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김재홍 + 정운현 추천10 비추천0

2014. 02. 04. 화요일

김재홍 + 정운현









박정희소백과사전 'App' 커밍쑤운~


AppIcon.png


딴지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E-Book

(App) 프로젝트의 시작인 '박정희소백과

사전'의 발간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새해벽두 독자제위께 공지하는 바, 알차디

알찬 내용의 일부를 지면을 통해 공개한다. 



사진 1 (1).PNG


창작자의 욕망을 100% 해소함과 동시에, 

개성과 재미를 듬뿍 때려넣은 딴지 E-Book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의 말 (전자책나무)


박정희 소백과사전은 2012년 10~11월 팟캐스트 방송 <그것은 알기싫다>에 내보낸 내용을 보완, 재정리한 것입니다. 귀한 자료가 mp3 파일로 떠다니는 게 아니라 글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했습니다.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이 내용이 새롭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책과 기사에서 이미 다룬 내용이 많지만 새로운 얘기도 적지않게 포함됐습니다. 특히 여러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실들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 이 책의 목적입니다.

 

저자 두 분은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를 책으로 내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하며 우려를 내비치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한 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모두가 알다시피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입니다.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피해를 입는다면 그것은 연좌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고, 정치적으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위치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이고, 어떻게 대통령이 됐으며,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 국민들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료는 많지만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알아야 하는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 자체로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박정희 소백과사전」은 구술로 된 자료를 정리했습니다. 주제에 벗어나는 내용은 방송이라는 한계로 이야기 할 시간이 없어서 오롯이 주제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책보다 정보량은 적지만 박정희라는 인물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흐름상 필요한 정보는 주석으로 간략히 정리를 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프롤로그

 

김재홍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우리나라 유명한 법언(法諺)이죠. 검찰에서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5.16 쿠데타를 현대사 학자들은 5.16 군사반란이라고 하더라고요.


반란과 쿠데타의 차이는 예를 들면 전두환, 노태우, 하나회 그룹이 저질렀던 12.12를 군사반란이라고 합니다. 군권을 찬탈하기 위해서 행한 것이 군사반란이고, 정권을 찬탈한 것은 쿠데타인데 5.16이 쿠데타죠. 쿠데타라는 것은 기존의 정부를 뒤집어 엎고 정권을 잡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군사반란이 더 강한 표현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의미를 제한시킬 수 있는 것 같아 쿠데타라는 확립된 표현을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가졌어요. 군사반란이 쎈 표현이라고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어쨌거나 혁명은 전혀 아니고 반란 성격인데 용어는 군사 쿠데타인 것 같아요.



52471834_1305797332.jpg

12. 12 이틀 후인 79년 12월 14일 서울 보안사령부에서의 기념(?)촬영



정운현 혁명하고 쿠데타를 구분하는 지점이, 혁명은 4.19 혁명, 프랑스 대혁명. 이렇게 혁명은 부패한, 부도덕한 정권을 무너뜨리지만 혁명의 주체들이 권력을 잡지는 않습니다. 4.19도 학생들이 주도했지만 학생들이 대통령을 뽑거나 내각을 차지하지는 않았잖아요. 불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혁명이고, 쿠데타는 남미 등에서 숱하게 봐왔듯이 권력을 손에 넣죠. 그런 차이점이 있고요. 5.16은 분명히 군사 병력을 이용한 쿠데타죠. 쿠데타는 5.16 당시 조선, 동아, 경향 등의 신문이 당일 아침에 뽑은 제목입니다. 그들 역시도 쿠데타로 봤어요.


