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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국 3일 남겨두고, 다른 글 쓰고 있는 상황.

 

※ 죽지않는돌고래 편집장이 당번병과 박찬주 장군에 대해 말하라 하는데, 그냥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쓰겠다. 제 정신이 아니다. 찰떡 같이 알아봐주길 바란다.

 


“7” 이야기

 

개인적으로 육사 기수들 중에서 ‘7기’로 끊어지는 기수들에 대해서 관심이 상당히 많다. 대한민국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이들 7기는 참 특이한 인연으로 군(軍)과 국가에 영향을 끼쳤다. 잠깐 ‘썰’을 풀어볼까?

 

(그 전에 잠깐, 예전에 딴지에 썼던 육군사관학교 기수별 역사에 관한 글 중 주요부분을 발췌해봤다. 이걸 읽으면 이해가 빠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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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기수별의 특징과 쿠데타의 상관관계를 살펴 보자,

 

육군사관학교 1~7기생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육사생도들이 아니다. 이들은 해방 이전에 일본군이나 독립군등 창군 이전의 군사적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이들의 교육기간만 봐도 알 수 있는데, 1기의 경우 24일, 2기는 80일, 3기는 3개월, 4기는 4개월이었다. 이후 5기의 경우도 교육기간은 6개월로써 그리 길다고 할 수 없다. 5기의 대표적인 주자가 바로 박정희였다.

 

당시 5기는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에 의해 다시 서북파와 동북파로 나뉘어졌고, 이 두개의 계파에 들지 못한 이들이 다시 중남부파로 갈리어져 세를 모으게 된다. 박정희는 이 중남부파에 속해 있었다.

 

5.16쿠데타의 경우 육사 5기들이 얼굴마담으로 위에 올라가 있고, 그 실제적인 계획과 실행은 육사 8기생들이 주도했다. 여기서 육사 8기생을 살펴보면, 이들은 이전까지의 기수들과 달리 유달리 프라이드가 강했다. 그 이유는 대략 네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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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8기생의 대표주자 - 김종필과 김형욱

 

첫째,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배출된 장교란 점이다. 육사1~7기까지는 조선경비사관학교의 이름으로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이 조선경비사관학교란 이름을 육군사관학교로 개칭한 1948년 9월5일 이후 입교한 최초의 육군사관학교 졸업자이며, 그 이전의 기수들과 달리 일본군이나 독립군에서의 군사경험을 겪은 세대가 아니란 것이다. 이미 과거의 군 경험을 가진 세대들은 1~7기로 다 소화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간출신 병력들이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배출된 장교라는 자부심과

 

셋째,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인재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육사 8기생도들의 입학시험 당시 경쟁률은 10대1이었다.

 

넷째, 8기의 경우 이전 기수보다는 비교적 긴 6개월이라는 교육기간을 같이 보냈고, 6.25전쟁 당시 소대장, 중대장 등으로 야전에서 실전경험을 쌓았기에 기수간의 단합은 물론 프라이드도 남달랐다.

 

문제는 이처럼 프라이드를 가진 육사 8기들이 진급정체에 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6.25 전쟁 와중 30대 장군들이 수두룩 지천으로 깔리게 된 상황이었고, 더구나 미군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의 장성진급을 선호하였기에 육사 8기생들 중 아직까지 중령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더 큰 문제는 30대의 장군들이 언제 군복을 벗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57년, 70만이던 군대를 60만으로 줄이고 민주당 장면총리는 장기적으로 군병력을 40만 수준까지 감축하겠다는 발언까지 한다.(이후 50만수준 유지로 일보후퇴하긴 했어도 10만명의 병력을 줄인다는 것은 직업군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8기생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자신들보다 불과 4개월 먼저 입대한 육사 7기생들은 벌써 소장 진급자를 배출해 별들의 고향에서 노는데, 8기생들 중 별을 단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고, 거의 대부분 중령급에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다. 더구나 8기생은 그때까지 배출한 육사생도들 중 가장 많은 동기생을 가지고 있었기에 승진정체는 요원하기만 하였다. 5.16 쿠데타의 이면에는 바로 이런 승진정체가 큰 원인이 되었다.

 

5.16쿠데타의 성공 이후 쿠데타의 두 주체세력인 육사 5기와 8기들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우게 되는데, 5기생들이 61년 7월1일을 거사일로 잡고 8기생들을 몰아내려 하였지만, 역으로 8기생들에 의해 진압된다. 이때 육사 5기생의 대부분이 거세되었다.

