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1. 29. 수요일
루저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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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엄마 말 안 듣고 그렇게 떼쓰고, 공부도 안하면 커서 저 아저씨처럼 돼!”
멸시받는 루저의 삶
내가 10대 말 노가다 판에서 일하다가 현장 구석에 쉬고 있을 무렵, 그 옆을 지나가던 어떤 아이의 엄마가 울던 아이를 어르면서 하던 말이다. 물론 ‘저 아저씨’는 시멘트 가루를 뒤집어쓰고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던 나를 일컫는 말이었다. 내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노숙자도 아니고 당당히 노동하던 사람이었는데 절대로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다.
다소 황당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던 순간이었지만, 사실 그 아줌마를 탓할 일만도 아니다. 노가다 뛰는 사람을 존중하는 대신 멸시를 하도록 노골적인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미 사회적으로 그런 인식은 상식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3D 업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부모들 자신조차도 대부분 자식들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는 자조의 말을 입버릇처럼 내 뱉는다. 그런 인식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면화 되어버린 지는 오래다.
우리 사회에서 저소득층, 3D 업종 종사자, 실업자, 교육 수준이 낮은 자 등은 대체로 루저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루저들이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하면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학교 다닐 때 게으름 피우며 공부 안하고, 말썽피우고 놀기 좋아했기 때문, 다시 말해 인내하지 않고 마시멜로를 금방 집어 먹은 업보에 다름 아니다.
우리 사회가 신분제 사회에서 ‘능력제’ 사회로 이동한 지 반 세기가 넘었다. 타고난 신분 때문에 못살고 천대를 받았던 구한말 이전과 비교한다면 기회의 평등이 훨씬 진전된 사회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좀 더 먼 과거를 떠올려 본다면 우리 사회가 물질적인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평등을 기준으로 볼 때도 꾸준히 진보된 것만은 분명하다.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던 당대의 엘리트 최치원조차 골품 귀족들에게 좌절을 맛봐야 했던 신라시대에 비한다면, 과거제도를 도입했던 고려는 평등의 영역이 좀 더 넓어졌고, 문벌귀족들이 사라졌던 조선시대에는 그 영토가 훨씬 더 커졌다. 일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신분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급기야 한국 전쟁 이후에는 토지개혁 마저 이루어져 땅에 속박되었던 많은 소작농들이 자영농으로 탈바꿈했다.
실로 이러한 진전은 역사적으로 수백, 수천 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어도 구현이 될까말까한 발전으로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와 노력에 대한 신화
이제 대한민국은 출신과 배경에 따라 다소나마 차이가 있을지언정 '기회의 평등' 사회가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거의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 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같은 교실에서 같은 교과서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사회이니 말이다. 고위관료, 재벌, 학자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 중 1세대 대부분은 어렸을 적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가난기를 겪으며 불굴의 의지와 불철주야 노력으로 개천에서 용된 드라마의 주인공들인 것이다.
입지전적인 인물이 아니어도 전문직종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을 보면 학창시절에 열심히 공부한 것만은 틀림없다.
비록 자연이 재능을 불평등하게 배분시켰을지언정, 노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 의지를 갖고 노력하면 어떤 난관도 뚫고 성공할 수 있다. 요즘 시대 책 값이 없어서, 등록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 않은가. 따라서 그 이상의 평등을 외치고 사회탓을 하는 자들은 빨갱이, 혹은 비겁한 루저의 변명밖에 안된다.
신자유주의 사회다,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너무 심화된다 하며 ‘남 탓, 사회 탓’을 하는 경우가 유달리 많아졌지만 성공의 미담은 도처에 널려있다. 비록 학창시절을 헛되이 흘려보냈다 하더라도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니다.
총각네 야채가게 사장처럼 밑바닥 생활부터 뛰어들어 대박을 치는 사람이 나오기도 하고, 강남 어학원에서 스타강사로 뛰며 독설로 유명한 유수연도 명문대 출신이 아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모두 노력에서 기인한 것이지, 타고난 재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재능이 떨어진다면 부족한 만큼 더 노력으로 채우면 그만일 뿐이다.
