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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다보면 기억에 남는 표정들이 있습니다.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소니 퀸이 지었던 ‘웃다가 우는’ 그 기막힌 연기는 영화의 줄거리를 거의 까먹은 오늘날에도 더 선명해집니다.

<빠삐용>에서 빠삐용이 벼랑에서 뛰어내려 코코넛 부대로 헤엄쳐 가는 것을 바라보는 드가, 즉 더스틴 호프만의 얼굴도 가히 예술입니다. 안쓰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간절하기도 하고,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달관과 “나는 저렇게도 할 수 없구나”는 무력감이 교묘하게 겹쳐진 얼굴이었죠.

영화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에서 살인마의 존재를 깨달은 송강호의 얼굴이 굳어지는 장면도 역시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가해지는 충격과 공포, 그와 더불어 “아차, 놓쳤구나.” 하는 아쉬움, 심지어 그 새끼 그거... 하는 승부욕까지도 읽히는 얼굴입니다.

언뜻 떠오르는 얼굴만 적어서 그렇지 아마 얼굴 얘기로만 오늘 밤을 새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곱게 접어 두고서 최고의 표정으로 꼽는 장면이 있어 소개를 드리려고 합니다. 영화 <스카우트>의 마지막 장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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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운전사>가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조금의 아쉬움은 있지만 <화려한 휴가>보다 훨씬 좋았고 <26년>보다는 더 리얼했고 <박하사탕>은 광주를 직접 건드리지 못했고 <꽃잎>은 기억도 안 나니 제가 본 광주 관련 영화에서는 제일 낫다 싶습니다. 이 영화 <스카우트>를 제외하면 말이죠.

개인적으로 저주받은(?) 걸작을 세 개 꼽습니다.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제가 ‘정독’하게끔 만들었던 영화들입니다. <국경의 남쪽>, <내 깡패 같은 애인> 그리고 이 <스카우트>입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국민 스포츠는 고교야구였습니다. 선린상고의 박노준, 김건우는 요즘으로 치면 오빠 부대의 원조격인 여학생들을 무더기로 몰고 다녔지요. 박노준이 슬라이딩 하다가 복사뼈 돌아가는 장면은 아마 수백 번 리바이벌 되고 뉴스를 장식하며 대한민국 전체의 화제가 됐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 울트라 슈퍼 캡숑 짱 고교생들은 요즘으로 치면 프로급의 대우를 받으며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우수 선수를 둘러싼 스카우트전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실제로 선수를 납치하는 일도 있었고 부모와 선수간의 의사가 달라 부모자식간에 죽이니 살리니 하는 일도 잦았으며 스카우트 하나에 감독 코치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도 비일비재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 광주일고에 걸출한, 아니 걸출하다는 형용사조차 모자란 괴물 투수 3학년이 태양같이 떠오릅니다. 그가 선동열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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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연세대 스카우트 호창(임창정)이 광주로 옵니다. 선동열은 이미 고려대랑 얘기가 끝난 상황. 하지만 연세대 스카우트 호창 역시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처지입니다.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죠. 뭐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아부하고 선동열을 빼돌린 병원에 잠입하고 등등...

그런데 이토록 흔해빠진 스카우트를 둘러싼 해프닝 영화로 흘러가던 영화는 갑자기 한 여자 앞에서 하회마을 수준의 물돌이를 하게 됩니다. 그녀는 스카우트 호창의 옛 애인 세연(엄지원)이었죠.

둘은 다정한 연인이었으나 어떤 계기로 인해 별안간 헤어지게 됩니다. 그 계기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포인트죠. 하지만 호창은 그걸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저 갑자기 떠나갔던 옛 애인이 반갑고 아쉽고 또 어찌 다시 시작할 수 없을까 궁리할 뿐이죠. 그 이별의 이유는 호창의 개인적 단점이 아니라 7말 8초의 대한민국의 역사적 아픔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 계기는 영화의 급속한 후반부, 광주항쟁의 발단 과정과 급속하게, 그리고 절묘하게 맞물립니다.

스포를 가급적 피해서 말씀드리면 임창정은 선동열을 거의 낚을 상황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광주항쟁과 옛 애인 세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영화를 보시는 게 낫겠습니다. 하나 팁을 드리면 호창이 선동열조차 팽개치고 옛 애인에게 달려갔던 이유는 옛 기억을 재생해 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억이 반복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옛 애인을 광주의 피바람으로부터 구해 내지만 둘은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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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르고 세연은 중년의 여인이 됩니다. 분장 덕분이겠지만 엄지원의 중년 모습은 참 품위있고 깊이 있습니다. 그녀는 거실에서 WBC인지 올림픽인지 모를 야구 경기를 보며 열광하는 아들들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바로 그때 선동열 ‘감독’이 등장합니다. 왕년의 그 멍게 대식가 투수. 옛 애인 호창이 그렇게 목놓아 외치던 선동열을 보면서 그녀는 일순 표정이 굳습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서서히 얼굴로 줌인하지요. 그때 평온한 연못에 모래 알갱이 떨어진 듯, 아주 느리지만 분명한 파문으로 얼굴이 풀리고 입가가 올라갑니다.

뭐 눈물 같은 싼티 연출은 없었습니다. 그저 그 해에 벌어졌던 끔찍한 일들과 뜻밖의 옛 애인과의 해후, 그리고 또 한 번 창졸간에 맞은 헤어짐까지, 그리고 그 후 만나지 못했던 세월의 길이까지 그 미소 하나로 표현을 합니다.

저는 이때 엄지원에게 박수를 쳤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저런 표정을 만드는 것은 배우들로서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요. <시네마 천국>의 때늦은 러브신에서 느꼈던 안타까움, <더 웨이 위워>에서 오랜만에 마주치는 로버트 레드포드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멋쩍은 그러나 반가운, 그러나 씁슬한 몸짓들, 영화 <쉐인>에서 컴 백을 부르짖는 소년을 뒤로 하고 떠나는 쉐인의 얼굴(영화에서 나오지는 않습니다)의 느낌을 그 표정 하나에 다 녹여 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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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 위로 흐르는 나레이션,

“어렵다고 생각하는 선동열을 포기한 대신 나를 구했다. 결국 라이벌 대학에 진학한 괴물투수는 한국을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그 사람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가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인연은 닿지 않았다. 하긴 선동열이 없었더라면 그 봄날의 짧은 재회도 없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봄날’은 광주였습니다. <택시운전사>를 보고 오셨다면 이 영화 <스카우트> 한 번 봐 보시기 바랍니다. 전혀 다른 느낌의, 하지만 잔잔히 마음을 울리는 스토리와 더불어 엄지원 일생일대의(제 주관적인 평가입니다) 표정 연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산하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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