추억할 때마다 현재의 미술계에 대한 참지 못할 분노를 느끼곤 했다.

 

유대인이 시장을 장악하여 그들의 입맛에 맞는 그림들을 터무니 없는 가격에 거래하는 그 못된 방식들... 과거 유럽의 영광 따위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 표현주의, 다다이즘, 입체파, 야수파 등의 이름을 달고 나오는 작가들의 작품들... 도저히 예술의 고귀함을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작품들에서 분노가 생겼다. 비단 이 경향은 미술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음악, 문학, 무용 등 전 예술 장르에서 일어나는 일이니만큼 확실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압수하고 없애버리면 된다. 반발하는 놈들은 다시는 못 일어나도록 밟아주면 그만이었다.

 

그의 뜻에 따라 당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타락예술이라는 낙인 속에서 탄압을 받았다. 그림은 압수당하고, 불태워졌다. 일부 작가들은 죽기도 했으며, 망명을 떠나는 작가들도 많아졌다.

 

특히 유대인 작가들이나 미술 상인들에 대한 탄압은 그 정도가 훨씬 심했다. 하지만 나치가 하는 일은 적어도 이 독일 땅에서는 그 누구도 반기를 들 수 없었다.

 

나치는 작가들의 그림을 압수해서 퇴폐미술 전시회까지 개최했다. 그림 옆에 장애인의 사진을 같이 걸어두고 마치 예술가들이 정신적 장애가 있는, 고로 나치 제국주의의 입장에서는 ‘정화’라는 이름으로 ‘제거’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독일인들에게 각인시켰다. 예술가들은 참을 수 없는 참담함과 패배감을 느꼈다. 예술가들에게 국민들은 더 이상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괴물들로 보였고 이 곳에서 예술 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것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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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경매에 나왔던 히틀러의 수채화



그렇게 약탈된 수많은 그림들은 공개적으로 소각되었다. 유대인 미술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수많은 작품들도 압수되었다. 수많은 작품들이 화염 속으로 던져졌으며, 헐값에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그들의 강압과 힘의 논리앞에 그 어떠한 반대도 용납되지 않았다. 화가들과 그림의 소유주들은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주변에서는 그들의 공산주의적이며 정신병이 있는 듯한 미술 취향에 손가락질을 해 댔다.


당시 나치에 의해 행해지던, 많은 그림들이 모아지거나 소각되고 해외로 판매되는 행위를 함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필요했다. 그림을 볼 줄 알고 그림을 분류할 줄 알고 그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 전문가들...

 

그들은 암암리에 그림을 강탈하고 해외로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생각보다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었으나 나치식으로 불태워 없애버리느니 싼 값이라도 팔아버리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그러한 전문가 중에 힐데브란트 구를리트가 있었다. 미술사가이자 미술상인인 그가 주로 맡은 일은 나치로부터 압수된 그림을 외국에 팔아버리는 것. 2차 대전 중에는 프랑스에서 직접 그림들을 압수하는 일에도 가담했다.

 

하지만 전쟁 후 그에 대한 판결은 무죄로 나왔고 그렇게 계속해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다.


그의 무죄 판결에 있어 그가 유명한 미술가 집안 출신이라는 점이나 꼼꼼한 성격으로 증거를 잘 숨겨 놓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도 결국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게 된다.

 


그의 아들로 한평생 유령처럼 살아온 코넬리우스 구를리트.



세관원들은 일단 막막했다. 이 그림들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고 나름 오래되어 보이는데 막 만졌다가 손상이라도 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가져온 것은 달랑 수색영장 하나 뿐인데 이대로 돌아가려니 다음에 오기 전에 노인이 다 숨겨 버리면 다시 찾아낼 방법도 없다. 집안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수많은 스케치들과 판화 그림들이 대충 쌓여 있었다.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을 보호하는 그 어떠한 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세관원은 전화를 걸어 압수팀을 요청했다. 압수수색 영장이 아닌 일반 수색영장이라서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으나 구를리트는 유령이다. 이 유령은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알 수 없다. 오늘 당장 끝내야 한다는 마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다. 노인과 세관원 사이의 어색한 침묵이 흐를수록 그 시간은 더욱 더 길게만 느껴졌다. 세관원은 속으로 커피라도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저 노인에게 그런 얘기를 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문득 아랫집에 사는 타데우스라는 한국에서 온 친구가 독일은 모든 것이 너무 느리다며 항상 불만을 토로하던 것이 생각나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한국은 모든 것이 엄청 빠르다던데 다음엔 한국으로 휴가를 가볼까?’라는 생각을 하는데 벨이 울렸다. 세관원에 신청한 사람들이 대거 도착했다. 손에 장갑을 하나씩 나눠끼며 들어오는 그들의 눈에도 놀란 모습이 역력했다.