노력한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건 아닐지라도, 성공한 사람 중에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투지로 노력한다면, 굳이 큰 성공을 하지 못하더라도 안정적인 삶을 그런대로 누릴 수 있을 지 모른다.
옛날 옛적 광고카피 '따라올테면 따라와 봐'
노력과 인내만 있다면 따라갈 수 있는 걸까?
대체로 이러한 줄거리가 성공신화를 뒷받침하는 자기개발서의 기본 구성이기도 하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왠지 선뜻 받아들이기가 좀 찜찜한 구석이 있지만 개인사적인 조언으로 삼기에는 별반 틀린 말 같지도 않아 보인다.
성공 신화에 대한 사회적 비난은 흔히 들을 수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이 ‘노력의 신화’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제기가 없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근성과 노력 그 자체는 닥치고 찬양할 수 밖에 없는 미덕인 것 같다. 그러나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적인 논객들도, 자기계발의 출발점인 ‘노력’ 그 자체에 대해서는 별반 분석해 놓은 것이 없다.
나는 공상 만화 같은 자기계발서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비판하려면, 노력이라는 문제에서부터 깊이 있게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엔 억울한 사람이 많다. ‘억울하다’는 것은 위로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이 전제된다. 다시 말해 위로받기 위해선 위로할 만한 어떤 노력이나 고생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령, 3년 동안 열심히 수능공부를 했는데 답안지를 밀려 썼다거나, 회사에 충성을 다 바쳤는데 짤렸다는 경우가 그럴 것이다.
만일 빈둥빈둥 놀았던 자들이 시험을 망치거나 회사에서 짤렸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위로는커녕 비난만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왜 노력하지 않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던져지지 않는다.
자연과학의 발달은 물질 운동의 원인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과정으로 발전해 온 역사였다. 그 과정에서 물질의 기본입자인 원자까지 탐구해갔으며, 지금은 그 원자핵마저 쪼개고 또 쪼개서 쿼크입자를 분석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사회학은 문제의 근원을 쫓다가 개인의 선택과 행동의 문제에 다다르면 더 이상의 분석을 멈춰버렸다.
나는 이 ‘노력’의 문제가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노력’이 의지력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때, 그 개인의 의지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가?
우리 사회가 노력한 자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하는 사회인가 하는 의문은 여기서 잠시 제쳐두자. 논의의 단순화를 위해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라는 것을 일단 가정하고 논해보자.
노력을 하는 자와 안 하는 자, 다시 말해 인내심을 유지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일까?
마시멜로 실험 이야기
아... 땡겨...
개미와 베짱이의 다른 버전인 마시멜로 이야기는 성공한 자(적어도 실패하지 않은 자)와 루저의 차이를 인내심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다. 4살 난 아동이 눈앞의 마시멜로 사탕을 당장 먹으면 한 개만 얻을 수 있고, 15분 간 참으면 두 개를 얻을 수 있게 한다는 실험이다. 이 실험에서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시멜로를 두 개 얻은 소수 아이들의 삶을 수십 년 동안 추적해보니, 인내심을 발휘한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아이에 비해 여러모로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실험이 주는 교훈은 명약관화하다. ‘인내하면 성공한다’. 놀고 싶은 마음, 이성과 교제하고 싶은 욕망, TV를 시청하고 싶은 욕구 등을 참으면서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하면, 대체로 좋은 대학에 들어갈 확률은 높아지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좋은 직장에 들어갈 확률도 같은 비중으로 올라간다.
우리 사회가 이렇듯 선명한 인과적 상응체계를 갖추고 있는 사회라면, 노력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차별은 정당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합의될 수 있는 사회적 공리와도 같다.
의심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이러한 공리가 과연 타당성을 갖출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분석해보자.