박정희는 5.16을 처음 시도해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두 번에 걸쳐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세 번째 죽기살기로 시도했습니다. 이미 그런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볼 때 박정희는 아주 강력한 권력찬탈욕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시대에 권력찬탈욕에서부터 쿠데타를 일으켰으면 독재로 가는 길이에요. 61년 5.16 쿠데타, 63년에 군복 벗고 나가서 5대 대통령 선거, 67년에 두 번째 대통령 선거, 71년에 세 번째 대통령 선거, 72년에 유신해서 종신집권을 하고자했으면 그게 이미 독재자 아닙니까. 박정희가 그간 대통령 지낸 것을 생각해보면. 백 번 양보해서 당시 민주당 정권이 부패해서 청년 장교들이 일어나서 뭘 했다, 그걸 가정한다 칩시다. 장준하 선생이 잠시 그렇게 오해를 했었죠. 그렇다고 쳐도 그 이후에 그렇다면 혁명공약 제6항에 사태가 수습되면 원대복귀하겠다라고 했는데 만약 박정희가 혁명공약 6항을 지켜서 원대복귀를 했다면 그에 대한 세상의 판단은 ‘젊은 군인들이 나라와 시대에 대한 충성심이 있었다’고 평가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후를 본다면 이건 자기가 대통령을 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재홍 5.16을 일컬어 ‘구국의 결단이다’,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얘기를 한 게 이슈가 됐었는데요. 역사적인 성격 규명을 해봐야 할 것이겠고요. 쿠데타는 아까 정리한대로 주모자들이 정권을 잡는 거예요. 권력욕이자 탐욕이야. 혁명이라고 한다면 혁명에 참여한 민중이나 주체 세력이 권력을 탐하지 않습니다. 대의명분이나 정의감을 가지고 나선거죠. 실제 5.16의 실현과정을 보면 두 번째 거사일로 잡은 게 1961년 4월 19일이었어요.


4.19 1주년 기념일을 거사일로 잡아놓았는데 왜 그날이냐면 당시 장면 민주당 정부가 무능했다, 또 사회 혼란상이 극에 달해서 국가안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이런 이유거든요? 그런데 그날 보니까 자기들이 예상했던 학생 시위가 없었어요. 혼란스럽지 않았어요. 그 때는 이미 4.19 혁명 시위대나 학생운동권이 질서잡기랄까 자제하는 분위기로 갔죠. 박정희 생각은 4.19 1주년 기념식 때 학생들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대규모 시위가 터질 것이다, 그 시위대를 진압한다. 사회 혼란상을 진압했다는 명분으로 싹 쓸어버리자고 생각을 했는데 지켜보니까 안 나왔어요. 생각이 틀렸구나하며 세 번째로 잡은 날이 5월 16일이었고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사회 혼란이었기 때문에 구국의 결단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권력욕을 실현하기 위해서 거기에 맞춰 날짜를 선택한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자면 대의명분이 없었어요.


또 하나는 별로 알려지지는 않은 이야기인데, 5.16 쿠데타가 나던 해인 1961년 5월 말에 박정희 소장이 옷을 벗게 돼있었어요. 61년 육군본부 심사위원회에서 인사고과 평가를 했고, 사상이 불순한 전력이 있는 고급장교에 대해서 심사를 했습니다. 당연히 걸리죠. 아시다시피 남로당의 군사 프락치였단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소장 이상 진급할 수 없었고, 사실 소장까지 올라간 것도 이상하죠. 일본군 계에서 봐줬기 때문에 올라간 것인데, 그래서 5월 말로 옷을 벗도록 되어 있었고. 그것을 본인도 알고 있기에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나선 것이고요.


또 하나는 5.16의 음모세력 중 핵심세력으로 육사 8기생이 있죠. 육사 8기가 1,350명 정도 임관했습니다. 특별반 포함하면 더 있고요. 전쟁 중이라 단기로 임관했는데 이 사람들 중에 대령으로 1차 진급한 사람들이 7명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인사불만 뿐 아니라 장래도 불안했죠. 5.16 쿠데타에 참여한 김종필, 김형욱 이런 사람들이 1차 지급하지 못한 육사 8기 중령이었는데, 김종필 중령은 하극상 사건에 걸려서 옷을 벗어야했고요. 말하자면 자신들의 인사불만과 장래불안이 쌓여있어서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 소장을 등에 업고 나선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정리할 때 현미경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배경을 보면 우습지도 않은 이유와 동기를 가지고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그 엄청난 일이 우연히도 성공했고, 검찰의 법언처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하지 못하게 되었’고요.



정운현 박정희 일파 5.16 쿠데타의 부도덕성을 이야기했는데, 덧붙일 말이 있어요. 5.16 후에 군인들이 통치하던 시기를 군정이라고 하죠. 박정희 대통령이 군정 말기에 육사 후배인 최주종 장군에게 역쿠데타를 제의한 적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최 장군이 살아계실 때 직접 들은 이야기이고 기사로도 쓴 내용이기도 합니다. 1962년 군정 말기이자 민정이양 하기 전에 최 장군에게 했다는 말이 ‘최 장군. 자네가 쿠데타를 좀 해라’. 박정희는 군정을 좀 더 하고 싶었어요.



김재홍 일종의 친위 쿠데타지요.



