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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신분석학적 관점

지난 번에도 말했듯이, 현대의 의사들은 주로 DSM 체계에 따라 정신 질환을 분류하고 진단하고 있다. 에드워드 옹의 케이스 같은 경우를 DSM에서는 ‘변태성욕장애(Paraphilic disorders)’라고 한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하위 진단명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가 살펴볼 것은 ‘물품음란장애(Fetishistic disorder)’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품음란장애로 진단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항목을 만족시켜야 한다.


물품음란장애의 진단 기준 (DSM-V)


A. 무생물의 물체를 이용하거나, 성기가 아닌 신체 부위에 상당히 특정한 집착을 함으로써 반복적이고 강렬한 성적 흥분이 성적 공상, 성적 충동, 또는 성적 행동으로 발현되며 적어도 6개월 이상 지속된다.


B. 이러한 성적 공상, 성적 충동, 또는 성적 행동이 사회적, 직업적, 또는 다른 중요한 기능 영역에서 임상적으로 현저한 고통이나 손상을 초래한다.


C. 물품음란의 대상이 되는 물체는 옷 바꿔 입기에 쓰이는 의복(복장도착장애에서처럼)이나 접촉적인 성기 자극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물품(예, 진동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DSM 진단체계는 분명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을 중심으로 하나의 정신질환을 진단하기에 매우 유용한 도구임에 틀림 없지만, 어딘가 공허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래, 물품음란장애자가 이런저런 특징을 가진다는 건 나도 잘 알겠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특징을 갖는다는 것인가? 정신분석학은, 다소 현학적이고 허무맹랑한 면은 있어도, 이런 걸 설명해 주는 부분에서 강점을 지닌다.


과거 <애국가 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링크) 에서 필자는 정신질환의 구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음을 설명하면서 ‘신경증’과 ‘정신증’에 대해 설명한 적 있다. 이제 여기에 더해 하나 더 배워볼 차례다. ‘도착증’이 바로 그것이다. 에드워드 옹처럼 기이한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도착증’이라는 정신 구조에 속한다. 도착증을 구성하는 특징은 실로 다양한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또 중요한 점은, 도착증자들이 ‘페티쉬즘(Fetishism)’을 향유하는 특징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Fetishism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어릴 적 56k짜리 모뎀 하나에 의존해 전세계의 야동사이트를 종횡무진하던 필자는, 사실 Fetish라는 단어가 Feet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인 줄 알았더랬다. 가슴이나 엉덩이, 혹은 매끈한 몸을 가진 여성의 사진이 나오던 다른 항목들과는 달리 이 항목만 클릭하면 자꾸 발이나 스타킹의 사진이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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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신에 'Fetish'를 검색하면 이렇게 유독 발이나 신발, 스타킹 같은 사진이 많이 나온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대다수의 독자들도 분명 Fetish라는 단어가 포르노 산업에서 기원한 단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단어는 전혀 엉뚱한 분야에서 유래한 것이다. 페티쉬즘은 사실 포르투갈인이 서아프리카인의 종교생활을 연구하던 중 그들이 주술적으로 숭배하는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단어다. 『자본』을 저술한 맑스의 경우, 시쳇말로 ‘개도 안 먹는’ 종이 쪼가리, 즉 ‘화폐’가 요상한 마술적 과정을 거쳐 물신화되는 과정을 가리켜 ‘페티쉬즘’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페티쉬즘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성적인 의미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로이트 이후부터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신의 리비도(보편적인 말로, 성적인 에너지)를 투여해 그로부터 성적인 흥분을 이끌어내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페티쉬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 갑자기 리비도니 성적 흥분이니 하는 새로운 용어가 나오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스크롤의 압박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올 것 같다. 그렇지만 이 내용을 알고 있으면 어디 가서 잘난 척 하기 좋으니까 조금만 집중하고 들어보도록 하자.



1) 프로이트의 관점

페티쉬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거세’라는 프로이트의 개념을 짚고 넘아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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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거세라니!!


흔히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하면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니 ‘엄마와 아기 사이의 금지된 사랑’같은 것을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개념이 바로 ‘거세’다. 이 거세를 중심으로 아이의 정신세계가 큰 변화를 겪게 되기 때문이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엄마란 자신의 전부이자, 나아가 그 자신이다. 아직 엄마와 아이 사이에 정신적인 분리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먹으면서 아이는 무한한 쾌락을 경험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 나타나 그 둘 사이를 훼방하고 나선다. 바로 아이의 아빠다.