 

이후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내심 이 육사 8기생들의 대두를 두려워했다. 칼로 일어선자 칼로 망한다고, 박정희는 8기세력들의 움직임을 견제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힌다. 이때 박정희가 염두한 세력이 육사 11기 세력들이다.

 

육사11기는 대한민국 육군이 염원하던 '4년제 육사'의 첫 스타트를 끊은, 말 그대로의 '정규육사' 1기생들이었다. 원래 육군은 1949년 5월7일, 6개월 과정 육사의 마지막인 9기를 모집하는 것과 동시에 2년제인 제1기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모집을 공고하게 된다. 처음부터 4년제를 시행할 수 없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으나, 이 2년제도 결국 1년제로 조정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졸업 20일을 앞두고 터진 6.25 덕에 임관도 못하고 그대로 전선에 투입된다. 49년 11월에 모집한 '제대로 4년제' 육사생도 1기인 제2기 생도들 역시 입학 24일만에 터진 6.25 덕분에 무산, 6주간의 교육을 마치고 곧바로 임관하게 된다.

 

그리고 1951년 10월 30일, 육군사관학교는 재개교 하였고, 이듬해인 1월 20일 대망의 육사 11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11기 역시 프라이드가 강했고, 그들만의 독특한 경험들에 정치적으로 변질(!)되기 쉬운 입장에 있었던 기수였다. 한번 살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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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11기 동기생들

 

첫째, 6.25 동란 와중에도 제대로 된 4년제 교육을 받을수 있는 유일한 학교가 육사였다는 점이다. 즉, 그 당시 최고의 엘리트들은 전부 육사로 들어왔고 수재들의 집합소가 바로 육사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그들 스스로도 이런 생각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둘째, 그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점이다. 당시 육사의 주요 교수진들은 서울대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학제도 미국의 웨스트 포인트를 그대로 모방한 교육체제였기에 이들은 최고의 인재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셋째, 이전 기수들과 달리 정규 4년제 교육을 받은 최초의 기수였기에 끈끈한 전우애를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길어봤자 6개월 교육을 받은 기수와 4년 내내 동거동락한 이들의 인간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을 것이다.

 

넷째, 주변의 기대였다. 최고의 인재를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가르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육사 11기들은 언제나 주목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6번이나 육사를 방문해 11기들을 만났을 정도로 이들은 주목을 받았다.

 

이런 그들이었기에 스스로를 정규육사 1기란 자부심으로 '육사 1기'라 부르곤 하였으나, 군내의 반발 덕분에 1955년 4월 27일자 육군본부 통첩에 의거 육사 11기 기수로 명명되었다. 그럼에도 그들 스스로는 <정규 육사 1기>라는 강한 자부심과 프라이드를 가지게 된다.

 

이런 육사 11기를 주목한 것이 박정희였다. 육사 8기들이 프라이드로 뭉쳤다면 이들보다 더 큰 프라이드와 더 끈끈한 전우애를 가지고 있으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은 11기를 전위로 내세워 군내부를 통제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11기 주자들 중 대표 주자가 바로 전두환이다.

 

이런 육사 11기의 프라이드에 버금가는 것이 또 육사 17기들의 프라이드였다. 육사 17기는 제대로 된 정규 육사 1기는 바로 자신들이라며 그들만의 프라이드를 강조하였다. 이들이 스스로를 이렇게 포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6.25 전쟁등에 의한 피난생활을 한 <피난육사>가 아니라 제대로 안정된 틀에서 교육을 시작한 것이 17기였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11기만 하더라도 6.25 전쟁중이었기에 부산이나 진해 등지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17기는 전란이 끝나고 모든게 정상화된 상황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이들은 서울대를 갈수 있는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육사를 선택했던 세대라는 것이다. 11기의 경우나 그 이후의 경우 6.25전란중이거나 한참 전후 복구작업에 들어간 상황이었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나, 17기의 경우에는 서울대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즉 공부를 잘해 서울대까지 갈수 있는 실력이 있었으나, 집안이 어려워 육사를 택했던 가난한 수재들의 집합소로서의 육사 기수였던 것이다.

