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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7. 03. 금요일

도비공











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첫머리에는 이런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2004년 여름, 멕시코 만에서 세력을 일으킨 허리케인 찰리가 플로리다를 휩쓸고 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 그 결과 스물 두 명이 목숨을 잃고 110억 달러에 이르는 손실이 발생했다. 뒤이어 가격폭리 논쟁이 불붙었다.


올랜드에 있는 어느 주유소는 평소 2달러에 팔던 얼음주머니를 10달러에 팔았다. 전력부족으로 8월 한여름에 냉장고나 에어컨을 사용하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값을 고스란히 지불했다. 나무가 쓰러지는 바람에 전기톱과 지붕 수리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건설업자들은 지붕을 덮친 나무 두 그루를 치우는 데 무려 2만 3000달러를 요구했다. 가정용 소형 발전기를 취급하는 상점에서는 평소 250달러 하던 발전기를 2000달러에 팔았다. 일흔일곱의 할머니는 나이 든 남편과 장애가 있는 딸을 데리고 허리케인을 피해 모텔에서 묵었다가 하루 방값으로 160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평소 요금은 40달러였다. (중략)


플로리다에는 가격폭리처벌법이 있어서,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 법무장관 사무실에 2000건이 넘는 피해 사례가 접수되었다. 이중에는 소송에서 승리한 경우도 있었다. 웨스트팜비치에 있는 숙박업소 ‘데이스 인’은 벌금 7만 달러를 내고 추가로 받은 숙박료를 투숙객에게 돌려줘야 했다.


그러나 크리스트(플로리다 주 법무장관)가 가격폭리처벌법을 집행하려 하자 일부 경제학자들은 해당 법에, 그리고 주민들의 분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자유시장 경제학자인 토머스 소웰은 가격폭리를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경제학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표현”이라고 말하면서, “경제학자 대다수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는 너무 복잡해서 구태여 신경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웰은 <탬파 트리뷴>에 기고한 글에서, “‘가격 폭리’가 어떻게 플로리다 주민에게 이익이 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가격이 사람들에게 익숙한 수준보다 현저히 높을 때” 가격 폭리라는 혐의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쩌다 익숙해진 가격 수준”은 도덕적으로 대단히 신성한 것은 아니다. 그 가격은 허리케인 습격을 비롯해 다양한 시장 상황에 따라 형성되는 다른 가격보다 “더 특별하거나 ‘공정한’ 가격”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소웰의 주장에 따르면 얼음, 생수, 지붕 수리, 발전기, 모텔 방의 가격이 높아지면 수요자는 소비를 억제하고 공급자는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먼 곳까지도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려는 욕구가 높아지는 장점이 있다. 뜨거운 8월에 플로리다가 정전되었을 때 얼음주머니 가격이 10달러라면, 제조업자는 얼음을 더 많이 생산해 나르려 할 것이다. 소웰은 비싼 값이 전혀 부당하지 않다면서, 그것은 구매자와 판매자가 서로 교환할 물건에 부여하기로 한 가치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친시장 논평가 제프 제이커비는 <보스톤 글로브> 기고문에서 비슷한 논리로 가격폭리처벌법에 반대했다. “시장이 견딜 만한 값을 요구하는 행위는 폭리가 아니다. 탐욕도 뻔뻔스러움도 아니다. 그것은 자유 사회에서 재화와 용역이 분배되는 방식이다.” 그는 “가격 급등은 강력한 폭풍으로 삶이 수렁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특히 화가 나는 일”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화가 난다고 해서 자유 시장을 방해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언뜻 터무니없이 보이는 가격이지만, 필요한 물건을 더 많이 생산하도록 공급업자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사실은 “실보다 득이 훨씬 많다”. 제이커비의 결론은 이렇다. “장사꾼을 악마로 만든다고 해서 플로리다의 복구 속도가 빨라지지 않는다. 장사를 하도록 내버려두는 편이 오히려 낫다.”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자유시장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한 마디로 ‘시장에 맡기면 모든 자원이 효율적으로 분배되므로 정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혹은 자주) 시장이 효율적인 자원배분에 실패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경제학에서도 시장 실패의 사례로 독점, 정보의 불균형, 외부효과를 꼽는다. 위에 언급한 사례는 외부효과에 포함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본인들이 시장이 실패하는 사례가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시장의 자정능력을 내세우며 어떠한 경우에도 정부와 같은 시장 외적인 힘이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지난 기사(링크)에서 나는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을 과학으로 칭하는 것이야말로 경제학의 가장 큰 거짓말이라는 점을 말한 바 있다. 사실 위와 같은 경우에 폭리를 추구하는 장사꾼을 국가가 제재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 원리에 맡겨야 할 것인가는 사회 구성원 간에 토론으로 정할 문제이지 어떤 절대적인 법칙이 있어서 그것에 따라야 할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이런 사안을 토론으로 결정한다면 시장에 맡기자는 의견은 소수의 의견으로 전락할 소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은 스스로를 과학이라 칭하면서, 시장 법칙에 절대성을 부여하려 한다. 이 순간 경제학은 사이비 종교의 영역에 발을 디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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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경제학의 사이비 종교적 행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앞선 글에서 언급했던 칼 포퍼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개인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를 열린사회, 전제정치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닫힌사회라 규정했고 그 특징을 규범과 자연법칙에 대한 태도에서 찾았다. 열린사회에서는 규범과 자연법칙이 구별되지만 닫힌사회에서는 규범이 자연법칙과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 ‘물은 1기압일 때 100도에서 끓는다’는 자연법칙이고, ‘살인하지 말라’는 규범이다. 열린사회에서 살인은 기본적으로 나쁜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이를테면 정당방위나 안락사 등) 용납할 수 있고, 그 경계는 구성원 간의 자유로운 토론에 맡긴다. 그러나 닫힌사회에서는 규범이 자연법칙과 같은 지위에 있으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인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가 된다. 미국의 근본주의 기독교도들은 말기 암 환자의 안락사나 강간에 의해 임신한 아기의 낙태 등, 민주주의 사회에서라면 충분히 용인할 수 있는 조치조차도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이런 포퍼의 논점을 적용해보면 우리는 주류 경제학에서 닫힌사회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찾아볼 수 있다. 주류경제학은 규범과 자연법칙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자연법칙과 같은 권위를 지니며,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을 방해하는 정부의 시장개입은 있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과연 자연법칙이냐는 의구심을 먼저 품을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논의하도록 하자. 그리고 일단은 자연법칙에 준하는 시장법칙이라고 인정해주자. 그렇더라도 문제는 발생한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역시 그와 같은 지위를 갖는 시장법칙인가?