우선 ‘노력=성공의 삶, 게으름=루저의 삶’이라는 명제가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선, 일단 출발선은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두어야 할 것이다. 선천적 뇌장애 등 명백한 신체적 불리함을 갖고 있는 경우와,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갑부의 자식이라는 예외를 두고 생각한다면(인구학적으로 소수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신분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고, 중고등학교 진학률이 100% 가까운 사회이므로 일단 출발선은 엇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능이라는 측면이 있지만, ‘머리 좋다고 다 공부 잘하는 것이 아니고, 조금 나쁘다고 모두 공부 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통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비록 출발선이 약간 삐뚤할지언정 누구나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현격히 불리한 운동장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문에 누구나 자기 의지로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갖고 노력을 한다면 성공적 삶의 기회를 누리게 되는 게임의 룰은 기본적으로 공정한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노력과 인내심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가 있으면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마법의 키가 될 수 있을까? 혹시 그것마저 지능만큼이나 선천적 요인이나 운에 크게 좌우되는 요소라면, 우리가 이 사회의 공리로 받아들이는 성공법칙은 윤리적 타당성에 근본적 의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의지와 노력은 운이다.
마시멜로 실험 그 자체를 생각해보자. 마시멜로 실험의 대상자는 4살 난 아동들이다. 이 나이는 자아 정체성이 아직 확실히 정립되지 않았을 때이며, 기질과 본성에 압도적으로 영향을 받을 나이다. 4살 때의 아이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 인생 전반이 좌우될 정도라면, 마시멜로 실험은 그러한 인내심 역시 지능 못지않게 선천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생후 18개월에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 심하게 울고 떼 쓴 아기들과 엄마가 올 때까지 잘 참고 기다린 아이들을 만 5세가 되었을 때 비교해보니, 전자의 아이들은 여전히 참을성이 부족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최근의 진화심리학과 신경생리학의 연구는 ‘자기 의지’마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 의지’는 아니라고 얘기한다. ‘자기공명 영상장치’를 이용한 실험이 있다. 가령 A라는 카드와 B라는 카드 중에 어떤 특정한 것을 선택하려고 결심함과 동시에 버튼을 누르는 것이 이 실험 내용이다. 피험자의 뇌는 영상장치로 촬영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피험자가 결심한 그 순간의 7초 전 부터 뇌의 특정부위에서는 이미 피험자가 어떤 카드를 선택할 지에 대한 뉴런의 활동 패턴 신호가 잡힌다. 피험자의 뇌를 촬영하여 볼 수 있는 연구원은 피험자보다 먼저 그가 선택할 카드의 종류를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가장 단순한 의식의 수준에서조차 우리는 무의식의 조종을 받는다
자기 의지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결심, 행동 등은 모두 뇌에서 일어나는 신경학적 사건의 결과들이다. 예컨대 유전자가 전사되고, 신경전달물질이 수용체에 결합되어 근섬유들이 연락하면, 컴퓨터 내의 야동 폴더를 뒤지게 되는 것이다.
좀... 찾아볼까.
샘 해리스의 논지를 따라 가보자. (이하, [자유의지는 없다]의 내용)
결정, 의도, 노력, 목표, 의지력 등은 뇌의 인과적 상태이며, 이 상태는 특정 행위들을 이끌며, 그런 행위들은 세상에 결과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의식적인 행위들은 내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선택의 선행원인은 암흑같은 어떤 미지의 무의식 속에서 불현 듯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새해에 많은 결심을 한다. 금연, 다이어트, 영어공부 등 한 해에 적어도 수십 번의 결심과 낙담의 과정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몇 번의 시도 끝에 금연에 성공했다. 왜 그 전에는 실패했는데, 하필 2013년 5월에는 성공했을까? 다이어트를 3년 동안 실패했는데 어째서 이번에는 5kg 감량하는 데 성공했을까?
여러 해 동안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고 결심을 했었지만, 하필 오늘에서야 책을 들게 되었는 지 설명할 수는 없다. 이것은 흡사 길 가던 중 문득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만큼이나 우연적이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김어준 총수는 어느 날 문득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냥 끊었다. 그 전부터 각오를 단단히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몇년 지난 후 다시 피게 되었다. 그것도 대단한 결의를 갖었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여러 상황을 얘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친구의 조언, 다이어트 베테랑의 지도, 엄마의잔소리, TV에서 본 멘토의 강연 등등..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사후적인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미 그 전에도 그런 상황들은 놓여 있었다.