 

압류의 과정은 신속했다. 먼저 리스트를 작성한 후 사진을 찍고 번호를 매기자마자 곧장 차에 실었다. 모든 작품은 일단 보온 보습이 되는 세관 창고로 이동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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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브란트 구를리트가 강탈한 미술품 목록 1페이지

 

 

베를린에서 뮌헨으로 가는 고속도로는 오늘도 한가하다.

 

마이케 호프만 교수는 주말에 왔던 전화를 곰곰히 곱씹어 봤다. 세관에서 대뜸 전화를 해서 나치시대에 퇴폐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것을 물어왔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자세히 알려주지도 않는다. 어디에선가 당시의 약탈품이 다시 나온 것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설렘과 흥분을 느끼며 핸들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 몇 점이나 있길래 그들이 자세히 얘기를 해주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대학에 와서 근 10년 간 퇴폐미술관련 연구를 했던 것에 대해서 이번 만큼 뿌듯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뮌헨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그동안의 연구가 쭉 떠올랐다. 20세기 초 이미 히틀러가 집권하기 이전부터 유대인에 대한 배척만큼 독일 안에서 강하게 일어났던 <다양성의 통일성>이라는 문화 정책적 기조 아래 많은 예술가들이 당시의 프랑스나 영국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던 운명적인 그 시기...

 

그에 맞서 싸우던 독일의 예술가들이 겪어야 했던 독일 안팎의 다른 평가들...

 

그리고 결국 히틀러의 힘에 의해 1937년 단지 몇 달만에 현대미술이라고 이름이 붙은 2만 천여 점 이상의 압수품이 나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미 그것들 중 상당수가 남아 있지 않겠지만 한두 작품만 나와도 이번 여행길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기왕이면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이면 더할 나위 없고 말이다.

 

 

세관 사무실

 


마이케 호프만(호): 아니 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거죠?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부측 입장을 대변하려고 나온 사람은 그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공무원: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게 된다면 그리고 공개적으로 다루어 질 경우 사방팔방에서 이 그림을 차지하려고 달려들 것은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입니다. 이번 만큼은 저희 뜻대로 진행해 주시죠.


호: 아니 제 전공은 그림을 추적해서 그 출처를 찾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공개적으로 할수록 정보의 양도 더 많아지고 영국이나 유대인 학자들의 도움도 필요한 부분입니다.


공: 그렇다고 할지라도 저희가 지원해 드릴 테니 그 모든 것을 비밀리에 진행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태도였지만 저렇게까지 하니 마이케도 어쩔 수 없었다.



호: 알겠어요. 그럼 시키는 대로 해야죠 뭐.



그는 그녀를 데리고 앞장서 창고로 갔다. 어떤 그림이 나올까 하는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창고의 문이 열렸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옆에서 정부공무원이 별일 아니라는 목소리로 그녀에게 설명했다.



공: 저희 예상으로는 이 작품들 모두가 나치 시대의 퇴폐미술로 점 찍혀 압수된 그림들로 보입니다. 그 그림들을 힐데브란트 구를리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코넬리우스 구를리트가 지금껏 보관해 왔구요. 자세한 출처는 아직 그가 입을 열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현재 이 창고에는 대략 1500점의 회화와 판화 스케치 등이 압수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전혀 보존에 신경을 쓰지 않아 상태가 좋지 못한 작품들도 더러 있습니다. 게다가 액자에 끼워진 작품은 대략 200점 정도밖에 되지 않고 나머지는 그냥 막 보관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마이케는 속에서 올라오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언뜻 보이는 그림들도 오토딕스 피카소 등의 화풍이 확실하고 다만 지금껏 본적이 없는 그림인 만큼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림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호: 그가 혹시 가짜 그림을 만들어 팔던 사람은 아닐까요?