이 시기에 (남자)아이[1]는 자신의 몸과 엄마의 몸을 비교하게 된다. "어라, 나한테는 똘똘이가 있는데 엄마한테는 그게 없네? 왜지? 우리 아빠가 그것을 잘라버린 건 아닐까?" 여기에서 아이는 최초로 어떤 실존적인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게 그 유명한 ‘거세공포’다. 똘똘이를 잘라버릴 정도로 막강하고 포악한 힘을 지닌 아빠를 보면서, 아이는 자신의 전부였던 엄마를 아빠에게 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 내가 내 똘똘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엄마를 아빠한테 양보할 수 밖에 없겠구나...’


여기에서 아이는 엄마에 대한 성적인 욕구를 억압하게 되면서, 자신이 아버지에 의해 거세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이 언젠가 거세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이 동일시를 통해 아이는 거세 당하는 입장에서 거세를 할 수 있는 입장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이로써 불안감이 점차 해소된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생각한 전형적인 (남자)아이의 정신 발달 과정이다. 그렇다면 페티쉬즘은 어디에서 어떻게 발생하게 되는 것일까? 이를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거세 공포에 맞서 아이가 취할 수 있는 세 가지 전략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첫째 전략은 엄마가 거세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도 언젠가 거세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경우 아이는 신경증의 경로를 밟는다. 이 신경증의 경로가 바로 위에서 설명한 ‘일반적인 아이들’의 경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일반적인 사람들은 ‘신경증’의 구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전략은 자신이 본 것을 아예 부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현실에 대한 인식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고, 아이는 정신증의 구조를 갖게 된다. 쉽게 말해서, 아이는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 (가령 꿈이나 상상 혹은 환상)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는 데 실패한다.


마지막으로 셋째 전략은 엄마가 거세되어 있다는 현실을 ‘인지하되’ 동시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로를 밟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이 과정은 꽤나 모순된 것으로 보인다. <질편음란증(Fetishism)>이라는 1927년의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거세공포에 대해 아이가 취하는 이 특이하고도 모순된 전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성을 관찰하고 난 후 남자아이는 여성에게도 음경이 있다는 기존의 믿음을 변함없이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질편음란증의 경우에) 그는 그런 믿음을 계속 보유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포기하기도 한다.”[2]


일반적인(신경증적인) 아이들은 거세의 공포 앞에서 ‘아, 우리 어머니는 거세가 된 사람이구나. 우리 아버지는 그만큼 막강한 사람이었어’라면서 아버지의 힘을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양보하면서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이뤄낸다. 그러나 몇몇의 아이들은 거세의 공포를 ‘부인(Disavowal)’[3]하는 경로를 밟는다. 자신의 똘똘이도 언젠가는 잘려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이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가서 엄마에게 남근이 없다는 것을 목격하지만, 자신이 목격한 그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시선을 회피하게 된다.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걸거야. 엄마는 분명 나처럼 똘똘이를 갖고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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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존슨을 잘라버리겠어!" - 영화 <빅 레보스키> 中


여기서 프로이트는 아이가 엄마의 ‘거세된 남근’을 직면하기 바로 직전에 보았던 하나의 대상으로 지속적으로 회귀하려는 특징을 가진다고 본다. 가령, 어떤 아이가 엄마의 발에서부터 시작해 시선을 올려가면서 ‘그곳’을 보게 되었다면, ‘그곳’을 보게 된 것을 무효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발’로 관심을 옮겨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발’ 같은 대상에 리비도가 투여되고, 결국 그 대상은 성적인 흥분을 일으키는 하나의 대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관점은 ‘발’이나 ‘신발’같은 대상 외의 다른 대상에, 가령 에드워드 옹의 경우 처럼 자동차에 집착하는 사람의 케이스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갖는다. 뭐야, 그럼 이런 건 아이가 엄마의 거기를 보기 직전에 자동차라도 봤다고 봐야 하는 건가? 그럼 그 말은 엄마가 차들 다 다니는 대로 변에서 치마라도 올렸다는 뜻임? 여기서 우리는 도착증을 설명하기 위한 보다 보편적인 설명 방식을 필요로 하게 된다. 프로이트의 후계자가 한 두명이 아니지만, 필자는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라깡의 관점을 간략히 설명해보고자 한다.