정운현 그러면 박정희가 쿠데타를 진압하는 형식으로 해서 최 장군 일파를 잡아넣고 재판을 거쳐서 잠시 형을 살게 한 다음 해외로 내보내고, 몇 년 뒤에 다시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친위 쿠데타를 사주했습니다. 이를 최 장군은 거부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더라도 박정희가 권력을 잡는 과정, 또 잡아서 진행해 가는 과정을 보면 권력을 연장하고 강화하는 그런 형식으로만 집권기간을 보내온 사람이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얘기는 왜 안 합니까? 5.16 직전에 술 먹은 이야기.

 

 

김재홍 5.16에 있어 중요한 이야기인데요. 쿠데타 지휘자인 박정희 소장이 막걸리 세 대접을 마시고 청진동을 출발해서 쿠데타 지휘부인 6관구 사령부로 가서 지휘를 했죠. 박정희 양 옆에 있던 김재춘 대령이나 오치성 대령이 ‘술 냄새를 역하게 느낄 정도였다’고 했어요. 이건 다큐멘터리에도 이미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정운현 저는 그 얘기를 김재춘 씨한테 직접 들었습니다. 인터뷰할 때 들었죠.

 

 

김재홍 5.16이 음주 쿠데타였다는 것은 다 근거가 있는 이야기고요. 청진동에서 술 마시고 쿠데타를 시작해서 궁정동에서 술 마시다가 끝이 난 것 아닌가.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것이 박정희 권력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b3ff3b0dc8e3fe50efa77a5ad214ed96.jpg

술로... 시작.



정운현 박정희가 5월 15일 저녁에 집에서 부인인 육영수 여사에게 거사를 말하고 집을 나와서 문래동에 있는 6관구 사령부로 가는데, 거기가 5.16 지휘본부였죠. 그래서 박정희 흉상이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6관구 사령부 참모장은 육사 5기 김재춘 대령입니다. 쿠데타 세력의 양축 중 하나는 육사 5기생과 8기생, 다른 축은 만주군 출신. 또 나머지로 광주포병학교 인맥과 9사단 인맥들이 있습니다. 그 당시 장도영 이런 사람들이 5.16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장도영은 쿠데타를 알고 있었지만 방임한 것 같고요. 보안대에서 이런 것을 파악하고 박정희를 좁혀오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로서는 겁도 났을 것입니다. 소문은 다 났지, 6관구에서는 빨리 안 하냐고 그러지, 박정희는 종로 쪽에 있었으니까 가는 길에 청진동에 내려서 몇 사람들과 막거리를 마셨습니다. 박정희는 술이 쎈 사람입니다. 제가 보기에 만취는 아닙니다. 그래도 컨디션이 좋을 때 석 잔하고 고도로 긴장하고 흥분했을 때 석 잔하고는 다를 수 있죠. 김재춘 씨는 제게 ‘한강다리 건널 때 박정희 옆에 있었는데 술 냄새가 났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술에 취해 비틀거리지는 않았지만 맑은 정신은 아니었다. 술기운에 5.16을 했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 정도로 스스로도 불안하고 걱정도 되고 그랬다는 것이죠. 아까 말한 것처럼 옷 벗을 때는 되어가지, 소문은 자꾸 나지, 세 번째 시도하다 보니까 이탈하는 사람도 있고 이러니까 박정희는 이번에 성공하지 않으면 목이 날아갈 운명이죠. 5.16 쿠데타가 구국의 결단이나 혁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개인적인 권력욕, 탐욕 말고도 더 있습니다.


1952년 5월 부산 정치 파동 당시 이승만이 발췌개헌을 하면서 군 동원을 지시합니다. 국방부 장관이 이종찬 장군이었는데, 이 장군은 정치에 군 동원은 안 된다며 거절합니다. 그 때 육군본부 작전처 대령인 박정희가 이 장군을 찾아가요. 찾아가서 ‘정치, 놔두면 되겠습니까? 쿠데타 해야합니다. 군부가 나서야합니다.’ 그러자 이종찬 장군이 ‘육참총장직을 걸고 대통령의 군 동원을 거부한 이유는 군이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되기 때문이야. 일본의 전철을 밟는거야. 일본 군국주의가 그러다 망한거야.’라고 말해요. 이 때가 1952년입니다. 박정희는 계속 쿠데타를 입에 달고 다녔어요. 그런데도 조치하지 못한 문제가 있어요. 이종찬 총장 10년 후 같은 위치에 장도영 총장이 있잖아요. 장도영 총장은 이종찬 총장처럼 박정희를 나무라거나 훈육하지 못했어요.