‘정부는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규범에 불과하다. 이것이 규범이 아닌 절대적인 명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그 명제를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이길 바란다. 열린사회에서는 규범이 허용되는 범위에 대해서 누구나 토론할 자격을 지닌다. 정부가 곧 시장 공급자였던 사회주의는 분명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대안이 정부는 시장에 절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일까. 어느 정도는 개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분야에 어느 정도 개입이 허용되어야 할까. 정부의 시장개입 불가라는 입장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하나의 규범인 이상, 이런 질문에 대해 누구나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열린사회이다. 그리고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화두인 경제민주주의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애초에 토론의 여지를 봉쇄하고 시장을 신성불가침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여기에 반대 의견을 내는 사람들은 뭘 모르는 사람이거나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된다.


이와 같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태도는 플라톤에게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이데아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동굴 속에 입구 쪽으로 등을 돌리고 동굴 벽만을 바라볼 수 있게 몸이 묶인 죄수들이 있다. 그들의 등 뒤에서 횃불이 타오르고 벽에는 사람과 동물의 그림자가 비친다. 죄수들은 그 그림자가 실재의 세계라고 믿게 된다. 그런데 한 죄수가 우연히 결박이 풀려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처음 보는 강렬한 태양빛에 한동안 눈이 멀었던 죄수는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진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이제까지 자기가 보아왔던 것이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다시 동굴 안으로 돌아가 죄수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만 한평생 그림자만을 보아온 다른 죄수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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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은 이 비유를 통해 세상은 우리가 사는 현상계와 죽어서 영혼이 되어야 도달할 수 있는 이데아계로 나눌 수 있는데, 이데아의 세계가 진실된 세계이고 현상계는 이데아계의 불완전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을 믿었고 사람이 죽으면 살아서의 행적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서 일정 기간 지난 뒤 다시 다른 존재로 환생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영혼 상태에 있을 때에는 이데아계를 볼 수 있으나, 환생하는 순간 이데아계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현상계, 즉 이데아계의 불완전한 그림자만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데아계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긴 했어도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정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철학적 사유를 통해 얻어낸 이데아계의 지식을 플라톤은 에피스테메(episteme : 참지식), 현상계에 대한 지식을 독사(doxa : 억측, 억견)라고 구별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우리의 현실에서 얻게 된 경험적 지식은 모두 억측에 불과하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얻게 된 이데아의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라는 점이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플라톤은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그의 사상은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로 서양인들의 의식에 영향을 끼쳤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주석 달기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실제로 플라톤의 저서는 대단히 방대한 분야를 다루고 있고, 이후 서양철학에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들의 단초가 되는 아이디어들이 곳곳에 나타난다. 최근에도 부시 행정부의 대외 정책에 큰 영향을 끼친, 레오스트라우스를 필두로 극도의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네오콘들 역시 자신들의 사상의 기원이 플라톤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플라톤의 사상에는 긍정적인 측면 못지않게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명이라 생각했는데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옳은 주장이다. 그러나 지식을 에피스테메와 독사로 나누고 현실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모조리 억견이라고 몰아붙인 태도는 후대에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사실상 이런 태도는 ‘나는 무조건 옳고, 너는 무조건 그르다’의 가장 현학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무시하고 형이상학적 추론(사실상 궤변)만을 중시하는 지적 풍토를 낳았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바늘 끝에 몇 명의 천사가 올라설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이성적으로 추론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사례이다. 결국 플라톤의 사상은 후에 전파된 기독교와 결합하어 현실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다양한 욕구를 죄악시하고 오직 하늘나라만을 생각하도록 중세인들을 옥죄는 사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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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좌)과 아리스토텔레스(우)