 

17기는 이런 프라이드로 인해 육사 8기생들이 겪었던 비애감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데, 1979년 당시 육사 17기 출신들은 꼭18년 전 육사 8기생들이 느꼈던 진급정체와 처우개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 육사 8기생들의 힘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영관급들이 뭉치는 걸 막았고, 그 덕분에 영관급들의 불만은 팽배해져 갔다. 더구나 한정된 자리에 쏟아져 나오는 장교들 덕분에 진급은 계속 정체되어 있었고, 언제 별을 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이들을 옥죄는 것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이들이 가진 프라이드였다.

 

 '나는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실력이 있었으나, 집안사정 때문에 육사를 택했다.'

 

라는 프라이드. 그러나 이들이 정작 군문에 투신한 이후의 상황은 만만치가 않았다. 1979년 당시 육군 대령의 월급은 17만원 수준이었다. 문제는 같은 시기 서울대나 다른 사립대를 간 그들의 동기생들이 사회에서 받는 대우보다 그들이 못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이 되면서 군을 장악하게 되고, 군 인사가 시작되면서부터 17기들의 불만은 점점 팽배해져 갔다. 정승화 라인을 타고 정승화 친위세력들이 전면에 부상할 것이라는 불안감. 이 상황에서 ‘정승화가 10년은 더 해먹을 것이다’라는 불안감이 엄습하였던 것이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기 위해 공관으로 향했던 허삼수, 우경윤 대령이 처음 말을 건넬 때 우경윤 대령이 이번에 진급 못한 것이 섭섭하다는 말을 전한 것이 바로 이런 17기 영관급들의 불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 대목에서 정승화가 간과한 것은 당시 17기들의 보직이었다. 1979년 당시 17기들은 전체 대한민국 육군 연대장들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실병력을 직접 통제하고 관리하고 운용하는 연대장의 절반이 17기 기수들로 채워졌던 것이다. 5.16 쿠데타는 8기들의 등에 업힌 5기들이 일으킨 것이고, 12.12 쿠데타는 17기들의 등에 업혀 11기들이 일으킨 쿠데타라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미국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군을 비아냥거리며,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커널(colonel : 대령)이란 계급을 없애버리면 된다."

 

라고 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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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었는가? 슬슬 7기 이야길 해보겠다.

 


1. 7기

 

육사 7기생은 참 ‘불쌍한’ 존재들이다. 바로 밑 기수에는 그 유명한 육사 ‘8기생’들이 있다. 8기생? 쉽게 말해 5.16 쿠데타의 핵심세력이다. 김종필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다. 김종필이 8기생이다. 이 8기생은 육사 생도들 중에서 가장 많이 입학했고, 가장 많이 전사한 기수다. 무려 1,263명이나 임관했었다. 6기생은 창군 당시 각 연대의 우수하사관과 사병 가운데서 선발했는데(이들 중 관상을 봐서 ‘장교관상’이 아니면 퇴교됐다. 아놔...농담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20여 명이 쫓겨났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이 6기생 중 가장 유명한 게 ‘박태준’이다. 그럼 그 윗 기수인 5기는? 5기는 민간에서 뽑았는데, 이 5기에서 가장 성공한 이가 ‘박정희’다.

 

어쨌든 7기에선 별이 38명 나왔다. 그런데 뭐 이건 중요치 않다. 진짜 중요한 건 7기 ‘정규반’이 아니라 ‘특별반’이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7기 특별반’이란 코스가 따로 있었다. 대한민국이 정부수립을 발표하고 이틀 뒤인 1948년 8월 17일 날 육사에 입교한 이들이 바로 ‘7기 특별반’이다. 7기 정규반보다 1주일 늦게 입학한 이들은 극심한 장교부족을 메꾸기 위해서 ‘경력자’들을 추려 뽑았는데(그 경력이 ‘광복군’과 ‘독립군’만 인정되는 건 아니다. 일본 육사 출신들, 만주군 출신들...뭐 여하튼 많았다. 이들은 경력대우를 받았고, 2주 훈련 후 경력에 맞게 계급을 부여받았다) 이들은 입학은 늦었지만, 졸업은 정규 7기 보다 한 달이나 빨랐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게 ‘7기 특별반’의 특별한 인연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대한민국 육사 1기라고 자처했는데, 논리는 간단하다.

 

 “씨바, 우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입학했어! 그니까 우리가 육사 1기야!”