2) 라깡의 관점[4]

“뭐야, 또 그놈의 라깡 타령이야?”라고 묻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말하건대, 어디 가서 오늘 읽은 얘기 가지고 잘난 척 하고 싶다면 이 부분을 꼭 읽어두기 바란다. 사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 없다. “라깡이 말하길...“이라고 시작한 다음에 이 글에서 주워 들은 단어 몇 개만 간단히 주절거려 주자. 그걸로 필자는 본 글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본다.


우리는 앞서 ‘거세’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신경증’, ‘정신증’, ‘도착증’이라는 세 가지 정신 구조가 어떻게 분화되는지 살펴보았다. 라깡은 이 동일한 세 가지 정신 구조를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아이의 태도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친다.


자, 우리 모두 ‘아버지’라는 단어를 머릿 속에 떠올려보도록 하자. 어떤 느낌이 느껴지는가? 누군가는 ‘인자함’이라는 감정을, 누군가는 ‘따뜻함’이라는 감정을, 또 누군가는 ‘측은함’이라는 감정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필자의 경우 어릴적 워낙에 맞고 자란 기억이 많아 아직까지도 ‘아버지’ 하면 ‘위협’이나 ‘불안함’ 같은 감정이 먼저 떠오른다. 프로이트나 라깡도 필자처럼 어릴 때 많이 맞고 자란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모두 이러한 ‘위협’ 같은 감정이 ‘아버지’라는 이름에 보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버지의 이름! 프랑스어로 Nom du Pere. 소개팅 나가서 잘난 척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한 번씩 읽어주도록 하자. 읽을 때는 “농 뒤 뻬흐“라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어에서는 ‘이름’을 뜻하는 Nom과 ‘아니오’ 혹은 ‘안돼’를 뜻하는 Non 모두 ”농“이라고 읽는다. 이 때문에 라깡은 그 특유의 말장난을 통해 ”아버지의 이름 안에 이미 금지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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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의 이름으로!!!


라깡에 따르면 아버지의 이름이 수행하는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금지’고 다른 하나는 ‘이름 붙이기’다. ‘금지’라는 건 곧 ‘법’을 의미한다. 우리가 금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법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엄마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라는 태초의 금지가 인간의 정신에서 최초의 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라깡은 이 ‘금지’라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욕망’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욕망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금지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깡은 반대로, 금지가 있기 때문에 욕망이 생긴다고 한다. “어떠어떠한 것은 안 된다!”라는 금지가 없다면, 우리가 욕망해야 할 대상 자체가 설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붙이기’라는 건 ‘언어라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라깡은 우리가 언어(조금 더 유식하게 말하자면 ‘기표’라고 한다)라는 질서를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서 ‘욕망’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조금 복잡한 개념이 나오는데, 바로 ‘타자의 욕망’이라는 개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라는 고유한 객체가 어떠한 대상을 ‘욕망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 그 ‘욕망’이라는 것은 나의 안에서 기원하는 것이고, 나에게만 고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라깡은 욕망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타자에게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욕망하는 무언가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화를 거치면서 주변으로부터 ‘내가 욕망해야 할 것’을 주입받게 되고, 결국 그것을 내가 욕망하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가령, 지금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욕망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성공’, ‘부’, ‘학식’, ‘명예’, 등등...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엄마 뱃속에서 가지고 나온 것인가? 아니면 엄마와 아빠에게서 성장하면서 그들로부터 ‘욕망하도록 교육받은 것’인가? 라깡은 후자가 맞다고 보며, 따라서 한 개인이 가지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타자에게서 기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 타자라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엄마가 될 수도 있고, 아빠가 될 수도 있고, 혹은 만나기만 하면 오지랖 넓게 내 인생에 참견하는 옆집 아저씨가 될 수도 있다. 그 중에서도 아이가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타자는 바로 엄마다. 따라서 아이는 엄마라는 타자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할 수 있게 된다.


다시 아버지의 이름의 두 가지 기능에 대한 설명으로 돌아와 보도록 하자. 처음에 아이가 태어나면 아버지의 이름은 일단 ‘금지’를 통해 아이와 엄마 사이에 어떤 경계선을 설정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엄마가 욕망하는 어떤 것들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엄마라는 타자가 욕망하는 바를 구체화시키게 된다. “너희 엄마는 똑똑한 남자를 좋아하지”, “너희 엄마는 샤넬 빽을 좋아해...”


