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매일이 만들어 모이는 내일
당연한 이야기다. 과거에서 도망칠 순 있어도, 과거로부터 숨을 순 없다. 그러니 다른 내일을 생각한다면 다른 오늘을 살아야 한다. 이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아야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국가 이름이 어디에서 기원된 것인지부터 시작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1부와 2부에서 봤듯, 베네수엘라에서 유가폭락으로 인한 경제 파탄은 이번에 처음 일어난 일이 아니다. 1989년 2월 27일의 봉기와 이에 대한 처절한 진압에서 공식적으로만 287명이 사망했다. 대한민국에서 보수라고 하는 이들은 이 일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멀쩡한 나라를 차베스가 '과도한 복지'로 망쳐놨기 때문에 마두로 현 대통령 퇴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자기들의 주장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뭐, 낯선 일 아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 많으니까. 참여정부 초반에 상당수의 경제학자들은 ‘기업들이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 때문에 투자를 안 한다”며 1996년과 1997년 대비 2000년 이후의 투자율이 낮다는 것을 근거로 든 적 있다. IMF 구조금융 사태는 단기 자금을 가져다가 시설자금으로 집어넣었던(투자를 했던) 것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니까 그 시기의 투자 행태는 비정상적이었던 것이다. 그 비정상 지표를 대조하는 대상으로 놓고 정권 탓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IMF 구조금융은 정부 정책실패의 결과인데, 관료들은 그 사실을 2001년부터 필사적으로 가리려고 했다. 2002년 7차 사회 교과서부터 IMF의 원인은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이라고 적시하기 시작했다. 이게 문제가 되자 2004년엔 이 내용은 빼고 다른 이야기들을 했었다. (참고기사 - 링크) 아니, 서울 구치소 503 시절에 왜 국정교과서를 추진했겠는가? 실제 역사에 열심히 덧칠하려고 그런거지.
남미의 다른 국가들에선 심심하면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헌정중단 사태가 일어났던 것과 비교하면 베네수엘라는 석유 수입을 나눠갖고 군부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했던 푼토피호 조약(Puntofijo Pact) 덕택에 약 30여년간의 안정된 국가를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푼토피호 조약을 맺었던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 AD), 사회기독당(COPEI Social Christian Party), 그리고 민주공화동맹(Unión Republicana Democrática URD) 출신이 아닌 정치인이 나설 수 없는 환경이 30여년간 이어지면서 거의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거기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Carlos Andrés Pérez, 1922년 10월 27 일~2010년 12월 25일)가 IMF의 구제금융 제공조건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그 수명을 다했다.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무역 자유화에 나섰으며, 경제규제들을 철폐하자 휘발유 가격과 대중교통 요금이 폭등했다. 그래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공식적으로만 287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푼토피호 조약에서 정의한 석유수출의 이익을 받을 수 없었던 이들, 중간계급과 도시 빈민은 새로운 리더십을 찾았다. 구체제를 쓸어버리고 새로운 체제를 만들겠다고 서른 여덟의 나이에 쿠테타를 일으켰던 젊은 대령은 2년간 복역한 후, 라파엘 카레라 대통령의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푼토피호 조약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그가 새로운 국가 비전으로 제시했던 것은 남미연방공화국을 만들었던 시몬 볼리바르(Simón José Antonio de la Santísima Trinidad Bolívar Palacios y Blanco, 1783년 7월 24일-1830년 12월 17일)의 위대한 베네수엘라였다.
9. 시몬 볼리바르
그래서 일명 해방자(El libertator)라고도 불리는 시몬 볼리바르를 이해하는 것이 차베스를 이해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중남미의 대표적인 까우디요(Caudillo)였던 시몬 볼리바르는 1783년 스페인 출신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나서 삼촌이 그를 키웠다. 16살이 되었을 때 볼리바르는 유럽으로 유학을 떠났다.