 

란 소리를 했다. 물론, 개소리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기수가 받지 못한 전무후무할 ‘특혜’를 받은 유일한 기수였다. 그건 그들의 특별한 인연 때문인데, 당시 이들을 훈련시켰던 이가 ‘박정희 소령’이었다. 이 인연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6.25 때의 활약 덕분인지, 아니면 이들의 원래 ‘경력’ 때문인지 나름 화려했다. 동기 246명 중 실제로 졸업한 이가 189명이었는데, 이들 중 대장이 2명, 중장 4명, 소장 18명, 준장 16명 등등 별들을 참 많이 뽑아냈다. 200명도 채 되지 않은 인원 중에서 40명의 장군이 나온 거다.

 

7기 특별반은 시작부터 박정희와 인연이 깊었는데, 이들 특별반에는 이주일, 윤태일, 김묵 등등이 들어가 있었다. 박정희의 만주군 선배들이었다.

 

인연 덕분인지 그 후의 대우들도 파격이다. 혹시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가 봤는가? 여길 가보면, “육사 7기 특별동기생 추모탑”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추모탑이 하나 있다. 공식적인 건립취지와 유래를 보면, 


“한국 전쟁 중 구국전선에 뛰어들어 고귀한 생명을 국가에 바친 육사 7기 특별동기생 전몰용사의 숭고한 넋과 거룩한 희생을 위로, 추모하고자 생존한 동기생들이 1963년 8월 17일 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개축 시 탑 안에 동기생들의 유품과 기념품, 사진 등을 함께 봉안하였다”

 

라고 나와 있다.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전쟁 중에 목숨 안 바친 육사 출신 장교들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참전한 모든 기수들은 다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현충원에는 사관학교 기별 위령탑을 포함해 개별적인 구조물을 설치할 수 없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7기 특별반만 예외를 인정했다. 왜? 이들 동기생들이 박정희를 찾아가 중대장 하던 인연을 팔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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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가 중대장 할 때 키웠던 애들 아닙니까? 에이, 한 번 시원하게 쏴 주시죠?”

 

이렇게 해서 위령탑이 올라 간 거다. 7기부터 심상치 않지 않은가?


 

2. 17기

 

앞에서 언급했듯이 12.12 쿠데타의 핵심 세력들이 포진해 있다. 허화평, 허삼수 등등이 유명하고, 직속 후배였던 18기의 이학봉이 이들의 꼬붕이 된다.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3. 27기

 

한때 ‘꼿꼿장수’로 그 이름을 떨친 김장수가 있다. 이 사람이 참...설명하기가 애매하다. 전라도 광주 출신으로 ‘고향’이 살짝 발목을 잡았다. 한참 영관급에서 달려 나가던 시절이 하필이면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때였는데, 하나회의 견제를 받았다. 하나회가 숙청당하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쭉쭉 승진해 올라갔다. 노무현 정부 때 육군참모 총장을 찍고 국방장관이 된다. 이후 민주당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았고, 이를 수락했음에도 이 약속을 깨고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한 다음 박근혜 정부 시절 안보실장 자리에 앉는다. 그리곤 중국 대사까지 올라간다. 한 기수 후가 그 ‘유명한’ 김관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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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박근혜 정권 정부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안보 관련 분야에는 육사 27기부터 육사 31기까지가 핵심요직을 거머쥔다. 김장수(27기), 김관진(28기), 박흥렬(28기, 청와대 경호실장), 한민구(31기) 등등. 여기에 독사파, 알자회, 나눔회, 누나회 등등이 엮이면서 파벌이 형성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된다.

 

(지역감정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자면, 전라도 출신이라고 군내에서 완전 배제되거나 한직을 전전하는 건 아니다. 하나회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에도 전라도 출신 장성들은 있었다. 다만, 이들의 위세가 위축된 건 사실이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부 들어서면서 치고 올라가게 됐고, 지금은 정치적 고려를 해야 하기 때문에 대놓고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물론, 이명박 시절에 육, 해, 공 3군 참모총장을 모두 영남 출신으로 앉히는 ‘용맹과감’함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건 MB니까.)

 


4. 37기

 

이제야 이야기의 주제가 나왔다. 육사 37기.

 

정말 말 많고, 탈 많은 기수다. 이들은 시작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1977년 육사에 입학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박지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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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만 덕택에 더 빡세게 훈련받고, 욕도 많이 먹었으며, 인사에 있어서도 역차별을 받았다고 했지만, 그 ‘결과’만 보면 다른 기수에 비해 ‘혜택’을 본 게 맞다.

