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레이테에서 이기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 당시 총리였던 고이소 구니아키의 1944년 11월 8일의 발언 중 발췌
고이소 구니아키는 전 국민을 향한 라디오 방송에서 레이테에서만 이기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선언했다. 실제로 당시 일본 군부는 레이테만 전투에 모든 걸 걸었다. 고이소 구니아키는 레이테 전투를 덴노산(天王山) 전투라 부르며 그 의미부여를 했다.
덴노산 전투?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원수인 아케치 미쓰히데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은 야마자키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고이소는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을 이길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 군부가 정부와 따로 놀고 있다는 사실이다.
1944년 10월 25일 이미 일본 연합함대 전력의 1/3이 레이테 해전에서 분쇄됐고, 육군도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사실을 고이소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고이소는 레이테에서 이기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며 덴노산을 언급했던 거다.
고이소 구니아키
고이소가 레이테에서의 패전을 알게 된 건 1944년 12월 20일. 덴노 알현 직전이었다. 덴노를 알현하기 직전이 돼서야 육군 대신인 수기야마 하지메(杉山 元)가 귓속말로,
“최고 사령부가 루손섬에서 최후의 대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레이테에서 최후의 결전을 감행한다는 방침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려드려야겠습니다.”
황당함 그 자체였다. 전쟁 최고지도부의 일원이자, 명목상 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덴노의 알현 직전이 돼서야 레이테 포기 사실을 확인하다니... 곧바로 이어진 히로히토 덴노와의 알현에서 고이소는 히로히토에게 질책을 받는다.
“수상, 그대는 레이테가 이 전쟁의 덴노산이 된다고 했던 성명(聲明)을 어떠한 방법으로 정당화 할 참인가?”
고이소 총리는 할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루손에서도 패전했고, 유황도가 점령당했으며, 오키나와까지 빼앗기게 된다.
고이소 총리의 에피소드는 시사하는 바가 컸다.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은 도조 내각이 총 사퇴하고 나서 육군의 강력한 요구로 내각이 구성된 경우다. 즉, 육군의 요구로 고이소가 총리가 됐다는 의미다. 고이소 역시 육군 대장 출신으로 군부의 일원이라 불러도 무방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군은 그를 배척했다. 이때쯤 되면 일본 군부는 패망 직전의 혼란상태를 보여줬다. 하극상과 공포정치는 일상이 됐고, 정부 조직체계는 아예 무시됐다.
이제 일본의 패전은 확실시 됐다. 몰살당하기 전에 살길을 찾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이 시점에서 정부의 일부 지도자들은 일본의 패전을 인식하고 강화조약의 체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는 달랐다.
본토결전 (本土決戰)
“우리는 적과 본토에서 싸워 전세를 역전시킬 것이다. 그것을 위해 새로 16개 사단을 편성하고 있다. 적의 상륙 후 2주일 이내에 20개 사단을 투입해서 적을 일소하고 일본의 승리를 굳힐 것이다.”
- 1945년 2월 6일 미야자키 슈이치(宮崎周一) 소장의 발언 중 발췌
1945년 2월 6일 일본 육군 본부에서는 본토 방어 정책을 공표했다. 이때 미야자키 슈이치는 필리핀 실함(失陷)을 인정하고, 본토결전을 말했다.
그리고 본토결전을 위해 새로이 부대편성을 하고, 만주로부터 병력을 충원할 것을 말했다. 이 당시 미야자키의 생각은 미국 상륙군 1명 당 일본군 3명이 달라붙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이 당시 일본 육군이 예측한 미군의 상륙코스는 2개였는데, 하나는 중국본토에서 동해를 거쳐 일본에 상륙하는 북방루트이고, 나머지 하나는 오키나와부터 치고 올라오는 남방루트였다. 일본군은 남쪽의 규슈를 주 방어선으로 선택했다.