이종찬 장군한테서 면박을 당하고 그 다음 박정희가 접근한 사람은 이용문 장군입니다. 이용문 장군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용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죽지 않았습니까. 박정희가 처음부터 쿠데타를 직접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선배들에게 요청했는데 한 분은 거절하고 한 분은 돌아가셔서 이제는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김재홍 5.16 쿠데타 때 제1야전군사령관이었던 이한림 장군. 박정희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이한림 장군 회고록을 보면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래서 몇 번 경고도 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5.16이 구국의 결단, 혁명, 대의가 있다는 이야기는 말이 안 되고요.

 

 

정운현 그 당시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지가 얼마 안 됐고, 신구파 갈등이 있고, 시대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군부가 나서서 정권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란 말이죠. 방금 예를 들었듯이 이종찬 장군도 안 된다고 하고, 만주에서부터 같이 있던 이한림 장군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정도라면 군부 내에서 뜻있거나 지도급 인사들 조차도 쿠데타로 이 시국을 타개할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었는데 유독 박정희와 뜻을 같이하던 일파들이 권력에 눈이 멀어서 이런 짓을 한 것이죠. 이게 무슨 구국의 결단이에요.



225px-General_Jong-chan_Lee_1951.jpg

안된다고...했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낸 비방이 아닙니다. 자료를 가지고 말을 하죠. 이 자료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근거없는 비방이 아닙니다. 세 대 때릴때는 세 대만 때려야 합니다. 백 대를 때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 정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조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박정희란 인물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에는 전반기 삶, 중년의 삶, 말기 권력자 독재자의 삶을 고루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그 업적 속에 공이 있다면 공에 대한 것도 폄하하거나 인색할 필요는 없어요. 박정희의 친일과 관련된 행위들, 친일이 어느 정도인가, 친일파로 볼 것인가 그런 것도 다뤄보고요. 사상 전력에 관한 것도 다뤄보고요. 그의 가족사, 5남 2녀 가족사에 대해서도 나눠보고. 자녀들 이야기도 나눠보고. 박정희라는 큰 그림을 그려서 모자이크를 해보면 박정희의 얼굴이 나타날 겁니다. 딱 하나만 집중해서 두들겨 패는 식은 적당하지 않고요.



김재홍정희 통치 시기에 군대 동원을 18년 동안 7번 했더라고요. 평균 2년 반마다 한 번씩 한 거예요. 사실 군대 동원 할 때마다 쿠데타에요, 친위 쿠데타.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을 할 때마다 야당이나 언론이 대들고 그러면 무력으로 총칼로 한 것 아니겠습니까.


정식으로 쿠데타로 명명할 수 있는 것만 해도 5.16이 있고, 6.3사태라고 부르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있고, 유신 쿠데타는 국회를 강제 해산한 겁니다. 헌법에 아무 규정없는 초헌법적 행위죠.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은 헌정파괴죠. 일종의 반란이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놓고 헌법안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원래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가 아니면 입법권이 없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하여금 비상국무회의라는 이름을 붙여서 거기에서 의결을 한 거야. 그것은 사실 사문서예요. 그런 헌법을 가져다가 국민투표에 회부했는데, 계엄령도 해제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헌법안에 대한 찬반토론도 금지시켜놓고, 언론도 비판을 못하게 해놨어요. 그렇게하고 국민투표를 한 예가 세계 정치사상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선 국민투표를 거쳤으니까 정당성이 있다는 얘기를 하면 역사가 웃을 일이예요.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자가 된 뒤 국가 권력을 이용해 술과 여자를 탐닉했다, 이것은 개인 사생활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이야기합니다. 국가권력자가 더군다나 중앙정보부에 의전과장을 두고. 원래 청와대 경호실에서 하다가 눈에 띄니까 안 되겠다 싶어 중앙정보부에 넘겨서 비밀리에 하고. 이런 부분이 사생활이 될 수 없고, 대통령 권력을 이용한 나쁜 행위였다는 것이고요. 그것은 정정당당히 밝힐 일이고요. 유신 체제가 형식적으로 마무리 된 10.26 사건의 중요한 이유이자 배경이 그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다음회에 계속...

 

 





김재홍 + 정운현

정리 : 전자책나무


편집 : 너클볼러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