그런데 욕망이라는 것은 그 특성상 절대 충족되지 않고 그 대상을 바꾸는 법. 똑똑한 남자로도, 샤넬 빽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엄마라는 타자의 욕망을 보면서 아이는 ‘도대체 엄마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여기에서 비로소 아이에게도 어떤 ‘결여’라는 것이 생기고 아이가 무언가를 욕망할 수 있게 되는 활로가 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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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엄마가 원하는 건 뭐지?


신경증은 이러한 ‘아버지의 이름’이 제대로 기능한 경우다. 이 경우 아이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향해 어떤 운동을 개진할 수 있게 된다.


정신증은 반대로 아버지의 이름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경우다. 가령, 엄마가 계속해서 아이에 집착하면서 아빠를 왕따시키는 한 가족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아이는 자신을 엄마와 분리시키지 못한 채, 말하자면 금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리된 주체로 스스로를 발달시킬 수 없다. 금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법’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 검증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된다. (‘현실’이라는 건 ‘아무런 매개도 없이 맑고 투명한 어떤 것’이 아니다. ‘현실’은 이미 ‘언어’, ‘과학 법칙’, ‘사회의 규칙’같은 것들에 의해 이미 매개된 상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현실에 대한 인식 자체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착증은 어떤 경우일까? 도착증은 신경증과 정신증의 중간 정도로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법’이 애매하게 자리잡은 경우다. 집안에서 아빠가 완전히 왕따된 건 아니지만, 엄마에게 무시를 당하는 바람에 힘을 못쓰는 경우라고 해야 할까? 이 경우 아이는 아버지의 이름이 제대로 ‘금지’와 ‘이름붙이기’라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엄마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라깡은 도착증자들이 이러한 사태를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아버지의 이름을 ‘세우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가령 도착증의 한 예인 마조히스트의 경우, 자신에게 금지를 내리는 아버지가 부재하는 것을 보상하고자, 어떤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금지를 가하고, 강요를 하게끔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맥락 속에서 페티쉬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라깡은 아버지의 ‘이름 붙이기’ 기능을 보상하는 과정에서 페티쉬즘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앞서 말했듯이 아이가 제대로 욕망할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일단 최초의 타자인 엄마가 스스로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으며, 무언가를 욕망하는 자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여기서 아버지가 “너희 엄마는 OOO를 좋아하지”라고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이런 과정이 제대로 도입되지 않은 경우 아이는 스스로 OOO에 집착하게 되면서 스스로 ‘이름 붙이는 과정’을 보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아이가 OOO에 대한 집착을 반복할 수록, 부재하는 '아버지의 이름'의 기능이 보상되면서 아이는 엄마로부터 더 거리를 두고, 스스로 욕망하는 주체로 탄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휴우... 이렇게 라깡의 관점까지 다뤄보면서 정신분석학에서 도착증, 그 중에서도 페티쉬즘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혹자는 위의 내용을 들으면서 엄마가 어쩌구 아빠가 어쩌구 이게 뭔 개소리냐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정신과 의사들 중에서는 (특히 ‘근거중심의학’을 강조하는 현대의 의사들은) 이런 관점을 아예 수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아쉽게도, 도착증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명확한 신경생리학적 관점은 아직 없다. 뇌의 신경전달물질이 어쩌구 저쩌구 해서 에드워드가 결국 자동차를 혓바닥으로 핥게 됐다! 이렇게 깔끔하게 설명할 수만 있다면야 나도 기꺼이 그런 설명방식을 받아들이겠다만...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기본적으로 과학적 마인드를 가진 의사니까 아직까지 밝혀진 신경생물학적 병인론에 대해 간단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1] 여기서 중요한 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니 남자 아이의 사례만 다뤄보도록 하자.

[2] Sigmund Freud, <질편음란증>,『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프로이트 전집 7)』, 김정일 옮김, 열린책들, 2004, 322쪽

[3] 프로이트의 원어로 이는 ‘Verleugnung’이라고 한다.

[4] 필자는 주로 미국의 정신의학자인 브루스 핑크(Bruce Pink)의 관점에 입각해 라깡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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