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을 새긴 뒤 달라진 건 출퇴근 지하철이었다. 지하철에서의 입지랄까. 키가 작아 그런가, 만만해보여 그런가, 지하철만 타면 자리양보를 ‘강요’ 받았더랬는데(다른 사람 다 놔두고 굳이 내 앞에서 가만히 있는 나를 노려본다), 어째 타투를 드러내고 있으면 그런 일이 적다.
다리를 툭툭 치이는 일이 줄은 것은 물론, 앞에 서있던 사람이 팔목을 보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 적도 있다. 팔목에 동전보다 작은 꽃 하나 새겼다고 이상한 애 내지 무서운 애로 보는 것 같다. 몸에 용이라도 새기면 돈도 받을 수 있겠...
슬픈 건, 쾌적한 출퇴근은 타투가 보이는 날만 가능하다. 타투가 팔목, 그것도 안쪽에 있는 터라 긴팔을 입으면 하나도 보이지 않아 앉아 있으면 자리양보를 강요당하고 서있으면 밀쳐지는 건 기본인 일상의 지하철로 돌아간다. 분노가 담긴 손길로 누군가에게 밀쳐지고 나면 가방에 권투 글러브를 갖고 다녀야겠다 생각하면서... 아, 아닙니다.
평화로운 지하철이 뭔지 알아버린 상태에서 긴팔 옷 하나에 소용 없어진 벚꽃은 또 다른 슬픔이었다. 커다랗게 용이라도 박지 그랬냐, 과거의 나를 원망하고 만다.
라는 것에서만 끝나면 발전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보다 발전적 삶을 살기 위해 과거에 머무르지 않기로 했다. 옛날에 안했다면 지금 하면 되잖아? 충분한 고민(5분) 후 두 번째 타투를 하기로 결심, 이것이 존망의 지름길이라는 걸 직감했지만 늘 그렇듯 미래의 일은 미래에 생각하기로 한다.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한 사람은 없다
처음엔 관음으로 타투 욕구를 없애보려 했다. '보려'는 했다. 관음은 시작일 뿐, 끝이 아니란 건 내가 알고 지구가 알고 우리집 푸우 인형이 안다. 한달도 안 된 새 귀에 피어싱을 네 개나 달아버린 애한테 뭘 바라지 말아야지. 뽐뿌가 왔을 땐 바로 해치워야 하는 법.
그래, 하자. 하는 것이다.
유명한 타투이스트에게 작업 받으려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하는 것은 물론, 예약하는 것조차 몇 달을 기다려야 할 수 있다. 유명한 사람은 빠르게 포기,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인스타그램은 사진을 기반으로 하는 SNS답게 여러 타투이스트의 작업물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저번에도 언급했지만 타투를 할 때는 크게,
타투이스트 / 부위 / 타투 모양(글자 혹은 그림/그림+글자도 가능)
세 가지를 결정해야 한다. 타투이스트는 처음 결정 그대로(그러니까 예약하고 나면 낙장불입) 가야하지만, 타투할 부위나 모양은 마지막까지, 잉크 묻히기 전까진 바꿔도 된다. 이 셋을 정하는데 순서가 있는 건 아니기에 생각나는 대로 결정해버리는 멋짐을 행한다.
① 타투이스트
영혼에서부터 '이번엔 레터링(글자 타투)을 할 거'라고 정했기 때문에 타투이스트부터 찾았다. 정확히 무슨 글자를 새길지, 글자만 새길지(혹은 그림까지 같이 새길지) 등을 명확하게 정하지 않아서였다. 레터링에 특화된 타투이스트를 찾고 그 사람의 작업물을 보면서 표절, 아, 아니 참고하려고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타투이스트에 따라 잘하는 분야가 다르다. 레터링을 잘 새기는 사람, 동물을 잘 새기는 사람, 꽃을 잘 새기는 사람 등)
‘#레터링’ ‘#레터링타투’ ‘#레터링문신’ 등의 해시태그를 검색하면 다양한 타투이스트들의 작업물을 한 번에 볼 수 있다. 그 중 마음에 드는 작업물을 발견하면, 해당 타투이스트 인스타그램 계정에 가서 다른 작업들을 둘러보자. 그것마저 마음에 들면 영혼의 짝임이 틀림 없다.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 생각하고 연락하는 것이다. 자니...?
보통 프로필에 연락처를 남겨둔다. 한국의 타투이스트들은 카카오톡 아이디를 남기는 편.
나중에 한다는 건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예약부터 잡는 게 좋다. 손 빠른 놈이 이기는 건 어디나 똑같다.
실제 예약과정. 나도 인스타그램에서 마음에 드는 타투이스트를 찾아 연락했다.
약간의 대화를 가장한 상담이 오가면 또 혼자만의 시간이 온다.
