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광복절 맞이 무임승차, 영화 속 시민의 탄생을 디벼보자.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과 관련된 세 편의 영화에 대해 슬쩍 야그해보려고 한다. 한국, 소련, 북아일랜드의 독립 또는 탄생을 조명하는 영화. 알다시피 영화는 실화라는 재료를 다른 레시피로 요리한 허구다. 스포일러는 피하겠지만, 역사 자체가 스포일러인 만큼 독자 제위의 너른 아량을 바란다.

 

매년 8월이 다가오면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속속 나온다. 2015년에 <암살>이, 2016년에 <밀정>이 개봉됐다. 올해는 <군함도>가 나왔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대항해 펼치는 액션 활극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은 비슷하다. 어쩌다 비극과 폭력이 최강 조합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영화들에게도 원조할매국밥이 있다. 김상중, 정준호, 장동건, 이범수, 김인권 주연의 2000년작 <아나키스트>.

 


https://youtu.be/SDOwqppO12w


 

영화는 해방 서울, 상구(김인권 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는 날 아침에 상구는 과거를 회상한다. 만주에서 의열단 내 아나키스트 그룹에 들어간 상구는 테러리스트로서 간지나는 암살 훈련을 받는다. 요인 암살 임무를 수행하면서 배신과 믿음, 생활고와 절망적인 도전들에 부딪히는 주인공들은 하나 둘 쓰러져간다.


 

김상중.jpg

그런데 말입니다. 김상중 아저씨도 졸라 풋풋하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풋풋한 시절을 보는 재미(장동건과 예지원의 미모는 클로즈업 때마다 놀라울 지경)도 있거니와 수트빨 돋는 아나키스트 형님들은 선 데가 화보요, 움직이면 CF다. 예고편만 봐도 짙은 느와르의 엑기스가 찐득찐득 흘러내리 않는가. 이게 바로 아나키스트의 길 비극적인 이야기는 다시 서울에서 상구의 내레이션으로 끝난다. "훈장을 주는 자와 훈장을 받는 자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동지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의 허울뿐인 정통성, 혼자 살아남은 상구의 죄책감이 씁쓸하게 교차한다.

 

극 중에서 이근(정준호 분)이 상구에게 아나키스트의 뜻을 알려주는 장면이 있다.

 

"아나키스트는 선장없는 선원이라는 뜻이야"

 

뱃전을 때리는 파도소리가 처얼썩 처얼썩 하는 가운데, 부유하는 자기들의 심정을 표현한 대사. 사실 아나키는 그리스어 안(av)+아르케(apxn)의 합성어로 '정체政體 없음'이자, 보다 실천적으로는 반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나키는 비관주의로 흐르는 호젓한 감상이 아니라 전제군주 등 모든 권위주의와 대립하는 민중주체의 투쟁 그 자체로써 이해해야 한다. 극 중 이근의 말은 몰락하는 운명을 예감한 것이었겠지만, 동시에 이 싸움이 결코 멈추지 않을 가장 큰 근거를 말한 셈이기도 하다. 그들이 바로 반항하는 민중이었다.

 


아나키스트포스터.jpg

<아나키스트>의 포스터 '당당한 그들이 온다!'. 간지난다.

 

 

1981년작 <레즈>는 워렌 비티가 주연과 감독을 맡은 작품이다. 일단 제목이 시원시원하다. 빨갱이. 영화는 20세기 초 미국의 사회주의자 저널리스트인 존 리드를 중심으로 사랑과 혁명의 현장을 그린다. 3시간 넘는 상영시간이 무색하게 결코 지루하지 않다. 영화의 핵심인 존과 루이스의 러브스토리는 중반부터 소련으로 무대를 옮겨 혁명의 질곡과 보조를 맞춘다.

 

미국 지식인 사회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존 리드는 유능한 기자이자 행동가다. 자유주의자인 루이스는 주변 시선에 아랑곳 않고 자기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여성이자 야심가다. 영화는 실화와 허구를 조심스레 직조해 두 사람의 로맨스 위에 미국 내 좌파지식인들의 활동상을 버무린다. 존 리드가 미국 공산당 대표로 코민테른의 일원이 되는 순간까지 스크린을 횡단하는 다이앤 키튼(루이스 역)과 잭 니콜슨(유진 오닐 역)의 훈훈한 모습은 덤.