궁극적으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매사에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련의 사고와 행동은 모두 유전형질, 인생 경험, 인간관계 등 수많은 숨겨진 요인들이 서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뇌 안에 있는 뉴런의 활동 패턴으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 기제의 결과로서 작동된다.
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두 여자의 얼굴 사진을 보여주고 어느 쪽이 매력적인지를 고르도록 했다. 참가자가 선택을 하면 그 이유를 물었다. 헤어스타일, 눈매. 그런데 실험자가 손재주를 부려 사진을 바꿔치기를 했어도 피험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이 선택했다고 믿는 그 사진의 주인공이 왜 매력적인지를 계속 설명한다. 심지어 맛을 선택하는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일단 선택을 하고나면 결정에 이유를 갖다 붙인다. 의식은 무의식이 선택한 것에 대한 대변인 노릇을 하는 거다.
인간의 의지력을 유지하는 일은 신체의 근육을 단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선천적 조건과 제반의 환경 등이 어우러진 결과일 따름이다. 스타급 플레어어의 탄생은 뛰어난 육체적 자질 뿐만 아니라, 선천적인 성격-멘탈, 소속된 팀, 코칭, 후원 등 주변 여건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전적으로 한 개인의 자유 의지로서 모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심리의 95%가 무의식에서 비롯되고 그런 무의식의 저변은 당대의 사회적 현실, 인간관계 등 외부환경과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 모두는 각 개인마다의 자아를 생성시켜주는 질료이며 개성을 규정짓는 요소이다. 개인의 어떤 자유로운 선택이 있겠는가? 아프리카 소말리아에서 빌게이츠가 나올 수가 없고, 독일의 산업 환경에서 주커버그가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한 개인의 노력과 선택, 의지 등을 규정하는 제반의 요소들은 자기의지와는 무관한 모두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상대평가-경쟁의 룰은 자기 살을 뜯어 허기를 채우는 짓
사고실험을 해보자.
만약 운전면허 시험을 상대평가로 하여 상위 5%에게만 면허증을 발급한다고 하자. 그리고 시험과목은 자동차 공학부터 윤리학까지 걸쳐져있다고 하자. 그렇게 된다면 면허증을 발급받은 사람과 운전사는 사회의 엘리트로서 선망된 위치에 놓여있고 고소득 전문직종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전과자는 일단 운전을 할 수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범죄에 이용할 수 있으니까. 자동차 공학을 잘 알아야 한다. 자동차를 잘 알지 못하면 도로 위에서 불의에 사고 혹은 고장이 일어났을 때 사고위험이 배가 되니까. 윤리적 소양도 갖추어야 한다. 교통 법규 위반은 교통사고로 직결될 테니까. 모두 사람 목숨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명분은 충분하다.
그리고 아마 자동차 공학도 직관적이고 편의적인 방향보다는 엘리트들의 자부심을 한층 드높일 수 있는 마니아적인 기능중심으로 설계되고 항공기와 유사하게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발달되었을 것이다. 아마 오토매틱 기술 대신 다른 기술이 발달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될 경우 기계조작과 학습에 서투른 저학력자, 여성, 노인 등은 운전석 앞에 놓여있는 복잡한 조작 계기판을 보며 운전을 엄두도 못내고, 그것은 특별한 능력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고급 기술로서 사회적 인식을 강화시킬 것이다.
여성 합격자, 비명문대생의 합격 수기도 화제가 될 수도 있다. 면허증을 따기까지의 드라마틱한 합격수기 및 자기계발서가 등장할 것은 자명하다. 또 합격자를 늘려달라는 면허 재수생, 삼수생들의 항의는 능력 없는 루저들의 땡깡으로 취급받게 될 지도 모른다.
만일 자격조건을 완화하거나, 합격자 수를 늘리거나, 시험과목을 축소시키려고 한다면 이미 기득권자가 된 면허증 소유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을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이미 자동차 운전을 대단히 어려운 전문직종으로서의 가치를 주입받았을 것이다.