<School of Athens>, Raffaello


또한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현실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게 되고, 이러한 태도는 사회적 변화마저 거부하고 오직 현상유지만이 최선이라는 태도를 낳게 된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지상 최대의 쇼’에서 진화라는 개념이 그렇게 어려운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학사에서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은 훨씬 어려운 개념들이 먼저 발견되고 진화라는 아이디어는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발견되었는지 의문을 품었다. 심지어 농부들조차 일찍부터 동식물의 품종교배를 실시해왔는데 어째서 과학자들은 진화의 개념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도킨스는 그것을 플라톤주의의 망령 때문이라 생각한다. 현실의 모든 사물이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받아들이면, 불변의 이데아가 실재하는데 그림자에 불과한 하나의 종이 제멋대로 변화해서 다른 종이 된다는 발상을 떠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플라톤주의의 망령은 주류 경제학에서 그대로 발견된다. 그들은 합리적 인간과 완전경쟁시장이라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데아를 창조해내고 그것의 작동만을 연구한다. 그들에게 현실의 경제문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위에서 사례로 든 플로리다의 폭리 문제에 대해서도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란 결국 시장에 맡기면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 이상의 것은 없다. 물론 정부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플로리다의 폭리 문제는 해결되고 언젠가 시장 균형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균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데다가, 정작 이루어지는 시장 균형이란 것은 파산한 수재민들이 더 이상의 지불 능력을 상실해 어쩔 수 없이 가격이 하락하는 최악의 경우일 것이다. 시장에 맡기면 언젠가 해결된다는 주장에 대해 일찍이 케인즈는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 죽는다’라는 유명한 비아냥을 날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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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주류 경제학자들이 현실 경제 문제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이와 같다. 당장 아무 경제 신문이나 집어 들고 확인해보기 바란다. 모든 문제에 대해 결론은 ‘시장에 맡겨두면 알아서 잘 해결된다’로 귀결될 뿐 별다른 의미 있는 정책 제안 따위는 없다. 그들은 완전시장이라는 이데아를 전파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 현실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서두에서 인용한 경제학자 토마스 소웰조차 이런 문제는 복잡해서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실토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이렇게 이상한 이데아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을까. 아마도 그가 기하학에 익숙했다는 점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사실 수학적인 정리나 추론에 익숙한 사람은 이데아의 개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수학이야말로 순수한 추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가령 현실 세계의 삼각형은 제아무리 똑바른 자를 대고 그려도 유클리드의 정의에 들어맞는 삼각형은 아니다. 삼각형을 이루는 선분은 점들의 연속인데 점은 위치만 있을 뿐 부피를 갖지 않는다. 부피를 갖는, 즉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삼각형은 삼각형의 그림자일 뿐 삼각형의 정의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플라톤은 기하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심취한 나머지 본말을 전도하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약간의 수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모두 알듯이, 실제로는 플라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하학의 세계가 현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플라톤이 자신의 이데아론을 지지하는 무기로 기하학을 이용한 것처럼, 오늘날 주류 경제학자들도 자신들의 특색 없는 주장을 지키기 위한 무기로 수학을 사용한다. 경제학 개론을 펼치면 쏟아져 나오는 각종 미분 방정식은 수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제학이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연구하는 심오한 학문이라는 인상을 주기 쉽다. 그러나 수학 방정식이나 과학의 개념을 빌린다 해서 그 학문이 과학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이 시리즈의 1편에서 지적한 바 있다.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에는 수학이나 물리학의 용어를 함부로 도용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학자들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크 라캉이 인간의 발기기관이 허수 'i'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의 이론이 과학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증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닫힌 학문은 과학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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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큐의 경제학>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만들어낸 또 하나의 혐의에 대해서는 칼 포퍼가 지적한 바 있다. 플라톤은 이상국가의 모델을 하나 상정하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국가’는 소크라테스와 젊은이들 간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지만 플라톤은 등장하지 않는다. ‘국가’의 구성은 학자들에 따라 소크라테스의 말을 플라톤이 그대로 옮겨 전했다는 설과,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일종의 철학 소설이라는 설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데 나 역시 편의상 후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논의를 전개하겠다.) 젊은이들에게 ‘누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어리석은 사람이 통치해서는 안 된다와 같은 뻔한 수준의 문답이 오가다가 결국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 마디로 (이데아를 잘 아는)플라톤 자신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 이 문답에 숨겨져 있는 진실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이 이데아를 잘 아는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주류 경제학자들은 이데아 경제를 잘 아는 자신들이 왕 내지는 그에 필적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제는 세상 모든 분야가 시장의 원리를 받아들여 무한경쟁을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플라톤은 철인정치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디온이라는 인물의 초청을 받아 시라쿠사로 찾아가 현실정치에 발을 디디지만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그를 초청한 디온은 모반 혐의로 추방당하고 플라톤 역시 궁지에 몰린다. 이데아에 대한 지식이 현실세계에서는 별 쓸모가 없었던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현실에서 효과를 보이기는커녕 혼란만을 가중시키고 있다. 마티아스 빈스방거의 ‘죽은 경제학자의 망할 아이디어’에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대로 교육, 학문, 의료 등의 분야에 시장의 경쟁 원리를 적용하면 어떤 변태스러운 현상이 발생하는지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를테면 교수의 논문은 내용이 아니라 페이지 수로 중요도가 결정된다. 내용의 질은 경쟁을 위한 데이타로 만들기 어렵지만 페이지 수는 셀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실패한 자들이 왜 다른 모든 분야에 간여하는지 모르겠다는 장하준 교수의 지적에 십분 공감한다.