 

 

그의 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공: 아마 그렇진 않을 겁니다. 그의 집에서 어떠한 미술 도구도 나오지 않았으며 전혀 그림을 그릴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얼굴에 써 있나? 마이케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천천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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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압수된 그림들


1. 오토딕스의 자화상

2. 칼 슈피츠백의 음악 연주하는 커플

3. 마르크 샤갈 알레고리 장 면

4. 안토니오 카날레또 풍경화

5. 프란츠 마르크의 말


이 외에 키르히너, 배크만, 마티스, 쿠베르트, 피카소, 뒤러 등 시대와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작품이 나왔다.


 


몇 개월이 또 지났다.

 

마이케 호프만 교수는 그동안 힐데브란트 구를리트의 미술품 목록을 살피면서 그림들을 나누고 이력을 추적하느라 하루하루 정신없이 보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조사를 마친 그녀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다. 그림 전체가 당시의 나치정권에 의해 수많은 박물관으로부터 단순히 약탈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로부터 이어져 온 개인 소유품도 있고, 박물관으로부터 나온 것도 있으며 유대인으로부터 나온 것도 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고 샀는지 아니면 약탈한 것인지 하나하나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정작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구를리트는 입을 다문 상태라 이력을 추적하는 일도 종종 벽에 가로 막힐 때가 많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리스트를 훑었다.

 

1. 나치가 퇴폐예술이라고 한 작품들 380점

2. 주로 유태인 소유주들로부터 압수된 작품들 590점

3. (나치 시절 이전 구입 등) 확실히 합법적 입수로 보이는 310점


정작 이렇게 써 놓긴 했지만 확실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다. 아무래도 구를리트와 직접 대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잔뜩 경계한 구를리트와 그 앞에 앉은 마이케 박사는 공격과 방어 진지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게임을 벌이고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구를리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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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우스 구를리트

 

 

코넬리우스 구를리트: 그림들은 잘 있소?


마이케 호프만: 물론 선생님 댁에 있을 때보다는 안전하게 잘 있습니다.



구를리트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묻어났다.

 


구: 그래, 왜 보자고 한 거요?


호: 아무래도 조사를 하는 데에 있어서 막히는 부분이 많아서 도움을 좀 받아 볼까 합니다. 협조하여 주실 건가요?


구: 내 이미 충분한 협조를 한 것으로 아는데요. 당신들이 그동안 내 집에서 내 허락도 없이 가져간 내 자료들 속에 모든 내용이 다 들어있지 않소.


호: 그보다 선생님의 아버지께서 구입하신 혹은 약탈하신 작품들의 정확한 출처가 필요합니다.


구: 내 아버지가 약탈했다고? 아니오, 당신은 처음부터 틀렸소. 그냥 놔뒀으면 전부 태워지거나 국외로 팔려나갔을 그림들을 그나마 아버지가 구한 것이오.



마이케는 말문이 막혔다.



호: 하지만 그건 박물관이나 유대인들로부터 압수한 작품들이라고요.


구: 그렇게 안 했으면 그 그림들은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았을거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호: 좋습니다.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이젠 국가에 돌려주거나 기부하시면 되겠군요. 여기 정부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되길 원하던데요.


구: 내가 이 미술품보다 더 사랑한 것은 없소. 압수 당한 예술품들은 아버지가 미술관과 딜러들로부터 사들인 합법적 재산이며 작품들은 내 소유로 있어야만 하오. 아버지의 보물을 지키는 것이 내 평생의 임무이며 자발적으로는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내 비록 아직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것 아니오.



이미 구를리트가 미술품을 팔아서 그 돈으로 호의호식 해온 것을 알고 있는 마이케 호프만 교수는 그의 미술품 사랑에 대한 변론이 역겹게 느껴졌다.



호: 혹시 부인이나 자식이 있으십니까?


구: 없소. 내 단 한번도 그런 것을 가져본 적이 없소. 아버지가 물려주신 그 그림들이 내 사랑하는 아내이고 내 자식들이오. 그러니 그냥 돌려주시오. 내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소. 그냥 그 그림들과 같이 살다가 죽을 것이오. 그 이후엔 당신들 맘대로 하시오.