소수의 운전자들이 운행하는 만큼 도로 환경도 지금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적을 것이다. 때문에 일정한 조건만 갖추면 면허증을 발급하자는 주장은 공상과 같은 헛소리로 취급받을 것은 자명하다.
이런 우화적 상황은 결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경쟁 사회는 탈락자를 전제로 둔 사회다. 상대 평가는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만 한다. 90점이어도 91점 앞에서는 루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흡사 공 하나 들어갈만한 한 개의 구멍을 향하여 포켓공 10개를 동시에 굴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조건을 그대로 둔 채 골인하지 못한 9개의 공을 루저로 비난할 수 있을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학살을 당할 100명의 유대인 중 한달의 시간을 주고, 턱걸이 상위 10%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은 처형장에 보낼 경우를 상상해보라. 한달 동안 턱걸이를 미친듯이 연습하는 사람들과 저질 체력에 애초에 포기하는 사람.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 턱걸이 잘하는 사람을 암살하려는 사람 등. 미친듯이 폭주하는 우리나라 경쟁 체제의 군상과 아주 흡사한 상황이 재현될 것이다.
지금의 상대평가, 경쟁체제 속에서의 자기계발 의지는, 어떻게 하면 체력을 더 길러서 턱걸이를 잘해 살아남을 것인가를 궁리하는 모습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때문에 우리는 상대평가라는 제도를 근본적으로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수컷끼리 경쟁을 할 때, 모든 수컷이 다 싸우지는 않는다. 또 싸우더라도 기싸움에서 결판이 나는 경우도 많다. 아주 치명적인 결투를 벌이지는 경우는 드물다. 서로 잣대를 세우고 키를 재보는 것과 비견할 수 있다. 상대방이 더 세다고 느껴질땐 재빨리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치명적 상처를 덜입고 생존할 수 있다.
상대 평가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만 궁정악사가 되어야 한다면 하필 그 시대에 모짜르트를 만나게 된 살리에르는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만들어진다. 마치 뇌 속의 뉴런 가닥 그 자체는 의식이 아니더라도 그 네트워크로서 의식이 생성되는 것처럼, 나 자신의 자아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생성된다. 예컨대 글 잘 쓴다는 칭찬을 주변에서 받다보면, 스스로도 그렇게 규정을 내리고 글쓰기는 어느새 자기 욕망으로 전환되며 자기 정체성으로 구성된다.
욕망과 의지, 인내심과 노력 등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각 개인인 ‘우연히’ 보유하게 된 유전자와 사회, 가족, 또래와의 관계 등이 모두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일종의 파생물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생각보다 무척 약하다.
지능지수 검사를 하기 전 인종을 대라는 요구를 받은 흑인은 그렇지 않았을 때보다 현저히 낮은 점수를 받았다. 백인 학생에게 흑인이 되는 상상을 한 후, 끝마친 과제를 다시 해보라는 말을 하자, 학생들은 평소에 보이지 않던 반항적 태도를 보였다.
가난한 환경은 지능지수를 확실히 떨어뜨린다. 최근의 한 연구는 가난에 의한 사고능력의 잠식은 IQ 13포인트를 떨어뜨리는 효과와 동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정상인과 만성알콜중독자의 지능지수 차이와 동일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계발서와 정반대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미국의 한 빈민이 쓴 글을 보자.
“나는 경제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많이 내립니다. 어차피 평생 가난할텐데 지금 조금 참고 버틴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햄버거집에서 5달러를 안쓰고 참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요... 지독한 가난은 쓸쓸해요. 두뇌에서 장기적인 계획이라는 개념을 없애버려요.”
페퍼민트에서 소개하는 기사를 좀 더 이어가보자.
공부도 그와 같다. 기초가 부족한 학생은 성적을 따라잡는데 남들 보다 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 지능이 좀 떨어진다면 그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이고. 그러나 자신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비슷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보면, 상대 평가체제에서 자신감이 떨어질 지도 모른다. 또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도저히 풀 수 없다면, 성적 향상에 대한 자기 신뢰도 그만큼 떨어진다. 공부에 대한 흥미가 옅어지는 건 자명하다. 노력과 성적향상의 요인은 이밖에도 또래집단의 수준, 주변의 시선, 가정적 환경, 성격 등 수많은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이다.