 

육사 한 기수 당 중장에 오르는 숫자는 6명 정도다. 정말 운이 좋으면 7명. 그런데 37기는 8명이나 된다.

 

기수 당 대장을 달수 있는 경우는 평균 1명 정도이고, 잘하면 2명 정도다. 이 1~2명이 대장을 달고 난 뒤 육군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 등등의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된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흐르면 국방장관 자리를 놓고 다시 한 번 붙는다. 박근혜의 마지막 국방부 장관이었던 한민구. 그의 동기가 바로 황의돈 육군참모총장이었다. 31기 중 대장으로 올라간 2명. 그 중 황의돈은 정보 특기로 대장까지 올라간 특이한(!) 기록을 세우게 된다. 나름 주목을 받았지만, MB때 날아갔다. 솔직히 31기 출신 중에서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을 뽑아야 한다면, 내 개인성향으론 황의돈이다. 물론, 부동산 투기 문제가 걸리긴 하지만 한민구와 같은 관료형 군인보다는 나름 야전경험을 한 이를 선호한다. 물론, 관료형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선호의 차이일 뿐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는데, 어쨌든 한 기수당 1~2명의 대장을 배출하는 게 평균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37기는 3명이나 대장을 배출했다.

 

1~2명이 더 진급하고 못하고가 무슨 큰 영향이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엄청나다. 우리나라에서 대장 보직은 겨우 8개다.

 

합참의장, 연합사부사령관, 육군 1, 2, 3군 사령관, 육/ 해/ 공군 참모총장이다(합참차장도 대장 보직이지만, 보통 중장 자리를 앉힌다). 해군과 공군 참모총장을 빼면 여섯 자리다. 이중 절반을 한 기수가 차지하는 거다. 까놓고 말해 군인들에게 있어 승진보다 더 중요한 게 보직이다. 오죽하면 승진은 경쟁이고, 보직은 전쟁이란 말까지 나왔겠는가?

 

여섯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게 장군들의 전쟁인데, 이 전쟁에서 절반의 자리를 한 기수가 가져간다? 1명 늘어났다고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파괴력이다.

 

이 37기 중에는 꽤 유명한 이들이 많은데, 중장으로 진급한 이들 중 주목해 봐야 할 인물이 몇몇 있다. 개인적으로 2명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한 명이 ‘파격적인 행보’로 유명한. ‘영어장군’ 전인범이다.

 

영어 잘해서 인생이 잘 풀린 케이스인 전인범 장군. 나름 사병들에게 인기도 많고, 전투력 증강을 위해 개혁에 앞장선 인물이지만, 특전사 포로체험 훈련으로 2명이 사망하면서 대장 진급은 어려울 거 같았다. 어쨌든 중장에서 멈춰 섰고, 이후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했지만...그 다음은 뭐...

 

전인범과 함께 주목해 봐야 했던 인물이 바로 이재수 중장이다.

 

박지만과는 중앙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동기다. 절친이다. 그러나 대장 진급은 포기해야 했다. 박지만과 너무 친해서 대장 진급을 못 한 게 아니냐? 인사상 역차별을 당한 것이란 말이 들려왔지만, 이재수 중장이 대장 진급을 못 한 건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만약에 그가 진급을 했다면 그것도 문제가 됐을 거다. 대장 진급을 위해 기본으로 통과해야 할 게 계급별 지휘관 이수다. 소위 때 소대장, 대위 때 중대장, 중령 때 대대장, 대령 때 연대장, 소장 때 사단장, 중장 때 군단장 등등 각 계급에 해당하는 부대 지휘관 경력이 있어야 한다. 이재수는 군단장 역임 경력이 없었다.

 

일각에선 최순실 쪽이 박지만을 견제하기 위해 이재수를 내쳤다는 주장도 나온다. 당시 이재수가 기무사령관이란 막강 보직에 있었는데, 이때 모종의 사건이 있었다는 거다. 최소 임기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급히 제3야전군 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쫓겨 난 게, 기무사령관 시절에 문고리 3인방을 파고들었다는 것 때문이란 소문도 들린다. 뭐 그거야 조사해 봐야 확인할 수 있는 문제니...

 

여하튼 이재수가 날아갔지만, 37기 중에선 대장 3명이 나왔다.

 

이 3명의 장군들 중 한 명이 바로 박찬주 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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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끊겠다. 익숙지 않은 멤브레인 키보드 덕분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 다음회에 박찬주 이야기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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