1945년 2월 말부터 일본 육군은 본토결전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육군은 과달카날 철수 이후 지상전에서 싸울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그러나 우기가 본토에서 적을 맞아 싸운다면 우리 육군은 그 무적의 우월성을 과시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야자키 슈이치가 민간인 모임에서 연설한 내용이다. 일본 육군은 본토결전에서 승리한다면, 미국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이미 미국은 전력의 한계까지 끌어 모아 싸우고 있다고 판단했다(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한 거다). 그렇기에 결정적인 승리 한 번이면 전세를 역전하고, 일본이 승리할 것이라 믿었다.
그들 눈에는 ‘기아 작전’으로 인해 일본으로 향하는 해상 수송선이 봉쇄됐고, 원자재의 80%가 바다에 수장됐으며, 일본의 석유, 식량, 원자재 수입이 끊겼다는 것. 그리고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와 일본의 대도시와 공장지대가 잿더미로 만드는 B-29의 은빛 날개가 보이지 않았는가 보다.
어쨌든 일본은 본토결전을 위한 병력 확충에 나섰다. 2월 말에 열린 고위장교 회의에서 연합군 상륙에 맞춰 40개 사단을 확보하고, 징집연령을 낮춰 150만 명을 더 확보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계획이 만들어졌다.
일본 군부는 고이소 총리를 설득(?!) 해 모든 중학교의 문을 닫았다. 그리곤 중학생들에게 책과 연필 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게 했다. 이들은 농사를 지었고, 무기를 생산했으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제 일본은 임산부를 제외한 13세에서 60세까지의 모든 남녀가 무기를 들고 상륙군을 저지해야 했다. 히로히토 덴노는 새로 창설한 40개의 연대에 연대기를 하사했고, 라디오 방송에서는 2천만 학도가 전쟁을 위해 동원됐고, 농촌에서는 민병대가 편성됐다고 선전했다(독일 제3제국의 ‘국민돌격대Volksturm’가 애교로 보일 정도다).
당시 일본 군부는 ‘일정수준’의 자신감이 있었다. 만주에 있었던 경험 많은 전투부대가 속속 본토로 집결했고, 이들의 자신감은 전쟁 승리에 대한 기대를 끌어 올렸다.
(만주에서 넘어 온 부대들은 실질적으론 ‘민폐’였다. 이들은 중국인이나 조선인을 대하듯 일본인들을 대했는데, 전쟁에 대비한다며 참호나 진지를 구축한 것까진 좋은데 이 와중에 민가나 농지를 파괴했다. 또한 생산현장의 ‘규율’을 잡겠다며, 초급 장교들을 공장에 파견했는데 이들의 ‘똥군기’ 덕분에 공장의 생산성은 더 떨어졌다)
일본 육군은 본토결전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만).
“바로 그 상륙지점에서 압도적인 수의 일보군을 맞게 될 것이며, 적을 격퇴하여 바다 속으로 몰아넣을 때까지 공격이 계속 될 것이다.”
- 일본 육군 부참모총장 가와베 토라시로(河辺虎四郎) 소장의 발언 중 발췌
1945년 6월 6일 일본 육군과 해군은 『장래 전쟁 수행에 관한 기본 정책』이란 전투 계획을 전쟁 지도부에 제출했다. 이 계획서 상에서 일본군의 강점은 크게 2가지로 정리돼 있었다.
첫째, 일본의 지형.
둘째, 충성으로 뭉친 국민.
들쑥날쑥하게 길게 퍼져있는 도서(島嶼)지형의 일본 본토는 방어에 유리하다는 것. 그리고 덴노 아래에 충성으로 뭉친 일본국민이 가장 큰 강점이란 설명이다. 이들은 상륙군의 1/4을 바다에서 격파하고, 나머지 1/4은 상륙지점에서(해변에서) 격파한다면 미군은 막대한 인명피해 앞에서 스스로 강화를 제안해 올 것이라 예상(!!)했다.
이를 위해 250만의 전투 병력과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받은 400만의 민간인이 동원되며, 이들은 모두 실전에 투입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아울러 2,800만 명의 남녀를 국민 총동원령을 발동해 소집. 수류탄, 활과 화살(구석기 시대냐?), 죽창 등으로 무장시킬 계획을 가졌다.