3년간 스페인에서 공부하다 아내를 만났는데,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아내를 황열병으로 잃었다. 이후 1804년, 나폴레옹이 최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다시 유럽으로 건너갔던 시몬 볼리바르는 어렸을 때 그를 가르쳤던 시몬 로드리게스를 만나 당대의 유럽 지성들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이때 그가 읽었던 책들은 존 로크(John Locke 1632년 8월 29일~1704년 10월 28일,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 미국독립은 물론 당대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인물),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 1588년 4월 5일~1679년 12월 4일, 최초의 민주적 사회계약론자이다. 서구 근대정치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책 《리바이어던》의 저자), 장 르 롱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년 11월 16일~1783년 10월 29일, 프랑스의 수학자 · 철학자 · 물리학자 · 저술가이다. 해석역학의 기초를 구축하였고, 달랑베르의 원리를 세웠다. 또한 《백과전서》의 기고가이자 편집자였으며, 철학에서는 감각인식론을 취했다), 클로드 아드리앵 엘베시우스 (Claude Adrien Helvétius 1715년 1월 26일~1771년 12월 26일, 프랑스 계몽기의 유물론 철학자), 볼테르(본명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François-Marie Aroue 1694년 11월 21일~1778년 5월 30일, 대표적인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스키외 (본명 몽테스키외 남작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ède et de Montesquieu, 1689년 1월 18일~1755년 2월 10일, 몽주의 시대의 프랑스 정치사상가이다. 3권분립, 양원제 의회를 주장),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년 6월 28일~1778년 7월 2일) 와 같이, 대한민국 고딩 윤리시간에 많이 접했을 분들의 사상을 바로 그 현장에서 접했다.
스물 한 살에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을 접한 볼리바르는 왕정에 반대하고 국민주권에 기반한 공동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한 공화주의자였지만,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종신대통령제를 옹호하였으며 민주주의는 라틴 아메리카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민주주의가 무정부주의와 혼란을 가져오고 제국주의에 복속하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강력한 북미연방에 대결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독재적 정치권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 자신이 강력한 종신 독재자가 되려고 했다. 그의 호칭이 콜롬비아의 대통령이자 페루의 독재자기도 했고.
그리고 21세기의 볼리바르가 되겠다고 선언했던 차베스는 충실하게 시몬 볼리바르의 뒤를 따랐다.
10. 제5공화국 운동
1994년 석방된 차베스는 1998년 제5공화국운동(Movimiento Quinta Republica)이라는 정당을 창당한다. 스페인어 명칭의 대문자만 따면 MVR이라고 불린 이 정당은 약 10년 뒤인 베네수엘라 연합 사회주의당(Partido Socialista Unido de Venezuela)과 M&A 된다.
1998년 선거에서 차베스는 본인이 21세기의 시몬 볼리바르며, 푼토피호 조약을 맺었던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 AD), 사회기독당(COPEI Social Christian Party), 그리고 민주공화동맹(Unión Republicana Democrática URD)은 부패하고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18세기 시몬 볼리바르가 타도했던 스페인 제국과 같은 존재라고 몰아쳤다. 그들과 관련된 부패한 지배층, 즉 적폐세력이 석유 부국인 베네수엘라를 과거 스페인 제국처럼 착취하고 있기 때문에 60% 이상이 빈곤선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 전략은 잘 먹혀서 56.2%라는 과반이 넘는 득표로 당선된다. 1999년 2월 2일, 그는 다음과 같은 대통령 선서를 한다.