 


unnamed (2).jpg



이 영화는 헐리우드가 볼셰비키 혁명을 표현했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희열을 준다. 돈 들여 잘 표현한 혁명의 한 장면에서 존은 엉겁결에 파업 노동자들의 연단에 오르게 된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열띤 토론의 장. 이 자리에서 존은 파업을 지지하며 미국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노동자들과 함께할 것이라고 외친다. 우뢰와 같은 박수와 너나할 것 없이 부르기 시작하는 인터내셔널가. 우리는 고립되지 않았다는 희망과 우리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그런데 ‘노동자’로써만 연대해야 하나.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가?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IMG_2017-07-07 14:33:13.jpg



영화 <블러디 선데이>는 제이슨 본 시리즈를 만든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2002년작이다. 1972년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조명없이 핸드헬드로 그려낸다. 영국 시민권을 요구하는 집회에서 영국 하원의원 아이반 쿠퍼가 이끄는 비폭력 시위대의 행진을 향해 영국군 공수부대는 무차별적인 발포와 함께 폭력 진압을 강행한다. 카메라는 영국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충돌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군인들은 민간인 사살을 숨기고 지휘관은 책임을 회피한다. 이를 계기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오랫동안 영국군을 괴롭혀 온 무장단체 IRA(아일랜드공화국군대)로 대거 입단한다. 폭력에 반대해 복수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영화 말미에 아이반은 기자회견에서 말한다.

 

“영국 정부에 고합니다. 당신들은 시민권 운동을 파괴하고 IRA에게 최고의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오늘밤 이 도시 전역에서 소년들이 IRA에 가담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뿌린대로 거둘 것입니다.”

 

영화는 건조하고 잔인하고 슬프다. 우리의 역사에도 평화적인 시위와 잔인한 진압이, 독립을 꿈꾸던 무장단체가 있었다. 우리와 그들, 양쪽 모두 그 단체들의 성공으로 독립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우리는 어떻게 달랐을까. 정확히는, 그들이 실패하고 우리가 성공한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독립을 자력으로 얻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대대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동안 미군 원자탄 두 방에 일제는 허무하게 패망했다. 이어 내부 권력 투쟁으로 친미 세력이 친일파와... 아 시바. 35년간 조선 사람을 괴롭힌 일본 사람들은 다 몸성히 돌려보냈다. 저항의 서사는 광복에 이르러 한풀 꺾인다. 이쯤되면 당황스럽다. 중국인들은 쉽게 화내고 쉽게 화해하는 조선 사람이라고 했다던데, 참 묘하다. 한 대 쥐어박지도 않고 끝내다니.

 

하지만 어쩌면, 우리를 싸우게 하고 살아남게 만드는 것은 복수와 청산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아나키스트>에서 살아남은 상구의 자조적인 나래이션을 반박하는 것은 바로 상구 자신의 존재다. 연인과의 사랑 때문에 살아남았으니까. 영화 <암살>의 마지막은 즐겁게 춤추는 장면이고, 영화 <밀정>의 엔딩은 자기를 믿어준 단장에 대한 안부인사다. 그러니 ‘한풀 꺾인 저항력'에 대해서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다. 우리는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서만 폭력으로 저항했고, 이것을 통해 쟁취하고 싶었던 것은 후련함이 아니라 잃어버린 사람다움이라고. 해방된 조선에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신속한 치안유지와 재건을 시작했다. 그간 민족을 찢어놓은 일본인에 대한 학살이나 공인된 린치가 아니라.

 

광복절을 자축한다. 다만 국가권력을 쟁취한 날이 아닌, 인간 존엄을 되찾은 기쁨으로 기억되는 그런 광복절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독립을 기억해보려 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계속 권위에 저항하면서 사랑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거리만세.jpg

 





무리수

lin3us@gmail.com


편집 : 딴지일보 인지니어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