호: 하지만 지금도 그 그림들에 대한 분실 신고가 들어와 있습니다. 국제법상 저희는 돌려줘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구요.


구: 당신들이 그림을 가져간 지 얼마나 오래 지났는데. 세상은 아직 조용하오. 당신들 역시 이 모든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싫은 것 아니오. 그냥 그렇게 지금까지처럼 조용히 지나갑시다.

 

호: 그건 좀 힘들겠네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 그림을 자발적으로 돌려주실 생각은 없는 것인가요?

 

구: 단 한 점도 돌려줄 생각은 없소.



더 큰 벽에 부딪힌 느낌이다. 이 노인과의 대화가 시작된 이후 한 발짝도 진척이 없다. 그렇게 대화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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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자 마이케 호프만 교수

 

 

마이케 호프만 교수는 꾸준히 그림의 출처를 찾아 한 점씩 원래의 주인에게 찾아주는 일에 착수했다. 그림 분석과 주인을 찾아주려는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유대인 학자도 2명 포함시켰다. 다만 모든 일은 정부의 뜻에 따라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처음 구를리트가 기차에서 걸린 때로부터 2년이 흘렀다.

 

이른 아침 다급한 목소리로 총리 비서실에서 온 전화는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서둘러 집을 나서 연구소로 향하자 그 곳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공무원: 아, 교수님 이제 나오시는 군요.


마이케 호프만: 네, 좋은 아침이네요. 무슨 일이시죠?



한 남자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포커스지(신문)를 흔들어 보여줬다.


그곳에는 대문짝만하게 <나치 약탈 문화제 10억 유로 어치 발견(약 1조 5000억 원)>이라고 써 있었다. 마이케 교수는 11월임에도 불구하고 등에 땀이 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공무원들은 전화와 언론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유대인 단체에서는 태스크포스에 자신들이 꼭 껴야 한다며 항의해 왔고, 여론은 지금까지 모든 일을 비밀스럽게 진행해 온 독일 정부가 현행법을 위반했다고 질타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그림의 원 주인이지만 2차 대전 당시 기록을 잃어버려 억울하게 생각했는데 이제라도 돌려달라는 원성도 들어야 했다.

 

기자회견을 하고 언론과의 인터뷰로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확인할 수 없는 문서들이 각종 박물관으로부터 날아들었다.


마이케 교수도 더 이상 제대로 일을 천천히 진행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확실히 연혁과 출처가 확인된 작품은 사백여 점 밖에 되지 않았고 갈 길은 더 멀다. 지금껏 이 일을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여기서 멈추긴 아쉽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미 결정 난 일이라는 듯 뜻밖의 발표를 한다.



“지금까지 200여 점의 작품을 돌려주었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대략 출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거나 원래부터 구를리트씨의 부친 소유였던 그림 천여 점은 구를리트씨에게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돌려줄 것입니다. 그 후에 일어나는 그림에 대한 각종 소송이나 소유권 주장은 법원에서 판단할 것입니다.”

 


방송을 보며 마이케교수는 더 이상 뭐가 옳은 일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림을 몰수했던 일, 비밀리에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을 했던 것, 지금에 와서 나머지 그림을 다시 구를리트에게 돌려주는 것 모두 언론과 여론의 비판 거리가 되었다.


늦은 저녁 잔에 남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정의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지금까지 했던 일이 결국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상황에 이르자 그녀는 힘이 풀렸지만 지금까지 온 길보다 나아가야 할 길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언젠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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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포커스>

사진의 인물은 코넬리우스의 아버지 힐데브란트 구를리트

 

 


뱀발


위 사건은 2013년 11월 <포커스>가 발표한 후 미술계에 화제를 몰고 온 나치의 약탈문화재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구를리트와 마이케 호프만 교수는(현 베를린 자유대 교수)실존 인물임.

 

이야기가 중간에 뚝 끊긴 것 같지만... 사건이 현재 진행형이므로 언젠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계속 이어서 쓰겠음.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처벌과 그들의 재산 귀속에 관한 법들이 제대로 시행되었다면 현재 독일에서 일어나는 위와 같은 일들이 한국에서도 일어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음.







타데우스

편집 : 보리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