② 부위
손날이나 손가락에 하려했지만 타투이스트 분의 ‘손이나 손가락은 물이 많이 닿고 많이 사용하는 곳이라 금방 (색이) 빠져서 추천하지 않는다’는 말에 손목 혹은 팔로 바꿨다. 이미 오른 손목에 벚꽃 한 송이 있으니 이번엔 왼쪽에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잉크 묻히기 전까지 부위는 마음껏 바꿔도 된다. 아니, 것보다 가서 정한다...
③ 모양 (그림 혹은 글자)
저번엔 그림을 새겼던 터라 몰랐는데, “정확히 어떤 글자를 새길 건지”를 정하는 게 쉽지 않다.
아니다. 사실은 처음부터 새기고 싶은 문구(일본어 히라가나 두 글자였다)가 있었고, 예약할 때도 그 두 글자를 새기겠다고 했는데, 했는데... 마음을 굳혀갈 때 쯤 이 사진을 봤다.
한 일본 타투이스트가 새긴 한국어 타투
아차, 일본어 타투를 해줄 사람은 일본어를 써본 적이 없(을 수도 있)는 한국 사람이었다. 내가 수능에서 아랍어 2등급을 받았다고 해도 아랍인에게 인사 하나 할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도 지렁이 같은 히라가나를 대번에 잘 그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갑자기 이런 게 생각났고...
급격한 자신감 하락이었다. 레터링을 하겠다고 한 지라 다시 '그림으로 할래요!'라고는 못할 것 같은데, 또 일본어가 아니면 하기가 싫었다. 매국노란 이런 것인가!? 그렇다.
뭘 새겨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 일본어가 아님 많이들 하는 한글이나 영어를 새겨야 할 텐데, 새기고 싶은 말이 없다.
앞이 깜깜할 땐 표절이 답이다. 보통 기념일, 이름, 영화나 책의 문구, 좌우명 등을 새기는 듯 하다. 기념일이나 이름이라니, 차라리 주민등록증을 새기는 게 낫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내가 굉장히 귀여운 아이라는 게 떠올랐고, 귀여움을 십분 살리는 글자가 좋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전날까지 아무 것도 정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 레터링 할 때 중요한 ‘폰트’
글자체 하나에 교양시간 발표점수가 달라지듯, 레터링 할 때도 당연히 폰트가 중요하다. 글자‘체’, 즉 ‘폰트’를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다.
1) 캘리그라피처럼 타투이스트가 직접 글자를 그려준다. -> 전래 힘들고 오래 걸리며 비쌀 것
2) 기존 컴퓨터 폰트를 이용, 해당 글자를 그림 도안처럼 만든다. 다시 말해 ‘돋움체, 17pt’과 같이 글자크기와 글자체를 정한다. 글자를 그림 도안처럼 만드는 것이다. (후에 이것을 인쇄해서 그림 타투하듯 한다)
이렇게 예시를 만들어놓고 가장 맘에 드는 글자체를 고른다. 첫 번째 폰트로 쓴 ‘챙타쿠’가 맘에 든다고 하면,
이렇게 만든다. 크기별로 만든 이유는 부위에 대보기 위함이다. 30pt로 결정했다고 하면, 이후는 그림 타투와 똑같이 진행된다.
아픔은 왜 익숙해지지 않나
두 번째 조온망타투의 시간을 하루 앞둔, 아직도 뭘 새길지 1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너무 더럽지만 이제 정리하는 척도 하지 않는 회사 책상 위, 땀에 절은 앨리스 손수건이 놓여있었다. 원작 앨리스는 아니고 디○니의 앨리스가 그려진 손수건이었는데, 귀여움을 배가 시켜줄 아이템이라고 생각해서 샀지만 현실은 땀샘에서 나오는 노폐물들에 절여지기 바쁜 애였다.
그 와중에 노폐물에 쩔어도 앨리스는 귀엽네, 라고 생각한 게 화근이었다. 정해버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ふしぎの国のアリス)>의 ‘앨리스(アリス)’를 새기자. 새기는 것이다. 땀샘마저 귀여워지고 싶다는 걸로 이유를 대면 충분하지 않나 싶고 그런다. (일본어 자체를 안 할까 망설였던 건 새까맣게 잊기로 했다)
글자 옆에 꽃을 그릴까 생각했었으니, 꽃 대신 토끼를 그리기로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하면 토끼 아닙니까? 왜 앨리스 얼굴이 아닌 토끼를 새기려는 거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원작 삽화를 보라.
원작 삽화의 앨리스(좌)
왠지 무조건 미안...
원래 히라가나를 새기려 했던 주제에 왜 갑자기 가타카나(외국어 등을 쓸 때 사용하는 일본문자의 하나)가 튀어나오냐고 묻는다면[‘앨리스(アリス)’의 'アリス(정확히는 '아리스')는 가타카나], 앨리스를 히라가나인 'ありす'로 쓰면 생판 다른 인물인 것은 물론 구글에 검색하면 19금이 뜬다고 밖에...