(재미난 사실은 일본 군부는 민간인들의 무장을 최후의 최후까지 미뤘다. 무기부족에서 원일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근원적인 원인은 군부의 거부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 군부는 민간인들이 총을 드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인들이 총구를 어디로 돌릴까? 군부는 자신할 수 없었다)
가미카제 역시 착실히 준비했다. 이 당시 육군은 항공기 7,000대, 해군은 6,000대를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들 중 5,255대를 특공임무로 차출하려 했다.
이 계획은 이틀 후 전쟁 최고회의에서 승인된다. 일본은 끝까지 가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일본 군부가 본토결전을 준비하며, 국민총동원령을 말함에도 일부 지식인들은 강화, 평화, 패전, 항복 등등의 단어들을 생각하게 된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시 일본은 패망 직전의 상황이었다.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해야 할까? 본토결전을 말하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모습을 보며 뭔가 ‘해낼 것’ 같다는 느낌은 들지만, 상식적으로 이게 과연 가능할까?
B-29가 하늘에서 불벼락을 떨어뜨리는 마당에 여중생들에게 나기나타(薙刀 : 일본의 언월도와 같은 창)를 들고 싸우라고 등 떠미는 게 맞는 말일까? 실제로 당시 많은 여중생들은 나기나타나 죽창, 화궁(和弓 : 일본 장궁)를 들고 본토결전을 준비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지식인들은 저마다 고민을 하게 됐고, 이를 감지한 군부는 헌병과 비밀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평화를 생각하고, 이를 입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400여명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체포됐다(독일 제3제국 말기의 모습과 비슷하다).
마리아나 제도에서 패배하고 나서 정부 지도자들 중 비밀리에 강화조약을 추진하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고노에 후미마로, 아카타 게이스케, 요나이 미츠마사, 요시다 시게루 등이다.
전후 일본의 수상이 돼, 일본 부흥의 초석을 다진 요시다 시게루는 이 당시 연합국과의 종전교섭을 주장하다 헌병에게 체포돼 투옥됐다.
요시다 시게루
이와 동시에 프로파간다도 시작됐다. 연합국이 추축국을 점령했을 당시, 점령지에서 살인, 강간, 약탈을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순진한 일본 국민들은 군부가 퍼뜨린 소문을 믿었고, 일본이 점령당하면 자신들은 어차피 죽거나 강간당한다고 믿게 됐다.
(이는 전쟁 전 기간을 통해 있어왔던 일이다. 미군은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고민한 다음 잔혹하게 죽인다는 선전은 전쟁 초기부터 있어왔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이 탱크의 캐터필러로 일본군 포로를 밟아 죽였다는 소문이 대표적이다. 당시 일본군과 일본 국민들은 군부의 이런 선전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 그 결과가 오키나와였다.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항복 대신 자살을 선택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폭격에 죽지 않았더라도 죽음은 이미 턱밑까지 차 올라왔다. 식량부족과 가옥파괴로 결핵과 폐렴(밤이슬을 맞아야 했기에)이 급증했고, 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영양실조로 싸울 기력은 고사하고 생명의 유지도 힘들었다.
영양상태는 최악이었다. 이미 식량부족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암시장은 1945년 7월이 되자 사라지게 된다. 왜? 거래할 식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시골로 분산 수용된 학생들은 잡초와 양치식물을 한데 섞어 먹어야했고, 비단 공장에서는 실을 뽑은 후의 누에고치 번데기를 삶아서 먹었다. 하루 1,200칼로리의 최소 섭취 영양을 공급받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치안 상황은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강도, 소매치기, 절도는 일상이 됐고, 초등학생의 도시락을 훔쳐 먹거나 폭격당한 이웃집 물건을 훔치는 게 당연시 됐다.
전쟁은 인간성을 파괴했고, 인간의 최소한의 양심도 붕괴시켰다.
1945년 7월. 일본은 버틸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섰다. 남은 건 그들 말처럼 부서진 기왓장이 돼 길가에 굴러다니거나, 옥처럼 부서지는 것뿐이었다.
1부
2부
외전
3부
4부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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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펜더
편집 :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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