주류 경제학이 현실 경제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그토록 추앙해 마지않는 기업가들이다. 오늘날 기업 경영을 위해 하이에크나 밀턴 프리드먼을 연구하는 기업가는 거의 없다. 그들의 관심은 보다 현실적인 인간을 다루는 경영학에 치중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류 경제학자들이 명맥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주요한 정책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참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인 신앙이 해외 무역으로 돈을 버는 다국적 기업들에게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은 시장 만능주의를 불변의 원칙으로 삼아 정치가 경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일단 차단하고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제멋대로 이끌어낸 명제인 ‘사익의 추구가 공익을 실현한다’라는 사이비 종교 교리의 유포를 통해 오로지 사익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 면죄부를 발행한다. 그리고 각론을 통해 기업인들에게 범죄의 자유(규제 완화), 사회적 책임의 외면(세금 인하), 공공부문의 갈취(공기업 민영화), 모든 노동자의 일용직화(노동 시장 유연화), 약소국 수탈의 자유(자유무역) 등을 보장해주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요설을 펼친다. 부자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어주면 경제가 활성화된다는 주장은 부자들로 하여금 각종 경제학 연구소의 운영비나 경제 신문 필자들의 원고료가 활발하게 지급될 수 있는 동기를 자극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저런 정책의 실행이 소수에게 부를 집중시키는 효과 이외에는 아무런 경제 활성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류 경제학은 요지부동이다. 과학자라면 이론과 현실에 괴리가 있으면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측정하고 실험을 반복한다. 그러나 주류 경제학자들은 서두에 언급한 소웰이나 제이커비처럼 ‘시장에 맡기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주문만을 ‘아브라카다브라’처럼 읊조릴 따름이다. 이미 그들이 과학과는 무관한 사이비 종교의 길에 접어든 탓이기도 하고, 그들이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주류 경제학의 교리를 수정하는 순간 그들의 주요 고객이라 할 수 있는 거대 기업의 지원이 끊어진다는 사실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는 주류 경제학이 만들어낸 완전경쟁시장이라는 개념의 허구성을 밝히고, 그들이 완전경쟁시장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모형이 얼마나 조잡한 것인지 언급할 예정이다. 관심 가지고 읽어주시는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이 글은 여기서 맺는다.


ps : 다음 글 부터는 좀 재미있어질겁니다. --;







 도비공


편집 :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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