“나는 신과 나의 친애하는 민중 앞에서 이 끔찍한 헌법에 따라 새로운 공화국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대헌장(Magna Carta)를 갖도록 필요한 민주적 변화를 추진할 것을 맹세합니다,”
의회는 여전히 푼토피호 조약을 맺었던 민주행동당(Acción Democrática AD), 사회기독당(COPEI Social Christian Party), 그리고 민주공화동맹(Unión Republicana Democrática URD)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의회와 일을 하는 대신 제헌의회 소집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해버렸다. 1999년 4월 25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새로운 헌법을 만들 제헌의회를 소집하자는 그의 제안은 88%의 찬성을 얻었다. 그해 7월 25일에 실시된 제헌의회에서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125석의 제헌의회 의석 중에서 95%를 장악했다. 푼터피호 조약을 맺었던 세 정당은 단 여섯 석만 얻었을 뿐이다.
1999년 8월 12일 제헌의회는 기존의 정부기관들 중에서 부패한 조직이나 날려버리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공무원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부여했다. 125석 중에서 단 여섯 석만 장악할 수 있었던 과거의 야당, 당시 야당은 제헌의회의 이 결정을 두고 독재로 가는 길이라고 규탄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제헌의회는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의회를 바꾸고, 안그래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행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 헌법에 따라 2000년 대선과 총선이 치뤄진다.
차베스가 59.8%의 지지를 얻어 다시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베네수엘라 의회는 차베스 지지자들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1996년 베럴당 30달러 후반대에 있던 유가는 1998년 12월 2016년 달러로 환산하면 베럴당 12.7달러까지 떨어졌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국제유가에 모든 경제가 달려 있는 국가에서 유가가 오르기 시작했음에도 1999년 베네수엘라의 GDP는 5% 넘게 감소했다. 석유로 얻는 이익을 나누기로 했던 푼토피호 협약의 당사자들이 권력을 잃었는데 추가투자를 할 리가 없잖는가? 차베스는 이를 일종의 자본가들의 태업으로 봤다. 석유산업노동자들과 베네수엘라 석유공사의 경영진들이 단단한 카르텔을 맺어 베네수엘라 국민이 나누어 가지는 것이 마땅한 부를 자기들끼리만 나누고 있다고 봤던 것이다.
이렇게 갈등이 지속되는 동안 구체제와 결합되어 있었던 베네수엘라의 TV방송국들의 행태부터 깼다. 이들의 보도형태를 정리하면 조선중앙TV가 하루종일 SNL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을 모독하는 것 같았다고 보면 대략 상상이 될 것이다. 이들의 끊임없는 선동이 이어지면서 베네수엘라 국기와 미국 성조기를 든 시위대가 카라카스의 중심가를 심심하면 점거하기 시작했다.
2002년 초, 차베스는 베네수엘라 석유공사 (PDVSA, Petróleos de Venezuela, S.A.)의 사장과 이사진 모두를 쫓아냈다. 그러자 베네수엘라 석유공사의 노동조합은 파업에 돌입한다. 부패한 경영진을 수호하는 노동조합을 좋게 보는 이들이 있을리가. 이들 대부분이 해고되면서 베네수엘라에서의 대립은 극한에 다다른다. 이 즈음 차베스는 자신을 조롱하던 텔레비전 방송국 다섯 곳에 대해 각종 규정과 법 위반의 혐의로 폐쇄 결정을 내린다.
2002년 4월 12일, 군 지도부는 비무장 시위대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혐의로 우고 차베스를 체포한다. 그리고 차기 대통령으로 당시 베네수엘라 상공연합의장이었던 페드로 카르모나(Pedro Carmona, 1941년 7월 6일~)를 앉혔다. 페드로 카르모나는 대통령 자리에 앉자마자 1999년 헌법의 무효, 의회 해산 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쿠테타로 집권한 페드로 카르모나의 치세는 딱 48시간 유지되었다. 수십만명이 대통령 궁을 둘러싸고 차베스의 귀환을 요구했던 것이다.
차베스는 돌아왔고, 그는 베네수엘라 석유공사 경영진의 해임을 반대하는 석유노동자 1만 7천여명을 해고한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이런 갈등이 벌어지는 동안 베네수엘라의 GDP는 13%나 감소했다.
Samuel S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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