자기계발서의 기본적인 컨셉은 입지전적인 한 명의 인물의 고군분투기다. 공부를 못했지만 어찌어찌 인내하고 노력해서 명문대에 입학했다, 혹은 성공했다 류이다. 그러나 그 인물이 보여준 놀라울만한 자제력과 그것을 뒷받침해줄만한 선천적 유전자, 주변의 지지와 기대, 우연적 계기, 기타 등등 다른 여건은 모두 사장된다.
평생 채식만 해온 사자 리틀타이크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자에게 롤 모델로 채식 사자를 강요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나온 절에서 키운 고양이 역시 생선과 고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다른 고양이를 그렇게 키워야겠다고 일반화시키려는 의지를 가질 사람도 드물 것이다.
놀라운 자제력과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 성공한 경우는 위의 예보다야 많겠지만 일반화시킬 수 있다는 건 망상에 가깝다. 또 그렇게 했다고 반드시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성공했던 사람과 비슷한 노력을 경주했지만 실패한 수 많은 사람은 사회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또 그런 사람은 나서서 자기 주장할 생각도 없다. 그러다보니 그런 반례의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느껴진다. 때문에 노력=성공 등식을 갖은 극소수의 사람은 ‘과잉 대표’되며 세상의 롤모델로 자리잡힌다.
이것은 마치 [시크릿]에 나온 주문처럼 우주의 氣를 모아 간절히 원하면 실현된다는 주술적 태도와 흡사하다. 그 주술을 행한 수많은 사람들 중 소원이 실현된 사람은 [시크릿]이 진리가 되는 증거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된다. 실현이 안된 사람은 자신의 신심이 부족한 탓이기 때문에 반증의 예로서 나설 수 없게 된다. 기복신앙이 현대까지 살아남게 된 메카니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성공과 실패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조건하에서의 상대 평가는 그 과정이 아무리 공정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정의로울 수가 없다. 이런 조건을 그대로 둔 채 노력과 인내만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것은 인지부조화적인 모순만을 재생산하는 허망한 일에 불과하다. 또한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하는 경쟁 체제 속에서의 노력과 인내는 본질적으로 제로섬 게임일 뿐이다.
물론, 제한된 자리에 지원하는 사람이 몰려들면 상대평가는 불가피하다. 나는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서 상대평가와 경쟁 그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회 내에서 좋은 곳(직장, 학교)과 나쁜 곳이 극명하게 나뉘고, 그 좋은 곳이 소수의 몫으로만 배분 될 때 사회 전체는 루저생산 공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1마리의 강한 수컷만이 다른 50마리의 암컷을 독점하는 일은 강한 수컷의 유전자를 후세에 남긴다는 점에서 종번식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이다. 찌질한 수컷 유전자도 후세를 보장받는 일부일처제는 자연에서는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자연에서는 일부일처제가 별로 없다. 장기적으로 보면 찌질한 개체가 다수를 차지할 것이 분명하므로 종의 사멸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것이 일반화된 사회라면 일부일처제는 몽상이고, 반역의 이데올로기처럼 비춰질 것이다. 지금 부의 독점, 좋은 일자리는 어차피 소수의 자리밖에 될 수밖에 없다는 상식은 일부다처제가 자연의 섭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체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면서도 종번식에 성공했다. 성공해도 너무 많이 성공해왔다.
다음 시간에는 ‘노력’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한국사회에 작용하는 지를 보다 심도있게 진단하고, 아울러 진보진영조차 적극 주장하는, ‘공정 경쟁,’ ‘공정 사회’라는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겠다.
참고문헌:
샘해리슨, [자유의지는 없다](시공사)
브루스후드, [지금까지 알고있던 내 모습이 모두 가짜라면](중앙books)
주디스 리치 해리스, [개성의 탄생](동녘 사이언스)
대니얼 액스트, [자기절제 사회](민음사)
루저C
편집 :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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