여튼 글자를 정했으니 글자로 나름 샘플을 만들어보았다.
혹시나 해서 다른 글자들도 샘플로 만들어 갔다.
구글에 ‘japanese font’를 검색하면 일본어 폰트들을 찾을 수 있다. 무료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발견한 글자 중 예쁜 걸 골라 샘플을 만들었다. PDF까지 만들어 갔는데 그런 허튼 짓까진 할 필요 없다. 폰트 이름과 어디서 (폰트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지만 알아 가면 된다.
동그라미 친 애가 젤 귀여웠다
얘는 어쩌다 찾은 토끼인데, '앨리스(アリス)'라는 글자 옆에 얘가 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그러기로 했다.
그려보기까지 했다만 진짜 이렇게 생긴 놈을 내 몸에 그린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실전. 그 날의 첫 손님이어서 아주 나른한 분위기, 에서 하기는커녕
고양이가 양말을 자랑하는 터라 정신이 없었다. 나만 고양이 없어...
이게 진짜 도안은 아닙니다만 이런 느낌ㅇㅇ
글자와 그림을 조합해 위와 같이 도안을 만든 뒤,
크기 별로 인쇄해 타투할 부위에 대본다. 타투할 부위와 도안의 크기를 최대한 사맞게 하여 크기를 정하도록 하자. 원래도 팔에 하려고 했지만 도안의 크기가 생각보다 커져, 팔날(?)에 하기로 했다.
정확하게 이 부위
팔쪽은 살이 왔다갔다(?) 하기에 각도에 따라 사선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의 경우, 팔을 내리면 타투가 일자지만 턱을 괴는 자세에선 사선으로 보인다.
판박이 잉크를 묻힌 종이를 팔목 부위에 대면 위처럼 도안이 찍힌다. 얘가 마르면 이제 바늘의 시간이다.
오늘은 조금 덜 위험해보이는 의자에 앉아...
웰컴 투 He...ll...
빠르게 움직이는 게 바늘데스네...
적어도 소리는 안 질렀다. 이를 꽉 깨물었을 뿐이고, 눈에서 짠물이 나왔을 뿐이다. 반사신경이 뛰어난 편이라 그런 거지 아파서 눈물을 흘리거나 한 건 아니다. 아니다. 진짜 아니다. 암튼 아니다.
아닌ㅂ니다...
작업이 끝난 후 응접실로 가는 그 짧은 길, ‘또’ 병자처럼 손을 떨어대긴 했다. 하핫, 추태.
그래도 결과물이 파워 귀여우니까 된 거 아잉가 싶구...
가격은 10만 원. 이벤트 할인이 있긴 했지만 레터링+토끼를 합친 값으로, 흑백이라 추가금은 없다(보통 색 하나에 만 원).
흑백에다 진한 건 글자 뿐이라 그런지 세니덤 같은 타투 전용 메디폼을 붙이진 않았다. 다만 타투 전용 연고를 바르고 다녔다. 바세린 바르고 다녔던 지난날의 나 눈감아.
2주 쯤 바르면 된다.
아이라이너 반영구 문신한 사람은 알겠지만 가끔 눈에서 점처럼 아주 작은 것들이 떨어져 나올 때가 있다. 눈두덩이에서도 나오는데 팔에서라고 안 떨어지려고. 타투한 부위에서도 잉크가 (아마도) 각질과 함께 몇 조각쯤 떨어져나온다. 피부에 손댄 거라 당연히 딱지도 지는데, 절대 긁으면 안 된다. 잉크들이 떨어져나와버렷! 리터치 받기 싫으면 관리 잘해야 된다.
가장 최근 사진. 토끼씨는 잘 지내고 있읍니다
첫 번째 타투였던 벚꽃보다 몇 배는 눈에 띄는 두 번째 타투를 한 뒤 느낀 건 두 가지다. 하나, 관종이 될 수 있다, 둘, 상상 이상으로 덕후 같이 보인다. 셋, 나를 일본인으로 알고...
물론 관종과 덕후는 항상 해오던 것이므로 달라지는 건 없다. 아니, 것보다 타투한다고 달라지는 거 하나 없다. 타투는 누구나 할 수 있고, 쉽게 할 수 있는 거니까(아픔은 쉽지 않지만). '영구적', '지워지지 않는', '나이 들어서', 따위의 말들에 마음 쓰지 말자. 뒷구르기 하면서 생각해도 할머니 등에 호랑이가 있다고 하면 힙이라는 것이 폭발하고 만다.
어차피 흙으로 돌아갈 몸인 것을...
지난 기사 미니타투, 나 따위도 가능했다! (feat. 조금 아픔) |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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